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기획일은 회의로 시작해서 회의로 끝난다는 말이 있다.
조직개편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시점이라 다소 어수선하지만, 어쨌든 업무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처음 맞이한 장급 회의. 이 회의 결과에 따라서 내가 계획한 모두의 부동산 클래식 빌드 개발의 실제 실행 여부가 결정된다.
“여기 PPT 자료 준비해놨습니다.”
“수고했다.”
내가 작성한 PPT를 홍대리가 회의 인원수에 맞게 준비해왔다.
“그런데 분량이 좀 짧네요.”
남궁대리가 자리에서 힐끔 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PPT 길다고 좋은 거 아니야.”
“아는데, 윗분들도 아실까요?”
PPT에 대해 흔히들 하는 착각이다. 결국은 입으로 진행하는 것이고 PPT 자료는 거들뿐.
“구성이 깔끔하기는 한데······. 지금 우린 굴러들어온 돌 신세니까, 더욱 신경 써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일리 있는 말이지만, 이미 거기까지 고려해서 더욱 임팩트 있게 구성했다.
클래식 빌드 출시로 재미 보고 있는 게임들 사례와 모두의 부동산의 클래식 빌드 도전으로 얻을 수 있는 파급력과 효과에 대한 간략한 설명.
당장은 그것이면 충분하다.
“PPT 길어져서 꼬투리 잡힐 요소를 늘리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아! 그것도 그렇네요.”
“표과장님 PPT 잘해.”
홍대리가 마치 자기 일처럼 으쓱했다.
“그래? 항상 송부장이 샤우팅만 기억나서.”
그랬지.
송부장은 언제나 PPT의 색상이나 폰트 같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일로 꼬투리를 잡고는 했다.
사람이 원래 고지식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나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는지.
‘아마도 후자겠지.’
어쨌든 지난 일이고, 만약 하부장도 그런 타입이라면 곤란하지만,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이것도 일종의 테스트다.
하부장의 스타일을 파악하는 것만큼은 몸으로 직접 부딪쳐 봐야 한다.
“겪어 보면 알겠지. 그럼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나는 옥상 좀 들렀다가 회의 들어간다.”
“다녀오십시오.”
나는 옥상 흡연실로 향했다.
초봄의 아침 바람에는 아직 겨울의 흔적이 많이 묻어 있었다.
“서늘하네.”
찬바람 덕분에 머리가 환기되는 기분. 나쁘지 않다.
“표과장?”
“한팀장님.”
마침 흡연실에 프로그램팀 한팀장이었다.
“준비는 잘 했어?”
나는 들고 있던 서류를 슬쩍 들어 보이며 싱긋 웃었다.
“하부장님 스타일을 모른다는 것만 빼면 괜찮습니다.”
“그분이 깐깐한 스타일은 아닌데, 아무래도 신규 컨텐츠가 없다는건······. 캐시 아이템 수도 적어진다는 거니까. 그게 관건이지.”
개발자의 인사고과는 결국 수익성에서 판가름 나기 마련.
더군다나 부장급이라면 이 부분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쉬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버그 잡고 역전의 찬스까지 노리려면 이 방법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악은 전부 다하라고 하는 거지.”
버그 잡고, 오리지널 빌드 복원하고, 거기에 신규 컨텐츠 개발까지 전부 동시 진행.
과거 송부장 같은 스타일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법한 이야기다.
“하부장님이 그 정돕니까?”
“아니, 그 정도는 아닌데, 솔직히 예상 못 할 정도의 해프닝은 아니잖아.”
달리 모 게임사가 가산의 등대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게임사의 개발자 쥐어짜기 스킬은 여느 회사들과 차원이 다르다.
다른 회사들은 적어도 퇴근은 시켜주는데, 게임사들은 인근에 숙소까지 준비하는 철두철미한 준비까지 하는 곳이다.
“그 경우에 대한 대책은?”
“마법 주문 외울 겁니다.”
“하하! 양실장 이름 팔려고?”
“네.”
“정말 괜찮겠어?”
한팀장은 은근히 나를 걱정하는 눈치였다. 역시 이 사람 좋은 사람이다.
“그보다는 한팀장님도 이를 악무셔야 할 겁니다.”
“내가 왜?”
“신규 컨텐츠 없이 버그 해결에 주력하는데, 이거 못 고치면······.”
나는 목 앞에서 손바닥을 슬쩍 그었다.
“그렇지. 그것도 걱정이네.”
버그 픽스는 열정만으로 해결되는 일이 아니다. 운도 따라줘야 한다. 수많은 코딩 중에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리즘 적으로 내재한 문제인지, 결국은 찾기만 하면 반드시 고칠 수 있지만, 반대로 찾지 못하면 하염없이 시간이 소비된다.
이 비효율적인 문제 때문에 많은 게임사가 버그 수정은 뒷전으로 미루는 것.
“그래도 어떻게든 될 겁니다.”
“자신 있나 보네?”
