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려서부터 운동과 게임밖에 몰랐다.
낮에는 죽어라, 운동하고, 집에 와서는 게임을 즐기는 것이 내 삶의 전부였다.
한때는 국가대표 상비군까지 차출되었지만, 예상하지 못 한 사고로 은퇴.
결국, 남은 것은 게임뿐.
뒤늦게 공부를 시작, 복수전공으로 게임학과 수업을 이수했고 게임회사에 취직했다.
흔히 IT업계라고 하면 자유로운 사내 분위기와 창의적이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에 불과하다.
미친 듯한 크런치(Crunch)로 인해, 월화수목금금금에 야근과 철야는 보너스.
하지만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장사하시는 부모님에게 큰 빚이 생겼고, 내 월급은 고스란히 빚 변제에 쏟아부어야 했다.
야근 수당이라도 받아서 생활비를 벌겠다는 일념으로 회사에서 숙식을 반복하다 보니, 남들보다 조금 일찍, 대리를 달았고, 지금은 과장이다.
‘생각해보면 연아에겐 미안한 마음뿐이네.’
빈털터리인 남자친구 덕분에 그럴듯한 선물 하나 받지 못한 채로, 수년이 흘러버렸다.
그런 와중에도 싫은 기색 한번 없이 항상 웃어주던 그녀.
이제부터 열심히 돈을 모아서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했는데, 그건 의미 없는 걱정이었다.
‘설마 재벌집 딸이었다니.’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하다. 설마 재산 문제로 결사반대하면 어쩌지?
드라마에서나 보던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신파극을 직접 겪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도 오지 않을 지경.
덕분에 오랜만에 일찍 출근했다.
“표과장님?”
사무실에 들어서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어? 홍대리, 웬일이야? 이 시간에?”
절대 이 시간에 회사에 있을 리가 없는 홍기도 대리였다.
“금요일에, 뭘 좀 놓고 가서······.”
“뭔데?”
나는 슬쩍 열려있는 서랍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직사각형의 박스가 있었다.
콘돔 박스였다.
“너 제정신이냐? 이런 걸 회사로 배송했어?”
“흠, 제가 혼자 살다 보니, 집에 사람이 없어서요. 그보다 이게 나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당당한데, 왜 일찍 나와서 몰래 챙기고 있냐?”
“······ 커피 드쉴?”
말문이 막힌 것인지, 홍대리는 동시에 손으로 담배를 피우는 시늉을 했다.
“그래. 가자.”
어차피 머리가 복잡했다. 나는 홍대리와 함께 옥상 흡연실로 향했다.
“그런데 과장님은 왜 이렇게 일찍 출근하셨어요?”
“조금 신경 쓰이는 것이 있어서.”
“와, 과장님은 정말 열심히 일하시네요. 저 같은 월급 도둑과는 차원이 다르십니다. 역시 2연속 조기 진급자는 다르십니다.”
“그게 언제 이야기냐, 그리고 벌써 2번째, 차장 진급 물먹었다. 1번 더 아웃 되면, 그냥 똑같아지는 거야. 그리고 너는 월급 도둑이 아니라, 그냥 양아치지.”
홍대리는 요령이 좋은 타입이다. 능글맞은 미소로 대인관계가 완만하며, 야근, 철야, 주말 출근을 귀신같이 피해내는 재주가 있다.
기본적으로 일머리는 있다는 거다.
회사생활은 이 녀석처럼 해야 한다. 나처럼 무식하게 일만 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지금 나의 처지가 그것을 증명한다.
과장까지는 남들보다 빠르게 승진했지만, 차장 승진에는 애를 먹고 있다.
우리 회사는 차장 레벨부터는 위에서 끌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특히 천대받는 기획자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도 맥베스에 인수되기로 했으니, 이번에는 물먹일 일 없지 않겠습니까? 과장님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송준영 부장님도 퇴직하시잖아요?”
송부장의 이름을 듣자, 절로 이가 갈린다. 나와 가까웠던 김상무님과 송부장은 경쟁파벌이었고, 프로젝트의 실패로 김상무님의 파벌이 송두리째 날아간 이후, 애꿎은 나에게 화살이 돌아왔다.
가끔은 대통령 이름도 헷갈릴 정도로 정치와는 담을 쌓은 인생이었는데, 사내에서 정치에 휘말리다니.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냐.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네? 그럼 뭐가 중요한데요? 과장급은 전부 정리 없이 이직 확정되지 않았나요?”
“응? 어, 그렇지 뭐.”
홍대리는 내 말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차장 진급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만약, 회장님이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신다면······.’
회사에는 붙어 있을 수 있을까? 고작 부장 따위의 견제에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는데, 회장님 눈 밖에 나기라도 하면······.
“그 보다 들으셨어요? 작년에 퇴사하신 윤차장님 치킨집 오픈하셨다는 소식?”
“그래?”
밀려난 게임 회사 직원은 치킨집 개업이 국룰이지.
한국의 게임업계는 매우 독특한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다.
경력 있는 노련한 개발자는 오히려 이직이 어렵다.
어설픈 나이에 퇴직하면 게임업계에서 발붙일 곳을 찾기 힘들다.
