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8화 (8/346)

8.

모두의 부동산.

한때, 맥베스의 든든한 카우였지만 현재는 매출곡선이 하향 일변도로 전락해버린 게임.

과거 인기 보드게임을 벤치마킹하여 탄생한 이 게임은 과거의 영광을 잊고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주사위를 굴려 말을 이동하고, 칸을 구입해서 그곳에 건물을 세워, 그곳에 도착한 다른 플레이어에게 돈을 받아, 계속 칸과 건물을 구입하는 게임.

상대가 내 칸에서 돈을 잃을 때의 만족감, 상대가 구입한 칸을 피해야 한다는 긴장감.

모든 것이 주사위 운에 걸려있다는 긴장감이 이 게임의 묘미.

단순한 룰과 친근한 디자인으로 국민적인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게임.

*

*

*

“양실장님이 기획팀장이라고? 그거 좌천이야?”

모두의 부동산 프로그램팀 팀장인 한명수 차장은 목을 벅벅 긁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업팀 실장직 겸임이니까, 좌천은 아닐 겁니다.”

“그 양반이 기획도 할 줄 아나?”

불같은 성격과 개발 욕심 때문에 부장 승진의 기회를 번번이 놓친 한명수 차장이었다.

비록 차장이지만, 어지간한 부장급 연차인 그였기에 양성태 실장이라고는 해도 입사 기수만 따지면 한참 아래.

기본적으로 남들에게 관심이 없는 한명수였지만 양실장은 워낙 튀는 캐릭터인지라, 눈길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자기관리 잘하고 사회생활 잘하는 덕분에 승승장구하며 실장까지 올라간 것은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기획이라니······.

“개나 소나 개발 파트에 발 들이미는 거 안 좋은데.”

개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하기 시작하면 개발은 십중팔구 좌초한다.

“그분 속을 누가 알겠습니까? 하지만 실질적인 업무는 표세인 과장이 진행한다고 합니다. 그 친구가 기획팀 팀장 대리라고 하더군요.”

김순영 차장이 가볍게 혀를 찼다.

“표세인? 새로 합병한 쪽 인물이야?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낯선 이름인데, 왠지 귀에 익다.

“지난번 송부장님이 말씀하신······.”

“아!”

뒤늦게 한명수가 손가락을 튕겼다.

“대충 들어서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송선배는 왜 그렇게 그 친구를 싫어하는 거라고 했었지?”

같은 과 선후배라는 인연과 게임업계라는 이유로 졸업 후에도 몇 차례 술자리를 갖기는 했지만, 한명수는 송부장과 딱히 이렇다 할 친분이 없었다.

“듣기로는 위아래 없고, 비호감이라고 하셨었죠.”

“그래? 네가 보기에는 어떤데?”

“다른 건 몰라도, 양실장을 등에 업은 것은 마음에 안 드네요.”

“아, 호가호위 안 되지. 안돼. 시대가 어느 땐데.”

한명수의 미간에 주름이 생기자, 김순영은 몰래 싱긋 웃었다.

한명수의 성격은 잘 알고 있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괄괄하고 불같은 성격.

부정부패 용납 못 하고 원리원칙에 철저한 사람.

덕분에 부장 진급도 연거푸 물먹은 처지.

‘아마 나보다도 늦겠지.’

아니, 어쩌면 부장을 달지 못하고 퇴사할 가능성도 있다.

애석하게도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은 체력이 떨어지는 나이가 되면 명예퇴직을 권유받는 세상이다.

김순영은 속으로 한명수를 우습게 여기면서도 겉으로는 그의 비위를 맞추는 척 부드럽게 말했다.

“양실장님을 등에 업은 굴러들어온 돌이 얼마나 허황된 기획으로 한팀장님을 괴롭힐지······. 제가 다 걱정입니다.”

“킁, 허튼 소리하면 내가 가만히 있겠냐? 수틀리면 양실장이고 뭐고 없어.”

“역시 한팀장님이십니다.”

그러니까, 네가 승진을 못 하는 거야. 라고 김순영은 생각했다.

“말 나온 김에 얼굴이라도 봐야겠네.”

“먼저 내려가십시오.”

“그래.”

한명수는 먼저 옥상을 벗어났다.

한명수는 다부진 체격과 외모 덕분에 곰 같은 인상으로 여겨지지만, 그렇다고 마냥 눈치가 없는 타입은 아니었다.

김순영이 순수한 호의로 이런 정보를 전달해주었을 리는 없다.

‘이간질하고 싶겠지.’

송부장에게 어떤 부탁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양실장이 움직인 이상, 단순히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김순영은 이걸영 상무의 파벌이고, 이걸영 상무는 회장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양성태 실장을 상당히 예의 주시하고 있다.

