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실패하지 않는 아이돌의 기술 287화
나는 ‘가장 외로운 시간’에서 주인공 아역의 등장 장면을 떠올렸다. 유명한 아역 배우 출신의 성인 배우였다. 나와 동갑으로 알고 있고, 평생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였다.
내가 참견하는 바람에 그 배우 입장에서는 자리를 뺏기게 된 걸지도 모른다. 내가 물었다.
“형이 꽂아 넣은 거예요?”
“내가 장선영 부대표님한테 물어본 거긴 한데, 꽂아 넣은 정도는 아냐. 오디션 3차까지 보고 뽑았고, 심지어 원래 받기로 한 단역에서 바뀐 거야. 오디션 동안.”
그렇구나. 그런 거라면 죄책감이 좀 덜해진다. 그렇게 생각할 때, 강효준 대표가 말했다.
“이춘형이랑 나 중에 누가 더 보는 눈이 있는지, 주주들이 이 영화로 평가하겠네.”
“그건 저로 이미 증명된 거 아니에요?”
내가 농담했더니 강효준 대표가 맞춰줬다.
“그건 그렇지.”
나는 흐흐 웃었고, 강효준 대표가 손을 내밀었다.
“됐고, 뭐 사 왔어?”
내가 연습실에 있던 종이봉투를 얻어서 챙겨온 간식거리를 발견했나 보다. 나는 봉투를 강효준 대표에게 주며 말했다.
“먹을 거밖에 없어요.”
“잘했어.”
“그러니까요.”
맨날 먹을 거나 사 와야겠다. 회사에도 다 먹을 것만 뿌렸다.
아무튼 이제 안주원의 얼굴을 스크린에서 보게 됐다. 드디어 그 얼굴을 영화관에서 자랑할 수 있게 된 거다.
나는 대표실 소파에 앉아서 소금 맛이 나는 태피를 까며 말했다.
“그리고 형.”
“또 뭐 시키려고.”
“내가 대표님한테 어떻게 시켜요, 다 부탁이지……. 장선영 부대표님이요. 형이 빨리 데려다 써요.”
‘가장 외로운 시간’의 성공은 사실상 장선영 전 부대표가 밀어붙인 성과였다. 영화를 보는 눈도 그렇지만, 안주원을 캐스팅하는 데 힘을 쓴 걸 보니 사람 보는 눈도 있었다.
내 말에 강효준이 되물었다.
“사내 정치에서 밀린 사람을 데려와서 쓰라고?”
“오, 생각해 보니까 형이랑 동류네.”
“야, 난 안 밀렸어.”
“형은 클라루스 A&R이다가 4본부로 간 것부터가 밀려난 거라니까?”
“아, 이상하네, 난 즐거웠는데.”
“형 그렇게 속 편하게 살다가 건설업 맡게 되면, 실수로 성공해서 평생 그것만 하고 떵떵거리면서 살게 된다니까요? 형 그렇게 살고 싶어요?”
“……그러니까 지금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말이지?”
“당연하죠.”
“미안, 약간 듣는데 헷갈렸어.”
헷갈릴 게 뭐 있지.
나는 투덜거리며 다시 태피를 꺼내 입에 넣었다.
* * *
‘가장 외로운 시간’의 주인공, 윤재한 아역의 오디션 당일.
임 감독은 사실 안주원의 오디션을 봐야 하는 부분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장선영 전 부대표는 정말로 창작자를 자유롭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캔캔 스튜디오가 궁핍하던 때도, 발품을 팔아가며 어떻게든 영화 촬영이 진행되게 만들던, 지금 생각해 보면 초인이 아닐까 싶어질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자신에게는 은사나 다름없는 장선영 전 부대표가 오디션을 보라니 한번 보기로 했다.
그런데 오디션 장소로 들어온 안주원의 얼굴을 보자마자 입이 딱 벌어졌었다.
“안녕하세요, 안주원입니다. 05년생입니다.”
윤재한은 계속된 시간 여행으로 지치고, 퇴폐적이며, 감정이 완전히 소모되어 낡을 대로 낡아버린 남자였다. 그런 윤재한의 학생 시절은 대비가 되어서, 찬란하게 빛나야 했다.
그리고 지금 오디션을 위해 들어선 스물두 살의 청년은 그런 임 감독이 찾던 그런 남자였다. ‘첫사랑’이라는 단어를 인간으로 만든 듯한 얼굴이었다. 무엇보다 맑고 깨끗해 보이는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자유연기를 시켜보니 연기도 곧잘 했다. 아이돌이라고 했으니, 저런 얼굴을 연기 수업을 안 듣게 했을 리 없기는 했다.