“그럼요.”
없어도 있는 척하는 것이 기획자의 필수 스킬 아닌가?
“아이고, 두 분이 언제 그렇게 친해지셨습니까?”
“?”
회의를 앞두고 있기에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언제나 미운 놈들은 꼭 이런 타이밍에 등장한다.
바로 김차장과 윤과장, 그리고 그들의 팀원들이 몇 명.
“친하긴, 그보다 지금 비꼬는 거냐?”
한팀장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선배님 오늘따라 저기압이시네요. 하긴 이해합니다.”
“이해해?”
한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부장진급을 위해 성과에 목을 매야 할 시점에 버그 수정? 제정신 박힌 기획이라면 이런 타이밍에 그런 제안 안 하죠.”
김차장은 말끝에 슬쩍 나를 보며 이죽거렸다.
‘내가 요청한 것 아닌데.’
인수인계 단계부터 버그 픽스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그 부분에 대한 기획을 작성한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팀장 휘하 프로그램팀이 그 부분에 주력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보조를 맞춘 것에 불과하다.
“너도 프로그래머란 놈이 버그 픽스의 중요성을 몰라? 그리고 표과장이 제안한 것 아니야. 내가 하고 싶었던 거야.”
“그 결과가 프로그램팀에게는 버그 떠맡기고 자기들은 땡자땡자 클래식 빌드 올리는 전략으로 잘 되면 자기들만 꿀빨겠다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클래식 빌드가 잘 되면 그게 어떻게 기획팀 공입니까, 예전 개발자들 공로지.”
나는 직접 윽박지르는 것보다 이렇게 살살 약 올리는 타입이 더 싫다.
가뜩이나 첫 장급 회의를 앞두고 머리 복잡한데······.
슬슬 짜증이 솟구친다.
“이거 전형적인 프로그램팀 엿먹이기 아닙니까. 여기에 놀아나면 한팀장님 승진도 훨훨 날아가는 겁니다. 해묵은 오리지널 빌드 업데이트했다고 프로그램팀에게 무슨 혜택이 돌아가겠습니까?”
아무래도 원하는 것이 이간질인 모양.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잖습니까. 표과장이 일은 잘해도 회사생활을 못한다고요. 항상 저런식으로 저만 득보고 승진한다니까요?”
지난번 오마카세와 자판기 커피 물물교환으로 독기가 오른 윤과장이 슬쩍 끼어든다.
그런데 그 멘트 지난번에도 한 것 아니냐? 너는 개그맨이냐? 그거로 유행어라도 만들고 싶어?
“승진······.”
같잖은 이간질이지만 승진이라는 단어의 무게는 남다른 모양.
한팀장이 승진이라는 단어를 곱씹으며 뭔가 생각에 잠겼다.
‘이거 안 좋다.’
여기서 한팀장과 척을 지면 앞으로 개발일정이 정말로 꼬이는 수가 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개발실의 각 파트 팀장들은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지금은 내가 탱커로서의 역량을 발휘해야 할 시기.
“아니, 말씀이 조금······.”
“야. 김순영이.”
“?”
내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한팀장의 입에서 낮게 깔린 묵직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
*
*
한명수는 내심 부장진급을 포기한 유형이었다. 그라고 왜 승진 문제에 민감하지 않겠나?
하지만 애석하게도 게임 회사에는 가끔 돌연변이 같은 인물들이 존재했고, 한명수가 바로 그런 타입의 인물이었다.
천생 개발자.
부장급부터는 개발이 아닌, 관리직으로 전환된다.
하지만 한명수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래 봬도 대기업 차장.
급여는 크게 부족하지 않고 미용사인 아내는 돈에 사치에 크게 관심이 없는 편.
슬하에 아이도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개발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본인이 떳떳해도 주변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만년 차장이라는 딱지와 이따금 따라붙는 조롱 어린 시선.
더군다나 그 조롱 어린 시선의 주인이 자신의 학교 후배인 김순영의 것이라면?
“니가 뭔대 건방지게 내 승진운운하냐? 내가 방금 버그 픽스는 내가 원하던 일이라고 했어, 안 했어?”
한명수의 돌변에 김순영은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금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잘됐다.
어쨌든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라면 내심 표세인에 대한 악감정도 쌓일 것이다. 어차피 자신과 한명수는 조금만 지나면 부장 승진을 두고 경쟁상대가 될 운명이 아닌가?
‘어쩌면 나중에는 내 밑에 두고 부려야 할 수도 있으니, 이참에 기를 꺾어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지도? 언제까지 선후배 관계로 있을 수도 없지.’
김순영은 빠르게 계획을 정리했다. 다만 조금 걱정인 것은 호리호리한 자신과는 달리 다부진 체격의 한명수의 덩치.
‘설마 진짜 드잡이질을 하지는 않겠지. 그리고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김순영은 뒤에 있는 다른 팀원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팀이 자랑하는 해병대 삼총사. 원래는 두 명이었는데, 같은 해병대 출신인 윤과장이 합류하면서 삼총사로 거듭났다.
