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15화 (15/346)

15.

“이, 이건······.”

남궁대리의 미간이 좁아지고.

“와, 이거 들고 가면······. 거의 자살테러 수준인데요?”

홍대리는 홍대리 다운 엄살을 늘어놓고.

“?”

신입은 신입답게 물음표 마크 띄워 놓고 로딩 중.

하나같이 내가 작성을 끝마친 개발일정. 그것도 그래픽 파트의 작업 일정을 보고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걱정마. 내가 왜 지난 개발 자료를 샅샅이 훑었겠냐. 그간의 개발 역량을 분석해서, 충분히 가능할 정도의 분량이야.”

“곡소리 좀 나오겠는데요?”

소화할 수 있다고 했지, 쉽다고는 안 했다.

“그 부분을 우리가 어시스트해줘야지. 세부 기획 들어갔을 때는, 수정 요청이 최대한 안 나오도록 디테일 확실히 잡아주도록 신경 쓰자고.”

철야를 야근으로 바꿔주고, 야근 대신 칼퇴할 수 있게 지원하는 것도 기획의 일이다. 물론 대부분 그 반대지만.

“그럼 이거 지금 전달합니까?”

“그래야지. 일정 빠듯한데, 시간 끌면 안 되잖아?”

“지난번에 저보고 이 팀의 파이터라고 하셨죠?”

남궁대리가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응. 그랬지.”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 한 몸 바쳐 무사히 전달할 테니, 뼈라도 주워주시길······.”

안 하던 농담까지 던지며, 슈트 상의를 벗고 소매까지 걷어붙인다.

“이건 남궁대리가 할 일 아니야. 맡은 버그 픽스랑 시스템 리밸런스 쪽이나 신경 써.”

“정말요?”

남궁대리의 표정이 활짝 폈다. 아무리 파이터라도 자살 특공이 달가울 수는 없지.

“와, 우리 표과장님 진짜 살신성인 장난 아니시네. 제가 멀리서나마 명복을 빌어드립니다.”

“고맙다. 그런데, 그거 양보할게.”

“예?”

“홍대리야. 이거 니꺼야.”

“잘 못 들었습니다?”

예비군도 끝나가는 놈이, 새삼스럽게 군대 말투를 쓰긴······.

“뭘 놀라. 그래픽팀은 네 담당이잖아.”

기억해라 홍켓몬! 네 속성은 그래픽 담당이다!

“자, 잠깐만요. 이건 아니죠. 저 아직 여기 그래픽 팀장님과는 안 친해요. 그리고 아직 대리급 이상과는 말도 못 텄어요.”

네 직급이 대리인데, 대리급 이상이랑 말을 트니? 정말 재주도 용하다.

“가서 점심 같이 먹으면서 잘 구슬려봐. 알겠지? 여기 네가 좋아하는 법카다.”

나는 트레이너로서 힘든 싸움에 나서야 하는 홍켓몬을 위해 버프(법인카드)를 걸어주었다.

“과장님. 제 생각에 이 정도 사안은 팀장끼리 사전 협의를 거친 후에······.”

“협의 거쳤잖아. 장급 회의에서 결정난 사항이잖아.”

자기들이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끝났지만, 내가 일부러 말 안 했거든.

“가서 맛있는 것 먹고, 커피도 쏘고 알지? 너 이런 거 설명 안 해줘도 잘 하잖아. 믿는다. 자, 그럼 우리도 오늘은 맛있는 것 먹자.”

“법카 홍대리가 가져간다면서요?”

“내가 사지. 팀장 대행 무시하냐?”

무엇보다 나에게는 법카와는 비교도 안 되는 회장님이 하사해 주신 블랙카드가 있다.

‘그거 연간 최소 3억 이상 소비해야, 자격 유지되니까, 아끼지 말고 써.’

지난번 연아가 내게 해준 말.

‘다른 일도 아니고 팀원 밥값이나, 회식에 쓰는 것은 문제없겠지.’

대체 뭘 하면 1년에 3억 이상 소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런 건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사양하지 않는 것이 좋다.

‘결혼 후에, 셔터맨으로 보직 변경해도 이건 회수당하는 일 없겠지?’

가끔 기둥서방의 미래를 상상할 때마다 자꾸 콧노래가 나온다.

아, 사람이 너무 가벼워지면 안 되는데, 요즘 왜 이렇게 발이 둥둥 떠 있는 것 같지?

큰 골칫거리였던 장급 회의도 패스했고, 그래픽팀 통수 기획은 홍켓몬에게 떠맡겼다.