임 감독은 하지만 좀 더 무언가를 보고 싶었다.
윤재한의 아역에 유력한 것은 아역 배우 출신, 우종현이었다.
이미지야 안주원이 잘 맞았지만, 연기력에서는 비슷한 나이에 연기 경력 17년 차인 우종현을 이길 수 없었다.
우종현보다 확실히 윤재한 아역에 맞는 무언가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주원을 무작정 ‘잘생겼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뽑을 수는…….
하지만 사실 연기력 차이만 생각하면 떨어뜨려야 하는 게 맞았다. 우종현 역시 첫사랑에 잘 어울리는 청년이기는 하니까. 못 떨어뜨린 건 사실, 제 눈 때문이었다.
아름다움만을 우선하는 눈. 영화를 만들 때도 이 눈이 문제였다.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장면을 찍어 놓고 ‘아름답지 못하다’라는 이유로 편집해 버린 것이 몇 번이던가. 이것을 타협했다면 임 감독은 훨씬 더 여유롭고, 인망도 지금보다는 나은 감독이라는 평을 들었을 것이다.
임 감독은 매 영화를 촬영할 때마다, 자신이 괴롭히던 미술팀과 의상팀에게 생매장당하는 꿈을 꿨다. 특히 감독들이 무덤을 단단하게 다지는 발소리는 모든 꿈에 등장해 임 감독을 괴롭혔다. 꿈을 꾸면서도 묻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 앵글은 아름답지 않다고 호소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란 터무니없이 어리석은 중생의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문제는 자신의 탐미주의였다.
“연기가 좋진 않네?”
임 감독이 시큰둥하게 말하자 안주원이 선하게 웃었다. 웃지 마, 인마. 제발. 웃으면 더 아름다워지니까…….
“웃음이 나와?”
임 감독이 인상을 쓰고 말하니까 옆에서 같이 보고 있던 장선영 전 부대표가 말했다.
“왜 오디션에서 시비야.”
“아니, 연기가 안 좋다는데 웃잖아.”
“그럼 우니?”
그렇게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끼어들 타이밍을 찾던 안주원이 대화가 끝났을 때 입을 열었다.
“윤재한은 어린 시절에 잘 웃는다고 적혀 있어서요. 웃었습니다.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건 연기라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그게 우스운 건 아니었습니다.”
안주원의 진솔한 말에 임 감독이 움찔했다. 목소리도 근사했다.
영화판에서 솔직히 제일 많이 보게 되는 건, 잘생기거나 예쁜 얼굴을 촬영한 프로필이었다. 실제로 외모 출중하단 소리를 듣는 사람들을 세상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 이 영화판이니까.
아이돌들도 외모 괜찮다, 소리 듣는 멤버들은 한 번씩 영화판에 발을 들였다.
그런데 안주원은 프로필을 뛰어넘었다. 그것도 월등히. 임 감독이 얼굴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차림새를 하고 오디션을 보러 오는 걸 싫어한다는 걸 안 안주원은 검은색 반듯한 니트를 입고, 머리는 멋을 내지 않았으며, 메이크업도 거의 하지 않고 나타났다.
윤재한이 어린 시절에 어떻게 생겼을까. 솔직히 말하면 감독이라고 그 모든 얼굴을 떠올리면서 시나리오를 적지는 않았다. 쓰면서도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등장인물들이 당연히 있다. 그런 얼굴을 발견하려고 신인 오디션을 보는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임 감독은 지금, 윤재한의 아역은 안주원처럼 생겼을 거라고 점차 생각하게 되었다. 안주원이 어떤 윤재한적인 특징을 가져서도 아니었다. 따지자면, 너무 밝은 불이 나머지 불들을 삼켜버린 것과 같았다.
임 감독이 물었다.
“운동 배운 적 있어? 운동하는 씬 있는데.”
“예, 운동은 자신 있습니다.”
“그러네, 여기 적혀 있네. 리틀야구단이랑 태권도 4단…… 피아노도 칠 줄 알고……. 열심히 살았네.”
임 감독의 마음은 첫날 확정되었으나, 자신을 의심하며 그 이후 두 번의 오디션을 더 봤다. 그리고 결국 안주원을 뽑지 않는 것을 포기했다. 저 얼굴이 가득 차 있는 화면을 만들고 싶었다.
* * *
스파이, 박중운 팀장은 확신했다.
정해원에게는 또 다른 스파이가 있다.
‘가장 외로운 시간’이라는 영화에 대해서 며칠 전 VVV엔터 부사장으로 승진한 강효준이 물어봤는데, 전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또 다른 스파이가 누구인지 살짝 확인해 봤는데 정해원 주변에는 스파이 노릇을 할 만한 사람이 자신밖에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두 가지 중에 하나다.
