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새로운 인력의 대거 충원에 이은 대대적인 조직개편.
새로 배치된 파티션과 뒤바뀐 자리로 인해서 모두는 분주했다.
“뭐랄까, 한가하네요.”
“그렇지.”
우리는 인수인계 전, 간단한 사내 인트라넷 활용법을 포함 프로세스 설명과 데이터 테이블을 숙지하는 중이었다.
솔직히 말해 무척 지루한 작업이지만, 꼭 필요한 작업이다.
‘잘하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조회장님의 예비 사위가 일을 못 한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그보다 창피한 일이 어디 있겠나.
나는 꼼꼼하게 데이터 테이블을 훑어보며 게임의 전반적인 사안을 확인했다.
“표과장?”
“네?”
“담배 하나?”
“네. 합니다.”
“가자, 홍대리도 같이 오고.”
“네.”
아직 우리 기획팀에는 팀장이 없다. 그래서 하성열 부장님이 팀장 역할을 대신 맡아주고 계셨다.
보통 팀장급을 담당해야 할 차장급은 죄다, 쳐낸 덕분이다.
올해 치킨 체인은 유망한 신규 점주들로 북새통을 이루겠구나.
‘이런 걸 생각해보면 전화위복이려나?’
만약 어설프게 차장으로 진급했었더라면, 나가리 되고 새로운 직장을 찾으려고 고군분투하거나, 진지하게 치킨 프랜차이즈 본사를 방문해 창업상담을 받아야 했을지 모른다.
“어때, 적응 좀 했어?”
하부장이 넌지시 용건을 꺼냈다. 첫날 인사한 이후로 이렇다 할 교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직개편과 인수인계 때문에 모든 파트가 일대 혼란인 상황.
더군다나, 신규 인력들이 배정된 우리 팀에는 팀장도 없어서 하부장이 그 역할까지 대신하고 있었다.
“조금씩 적응하고 있습니다.”
“그래? 니들 아직 둘이 밥 먹지?”
“네. 하필 기존 인원들이 좀 바쁜 것 같네요.”
텃세일까? 일단 혼란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특히 배속된 첫날, 오후 업데이트 때문에 기존 인력들은 점심 식사를 늦게 해야 했기에 새로 온 우리는 따로 식사했다.
그리고 다음 날은 업데이트에 문제가 발생해서 다시 반복.
그렇다 보니, 며칠째,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
“텃세야 그거.”
네, 뭐 그런 게 아닐까 짐작은 했었습니다. 애초에 사람사는 곳이야, 다 거기서 거기다. 새로운 얼굴들이 들이닥치면 토박이들은 일단 바짝 가시부터 세우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나.
“아마, 얼마 후에는 다시 갈라진다는 생각에 굳이 신경 쓰지 않는 거겠지요.”
어차피 기존 인력들은 새로운 프로젝트에 합류할 것이고, 우리는 그들의 빈자리를 채울 계획이다.
내 생각이야 어떻든, 좋게 둘러대는 것이 좋다. 어디서 말이 새나가서 어떻게 와전될지 누가 알겠나?
“그런 거면 그냥저냥 지냈을 거야. 문제는 그게 아니거든.”
“?”
“며칠 전에 회장님이 선언하셨어. 신규프로젝트 조직개편 다시 손 보신다고.”
“어떻게요?”
“기존 인력, 신규 인력, 분간 없이 뽑으시겠다고 하시더군.”
“아.”
말은 맞는 말이다. 유지보수를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은 개발부터 지금까지 게임을 운영해온 기존 팀들일 것이고, 신규 개발은 딱히 누가 유리할 것도 없다.
“하지만 기존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요?”
“맞아. 그래서 지금 분위기가 묘하지.”
개발자는 경력으로 먹고산다. 단순히 개발 경력이 몇 년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게임을 개발했느냐가 생명!
그렇기에 기존 인력들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상황일 것.
말 그대로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낼지 모른 상황.
‘눈에 날이 서 있다 싶더니, 그런 거였군.’
딱히 윗선과의 연결고리가 없던 덕분에 우리만 상황파악을 못 했던 거다.
“그런데 표과장.”
“네.”