든든한 아군의 지원이 있다. 여기서는 질러야 한다.
향후 부장 진급을 놓고 경쟁할 상대에게 기싸움에서 밀려서 되겠나?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아무리 선후배라지만 여기 회사입니다. 게다가 같은 차장이고 팀장입니다. 예의 갖춰주시죠. 항상 그렇게 천둥벌거숭이처럼 행동하시니까, 윗선 눈 밖에 나시는 것을 모르십니까?”
“뭐 임마?”
순간 한명수가 김순영의 멱살을 잡았다.
‘이, 이때다! 다들······.’
액션은 상대 쪽에서 먼저 취했다. 이제 삼총사가 나서서 한팀장을 몰아세우면!
‘어? 왜들 가만히 있는 거야?’
분위기가 이상했다. 김순영은 자신의 멱살을 잡은 한명수에게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다들 가만히 있어라.”
한명수와의 유대를 위해 그와 보조를 맞추기로 한 표세인이 전투 모드에 돌입한 상황.
‘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눈을 부라리고 있는 표세인과 그 앞에서 고양의 앞의 쥐처럼 고개 숙인 팀원들.
‘아니, 대체 표과장이 뭐라고 이것들이 이렇게 기가 죽어서 꼼짝도 못 해? 윤과장! 너 표과장 킬러라면서!’
다른 녀석들이야 직급이 낮아서 그런가보다 이해하려 해도, 윤과장까지 꼼짝 않는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윤현창. 좋게 말할 때, 움직이지 마라.”
“야, 너, 너 임마 왜 그래. 여기 회사야. 회사.”
“알어. 회사인거. 그런데 회사에서 맞으면 덜 아프냐?”
아무래도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다. 김순영은 뒤늦게 자신이 상황을 완전히 오판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한명수의 분노는 계속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주 죽으려고 이 새끼가! 위아래도 없이 사람 속이나 긁고 너 진짜 죽고 싶냐!”
“아, 서, 선배님. 숨 막힙니다. 이, 이건 좀 놓고.”
상황을 오판한 대가는 끔찍했다. 이제는 그저 한명수에게 비는 수밖에 없었다.
한바탕 태풍이 지나고, 지나치게 흥분한 한명수를 표세인이 만류하며 그들이 먼저 옥상을 내려갔다.
남은 것은 김순영과 그 일행뿐.
“김차장님 괜찮으십니까?”
“윤과장······. 그리고 니들······.”
김순영은 엉망이 된 웃을 추스르며 이를 갈았다. 장장 3분가량 한명수의 우왁스러운 손길에 휘둘려 디스코팡팡을 탄 셈.
“귀신 잡는 해병 출신이라면서? 표세인이 뭐라고! 그놈도 해병대 출신이야?”
“아, 아닙니다. 제가 그놈이랑 동갑이잖습니까. 확실히 아닙니다.”
“그놈의 기수는 얼어죽을······. 그런데 왜 가만히 있었던 건데? 해병대 아니면 그놈 뭔데?”
“그 녀석 군대 얘기는 잘 모릅니다.”
“누가 군대 물었어?”
“저희가 압니다.”
해병대 출신 팀원들이 입을 열었다.
“저희가 군대에서 공수훈련을 뽑힌 적이 있습니다.”
“지금 군생활 자랑할 타임이야?”
“공수훈련을 갔을 때, 악마교관이라고 유명한 괴물 교관이 있었는데······.”
내가 이걸 계속 듣고 있어야 하나? 하고 김순영이 생각하는 찰나.
“표과장님이 그 악마 교관이었습니다.”
“뭐?”
“표과장님 특전사 출신입니다.”
“특전사? 그, 그게 해병대 보다 세냐?”
서울대 출신으로 방위산업 특례를 거친 김순영은 군대 지식이 전무했다.
“아무리 그래도 특전사는 좀······. 세상 좁다지만 여기서 표교관님을 다시 볼 줄은······.”
“진짜, 나 아까 오줌 지릴뻔 했잖아. 그리고 표교관님은 달라요.”
“뭐가 다른데?”
“그냥 달라요. 많이 다릅니다.”
“아주 지랄들 하고 있네! 그런데 윤과장은 왜 가만히 있었어?”
평소에는 부하직원에게도 깍듯이 존대를 사용하는 김순영이었지만 그런 가면은 한명수의 드잡이에 휩쓸려 날아간 지 오래.
“표과장 그놈이······. 지금은 안 그런데.”
“옛날 별명이 기획팀 미친개였거든요.”
“미친개?”
“아까 눈빛이 딱 그 시절 눈빛이었어요. 건드리면 물리겠다. 진짜 세게 물 것 같다. 그런 느낌.”
“그래서, 윤과장이 자신 있다며?”
“평소에는 괜찮습니다. 평소에는······.”
이게 말이야, 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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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찬성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