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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실패하지 않는 아이돌의 기술-203화 (203/380)

절대 실패하지 않는 아이돌의 기술 203화

내가 그래도 연예계에서 짬이 좀 생기긴 했나 보다.

KQS 쪽에 물어봤더니 바로 드라마 제작진 쪽으로 연락해서, 내 실제의 가상 친구 원일이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번호만 물어보는 게 민망해서 드라마를 너무 재미있게 봤다고 했더니, 제작진 쪽에서 엄청 기뻐했다.

받은 번호로 전화를 했는데 모르는 번호라 그런지 받지 않아서, 문자를 보냈더니 금방 답이 왔다.

[이원일 : 진짜 정해원이냐?]

[이원일 : 신기하다 나 지금 창덕궁에서 촬영하고 있어]

[언제 끝나 밥 먹자]

[이원일 : 계속 스탠바이 하고 있어서 잘 모르겠네]

[일단 글로 갈게]

나는 그렇게 적고 창덕궁으로 향했다.

5월 말의 창덕궁은 근사했다. 평일 낮이라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멀리 드라마 촬영차가 보였다.

"원일아, 나 근천데."

내가 전화하니까 저 멀리서 원일이가 나타났다.

"야, 너는 개인적으로 이동할 때도 팀으로 다니냐. 스타네."

"참 드럽게 반갑게 인사한다."

아무튼 이원일의 옷을 보니까 무관 같은 역인 것 같았다. 피지컬이 좋으니까 이런 역을 맡았나 보다.

피지컬 하니까 우리 멤버 효식이가 진짜 이런 옷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운 나쁘면 드라마 쪽에 뺏길 수 있으니까 말도 꺼내지 말아야겠다.

그래도 뭐, 드라마 대박 터지고도 여전히 퍼스트라이트 활동에 집중하는 신지운을 보면 효식이도 곧 돌아올 것 같긴 하다.

내 친구 이원일은 진짜로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근데 무슨 일이야? 왜?"

물론 우리가 막 되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찾아온 걸 황당해할 줄은…….

나는 약간 상처받았지만 대수롭지 않은 척 말했다.

"드라마 보는데 네가 나오더라고. 잘 지내나 궁금해서 연락해 봤지. 같이 연예계 있는데 연락하고 지내자."

"연예계는 네가 있지, 나는 단역인데."

"뭐래, 단역은 배우 아니냐?"

나는 표정을 확 구겼다가, 연예계 종사하는 사람이 많은 곳임을 떠올리고 다시 표정을 풀었다. 누구 입에서 내가 '실제로 보니 표정 안 좋은 개새끼더라'가 될지 모르니까.

이원일은 '하긴' 하고 말하며 흐흐 웃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근데 진짜 든든하다. 와, 이래서 사람들이 인맥, 인맥 하는구나."

"내가 무슨 인맥이야."

"인맥이지. 너 온다고 시끌시끌했어."

"빈말 잘해준다, 야."

시끌시끌은 무슨, 날 알아보는 사람 한 명이 없어 보인다. 다들 자기 일 하시느라 바빴다.

이원일이 말했다.

"아니라니까, 아닌 척하시는 거야."

"됐다. 아무튼 친구 잘 둬서 드라마 촬영장도 다 구경해 보네."

라고 말하고 있었는데, 매니저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달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아, 저, 진짜, 정말 죄송하고 말하기 참 어려운 얘긴 한데……."

뭔 말을 하려고 저렇게 머뭇거리나 했더니, 매니저가 말을 이었다.

"혹시 저희 배우님이랑 비하인드 포토 하나만 같이 찍어주시면 안될까요?"

"……저요? 왜요?"

"아, 그게. 저희 배우님이 아, 이게 참……."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담당하는 배우가 제일 좋아하는 게 집이고 집에 가면 연락 두절이라 연예인 친구가 아예 없다는 모양이었다.

문제는 하필 여기 주연 배우들이 하필 다 인싸 중에 인싸들이라 뭐 서로 스케줄을 짜야 할 정도로 매일매일 돌아가며 커피차를 받고 있어서, 안 그래도 소심한 배우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친구 조작에 참여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소속사에 물어보니 한참 이것저것 확인한 후에 비하인드 포토 한 장 정도는 인스타그램용으로 찍어도 된다고 했다.

워낙 팔로워가 많은 배우라 나를 태그하면 홍보가 될 것 같은 모양이다.

그사이 이원일은 드디어 촬영이 시작되어 떠났고, 나는 그 배우, 김문재와 사진을 찍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원래 딱히 낯을 가리거나 하진 않아서 꾸벅 인사했는데, 배우 김문재는 쭈뼛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보다 일곱 살이 많은데 뭐가 이렇게 불편한가, 싶다.

