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실패하지 않는 아이돌의 기술 301화
그렇게 서민혁과 전화를 하고 나서 회사에 연락하려고 보니, 내가 잠든 사이에 스파이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스파이 : 해원아 내가 우연히 봤는데 클라루스 서민혁 씨 너희 회사 방향으로 가시는 것 같다]
하, 스파이가 미리 알려줬는데 내가 자느라 못 봤다.
나는 급하게 회사에 있는 부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대표님, 지금 클라루스 민혁이 형이 저랑 얘기할 거 있다고 잠깐 회사 온대요.”
-뭐, 뭐?
예상대로 순식간에 회사가 난리가 나는 게 느껴졌다.
보이드 엔터는 작다. 아직까지 클라루스는 보이드 엔터가 얼마나 작은지 정확히 알지 못할 거다.
어쩐지, 강효준의 친할아버지가 건물이 작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다 예지였던 거다. 당연히 큰 건물을 써야 클라루스가 왔을 때 안 쫄릴 거라는 걸 언질을 주려던 거다. 왜 강효준은 자기 할아버지 말을 안 들었던 건가. 이러니까 잔소리를 듣는 거지.
나는 쫄리는 마음을 다독이려고 심호흡을 했다.
얼마 전부터 퍼스트라이트는 차를 둘둘셋으로 나눠 타고 있다. 다들 당연히 둘이 타고 싶으니까, 간절하게 가위바위보를 했는데 신기하게 나이 순서대로 갈렸다. 결국 막내즈 셋이 한 차에 타게 됐지만, 한효석과 박선재가 마치 자신들에게 딸려오는 업보처럼 민지호를 여기며 순응했다.
그래서 내 차에는 동갑인 황새벽만이 타고 있었다. 황새벽은 내가 부대표에게 전화하고 난 뒤에도 한동안 말이 없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나에게 말을 걸었다.
“회사에 민혁 선배님 오셔?”
“어, 지금 보자는데…… 아, 무서워. 심장 떨려.”
“야, 왼쪽.”
내가 심장 떨린다면서 두 손으로 오른쪽 가슴팍을 누르고 있었더니 황새벽이 팔을 당겨서 왼쪽에 놔줬다. 느리지만 예리한 놈.
황새벽이 나를 보더니 말했다.
“……와, 내가 만나는 거 아니라 다행이다.”
“네가 만나야 되면 내가 대신 만나줬지.”
“당연히 그래야지, 너는 심장이 떨리지, 나는 멎어.”
황새벽이 말하더니 한숨 쉬고 다시 누웠다. 자려고 하지만 다시 잠들지는 못하는 것 같다. 쫄보인 우리 둘이서 서민혁의 방문 이유를 추측하며 떨다가, 내가 말했다.
“아, 차에 민조가 없으니까 이게 안 좋네.”
“그러게.”
민지호가 있었으면 ‘무슨 상관이야!!!!!!!!!!’, ‘그게 왜 떨려!!!!!!!!!!!!!’라고 했을 것이다. 퍼스트라이트 외의 것들은 민지호에게 완전히 무가치하니까, 이런 일에 있어서 걱정도 부담도 없는 것이다. 평소에는 우리 멤버 중에 단연 제일 애교도 많고 귀여운 동생인데, 저런 강심장적인 면모를 보일 때는 목표에 집중한 맹수 같아 보일 때가 있다.
결국 다시 잠들지 못하는 황새벽과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가다 보니 다행히 좀 긴장이 풀렸다. 곧 차가 회사에 도착해 나만 내려주고, 나머지 멤버들은 숙소로 돌아갔다.
보이드 엔터 모든 직원들이 다 긴장하고 있는 동안, 서민혁은 회의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의실에 들어가 보니 다과가 예사롭지 않았다. 원래도 먹을 것에 진심인 회사인데, 오늘은 특히 더 신경을 쓴 게 보였다.
나는 서민혁에게 물었다.
“형 여기서 얘기하실래요, 아니면 제 작업실 보실래요?”
“작업실 봐도 돼? 그럼 당연히 가지.”
그렇게 우리는 같이 내 작업실로 이동했다.
둘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회사에 엘리베이터가 한 대인 걸 지적받은 게 생각이 나서 내가 말했다.
“아, 건물. 효준이 형네 할아버지가 작다고 엄청 마음에 안 들어 하셔서. 아마 옮길 거 같아요.”
