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같이 점심 먹었다면서?”
조양길 회장은 서류를 훑어보며 넌지시 물었다.
“그렇습니다. 어드바이스도 할 겸.”
“왕따 당하는 놈, 기 살려주려고 한 게 아니라?”
언제나 이런 식이다. 일개 사원들의 사정을 보지도 않고서 훤히 꿰고 있다.
머리가 좋다기보다는 사고방식의 얼개가 다르다.
이런 타입은 무엇을 해도 성공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미 큰 성공을 이루었다.
양성태 실장은 새삼 조양길 회장의 혜안에 탄복했다.
“괜한 참견이었을까요?”
“네 스타일이잖아. 섬세하고 사려깊고. 잘했어.”
이미 답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직접 조양길 회장 입에서 긍정적인 말을 듣게 되니, 한결 안심된다.
‘심복이라고 하면 듣기에는 좋지만······.’
조조가 말한 계륵의 의미를 단숨에 파악한 양수의 최후는 처참했다.
머리로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합이 맞기 위해서는 서로 사고방식의 공통분모가 넓어야 한다.
그래야, 실수를 줄이고 좋은 관계를 유지해 갈 수 있다.
조양길과 양성태는 그런 관계였다. 서로 생각하는 방향성이 비슷하다. 그래서 사주와 사원, 20살 이상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긴밀한 유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직접 보니 어때?”
조양길 회장은 서면 보고를 좋아하지 않는다. 의사소통에 언어가 차지하는 비율은 고작 30~35%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던가?
음조, 억양, 음량 그리고 표정과 제스쳐. 비언어적 영역을 토대로 본질을 추론하는 것이 조양길 회장의 방식이었다.
“사람이 담백합니다.”
“담백해? 계속해봐.”
조양길 회장은 흥미롭다는 듯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턱을 괴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표세인 과장에 대한 조양길 회장의 관심이 예사롭지 않다는 증거.
“일반적으로 부장급 이하, 아니 일부 부장급 사원들조차도, 제가 접근하면 2가지 패턴의 반응을 보입니다.”
“뭐 그렇겠지. 양성태 실장 정도 되는 인물이 접근하면······. 기대감으로 꼬리를 흔들거나, 경계하겠지?”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역시나 합이 잘 맞는 타입.
“그런데 담백하다? 혹시 천하의 양실장을 몰라보는 얼간이 천치라는 의미?”
“그건 아닐 겁니다. 다른 사람의 반응을 목격했으니까요. 그보다는······. 정확히 회장님과의 게임에 온 정신을 집중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전령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이랄까요?”
“하하하, 양성태의 자존심을 구기다니, 회사생활 편케 하긴 글렀구만.”
“보아하니, 명확한 보상도 모르는 것 같은데, 마치 저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느낌이랄까요? 그저 게임 외에는 안중에도 없다.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만약 확실한 보상을 알고 있기라도 했다면 이해하겠지만······.
분명 지난번의 대화에서는 명확한 보상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사내 정치에는 젬병이라던데, 그래서일까?”
“그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
“저와 타입은 다르지만, 분명히 선을 긋고 움직이는 것이 느껴집니다. 일례로 기존 인력들과 작은 실랑이가 있었는데, 지르기 전에 주변을 면밀히 살핀 후에 움직였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양성태 실장의 눈과 귀는 회사 곳곳에 뻗어있다.
“헛똑똑이는 아니라 이거군.”
“아시고서 주목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몰라, 인사과에서 넘겨받은 인사평가서가 전부야. 그리고 아주 악의적이던데? 봤잖아?”
“예.”
전 회사의 상사였던 송부장이 작성한 인사평가서에 표세인 과장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박한 편이었다.
회사의 캐시카우인 세븐메이지 기획의 핵심 멤버이고 동료 직원들에게 평가가 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악의가 느껴졌다.
“무슨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도 아니고, 협조성이 부족하고 음침하다? 딱 봐도 음침한 구석은 없더만, 게다가 협조성 부족한 기획이 어떻게 업무역량 평가가 이렇게 높아?”
“제가 따로 조사해보니, 아무래도 적대파벌 인사가 작성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과제는 통과할 것 같은가?”
조양길 회장의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떠올랐다.
튜토리얼을 무척 어렵게 제시해서 상대의 역량을 파악하고 보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저 억울한 일이겠지만······.
“뭔가 아이디어가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호오.”