“혹시 나에게 뭐 숨기는 것 있어?”
“숨겨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지?
“듣자 하니, 출근 첫날 양실장님과 따로 면담했다면서?”
“아! 나도 그게 궁금했는데.”
홍대리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하부장은 별다른 티를 내지 않았다. 하부장 자체가 담백하고 크게 권위적인 인물이 아닌 탓도 있겠지만, 홍대리는 이상하게 밉보이지 않는 특유의 이미지가 있다.
“별건 없고, 회사 생활에 대한 지도를 받았습니다.”
“출근 첫날에 갑자기 양실장님에게 회사생활에 대한 어드바이스를 받았다고? 학연?”
순간 하부장의 작은 눈동자 위로 이채가 스쳤다.
이거다.
쓸데없이 자기 식구들 터부를 들춰가며 내게 말문을 튼 이유.
처음부터 양실장과 무슨 관계인지가 용건이었던 거다.
“설마요. 저 체대 출신입니다.”
게임업계 전체를 다 뒤져도, 체대 출신을 찾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 찾기 난이도일 것이다.
“속 시원히 밝히고 싶지는 않은 것 같네. 뭐 좋아. 언제고 알게 되겠지.”
네. 언젠가는 알게 되실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하부장은 더는 캐묻지 않았다.
*
*
*
‘텃세였다. 이거지?’
어느덧 점심시간.
지난 며칠간 관심 없던 사내 분위기가 평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기존 팀들은 은연중에 우리가 빨리 사라지길 바라는 분위기.
나는 슬쩍 홍대리에게 눈길을 보냈다.
가라, 홍켓몬!
‘너 이런 거 잘하잖아. 같이 식사하자고 슬쩍 떠봐.’
‘아니요. 이건 씨알도 안 먹히는 분위기입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에요.’
홍켓몬은 혼란에 빠졌다.
‘그런가?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은가?’
하지만 얼마 후에는 본격적인 인수인계가 시작된다. 모든 인수인계가 그렇듯이 인수인계 이후, 돌발 상황에 따라서 자주 찾아가서 자문을 구해야 할 상황이 올지 모른다.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미리 친목을 도모해두는 것이 좋다.
흔히 기획자의 최고 스킬은 기획서 작성이 아닌,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라고 한다.
더 깊게 말하면 좋은 관계를 쌓아 두는 것. 그저 넋 놓고 시간이 해결해 주길 바라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
‘좋은 관계가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만만하게 보이는 것만큼은 곤란하다.
결국, 홍켓몬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트레이너인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한다.
“성과장님?”
“네?”
“식사 아직이시죠? 괜찮으시면 함께 하시면 어떨까요?”
오늘은 업데이트가 없다. 설마 이 정도로 부드러운 권유를 거절하지는 않겠지?
“아, 그, 그게······.”
뭐지? 눈 돌리는 모양새가 이상한데?
“죄송하지만 저희는 오늘 바쁩니다.”
“?”
대답은 성과장이 아닌, 옆에 있던 차대리가 대신했다.
“바쁘시다고요? 식사도 거르실 정도로?”
“네. 그 쪽분들과는 달리, 저희는 바쁘거든요.”
아, 설마 시작부터 이렇게 치고 나올 줄은 몰랐네.
아주 독이 바짝 올랐네?
“그리고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요.”
“선약이요?”
“김순영 차장님과 함께 식사하기로 했습니다. 마침 저기 오시네요.”
고개를 돌리자, 김순영 차장과 윤과장 일행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식사하러 가야지.”
“네.”
“이런, 표과장님 아직 식사하러 안 가셨어요? 바쁜 일 없을 때는 제 시간에 식사하셔야지요. 몸 관리 잘하셔야 합니다.”
여기서 물러나야 할까? 아니면 넉살 좋게 안면에 철판 두르고 우리도 끼워달라고 들러붙을까?
하지만 이 순간에도 홍대리는 소리 없이 입만 오물거리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낄끼빠빠.’
알아듣기 어렵지 않은 사인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냥 물러나는 것도 체면 구기는 건데, 어떻게 할까?
어차피 송부장 같은 지난 회사의 망령도 제거할 겸, 손바닥을 비벼야 하는 상황이 아닐까?
