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주말.
전 회사에서와는 달리, 홀가분한 기분으로 주말에 연아와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좋네. 전처럼 언제 회사에서 전화 올까 봐서 걱정 안 해도 되고.”
“어. 너무 좋아.”
퇴근 이후, 혹은 주말에 연락하지 말라는 정부지침에도 불구하고 중소게임 개발사에는 그런거 없다.
특히 송부장은 골프장에서 나를 회사로 소환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더랬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옛일.
“이래서 사람들이 대기업, 대기업 하나봐.”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어제 전화로 했던 이야기 계속해봐.”
“업무 이야기하는 것 안 좋아하지 않았어?”
“그때는 오빠가 맨날 인상 찌푸리고 욕만 했으니까. 오빠 스트레스 받을까 봐서 피한거지.”
그래. 100% 믿기지는 않지만,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네 성격이 천사인 걸로.
“그래서 사업비 빼돌려서 다른 게임 인수할 계획이라고?”
“빼돌리다니, 말이 심하십니다.”
회장님 딸래미가 빼돌린다는 단어를 쓰니까, 뭔가 등골이 오싹하다.
“다 회사를 위해서 하는 일이지. 막말로 그 게임 성공하면 내가 돈 버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가 돈을 벌 뿐이지. 그리고 너희 아버지가 나의······.
으흐흐, 요즘 너무 일할 맛이 난다. 내가 이렇게 가벼운 사람이 아닌데, 자꾸 웃음이 나네.
“그래서 그 게임 정말 성공할 것 같아?”
“응. 부족한 부분은 우리 팀이 보충할 거고, 자금도 충원됐으니까, 아마 정식 테스트 빌드 나오면 2차 투자 모집도 순조로울걸? 잘빠진 컨셉이니까. 이게 포인트가 뭐냐면······.”
한참 그 게임의 컨셉의 장점과 시장에서의 예상 파급력을 설명하다가 시계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내가 너무 신나서 떠들었지?”
세상에, 거의 10분 넘게 랩을 한 것 같다. 남친의 한심한 행동 베스트 3, 정도에는 들어갈 정도의 실책을 범한 것이 아닐까?
뭐, 항상 그러지만.
“아냐. 보기 좋아. 오랜만이네, 업무 이야기로 들뜬 모습.”
그렇네. 오랜만이네.
“그런데 오빠팀 고작 4명이라며, 그중에 한 명은 성태 오빠고.”
“오빠?”
네가 왜 양실장을 오빠라고 부르냐?
“뭘 그렇게 놀라. 내가 성태 오빠랑 알고 지낸 게 몇 년인데?”
뭘까, 이건 마치 교회 오빠에 대한 정보를 얻었을 때의 불길함?
“말이 나온 김에 물어보자. 이상한 소문이 있던데.”
“뭔데?”
“양실장이 회장님 숨겨놓은 아들이라는 소문.”
“큭.”
커피를 마시던 연아가 사레가 들렸다. 몇 번 콜록콜록하고는 겨우 진정했다.
“흠······. 생각해보면 그런 소문이 돌만도 하네.”
“왜? 진짜 뭐 있냐?”
“아니, 아빠랑도 오래됐지. 성태 오빠가 내 고등학교 때, 과외 선생님이었거든.”
“과외 선생?”
“그때부터 아빠랑도 죽이 잘 맞아서, 아빠가 성태 오빠 졸업하자마자, 채갔어.”
과외 선생이란 말이지. 과외 선생. 한창 나이의 남녀가 한방에서 가까운 시간을 보내는 매우 불건전한 관계.
나는 과외 같은 것을 해본 적이 없지만, 대학 시절, 자신이 과외하던 학생과 연애를 시작한 녀석들의 경험담을 들은 기억이 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도 있는데, 왜 이성을 과외 선생으로 고용하는 거지?
몇 년 전에 봤던 기생충이란 영화가 떠오른다. 거기서도 분명······.
“표정 왜 그래?”
“아, 뭐 좀 생각하느라고.”
“무슨 생각?”
“사람 때려본 적이 너무 오래돼서 어떻게 때려야 가장 아픈가를 고민했어.”
운동하던 시절에는 경기 때마다 원 없이 사람을 때렸는데, 그만두고 나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래. 그래. 가끔 그렇게 귀엽게 굴어야 사귀는 맛도 나지. 그런데 그거 알아?”
“뭐? 양실장 싸움 잘한대?”
나도 진짜 싸워본 경험은 별로 없어서, 상대가 싸움 잘하면 곤란한데······,
힘 조절 잘 못 해서, 크게 다치게 하면 어쩌지?
“성태 오빠 유부남이야.”
“양실장은 사람이 참 보면 볼수록 호감이야.”
“마냥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어쨌든 아빠가 붙여줬잖아. 잘 지내. 뭐 어차피 잘 하겠지만. 오빠 친화력 좋잖아?”
“그럼, 특히 유부남은 내가 선호하는 지인 랭킹 2위잖아.”
“2위? 1위는 뭔데?”
“1위 게이, 2위 유부남, 3위 외계인.”