“엄청나게 잘 된다고 하시던데요? 얼마 후에 2호점 계획도 하신다고.”
“그래? 그렇게 잘 된다고? 그런거 자본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고 있냐?”
“아뇨. 왜요? 퇴사하시려고요?”
퇴사는 아니고, 권고사직은 걱정하고 있지. 처음 여자친구의 집안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는 잠시 핑크빛 미래를 상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금방 현실적인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조양길 회장의 눈에 내가 가당키나 할까?
금지옥엽 같은 딸이 나 같은 별 볼 일 없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만약 너희 아버님이 나를 마음에 안 들어 하시면 어쩌지?’
‘하하하! 우리 아빠에 대해 모르는구나?’
‘내가 맥베스 조회장님을 어떻게 아냐?’
‘인간적으로는 별론데, 사상은 건전해. 그러니 걱정마.’
뭐랄까, 상당히 걱정스러운 정보다.
“기도야.”
“네?”
“인간적으로는 별론데, 사상은 건전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연애 상담입니까?”
“아니.”
“죄송합니다. 제가 도움이 될 수가 없을 것 같네요.”
기대한 내가 바보지. 가만 연애 상담?
“너 혹시 여자친구 부모님을 처음 뵐 때, 어떤 선물이 좋은지······.”
그때였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함께 송부장과 그의 추종자들이 등장했다.
“역시 송부장님이십니다. 맥베스에도 인맥이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하. 김차장 그 친구가 내 대학 후배야. 옛날에는 나랑 눈도 못 마주치던 친구야.”
“송부장님 덕분에 맥베스에서도 잘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 그곳에 가서도 잘해야지. 내가 잘 말해 놓을 테니까, 너무 걱정들 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송부장님! 충성! 충성!”
오늘도 어김없이 딸랑이 흔드느라 바쁜 녀석들을 보고 있으려니, 한숨이 나온다.
누군가는 저게 똑똑한 거라고, 저게 잘하는 거라고 하지만······.
“그런데 송부장님은 함께 가지 않으신다니, 아쉽습니다.”
“말도 마. 하도 사정사정하면서 와달라고 했는데, 내가 단칼에 거절했지. 나 정도 되면, 이제 은퇴할 때지.”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경영진의 연이은 실책으로 다 기울어져 가던 회사다. 그나마 현재 운영 중인 게임이, 맥베스와 공동출자로 개발된 게임이라는 인연 덕분에 부장 이상급을 배제한 인수가 성사된 것이다.
“나가리된 상황에도 허세는 쩌네요.”
홍대리가 드물게 옳은 말을 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모른 채, 지나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탁 트인 옥상 흡연실 어디에도 몸을 숨길만 한 곳은 없었다.
“니들 여기서 뭐 하냐? 일 안 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송부장의 날카로운 눈빛이 나를 찌른다.
송부장은 취향과 태도가 확실한 사람이다. 앞에서 딸랑이 흔들면 같은 편, 아니면 적.
나는 딸랑이 쥘 시간에 기획서 한 장 더치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결과 완전히 찍혀버렸다.
평소라면 냉큼 도망치듯 달아났겠지만, 연아 아버님, 그러니까 회장님과 만날 생각에 머리가 복잡하던 참이라서, 한발 늦었다.
눈이 마주쳤으니, 대답을 안 할 수는 없다.
“아직 업무시간 30분 전 아닙니까. 지금 바로 내려······.”
“어쭈? 말대답하네? 이제 곧 안 볼 사이다 이거냐?”
역시 눈치 하나는 족집게다.
“거기 맥베스 김차장이 내 대학 후배인 것은 알고 있냐? 너 지금 큰 실수 하는 거야.”
김차장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 조회장을 걱정하는 상황에서 차장?
진짜 같잖은 소리다.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너, 너 이 새끼가 지금 웃어······?”
아무리 그래도 직급도 나이도 새파랗게 아래인 내가 비웃자, 충격이 심한 모양이다. 송부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다시 웃음이 나왔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왜 자꾸 웃음이 나오지?
내 상황을 송부장은 꿈에도 모르겠지.
고작 차장 후배 이름 앞세워 골목대장 놀이에 심취한 그릇이라니······.
오늘따라, 이상하게 무섭지가 않다?
“평소에는 눈도 못 마주치던 놈이, 어디 비빌 구석이라도 생겼냐? 내가 우스워?”
이 사람······. 이렇게 작았나?
“너 지금 그 눈빛 뭐야? 너 미쳤어?”
“죄송합니다. 송부장님 키가 이렇게 작으신 줄은 몰랐네요.”
“뭐?”
나는 슬쩍 한 걸음 다가가서 얼굴을 들이밀었다.
거진 머리 하나 차이가 나는 탓에 나는 자연스럽게 송부장을 내려보았다.
‘작다. 키도 작고, 그릇도 작고······. 어제까지는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었는데.’
조회장 문제로 머리가 가득한 덕분인지, 모든 것이 다 우습게 느껴진다.
“그럼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너, 너······. 그래 어디 한번 두고 보자, 기억해라 이 업계 좁다! 어? 한 다리 건너면 결국 다 아는 사이야! 너 내가 오늘 일 똑똑히 기억한다.”
