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운동하던 시절의 일이다.
“이 바닥은 옵션 많은 애들이 의외로 별볼일 없어, 선택과 집중, 이해했어?”
나는 다재다능한 선수였다. 태권도 선수에게 가장 중요한 순발력과 민첩성은 물론이고 근력과 지구력까지 탁월했다.
더군다나 발재간이 남다른 덕분에 상대의 패턴을 읽고 거기에 맞춰 대응하는 습관이 있었다.
하지만 코치는 누누이 그것을 지적했다.
“잔재주 말고 확실한 거 하나. 여러 옵션을 고민해야 할 때는 궁지에 몰렸을 때뿐이야. 그전까지 힘 온존하면서 치고 나갈 수 있는 확실한 컨셉 하나면 충분해. 어차피 완벽한 정답은 없으니까. 이해했냐? 너 이거 정말 중요한 거다.”
코치의 말은 선수 시절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 시절의 나는 스스로의 축복받은 신체조건에 취해 타인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운동을 그만두고 게임업계에 투신하면서는 달라졌다.
체대 출신 기획자.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낙하산이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 속에서 발버둥치기 위해서는 확실한 컨셉이 필요했다.
선택과 집중.
해묵은 교훈 덕분일까? 나는 양실장의 입을 통해 미션 내용을 들은 순간, 이것을 떠올렸다.
오리지널 빌드.
잡다한 컨텐츠 없이. 게임 본연의 맛을 되살리자.
한때는 국민 게임 반열에 들었던 게임이 아닌가?
클래스는 영원한 법.
오리지널 빌드로의 회귀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수준의 부활은 무리라도, 분명히 상당한 반향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유저 반응은 확실해.’
인터넷에 산재한 모두의 부동산 유저들은 하나 같이 캐시 아이템에 의해 훼손된 게임성을 욕하고 있었다.
페이 투 윈.
주사위의 눈에 영향을 미치는 캐시 아이템에 의해 변질되어버린 게임 생태계.
이것을 손보는 것만으로도 게임은 부활할 수 있다.
일부 개발자들은 말한다. 비전문가인 유저들의 말에 휘둘리면 답이 없다고.
정말 그럴까?
그래서 유저들의 말을 듣고 변화를 꾀한 경험이 있기는 한가?
게임의 미래 방향까지 정확히 예측할 정도로 이 게임에 관한 조사 연구가 완벽하지 않다. 개발력도 부족하다.
그렇다면 컨셉을 정하자.
‘지표는 유저들의 반응에 올인하고, 개발력 소모는 최소화한다. 다만 버그만은 완벽하게 해결한다.’
모두의 부동산 유저들이 입을 모아 외치는 또 다른 문제가 바로 버그였다. 하다못해 게임의 핵심 캐시 컨텐츠인 행운 관련 아이템에도 버그가 존재할 정도.
마침 이 부분은 프로그램팀 한팀장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악수할 때, 열의가 가득했지. 그 정도로 버그 수정을 바랐던 거겠지.’
한팀장과의 첫 만남은 의외였다. 험상궂은 표정과는 달리 순한 양 같은 사람이었다.
‘뭐 험상궂다고 해봤자.’
선출인 내 기준에서 일반인들의 외모 기준은 조금 다르다.
‘궁합이 좋은 것 같다.’
어설프게 기세 싸움이나 하려는 타입은 아닌 듯했다.
악수할 때도, 너무 과하지 않은 적당히 열정이 넘치는 강도였고······.
무엇보다 그 이후로 내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던 그 모습이 너무 좋았다.
장급 프로그래머가 기획자의 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경우는 정말로 드문 법.
시작은 나쁘지 않다. 오히려 기존 인력들이 산재한 세븐 메이지 팀이 아닌 것이 호재일지 모른다.
과거의 인간관계 따위 없이,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홀가분한가?
윤과장 같은 귀찮은 녀석이라도 끼어있다면 쓸데없는 실랑이로 얼마나 많은 시간과 심력 낭비를 겪었을지 모른다.
“체크 리스트 점검 상황은?”
“과장님 장난 아니신데요? 정말로 이걸 인수인계 기간에 모두 체크하셨어요?”
“할 일이 없었잖아? 너도 처음부터 이쪽으로 배속됐으면, 그 정도는 했을 거잖아?”
“쟤도 과장님과 함께 배속됐는데······.”
남궁원이 홍기도를 지목했다.