“뭐야 그게.”
임자 없는 수컷들은 모두 잠재적인 적이지. 세상 남자들이 나 빼고 전부 유부남 아니면 게이였으면 좋겠다.
오늘만 해도 지나치는 남자마다, 얼마나 연아를 힐끔거리는지······.
“어쨌든 성태 오빠는 죽다 살았네.”
“무슨 말이야. 다 농담이지.”
“어이구, 그러셔요? 그래서 주먹 열심히 푸셨어요?”
“음······.”
“이거나 받아.”
“뭔데?”
연아는 한 장의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가 왜 이렇게 새카매? 그런데 이걸 왜?”
“아빠가 주래.”
“카드를?”
“그게······.”
*
*
*
“너 점심시간에 은행 들렀다면서?”
퇴근해서 집에 도착하기 무섭게 날아든 아버지의 질문.
워낙 눈치가 빠른 양반이라서, 연아는 잘 못한 것도 없는데, 살짝 긴장했다.
“응. 왜?”
“혹시 카드 만들었냐? 그놈 주려고?”
“그놈이 뭐야? 사위 될 사람에게.”
“그건 결혼식장 나오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고.”
“뭐야, 유치하게.”
“그리고 이거 그냥 내 세뱃돈 통장이야. 오빠 편하게 쓰라고······. 아니, 내가 이 나이에 이런 것까지 허락받아야 해?”
그동안 신경 쓴다고는 했지만, 은근히 자신의 씀씀이가 일반적인 수준보다 높지는 않을까? 남자친구에게 부담을 주고 있던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하던 조연아였다.
그래서 어차피 자신의 비밀도 털어놓은 김에 데이트 통장 개념으로 카드를 선물하려고 했던 것.
“누가 허락받으라고 했냐? 그래도 그건 집어넣고 이거나 줘라.”
조양길은 카드를 건네주었다.
“이게 뭔데?”
“내 카드.”
“이걸 왜?”
“너는 그동안 그놈 부모님께 예쁨 많이 받았다면서.”
“그랬지.”
말은 맞는 말이다. 표세인의 부모님들은 연아를 끔찍이도 예뻐해 주었다.
“솔직히 우리 집이 그 집에 비해 부족한 게 하나 있잖냐.”
“부족해?”
“사위 사랑 장모라는데, 너는 그놈 어머니에게 예쁨 받아도, 지금 그놈을 예뻐해 줄 장모가 없잖냐.”
“음······.”
어머니의 이름이 언급되면 조연아는 말수가 적어진다.
“그 대신이라기에는 뭣하고, 무엇보다 돈은 윗사람이 주는 것이 순리야.”
“와, 아빠. 오늘따라 달라 보이네? 이런 디테일이 있는 사람이었어?”
“나 이래 봬도 게임 개발자다. 디테일에 약하겠냐? 고객분들 지갑 열려면 작은 디테일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되는 법이야.”
“알았어. 그렇게 할게. 확실히 내 카드보다 낫겠네.”
조연아는 순순히 카드를 받았다.
“아, 그리고.”
“?”
“그놈한테 그걸로 TRPG 룰북하고 플레이어북 사서 확실히 숙지해두라고 전해.”
“······.”
“왜 대답을 안 해?”
“엄마 얘기 나온 다음에 TRPG 얘기가 나와? 아니, 애초에 그거 때문에 이 카드 준 거지? 다른 건 핑계 아니야?”
“나 바쁘다. 오늘 내로 시놉시스 정리 끝내야 해. 오랜만에 하려니까, 머리가 안 돌아간다. 넌 가서 할 일 해라.”
조양길 회장은 다시 TRPG 시놉시스 문서로 시선을 돌렸다.
“재미없으면 안 한다고? 하, 이 자식이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는 불타고 있었다.
*
*
*
“뭐 이런 느낌?”
“그래. 그런 느낌이구나. TRPG 룰북과 플레이어북 말이지.”
“하여튼 내가 잠깐이라도 감동할 뻔했다니까.”
“감동은 내가 대신 할게.”
첫 선물이 카드라는 것이 조금 낯설기는 하다. 하지만 돌아가신 장모님까지 언급하셨을 정도니, 정말로 나를 신경 써주시는 것이 느껴진다.
“그런데 혹시 카드 선물에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지 않아?”
연아가 슬쩍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 느껴진다.
“전혀. 그보다는······.”
“뭐, 신경 쓰이는 것이 있어?”
“이 카드 목적이 데이트 통장 개념이랬지?”
“응.”
“우리가 카드 긁으면······. 회장님이 다이렉트로 보시는 것 아냐?”
“······. 19금 이하 결제에만 사용하자.”
“예. 그래야지요.”
조금 숙연한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그보다, 아까 하던 말인데, 역시 맨파워가 부족하지 않아? 내가 개발 쪽 일은 잘 모르지만, 인력이 부족할 것 같은데? 오빠 일에 참견하고 싶지는 않은데, 전 회사에서처럼 또 회사에서 숙식하고 그럴 거야?”