나는 그대로 등을 돌려 옥상을 내려왔다.
“와, 과장님 오늘따라 웬일이세요? 평소엔 망부석처럼 계시던 분이?”
“그냥. 이제 안 볼 사람이잖아.”
나는 홍대리에게 대충 얼버무렸다.
누구라도 사단장 걱정하는 와중에 분대장 따위를 걱정하지는 않을 거다.
급이 너무 안 맞잖아.
“그보다 아까 무슨 말씀을 하시던 거죠? 선물?”
“아니다. 잊어라.”
선물은 무슨 선물이냐. 선물까지 갖다 바치고 뺨 맞으면 더 아픈 법이지.
그냥 이 악물고 다녀오자.
*
*
*
한남동의 고급 빌라들 사이로 조금 더 들어가자, 눈에 확 띄는 대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집 처음이지?”
연아는 살짝 윙크하며 말했다. 진짜 한 대 쥐어박고 싶은데, 눈앞에 있는 으리으리한 궁전 같은 집을 보면 절로 힘이 빠진다.
“아, 나 기 빨리나 보다.”
순도 100% 서민인 나에게 이 집은 너무 눈부시다.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점점 몸이 무거워지는 기분.
“후우. 후우.”
“왜 그래 무슨 시합 나가는 사람처럼?”
“전국체전 때보다 더 긴장된다.”
“엄살은.”
“나는 코딱지만 한 우리 회사 사장님 뵐 때도 긴장했거든?”
“그냥 여자친구 아빠야.”
“곧 내가 다닐 회사 회장님이잖아!”
“······아직 아니잖아. 그러니까, 지금 세게 나가.”
“세게 나가는 것 좋아하시니?”
그렇다면야, 내가 아주 제대로 한번······.
“아니. 자신감만 가지라고. 절대 허세 부리지마. 뭐, 그런 성격 아닌 것은 알지만.”
연아가 힘이 잔뜩 들어간 내 손을 꼭 잡았다, 놓았다.
그 덕에 긴장이 한결 풀리는 듯했다.
“알겠어. 그런데 회장님 성격이 좀 세신 편이신가?”
“응. 기 싸움 시작되면 갈아 마시려고 할 거야. 우리 아빠가 사람이 좀 유치해서, 젊은 남자들에게 기 싸움에서 안 밀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 맨날 자기 남성호르몬을 부르짖거든.”
“남성호르몬?”
“요즘 드라마 보면 자꾸 눈물이 난대.”
대기업 회장님도 드라마 보면서 우는구나. 역시 한국 드라마의 마력이란······. 그런데 나도 가끔 우는데?
음······. 이 주제로 공감대 형성이 가능할까? 아니, 지금 내가 뭔 생각하는 거냐.
긴장하긴 했나 보다.
“준비됐지?”
“아니.”
“그냥 묻는 말에만 대답해. 절대 허세 부리지 마. 우리 아빠가 이상하다 싶으면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는 버릇이 있거든? 절대 빌미를 주지마.”
얘는 자기 아빠를 무슨 애완견 소개하듯이 말한다.
“걱정마. 물지는 않을 거야.”
“만약 물리면?”
“······나 가난해도 사랑해줄 거지?”
“아니. 이젠 자신 없다.”
“미쳤냐!”
연아가 내 등을 팡팡 때렸고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덕분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그 사이, 자동으로 철문이 열렸다. 그리고 안에서 대기하던 검은 슈트 차림의 남자들이 절도있게 고개를 숙였다.
“아빠 안에 있죠?”
“네. 기다리고 계십니다.”
경호원으로 보이는 슈트 차림의 남자가 나를 힐끔 보고는 다시 한번 깍듯이 인사했다. 나도 엉겁결에 고개를 숙였다.
와, 긴장되네.
“어머, 아가씨 오셨어요?”
저택에 들어서자, 앞치마를 두른 아주머니가 반겨주셨다.
“네. 아빠는요?”
“아침부터 미간에 주름 꽉 잡고 계세요. 이분이 예비 신랑?”
“네. 인사해. 우리 이모야.”
“안녕하세요. 표세인입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저는 그냥 이 집 가정부에요.”
“그냥은 아니지! 나 어릴 때부터 함께 살았잖아! 진짜 이모들보다 더 이모지!”
“호호,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밉보이기 싫어요.”
“네네. 이쪽이야.”
“어, 응.”
복도를 지나, 커다란 유리창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오후의 햇살을 만끽하던 조양길 회장이 보였다.
“아빠, 나 왔어.”
“왔냐?”
나와 조양길 회장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르르르······.
내 귀에 환청이 들린다. 뭐랄까? 굶주린 케르베로스의 울음소리 같은 것?
안 문다며? 아주 뼈까지 잘근잘근 씹을 각오로 충만하신 것 같은데?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표세인입니다.”
“조양길이다. 만나서 반갑다.”
-그르르르······.
반가우면 조금 웃어주시면 안 될까요? 시작부터 최종 보스 사냥은 밸런스 붕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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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걸 설명해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