“안 그래도 표과장님이 저희와 함께 식사하자고 하셨습니다.”
차대리가 밉살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자리를 보고 발을 뻗었어야지, 라는 표정.
“하하하! 제가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표과장이 일은 잘하는데, 눈치가 없어요.”
윤과장 하여튼 이 자식은 의리도 없다. 아무리 미워도, 지금은 같이 굴러들어온 돌멩이 신세인데, 두둔해주지는 못할망정.
“안 그래도 제가 먼저 사양했습니다.”
차대리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마치 나 잘했죠? 하고 김순영 차장에게 칭찬해 달라고 꼬리를 흔드는 것 같은 느낌.
“그러셨군요. 그럼 아쉽지만······.”
“그러게요. 정말 아쉽네요.”
“?”
모두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일제히 시선을 옮겼다.
드레스 코드가 없는 게임 회사 직원 답지 않은 말쑥한 슈트 차림의 남자.
양실장이었다.
“양실장님?”
“다 같이 식사를 하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표과장님 밖에 시간이 안 되시는 것 같군요.”
“아, 아닙니다. 저희 시간 됩니다.”
김순영 차장이 당황하며 말까지 더듬었다. 대체 뭐지? 양실장이 대체 어떤 인물이길래, 김순영 차장이 벌벌 기는 거지?
게다가 하부장 눈치도 심상치 않았지?
“아닙니다. 일정이 있으신데, 제가 권유할 수는 없지요. 표과장님 함께 가시지요. 오늘 식사는 조금 멀리 나가서 드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조양길 회장은 양실장을 테스트 선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건가?
뭐랄까, 잘나가는 선배가 전학 온 후배 챙겨주는 느낌?
‘저도 가요?’
‘너도 가야지 그럼?’
‘전 그래픽팀 애들이랑 먹어도 되는데······.’
‘무슨 헛소릴!’
아직도 혼란에 빠져있는 홍대리에게 트레이너로서 도끼눈 버프로 강제 각성을 시키려고······.
했으나, 홍대리는 어느새 그래픽팀 여직원들 대화에 끼어서 낄낄거리고 있었다.
아주 낙엽 마을 닌자 납셨네.
기억해라. 탈주 닌자의 최후는 죽음이야.
“그럼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예, 예.”
김순영 차장과 일동은 엉겁결에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제가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늦어? 다행?
“무슨 말씀이시죠?”
“언제나 첫 단추가 중요합니다. 회장님의 새로운 게임 파트너가 시작부터 이미지를 구기는 것은 좋지 않지요.”
생각해보니, 홍대리는 없는 편이 나았을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회장님 관련 주제는 꺼낼 수 없었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아니요. 표과장님께 감사받을 일이 아니지요. 오히려 저분들에게 감사를 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지? 난처한 상황이었던 것은 나고, 그런 나를 구해준 것이 아닌가?
“회장님이 게임 파트너로 지목하셨다는 의미는 표과장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큰 의미입니다. 아마 얼마 후에는 저분들도 그것을 깨닫게 되시겠지요. 그 시점에 표과장님과 불편한 관계라면 무척 괴로울 겁니다. 그래서 제가 더 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수습한 셈이지요.”
양실장은 스치는 사람들의 인사를 일일이 고개 숙여 화답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주차장에 도착했다.
-삐빅.
고급 세단의 문이 열렸다.
“타시죠.”
“진짜 밖으로 나가서 먹습니까?”
“제가 아까 말하지 않았나요?”
“그냥 사람들 기죽이려고 둘러댄 줄 알았습니다. 평소에도 항상 멀리 나가서 식사하십니까?”
“설마요. 잘 보이고 싶은 상대니까. 시작부터 제대로 하려고 하는 거지요.”
잘 보이고 싶어? 누구에게?
“그렇게 멀뚱히 보실 필요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표세인 과장님은 회장님께서 점찍으신 분입니다. 나중에 제가 줄 서야 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아, 이 사람 뭔가 좀 무섭네. 내가 누군지도 모른다면서, 바로 공사 들어가?
뭐랄까?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쩐지 프로답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양실장의 차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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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보이는 것은 못 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