“그렇지. 뭐 신고식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맥베스는 전 회사처럼 사람을 막 굴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회장님과의 내기도 있고 허투루 일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판 무덤이니, 잘 해야지.”
“으이구, 이제는 좀 자주 보나 했다.”
“그래도 회사에서 얼굴 볼 수 있잖아.”
“서로 말도 못 걸잖아.”
“그렇긴 하지.”
우리의 관계는 숨겨야 하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대화 나누기도 쉽지 않다.
“어쨌든 잘해.”
“응. 열심히 할게.”
“아니, 일은 알아서 잘 하겠지. 그거 말고.”
“TRPG 말이야.”
“?”
“아빠 불붙었어.”
그러시구나. 불붙으셨구나. 졸지에 방화범 되어버렸네.
“잘할게.”
졸지에 참여하고 싶지도 않은 TRPG 참가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구나.
“응. 그러는 것이 좋을 거야. 자기 취미에 열중하면 주변 사람 닦달하는 타입이라서······.”
연기 학원이라도 등록해야 할까?
“그보다 점심 뭐 먹지?”
“나 가고 싶은 곳 있어.”
“뭔데?”
“여기.”
연아의 스마트폰에는 5성급 호텔의 레스토랑 신메뉴에 관한 포스트가 출력되어 있었다.
“그, 그렇군요. 저도 이제 점심 정도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먹어 줘야 하는 레벨인가요? 조금 긴장되네.”
“걱정마. 누나가 살살해줄게. 점심 먹고는 쇼핑 좀 하자. 옷 좀 사야겠어.”
“니꺼?”
“아니.”
네 것이 아니라면······.
“돌려 까는 거냐? 패션의 완성이란 말은 얼굴이란 말 못 들어 봤냐? 시장표를 걸쳐도 명품처럼 소화하는 것이······.”
“뭐래. 어머님 가방 새로 필요하시다며. 아버님 등산복도 낡았고. 혹시 부담돼?”
부담이요?
“비싼거 사주세요. 저 부모님께 칭찬받고 싶어요.”
“칭찬은 내 몫 아니야? 완전 날강도네?”
“월척은 낚시꾼의 공로지.”
우리는 시덥지 않은 농담을 나누며 카페를 벗어났다.
*
*
*
“사업비로 게임을 인수하다니, 이건 정말로 예상 밖의 수로군요.”
양실장은 내 보고서를 읽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미션 내용은 틀림없이 작년 수준의 매출 달성뿐이고, 사업비의 사용방식은 온전히 제 재량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오해했습니까?”
“아니요. 제가 전달드린 그대로입니다. 회장님께서는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렇다면 문제는 없겠죠?”
“예.”
양실장은 성공 가능성에 대한 여부 따위는 묻지 않았다.
“배틀로얄 시스템 베이스에 좀비의 결합. 시스템과 컨텐츠의 개연성 연계가 좋군요.”
“예. 솔직히 우리가 아니라도 언제고 다른 투자사의 이목을 끌만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투자 계약건은 제 이름으로 진행해야겠군요.”
실무는 내가 진행해도 공식적으로 우리 팀의 팀장은 양실장이다. 당연한 이야기.
“예.”
“인수 지분은 우리 팀이 속한 모두의 부동산 스튜디오로 묶으면 될 테고······. 계약 조건은 빌드업 단계에 따른 차등 지급으로 해도 괜찮겠습니까?”
“예. 거기 8페이지 보시면 세부 요구사항이 있습니다.”
“보고서 깔끔하게 뽑으시는 타입이시군요. 이해가 쉽습니다. 사업팀과 법무팀에게 제출할 서류도 작성해야겠군요.”
“아, 그러면 제가 내일까지······.”
“아니요. 이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개발 외의 잡무는 제게 맡겨주시면 됩니다. 가뜩이나 애먼 TO 하나 잡아먹고 있는데, 이런거라도 도와드려야지요.”
사실 모르시는 부분에서 여러모로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주로 이름 쪽이 열일하고 계시지요.
“그보다 관건은 맨파워 부족이겠군요.”
“예, 뭐 그렇죠.”
“대안은?”
“야근과 철야? 하지만 일단 모두의 부동산 쪽은 신규 컨텐츠 추가가 아닌, 오리지널빌드 복원 쪽으로 방향을 잡아서 불가능할 정도의 일정은 아닙니다.”
“오리지널 빌드요?”
나는 잠깐 내 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그건 묘안이군요. 확실히 근래 몇 개 게임들이 클래식이라는 타이틀로 오리지널 빌드를 새로 오픈해서 좋은 성적을 낸 전례가 있죠. 이건 임원 회의에서도 먹힐 것 같군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역시 당장 필요한 것은······. 아직 TO 전부 채우신 것 아니죠?”
“네. 급한 대로 남궁원 대리 한 명만 충원했습니다.”
“따로 생각해두신 사람이 있습니까?”
“생각 중이긴 한데, 명확하게 특정인을 고려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특정인을 고려 중이신 것이 아니라면 이 일은 제가 조금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도움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마법사가 드디어 직접 주문을 외워주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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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잡는 해병 출신이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