“여기 좋은데 왜. 퍼라 한 팀인데 회사가 크다.”
“재벌 3세 스케일엔 작지 않아요?”
“강효준이잖아.”
와, 아무래도 나랑 똑같이 강효준을 평가하나 보다. 서민혁이 말을 이었다.
“걔 처음 봤을 때는 회사에서 계속 숙식하더라고. 맨날 똑같은 옷 입고. 엄청 먹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이야기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내 작업실로 들어왔다. 나는 서민혁과 양쪽에 둔 소파에 마주 앉았다.
긴장돼서 아직 날씨가 더운데도 손끝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실제로도 피가 안 통하고 있는 것 같다.
서민혁은 지금까지 내가 본 걸로는 엄청 쿨한 형이었는데, 확실히 계약할 게 엮여 있으니까 평소와 분위기가 달라진다.
잠깐 앉아 있던 서민혁이 나에게 기획안을 꺼냈다.
거의 책 한 권 두께를 제본한 기획안이었다.
“……너무 두꺼운 거 아니에요?”
내 말에 서민혁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네가 초안 다 잡았다며.”
“에이, 저는 몇 마디 한 거지, 이 정도 압박적인 분량은 아니었어요. 형 이거 다 읽었어요?”
“어, 왠지 못 보겠어서 내내 미루다가 하루 밤새고 봤어.”
그 미루는 마음도 알 것 같다. 사람이 너무 중요한 일을 앞둘 때는 겁이 많아지니까.
서민혁이 소파 뒤로 기대앉아 중얼거렸다.
“오늘 여기 올라오면서 봤는데, 보이드 진짜 규모 작더라. 솔직히 강효준이 양쪽에 도움받을 할아버지들 있는 거 아니었으면, 여기 기획안은 펼쳐도 안 봤을 거야. 아무리 아는 사이였어도. 아니, 솔직히 아는 사이라서 더 섭섭하잖아, 이럴 땐. 나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이 새끼는 나 이용하려고 그러나? 준비도 안 된 신생 회사에 오라고 하게?”
날카로운 말투에 내가 바짝 쫄아 있는데, 서민혁이 말을 이었다.
“근데 읽어보니까, 심장 뛰더라.”
어휴, 이 형 강약 조절 미치게 하네.
내가 떨리는 숨을 뱉을 때, 서민혁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좋아하는 거, 우리 생각이 다 적혀 있더라고. 진심으로 준비했다는 게 느껴지더라. 솔직히 분량만 봐도 그렇긴 한데.”
지금 이 이야기의 끝이 어디로 갈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그렇게 서론을 끝낸 서민혁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근데, 난 솔직히 보이드 엔터가 클라루스를 지켜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
“…….”
“나 클라루스 진짜 사랑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사랑할 거야. 근데, 그렇게 사랑하는 팀이, 멤버들이. 점점 우리 팀에 대해서 자율도가 떨어지고, 멤버들 마음 다치는 거 옆에서 보고 있으니까 미치겠더라. 솔직히 슬슬 각자 자기 활동하고 싶어 하는 거 이해해. 그래서 여기까지 하자고 내가 먼저 말했고.”
서민혁은 진솔하게 해체를 결정한 이유에 대해서 말했다.
멤버들 각자의 이익, 팀을 유지할 때의 제약, 어느 순간부터 클라루스가 자신들의 클라루스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는 것.
나는 말없이 서민혁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일단 들었다.
그렇게 듣고 있으니까 나는 서민혁의 말에 동화되었다. 클라루스는 사실, 여기서 멈추는 것이 멤버들에게는 나았다. 여러 가지를 고려해봤을 때 그랬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게 이야기한 후에, 서민혁이 나에게 결론을 말했다.
“그래서 내가 궁금한 건, 해원아.”
“네?”
아, 맞다. 굳이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날 만나러 온 이유가 있었겠구나.
내가 오늘 중에서도 최고로 긴장해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서민혁이 말을 이었다.
“너는 왜 클라루스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한 거야?”
그리고 다행히 그 질문은 어려운 게 아니었다.
“계약종료 앞두고, 클라루스 팬들이 슬퍼하시는 걸 봐서요.”
“…….”
“그냥 그게 다예요.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저 사업가 아니고 아이돌 후배잖아요.”
“…….”