"선배님, 저 하트하실래여?"

"아…… 네……."

극도로 낯을 가리는 김문재는 그렇게 대답하고 내가 하자는 하트를 했다.

낯을 너무 가려서 거절을 못 하는 사람 같아서 나는 신나게 각종 하트를 하자고 했다. 부끄러워서 식은땀을 뻘뻘 흘려가면서도 다 해줬다.

그나저나 배우라 딕션도 좋지만, 목소리가 진짜 도를 지나치게 멋있었다.

"이야, 근데 진짜 선배님 목소리 너무 좋아요. 귀 녹을 것 같아요."

"아…… 허허."

"한 장 더 찍으실래요? 제 인스타에도 올려도 돼요? 아, 근데요, 형. 아, 죄송해요. 형이라고 해도 돼요?"

"네, 허허, 그러세요……."

나는 살면서 이렇게 소심하고 매사 조심스러운 인간은 처음 봤다. 그나저나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이제 그레이존을 시작하면 내레이션을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목소리가 치트키고 어차피 거절을 못 하실 것 같으니까. 히히.

아무튼 그래서 친해지려고 계속 말을 거는데 김문재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그사이 이원일이 짧은 촬영 후 다시 긴 대기 시간이 생겨, 내 쪽으로 돌아왔다. 내가 말했다.

"끝났어? 밥 먹자."

"아, 딱 문재 선배님만 보고 가도 돼? 연기 배우려고."

"당연히 되지. 나 시간 많아."

"웃기지 마, 네가 무슨 시간이 많아."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이에 김문재와 여자배우의 촬영분이 시작되었다.

방금 전까지 낯을 가려서 7살 어린 동성 후배에게도 쩔쩔매던 사람이, 슛이 들어가자 눈빛이 완전히 바뀐다.

김문재가 무심하고 냉정한 눈빛으로 대사를 했다.

"무엇이 다르겠소. 부인께서는 처음부터 나와 남과 다름 없는 사이었으니, 앞으로도 남처럼 지내면 되오."

애증으로 얽힌 저 조연 커플의 서사도 시청자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부분이었다.

워낙 발성이 좋아서, 한참 멀리까지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몰입력에 감탄만 나왔다.

황새벽이 무대 위에 올라가면 피곤한 걸 잊어버리는 것처럼, 저 배우도 촬영에 들어가면 본인의 내성적임을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나는 이원일에게 기운 내라고 고기를 왕창 사 먹인 후에 바로 작업실로 돌아왔다.

쓰고 싶은 곡이 생겼다.

* * *

그레이존은 결국 4본부로 제작이 넘어갔고, OTT 채널에서 오픈하는 것이 확정되었다.

이춘형 이사는 자기 라인 직원들을 시켜 계속해서 프레젠테이션에 태클을 걸었지만, 4본부에서 워낙 준비를 철저하게 해 전부 튕겨냈다.

결국 이춘형 이사 입장에서는 잘 쑨 죽을 4본부가 영역을 확장하는 데다 떠먹여 준 셈이 되어버렸다.

확정이 되자마자, 강효준이 친한 기자들이 신이 나서 기사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3세들의 승계구도, 화제성 좋은 아이돌, 자극적인 음식 테러 등, 기자들에게는 맛있는 재료들이 완전히 융합된 끝내주는 식사였다.

회의가 끝난 직후부터 인터넷은 온갖 기사로 들끓었고, 이춘형은 집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잡히는 물건을 집어 던졌다.

"X발!"

고작 그 사생 들여보낸 게, 대중에게 이렇게 큰 반응을 불러와 VMC까지 타격이 왔다는 게 이해가 안 됐다. 그게 아버지에게 까이고, 할아버지에게 까일 일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강효준, 그리고 VMC의 앞에 사사건건 장애물이 되는 정해원이 이때다 싶어 부채질해 작은 불을 큰 불로 키우고 있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요즘 장남인 형도 '사업에 관심 없으니 자유를 찾아간다'고 염병 떨던 게 질렸는지, 자기 자리 달라고 아버지에게 조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나마 하나, 다행인 건 어차피 이미 그레이존은 대중들에게 비호감을 있는 대로 적립한 프로그램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생전 프로그램 한번 제작해 보지 않은 4본부에서 제대로 된 프로그램을 내놓을 가능성도 현저히 낮았다.

이춘형은 아까부터 아버지의 전화로 울리고 있는 핸드폰까지 벽으로 집어 던졌다.

"시간이 약이다, 시간이 약."

그리고 쫄리는 마음을 그렇게 혼잣말로 달랬다.

* * *

[중단되었던 그레이존 기획 다시 시작…… X플X스에서 오픈 예정]

[이미 대중의 관심이 떠난 서바이벌…… 근거 없는 희망만 남았다]

[이미지와 이득을 동시에 취하려는 정해원의 욕심, 통할까?]