‘문제는······. 저 녀석 꿍꿍이는 마음에 안 들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기획병이라는 말이 있다. 기획자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개발 여력이나 일정을 고려하지 않고 말도 안 되는 크런치 일정을 쏟아내는 습관.

기획자들이 흔히 벌이는 민폐로, 특히나 든든한 윗선의 지지를 받을 때, 더욱 폭주한다.

‘내가 그걸 그냥 보고 넘길 수는 없지.’

다른 것은 몰라도 한명수는 개발자로서 상당히 프라이드가 강한 타입이었다.

자신이 십 년 가까이 담당한 모두의 부동산이 허튼 짓거리로 침몰하는 꼴은 눈 뜨고 못 본다.

‘초반부터 기를 죽여야지.’

한명수는 최대한 험상궂은 얼굴로 기획팀에게 접근했다.

“표세인 과장?”

그리고 앉아 있던 표세인 과장과 눈이 마주친 순간.

‘뭐지? 이 느낌은?’

그냥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묘하게 기분이 불편하다.

상대는 인상도 찌푸리지 않고 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치 않다.

그냥 막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그런 기분.

“아, 한팀장님. 인사가 늦었습니다.”

표세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키가 상당히 크다. 덕분에 언뜻 보면 늘씬해 보였던 몸이 생각 이상으로 굵직굵직하고 탄탄하다는 것이 느껴진다.

“표세인입니다. 이번에 모두의 부동산 기획팀에 배정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먼저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표세인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 순간 한명수는 생각했다.

‘이거다!’

악력에는 자신이 있다! 그는 표세인의 손을 잡고 힘을 꽉 쥐었다.

‘어?’

뭘까? 이 아련한 기분은.

어린 시절 아빠 손을 잡고 안간힘을 쓰며 재롱부릴 때, 느꼈던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절대적인 차이.

“힘 좋으시네요.”

표세인은 싱긋 웃으며 말했고 한명수는 십 년은 늙은 것 같은 표정으로 손에서 힘을 풀었다.

‘이건 안된다. 내가 큰 착각을 했다.’

한명수는 기선 제압은커녕, 되려 기가 죽었다.

“그런데 무슨 용건으로?”

“아, 그 뭐냐. 일단 인사도 하고, 무엇보다 향후 업무에 대해서 논하려고.”

“안 그래도 조만간 팀장 회의 준비하려고 했습니다.”

이미 꺾인 기세이지만 물러설 수는 없다. 회사원이 힘 세서 뭐하나? 일을 잘해야지!

“미리 말하는데, 허황된 규모의 컨텐츠 개발 같은 것은 용납 못 합니다.”

확실히 못을 박자!

“그럼요. 아직 손발도 완벽하게 맞지 않을 텐데, 갑작스럽게 일 벌이면 탈 나죠.”

“그, 그렇지.”

뭐지?

“말이 나온 김에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지금 버그 픽스에 열중하고 계신 것 맞죠?”

“그, 그렇지. 그러니까 우리 지금 건들면 안 돼. 출시 된 지, 몇 년짼데 아직도 버그가 산재해있어. 이것들부터 픽스 끝내고 신규 컨텐츠를 시작해야 하는데, 허구한 날 대규모, 대규모! 게임은 일단 버그가 없어야지!”

그간의 한이 서린 외침. 하지만 기획자들은 늘 앞에서는 네, 네 하고는 뒤돌아서는 무지막지한 기획서를 투하하곤 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저도 준비했습니다. 받으시죠.”

“뭔데?”

“버그 픽스 체크리스트입니다. 기존 리스트에는 빠져있는 것들이 많더라고요. 일단 커뮤니티에 올라와 있는 버그들을 취합해서 제가 체크한 항목들입니다.”

원래 계획에 2배는 됨직한 리스트였다.

“가만, 행운 아이템 발동 확률은 손대기 까다로워. 이거는······.”

“인트라넷에 픽스 기획안도 업데이트해 놓았습니다. 그 부분은 나중에 따로 논의하시죠.”

업무 파악하는 사이, 틈틈이 준비한 물건.

한명수는 꼼꼼하게 체크리스트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녀석······. 일 잘한다.’

출근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이렇게 꼼꼼한 체크리스트를 준비했단 말인가? 게다가 픽스 기획안도 작성 완료라고?

이미 게임에 대해 속속들이 파악이 끝났다는 뜻이다.

‘아, 아니지. 기획에게 끌려가면 답도 없어!’

“아니, 이거 우리 다 못한다니까? 이래놓고 신규 업데이트 일정 맞추라고 우리 닦달하면 아주 전쟁이야. 알아?”

“그럴 생각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우선 버그 픽스에 올인해 주세요.”