“근데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요, 형. 저 형 마음도 알아요. 지치고, 세상에 숨을 곳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요. 저도 2년 숨어 살아봤잖아요. 그게 얼마나 무거운지 아니까. 그래서, 저는 형이 싫은데 억지로, 다른 이유 때문에 클라루스를 선택하는 건 싫어요.”
나는 말을 이었다.
“형, 이 기획안은 그냥 고려할 만한 것들 중 하나인 거죠. 형의 선택을 어렵게 하려고 드리는 거 아니에요. 클라루스를 계속한다고 했을 때의 경로 하나를 보여드린 것뿐이죠. 이런 방법이 있다는 걸 알고 해체하는 거랑, 모르고 해체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잖아요.”
“…….”
“저는 형이 진짜로 가장 원하는 선택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 마음의 전부예요. 이 기획안은 형과 다른 클라루스 형들이 잘, 가장 원하는 걸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그걸로 자기 몫을 다 한 거예요.”
진심이었다.
나는 클라루스가 언제까지나 빛나는 이름이길 바란다. 나는, 우리 퍼스트라이트는, 그리고 수많은 후배가 그 이름이 비추는 빛을 따라 가게 될 것이다.
그러려면 본인들의 행복이 중요하다. 본인이 원하는 걸 했으면 좋겠다.
내 대답에 서민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내가 물었다.
“형, 식사하셨어요? 식사하실래요?”
“아, 미안. 오늘은 별로 생각이 없네.”
“와, 우리 회사에서는 절대 못 들어 본 대답이에요. 다들 끼니에 진심이라.”
나는 대답했고, 서민혁은 그제야 좀 웃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막 작업실을 나서는데 앞에 급하게 달려온 강효준이 있었다. 오늘도 30도가 넘는데, 엄청 뛰어와서 머리가 땀범벅이었다. 강효준이 벽에 팔을 짚고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X발…… 말 좀 하고 와……. 택시는 또 왜 이렇게 느려.”
“네가 평소에 운전을 막하니까 그렇게 느껴지는 거 아니야. 근데 왜 왔냐? 너 보러 온 거 아닌데.”
“세상천지에 서민혁이 왔다는데 안 달려오는 엔터 대표가 있겠냐?”
“너 술 먹었냐?”
“어, 송다랑.”
그러더니 서류 가방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계약 기념.”
“어, 아까 전에 계약했다고 그러더라.”
“넌…… 어, 고마워.”
내가 물을 주니까 강효준이 2L짜리 물통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손이 워낙 크니까 2L짜리가 하나도 안 커보인다.
서민혁이 복도를 턱짓했다.
“가자, 송다랑 한 잔 더 하러.”
그 말에 강효준이 물을 마시며 잠깐만 기다리라고 다른 손으로 손짓했다. 물이 콸콸 사라지는 걸 보며 내가 서민혁에게 말했다.
“저 형 진짜 하마 같지 않아요, 이럴 때?”
“와, 해원아. 내가 지금까지 강효준 하는 짓 뭔가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하마였다. 땡큐.”
우리가 양옆에서 갈구거나 말거나 강효준은 무시하고 물을 마신 후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더위에는 정신을 못 차리는 건 우리 멤버들도 마찬가지라 이해한다.
그렇게 물을 마시고 나서, 서민혁에게 가자고 턱짓했다. 나는 인사를 하고 작업실로 돌아왔다.
보이드 엔터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술자리가 시작되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 *
서민혁은 복도를 걸어가다, 잠깐 정해원의 작업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강효준을 보며 말했다.
“해원이.”
“어.”
“멋있다.”
그 말에 강효준이 대꾸했다.
“알아.”
“하긴, 그러니까 너처럼 책임지는 거 싫어하는 놈이 회사까지 차렸지.”
“왜 다들 그 얘기…… 근데 너 뭐하냐?”
“어, 너 이름 바꿔. 강하마로.”
강효준은 뭐라고 지적하기도 지쳐서 서민혁의 핸드폰을 힐끔 본 후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민혁의 차 조수석에 앉아서 자기 키에 맞게 의자를 조정하며 물었다.
“근데 둘이 무슨 얘기 했어?”
“왜 이렇게 성질이 급해. 술 마시면서 얘기해.”
“쫄리잖아.”
“야, 너보다 열 살 어린애도 안 쪼는데.”
“정해원은 인간이 약간 이상하잖아.”
강효준이 투덜거리자 서민혁이 웃으며 대꾸했다.
“솔직히 그건 그렇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