[사생 테러 후 다시 그레이존 참가 의사 비친 정해원…… 어디까지가 '설정'일까?]

이춘형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는지, 몇몇 기자들이 제목으로 정해원을 물고 늘어졌다.

[엥 어쨌든 VMC가 제작한다는 거 아님? 사생 테러 별 거 아니었나보네]

[↳X나 다르지 4본부는 그냥 보이드 엔터가 하는 레이블임 자기 대표랑 일하는 건데 어떻게 같냐ㅋㅋㅋㅋㅋ]

[해원이 슈스다 뭐만 하면 화제네]

[정해원은 뭐 아이돌일 때보다 사건사고로 시끄러울 때가 더 많냐ㅎㅎ]

[↳네가 관심없는 거지]

[↳너 방구석에서 그러고 있을 때 아이돌 갓생살고 있음]

[근데 진짜 별일 아닌 거 X나 크게 만드는 재주는 있는 듯]

[↳???? 도대체 사생 테러가 어떻게 별일이 아님?]

[↳이런 새끼들이 모기한테만 물려도 징징거림ㅎㅎ]

시끌시끌한 인터넷을 뒤늦게 발견하고, 급하게 정해원의 상태를 확인하러 작업실에 온 황새벽이 허 웃었다.

"그치, 내가 제일 빠를 리가 없지."

"당연하지! 형은 거북이니까!"

이미 멤버가 다 와 있었고, 황새벽이 제일 늦게 도착한 참이었다.

하여튼 작업실이 이 멤버가 다 수용이 될 정도로 충분히 넓어서 다행이었다. 다들 덥다고 불평불만을 하고 있어서, 황새벽이 멤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소매를 걷었다.

"비빔면 해줄게. 내려가자."

"내가 삼겹살 시킬게."

안주원이 말하며 배달 어플을 켰다. 박선재가 작업 중인 정해원에게 물었다.

"형, 비빔면이랑 삼겹살 먹을 거지?"

그렇게 부르자 정해원이 헤드셋을 내리고 돌아보더니 말했다.

"나 아까 창덕궁 갔다 왔다고 했잖아. 거기서 친구랑 밥 먹고 왔어."

"친구 누구?"

"어, 고등학교 친구. 너네 몰라."

그렇게 말하고 다시 작업하려 해서 신지운이 모니터 쪽으로 돌아가는 의자를 붙잡고 물었다.

"우리가 형 인간관계에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넌 알지. 원일이. 기억 나?"

"어? 그 형이 실존인물이야?"

"……날 미친 놈으로 아냐? 당연히 실존인물이지."

"난 형이 외로워서 만든 가상의 인물인 줄 알았지."

"야, 내가 그래도 친구가 하나는……. 아무튼 걔가 단역이어도 역할 맡게 돼서 밥 사주고 왔어. 그니까 너네 먹고 와. 나 일할게."

정해원이 말하더니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한효석이 정해원에게 모르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여전히 긴가민가하는 멤버들의 등을 떠밀었다.

"형도 친구 있을 수 있죠."

"아, 쟨 없는데. 상상의 친구 같은데."

황새벽이 영 걱정스러워하며 신지운에게 물었다.

"야, 지운아. 쟤 저거 진짜야?"

"어, 전에 배우 지망생 친구 있다고 얘기하긴 했어."

그러자 민지호가 감동한 표정으로 포스트잇에 글씨를 썼다.

[해원이 형이 친구가 있다니! 기특하다!]

그리고 그걸 몰래 정해원의 뒤통수에 붙이고 비빔면을 먹으러 떠났다.

잠시 후 한창 잘 먹는 남자 여섯 명이서 비빔면 각 3봉과 삼겹살을 때려먹은 후 정해원의 작업실로 돌아왔다.

멤버들이 밥 먹는 동안에도 일하던 정해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얘들아, 내가 오늘 촬영장 가서 만든 것 좀 들어봐."

정해원이 사극 로맨스 촬영장을 다녀왔다고 들었으므로, 거기서 영감을 받았다니, 멤버들은 당연히 정해원이 동양풍 음악을 가져왔으리라 짐작했다.

그런데 정해원이 플레이한 음악을 들어보니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하드보일드'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확 찌르고 들어왔다. 흐르는 음악 위로 정해원이 말했다.

"컨셉은 나쁜 남자야.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 때, 나쁜 남자인 척 보내주는 거지."

애틋하고 가슴 저리는 사극 로맨스 촬영장을 보고, 뜬금없이 나쁜 남자에 관한 곡을 만들어왔다.

"……어이없게 좋네."

예상한 동양풍이 아니었지만, 신지운이 중얼거리고 나머지 멤버들의 표정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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