“듣기는 좋은 말인데, 표과장, 이거 우리 레벨에서 해결 안 돼. 당장 부장님부터가 이번 분기 신규 컨텐츠는 뭐냐고 난리 치실 거라니까?”

게임업계의 윗선은 버그 수정을 메인 업무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프로그래머들은 항상 신규 컨텐츠 개발과 버그 픽스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

그리고 항상 놓치는 것인 버그 픽스 부분이었다. 그렇게 버그 컨텐츠 수만큼 늘어간다.

“걱정하지 말고 저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번 분기에 신규 개발은 없습니다.”

“널 믿으라고?”

고작 과장 따위를 어떻게 믿나?

“물론 소소한 이벤트 정도는 있겠지만, 그 정도는 가능하잖아요.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은 버그 픽스니까. 그 부분은 확실히 해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팀장 짬밥에 고작 과장의 말에 휘둘리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왠지 믿음이 간다.

“확실해? 이거 틀어지면 우리 첫 단추부터 어긋나는 거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신 체크리스트 차질 생기면 프로그램팀 다 같이 숙식입니다. 물론 저도 강제 동참이고요.”

“하!”

한팀장은 그저 헛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기획팀 팀장이 양실장님 아닙니까.”

“양실장님이 내린 지시야?”

“아니요. 이제 허락받아야죠. 이게 기획이 할 일 아닙니까. 개발자 케어하고, 윗선 탱킹하고. 모처럼 양실장님 같은 빵빵한 인사가 팀장에 앉았는데, 이걸 이용 안 하면 되겠습니까?”

표세인은 양성태 실장이 팀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그 시점에 지금 같은 그림을 그려두었다.

이건 일종의 마법 주문과도 같다. 사내에는 양실장 = 조회장이라는 공식이 있지 않나?

표세인은 양실장이라는 마법의 주문을 아낄 생각이 없었다.

좋은 템은 약빨 떨어지기 전까지 끈질기게 사용해야 하는 법.

더군다나, 기획서 하나 작성하지 않는 양실장을 굳이 같은 팀에 배정된 이유가 뭐겠나?

표세인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명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뭔가, 멋있는데?’

양실장과 정확히 어떤 관계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이름값이면 부장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이사진도 입에 지퍼 잠금이 가능하다.

물론 양성태 실장을 설득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눈앞에 있는 표세인의 표정은 일말의 의심도 없어 보인다.

합이 잘 맞는 기획자와 프로그래머가 만났을 때, 가끔 상상 이상의 케미가 터지는 순간이 있다.

“좋아. 이 체크 리스트 이번 분기에 내가 책임진다. 대신 표과장은, 알지?”

“예. 이번 분기 신규 컨텐츠 개발 없이, 버그 픽스에 주력. 저도 이 부분 책임집니다.”

이번에도 표세인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언제 한잔하자고.”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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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이번 분기 신규 컨텐츠 개발 안 하면······.”

하다못해 홍대리까지 걱정할 정도.

“우리 할 일 많으니까 걱정마.”

“테스트요?”

“그건 기본이고.”

“그럼요?”

“일단 모두의 부동산 첫해 출시 빌드와 기획서, 그리고 데이터 테이블 싹 긁어와.”

“첫해요? 그걸 왜?”

“오리지널 빌드를 새로 출시하는 것이 우리 프로젝트다.”

“오리지널 빌드요? 하지만 컨텐츠도 너무 적을 테고, 무엇보다 캐시 아이템도······.”

“지금 이 게임의 문제는 페이 투 윈이 너무 강해. 모두의 부동산의 전신은 보드게임이야. 더 간단하고 더 가볍게. 쓸데없는 아이템 공식 같은 것은 잊고 가볍게 주사위 굴리면서 낄낄대는 것이 이 게임의 본연의 맛이야. 그걸 되찾는 것이 순서야.”

내 말에 홍대리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캐시 아이템 상점이 텅 비면 윗선에서 좋아하지 않으실 텐데요.”

당연히 좋아하지 않겠지.

“걱정마, 내가 알아서 할 거야.”

“한팀장님에게 말씀하실 때도 걱정됐는데, 이것까지? 정말 감당 가능하시겠어요?”

“어.”

“진짜요?”

“앞으로 클레임 들어오면 니들은 무조건 내 이름 팔아.”

“그러면 과장님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나는 아이템 써야지.”

“아이템?”

나에게는 양실장 실드가 있거든. 아이템은 써야 제맛이지.

“나는 양실장님 이름 팔아야지.”

“양실장님이 화내지 않으실까요?”

화낼 거면 기획팀 TO에 이름 올리지 말았어야지.

‘마법사는 열일 해야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마법사는 하필 반지를 위해, 수없이 구르는 노장투혼형 마법사다.

마법사는 열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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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발들일 수 있는 판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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