“나는 과장님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부분을 커버했지. 그것이 팀워크.”
“그래픽팀 여직원들하고 시시덕거리는 게, 팀웍이냐?”
“친분의 깊이가 기획의 힘인 것 몰라?”
맞는데, 그렇다고 그것만 하면······. 얘는 정말 나중에 어떻게 되려나?
남궁원과 홍기도가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프로그램팀에도 다리 좀 뻗어 놔라.”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그래? 그쪽이 텃세가 좀 더 심하냐?”
“글쎄요? 일단 여직원이 없어서······.”
얘는 정말 나중에 어떻게······. 아니, 그만하자, 얘한테 신경 쓰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좋아. 남궁대리는 체크리스트 점검 계속하고, 홍대리는 가서 인수인계 마무리 끝내.”
나는 자켓을 걸치며 일어섰다.
“어? 어디 가시게요?”
“오늘 좀 들를 곳이 있어서.”
“반차? 표과장님이 반차를 쓰신다고요? 설마 집안에 무슨 큰 일이라도······.”
아니, 아무리 나라도 집안에 큰 일이 생긴 상황에 반차를 쓰진 않지.
“업무 미팅이 있어.”
“?”
“다녀와서 말해줄게.”
“다녀오세요.”
“올 때! 알죠?”
알긴 뭘 알아. 나는 홍대리의 웃는 얼굴에 중지 기립을 선물하고 사무실을 벗어났다.
‘보자, 늦지는 않을 것 같은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아직 시간은 조금 여유가 있다.
‘코치님 말씀은 틀린 부분이 없지만, 그래도 옵션은 많을수록 좋지.’
완벽한 답안은 없다. 코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기본적으로 청개구리 스타일이다.
옵션은 많을수록 좋다는 나의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새로운 옵션을 준비하려고 한다.
“느리네.”
하필 엘리베이터를 점검하는 날이라서 사용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하나뿐이었다.
“표세인 과장님?”
“?”
고개를 돌리자, 조양길 회장과 연아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어디 가나?”
“예. 잠시 업무차 방문할 곳이 있어서 나가던 참입니다.”
“업무차?”
개발자가 외근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일까? 조양길 회장이 흥미를 보이는 것 같았다.
“지금 말씀해 드려야 합니까? 양실장을 통해서 업무 보고로 전달받으시는 편을 선호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내 말에 조양길 회장이 피식 웃었다.
“감히 회장 속을 읽어?”
“그저 시스템 파악 중입니다. 아니 그보다는 마스터? TRPG 좋아하시죠?”
TRPG.
보드게임의 일종으로 주로 대화와 주사위를 통해 진행되는 역할극 게임.
주로 테이블에서 진행된다고 하여 테이블 탑 롤 플레이라고도 불린다.
조양길 회장은 젊은 시절 TRPG를 상당히 좋아했었다고 연아에게 들은 적이 있다.
‘이런 정보가 사위 후보의 치트키인 셈이겠지?’
TRPG는 마스터와 플레이어로 구성되며 주로 마스터가 준비해온 배경과 이야기를 플레이어들이 이야기 속 인물이 되어 연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지금 나와 조양길 회장의 관계는 마스터와 플레이와 같은 관계인 셈.
“네가 말해줬냐?”
“네.”
눈을 살짝 내리깔고 다소 사무적인 말투였다.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한다더니.’
연아의 공식적인 포지션은 회장 비서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지금 눈앞에서 보이는 태도만큼은 회장의 딸이 아닌, 비서 그 자체였다.
‘우리 연아, 오늘 멋있네.’
‘알아.’
‘아니, 진짜 멋있다고.’
‘안다고.’
빈말이 아니라, 사무용 정장을 입고 시크한 태도를 유지하는 연아의 모습은 색다른 매력으로 느껴진다.
살짝 눈빛 교환을 하며 미소를 짓고 있는데, 조양길 회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래. 그렇게 계속해야, 들통나서 페널티 먹어야지. 마스터는 원래 페널티 먹이는 재미로 하는 역할이니까.”
마스터의 스타일은 다양하지만 개중에는 플레이어를 괴롭히는 것을 낙으로 삼는 악덕 마스터들이 있다고 한다.
‘그거 안 좋은 것, 아닙니까?’
“더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계속하라니까? 내가 원래 보상보다 페널티 쪽 아이디어가 좋은 편이야.”
“그런데 저 사실 TRPG는 경험이 없습니다. 흘려들은 것이 전부라서 그냥 궁금해서요.”