유통기한이 지나 하락세에 접어든 게임을 부활시키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엄청난 인력을 쏟아부어 게임을 환골탈태시키면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그럴 바에야 신규 게임을 개발하는 것이 타산이 맞다.
“솔직히 실패하실 거라고 예상하고 제시한 임무라고 생각됩니다.”
“맞아. 초반에 긴장감 좀 조성해야, 몰입감이 높아지잖아?”
조양길 회장은 순순히 인정했다. 고작 과장급 인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제시했다.
어디 한번 보자.
한번 보여봐라, 네 그릇을, 스탯을 내가 파악할 수 있도록.
그것이 조양길 회장의 목적.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데······. 왠지 해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직감이 그래?”
“예. 그렇습니다.”
“직감. 직감이라······. 양실장 답지 않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동의했다. 양성태는 직감 같은 것에 의존하는 타입이 아니다.
“하지만 완전히 직감은 아닙니다.”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
“재량이라는 말에 마케팅 비용의 사용처에 대해 확답을 요구했습니다. 뭔가 상식 밖의 묘수가 나올 것 같은 느낌입니다.”
“묘수라 이거지.”
조양길 회장은 잠시 고민하던 끝에 슬쩍 양성태의 안색을 살폈다.
양성태는 자신이 지금껏 오랜 시간 곁에 두고 육성한 인재다.
그런 양성태가 마치 기대된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자신이 수를 못 읽었는데도 기분 나쁘다는 기색이 하나도 없어?’
눈치 100단이란 것이 양성태의 최대 장점이다. 그리고 본인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기대된다는 표정이라니?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랜 평온함에 이빨이 무뎌졌나?
‘그런 캐릭터는 아니지.’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단 하나.
‘사람 홀리는 재주도 있다 이거지?’
표세인에게 예상 밖의 숨겨진 재주가 하나 있었다는 것.
조양길 회장은 남몰래 피식 미소지었다.
*
*
*
“그러면 첫 번째 안건부터 시작하죠.”
나와 홍기도, 남궁원은 사내 카페에 비치된 소회의실에서 첫 번째 기획 회의를 시작했다.
드물게도 회의의 첫 운을 뗀 것은 홍대리였다.
‘새로운 직장, 새로운 프로젝트. 그래 너도 기획자다 이거지?’
왠지 지금의 홍대리는 어제까지와는 달리, 무척 든든하다.
“새로운 시작에 앞서 언제나 가장 중요한 안건은······.”
홍대리는 테블릿을 꺼내 들었다. 설마 PPT까지 준비했다고?
이, 이 녀석······.
“처음이니까, 화끈하게 시작해야죠. 소로 시작해서 클럽까지. 클럽은 법카 안되니까. 제가 쏩니다.”
-퍽!
아, 아차!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아니고, 괜찮냐?”
“으윽······. 과장님 힘 조절 좀.”
맞다. 힘 조절에 실패했다. 한 방에 보내버렸어야 했는데······.
“너는 초장부터 장난질이냐?”
“저 진지합니다.”
아, 진짜 장난기 하나도 없는 표정이라서 대꾸를 못 하겠다.
역시, 한 방에 보냈어야 했는데······.
“이게 그 유명한 홍표 만담인가요?”
“그게 뭐야?”
“모르셨어요? 두 사람 만담 유명하잖아요. 맨날 들러붙어서 시시덕대고······. 그래픽팀 언니들 사이에서 상당히 인기예요. 둘 다 얼굴도 반반하고 키도 훤칠하니까.”
남궁대리가 피식 웃었다.
“아니, 그건 아니지. 나 여자친구 있거든?”
“사진 보여주쉴?”
아픔이 가셨는지, 홍대리는 다시 기가 살아서 들이대기 시작한다.
“나는 사생활 공개 안 한다.”
“아무리 그래도 SNS나 프로필에 여친 사진이 한 장도 없는 게, 말이 됩니까?”
“응. 응. 안 그래도 그래픽팀에서 위장전술이라고 말이 많지.”
남궁 대리까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처음 사귈 때, 여자친구가 당부했어. 얼굴 노출되는 것 안 좋아한다고.”
“설마 연예인입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그때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지금은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간다. 게다가, 당장은 비밀로 해야 하므로 더더욱 그렇고.
“팀원간의 콘크리트 같은 유대를 위해서, 사진 공개를 요청합니다!”
“오! 드디어 전설 속의 과장님 여자친구분을 보게 되나요?”