첫 번째는 정해원이 초능력자이거나, 두 번째는 그 또 다른 스파이가 자신의 정보력으로도 추려낼 수 없을 정도로, 진짜 프로 스파이인 경우였다.
현실적으로 첫 번째는 말이 되지 않으니 두 번째일 것이다.
스파이 일이 얼마나 재미있는데. 더 유능한 스파이가 있다면 이제 자신에게 배당되는 일감이 줄어들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박중운 팀장은 정해원이 아직도 안 봤냐면서, 이걸 안 본 사람과 이야기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 로체스터 시리즈를 떠올렸다. 그 스파이 영화는 박중운 팀장 인생의 명작영화가 되었다.
스파이의 그 고뇌. 모든 사적인 관계보다 자신의 업무를 우선하는 그 태도가 너무나 감명 깊어 눈물이 났다.
본받을 점이 많은 영화였다. 다만 영화 속 스파이는 총을 들었지만, 대한민국, 그리고 엔터계에서는 그런 무서운 일을 할 필요도 없다. 그건 다행인 일이었다.
아무튼 그랬는데.
또 다른 스파이가 생겼다. 정해원은 절대로 다른 사람이 생긴 게 아니라고 달랬지만 상황이 여기까지 오니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람피우는 사람이 자기 입으로 바람피우는 중이라고 털어놓을 리 없으니까.
그렇게 한숨을 쉬고 있는데, 여느 때처럼 행동을 관찰 중이던 이춘형이 집무실을 나왔다. 그러더니 급하게 어디론가 향하는 것이었다.
박중운 팀장은 곧바로 강효준 부사장에게 전화했다.
“부사장님, 이춘형 이사가 스튜디오 쪽으로 가는 것 같습니다.”
-어, 놔둬.
“네.”
-혹시 되면 표정 사진 찍어서 보내고.
“예, 알겠습니다.”
박중운 팀장이 말하고 전화가 끊어진 핸드폰으로 카메라를 켰다. 그리고 먼저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VMC가 보유한 채널 중 한 채널이 얼마 전 사건, 사고로 문을 닫고, 그 채널이 쓰던 사무실이 통으로 비게 되었다. 그곳을 정비 중이었다.
곧이어 이춘형은 수행비서들과 분노의 발소리를 내며 스튜디오 앞에 섰다.
“이게…… X발 뭐야?”
이춘형이 얼이 빠져서 화도 안 나는 표정을 지었다. 문 앞에 임시로 적어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스튜디오 ‘장’ 입주 준비 중입니다. 소음, 분진 발생 시 아래 담당자에게 연락 주시면 빠른 시일 내 처리하겠습니다]
스튜지오 장.
이춘형은 스튜디오 안을 확인하고 기가 막혀서 허 웃었다.
VMC 전 부대표이자, 스튜디오 장의 대표 장선영이 자신을 믿고 따라온 직원들에게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어어, 그거 깨져, 깨져. 살살 내려놔!”
“아, 대표님, 저도 알아요.”
“아, 알아? 미안하다…….”
그렇게 멋쩍어하던 장선영 대표가 이춘형을 발견하고 사람 좋게 웃었다.
“어, 춘형이 왔니.”
“……이게 뭐예요? 왜 안 나가세요?”
“무슨 소리야. 캔캔 스튜디오에서 제작하는 영화, 이쪽으로 넘겨주기로 했잖아. 제작비 많이 든다고. 네가 다 결재해 놓고 무슨 처음 보는 일처럼.”
기억이 나기는 했다. 제작비가 말도 안 되게 많이 드는 영화 하나가 있어서, 강효준이 제작비를 내고, 스튜디오를 따로 떼 제작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스튜디오의 대표가 회사에서 쫓아낸 장선영 부대표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오른팔을 잘라냈더니, 적과 손을 잡고 다시 나타났다.
“아니, 자존심도 없어요? 이 VMC 부대표가 요만한 영화 스튜디오 하나 맡겠다고 다시 들어와요?”
“춘형아. 나 원래 부대표 같은 건 생각 없었어. 너희 할아버지가 시키니까 한 거지. 나는 뼛속까지 영화인이야. 영화만 제작할 수 있으면, 날 세상 어디로 보내도 좌천일 수가 없어.”
장선영의 태연한 말에 이춘형은 치미는 화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욕은 참자. 그래도 할아버지가 아끼는 부하직원이니까.
어차피 이 영화에 들어가는 제작비는 한국 영화계에서 있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기다리기만 하면 이 영화는 강효준, 장선영과 함께 몰락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화가 좀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