“궁금해? 한번 해보고 싶어?”
아, 너무 악셀을 세게 밟았나? 공과 사 구분이 엄격한 분에게, 너무 사위 모드로 접근했나?
아니, 그보다 이거 장르만 바뀐 산악회 같은 느낌이겠구나?
아이고, 절대 안 되지. 귀중한 휴일을 눈칫밥 먹으며 보낼 수는 없지.
“아니, 제가 실언을······”
“안 그래도 뉴페이스 충원을 고려해보긴 했는데······. 함전무나, 이상무 녀석들도 이제 나이 핑계로 집중력도 떨어지고 술자리나 골프만 좋아하고 말이지.”
함전무? 이상무? 뭐야? 대체 무슨 판이야? 설마 TRPG를 임원회의실에서 플레이하기라도 합니까?
“양실장은 또 연기가 약하고.”
“양실장도 참가한 적이 있습니까?”
안 그래도 인척 루머 때문에 양실장 이야기에 조금 신경이 쓰인다.
“싫다는 티를 내는 것이 재미있어서 한번 끌어들였는데, 연기는 잼병인 녀석이 주사위 운은 좋아서······. 안돼, 안돼. 글렀어.”
양실장이 머리 희끗한 임원들 사이에서 주사위를 던지는 모습을 상상하자니, 살짝 웃음이 나온다.
‘아, 가만······.’
그 자리를 고작 과장인 나 따위가 참석한다고?
‘이건 호런데······.’
장르가 너무 버겁다. 쟁쟁한 임원들 사이에서 과장 찌끄레기가 주사위를 던진다?
그것도 만약 주사위 눈금 하나로 천국과 지옥이 갈리는 중요한 순간이라면?
‘어우, 소름.’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
“생각해보니, 아직 제가 낄자리는 아닌······.”
“지금 부채질하고 발 뺀다고?”
“아닌 것 같지만, 꼭 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운동을 해서, TRPG를 들어는 봤어도, 경험해보질 못했거든요.”
옆차기 빗나가면 바로 돌려차기로이어야지. 타이밍 안 늦었지?
“미션 잘 수행하면 한번 기회를 주지.”
아니, 안 주셔도 되는데······.
“주말에 한가하지?”
“주말?”
순간 연아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럼 평일에 하리? 그게 무슨 비디오 게임처럼 1~2시간 만에 끝나는 건 줄 알아?”
연아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본연의 새침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슬쩍 내게 눈치를 보냈다.
‘무덤 잘 파네.’
‘죄송합니다. 제가 아랫물에서만 놀던 잔챙이라 아직 천지 분간이 서툽니다.’
입맛 씁쓸하다.
“그런데 아부할 요량으로 발 뻗은 거라면 다시 생각하는 것이 좋아. 내가 이래 봬도 플레이어에게 요구하는 기준 엄격해. 양실장도 하루 만에 아웃이었어.”
이래봬도라는 말이 필요합니까? 딱 봐도 그런 이미지신데.
“아뇨. 관심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고, 저도 재미없으면 안 할 겁니다.”
이 정도 솔직함은 괜찮겠지?
“재미······. 좋지. 좋네. 그래, 요즘 이 정도로 치고 들어오는 캐릭터가 없어서, 심심했는데. 좋아. 아주 좋아.”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설마 나 지금 잘못된 스위치를 밟았나?
연아가 고개를 돌리고 슬쩍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지뢰구나.’
아무래도 제대로 밟은 모양.
‘생각해보니······.’
TRPG의 마스터는 따지고 보면 게임의 설계자다.
게임 회사 회장에게 네가 만든 게임 재미없으면 안 할 거라고 선언한 셈이 아닌가?
“내가 플레이어를 깔 수는 있어도, 플레이어에게 까일 수는 없지. 좋아. 어디 두고 보자고.”
뭘까, 이 느낌.
어린 시절 삼국지를 읽을 때, 조조와 여백사의 에피소드에서 느꼈던 그 전율.
내가 천하 사람들을 저버릴지언정, 천하 사람들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寧敎我負天下人, 休敎天下人負我)
조조의 캐릭터성을 드러내는 비장미 넘치는 그 대사!
‘그런데 고작 보드게임에서 이런 분위기와 대사가 나온다고?’
“그 전에 미션이나, 제대로 해둬야 할 거야. 아무나 발들일 수 있는 판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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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금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