전설이라니, 내 여자친구가 무슨 네스 호의 환상종도 아니고······.
아, 아니지.
예쁘고 성격도 좋은데, 재벌집 딸내미다.
따지고 보면 진짜로 도시괴담에서나 등장할 법한 환상종 맞다.
“콘크리트?”
“네! 콘크리트!”
“내가 왕년에 태릉 격파왕 출신이거든? 진짜함 깨줄까?”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콘크리트는 생각처럼 단단하지 않습니다. 제가 많이 깨봤거든요.
“일하죠. 일.”
홍켓몬은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어차피 처음에는 인수인계와 업무 파악만으로도 바쁘지 않을까요?”
굳이 회의까지 필요하겠느냐는 의미. 기획자들은 회의가 업무의 절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회의를 자주 하지만, 더러 회의를 시간 낭비라고 여기는 타입도 있다.
남궁 대리는 어떤 타입일까? 홍대리는 회의를 쉬는 시간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긴 한데, 같은 타입은 아니겠지.
“일단 우리 팀의 목표에 대해서 논의하려고.”
“목표?”
“우리 목표는 작년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는 것.”
“네?”
“참나. 나가라는 소린가?”
홍대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남궁대리는 혀를 찼다.
반응은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같다.
“진정해. 만약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도, 너희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어.”
“왜요?”
“양실장님 개인의 목표야. 우리와는 관계없어. 그러니 걱정할 것 없어. 하지만 가급적 목표를 향해서 피치를 올려보자고.”
“하여튼, 윗대가리들 생각 없는 건, 어디나 똑같네요.”
남궁원이 애꿎은 양실장을 욕했다.
양실장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원래 높은 자리는 욕먹는 것도 연봉에 포함되는 것 아시죠?
“뭐, 윗선에서 말도 안 되는 오더를 내리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긴 하죠. 그런데, 양실장님은 우리팀에 그냥 이름만 올려두신 거죠?”
기획팀의 TO는 5명. 그중 한 명은 양실장이고, 이제 한 자리가 남았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한자리는 굳이 급하지 않다. 더욱이 현재는 자리도 없다.
기존 인력인 성과장과 차대리가 자리를 차지 하고 있는 덕분에 남는 데스크가 없다. 당장 나부터가 팀장 데스크를 사용중이지 않나.
“맞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양실장은 사업부 소속이다. 애초에 기획팀 팀장에 이름을 올리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일.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별명이 왕의 남자라고 했지?’
조양길 회장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양실장이 아닌가?
기획이든, 어디든 그가 발을 뻗는다고 해서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양실장이 회장님 숨겨둔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크흡! 켁켁.”
나도 모르게 커피를 마시다가 사레들렸다.
“괜찮으세요?”
“지, 진짜냐?”
“뭐가요?”
“방금 말한 양실장 얘기. 그거 사실이야?”
“사실이긴요. 성이 다른데. 원래 잘 나가는 사람한테는 그런 소문이 하나쯤은 붙는 법이잖아요?”
“그, 그렇지?”
그래도 찜찜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인척 관계 문제다.
이건 나중에 연아에게 꼭 물어봐야겠다.
“그런데 계획은 있으세요? 매출 역행을 노리려면 어지간한 규모의 컨텐츠 업데이트로는 안 될텐데.”
남궁 대리가 슬쩍 펜을 물었다. 머리를 굴려봐도 답이 보이지 않는 모양.
“계획은 있지, 게임을 싹 뜯어고쳐야지.”
“하지만 그게 지금 우리 맨파워로 가능할까요?”
“타팀 상황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요?”
조직개편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굴러들어온 기획이 과도한 업무량을 프로그래머에게 요구한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까?
싸움닭이라고 소문난 남궁대리 조차도 조금 걱정된다는 표정이다.
“당연히 시작부터 과한 채찍질은 좋지 않지.”
“그럼 장기계획?”
“아니, 그럴 시간 없어.”
“?”
게임을 뜯어고쳐야 한다고 했지, 컨텐츠를 추가한다고는 안 했다.
“꼭 새로운 컨텐츠를 넣어야만, 좋은 업데이트가 아니지. 때로는 빼고 고치는 것이 답일 수도 있어.”
“빼요?”
때로는 더하는 것 보다 빼는 것이 답일 때가 있다.
“예전 매출을 원하면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도 한 방법이지.”
넣지 않고 뺀다. 그것이 나의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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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좋으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