이보다 더 신나는 날은 월급날 제외하면 달 리 없지 않나 싶다.

“아옳옳옳옳!(진짜 인간적으로 이건 아니지 말입니다!)”

홍켓몬이 전의를 불태우며 기합을 넣었다. 기합 넣는 것 맞지?

자꾸 한 귀로 미끄러져서,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비싼거 먹어도 돼요?”

예전의 나였다면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멘트겠다만······.

“앞으로 내가 쏜다고 했을 때, 가격은 신경 쓰지 마.”

“오, 패기!”

“아옳옳옳옳!(저 법카 부술 거에요! 분기 할당금 완전 소비할 거예요!)”

“뒷감당 자신 있으면 그러시든지.”

끊임없이 전의를 불태우는 홍대리를 뒤로 하고 나와 다른 팀원들은 사무실을 벗어났다.

“그래서 뭐 먹고 싶어?”

“중화요리, 코스?”

“더 비싼거 골라도 된다니까?”

“제가 중화요리 좋아해요. 너도 괜찮지?”

“네. 저는 뭐든 잘 먹어요.”

여직원들이라서 레스토랑 같은 곳을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나중에 딴말하지 마라.”

“중화요리도 코스는 비싸요.”

음······.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요즘 양실장이 추천해준 고급 한정식집이나, 연아와 함께 간 호텔 레스토랑 같은 곳을 전전하다 보니, 내 의식 수준도 조금 바뀐 모양.

“그래. 니들이 좋아하는 것 먹어야지. 음식은 가격이 다가 아니지.”

엘리베이터를 내려 1층 로비에 도착, 스마트폰으로 중국집을 검색하는데, 함송희가 외쳤다.

“아! 여신이다.”

“여신?”

“모르세요? 우리 회사 2대 여신. 그중에 한 분이 저기 회장 비서분이시잖아요. 이름이 뭐였더라?”

조연아.

2대 여신인 것은 모르겠는데, 이름은 조연아다.

‘오늘도 예쁘네.’

오늘은 지난번과는 달리, 회장님이 아닌 다른 비서실 팀원들과 함께 있었다.

드레스 코드가 없는 탓에 다소 캐쥬얼한 복장이 대부분인 이 회사에서 유독 검은 슈트 차림 일색의 집단.

그리고 그 속에서 유독 존재감이 돋보이는 여성이 바로 내 여자친구였다.

“와, 예쁘네요. 저도 그래픽팀 언니들에게 들은 적은 있는데, 장난 아니네?”

“그쵸? 신입 연수 때, 진행자셨거든요. 남자 동기들 눈이 동시에 하트로 바뀌었잖아요. 다들 여신님, 여신님, 얼마나 연호하던지. 무슨 신흥종교 집회인줄.”

“크큭. 여신이라고?”

이거 재미있다. 나중에 놀려줘야지. 이런 아이템은 잊지 말고 잘 킵해둬야, 데이트 중에 대화 소재로 활용할 수 있는 법.

“왜 웃으세요? 안 예뻐요? 과장님 타입 아니에요?”

“과장님 눈 엄청 높으시네요. 그런데 솔직히 저 정도면 타입 같은 거, 씹어먹고도 남지 않나? 게다가 능력도 좋잖아. 자그마치 대기업 회장 비선데.”

“과장님 타입은 뭐예요?”

주제가 주제이기 때문일까? 마침 두 사람 모두 여직원이라 눈을 초롱초롱 빛낸다.

“나도 잘 몰랐는데, 내가 취향이 확고하더라고.”

“뭔데요?”

“엄청 부잔데, 그런 거 티 안 내는 여자.”

“네?”

“마지막으로 한참 숨긴 후에 선물처럼 짠하고 ‘우리 아빠 대기업 회장님이야.’라고 말하는 사람?”

“그, 그게 취향이에요?”

“과장님 꿈이 기둥서방이에요? 너무 속물 느낌 나지 않아요?”

“맞아. 내 장래희망이 재벌집 기둥서방이야.”

“요즘 스타일의 아재 개그인가? 적응 어렵네요.”

“됐어, 그냥 넘어가. 그보다 난 잘 못 찾겠다. 네가 검색해 볼래?”

“네. 잠시만요.”

“저도 찾아볼게요.”

팀원들이 중국집을 검색하는 사이, 나는 슬쩍 연아를 바라보았다.

‘우리 여신님은 점심을 뭐로 드시려나?’

그런데, 어쩐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왜 표정이 어둡지?’

나는 인파를 피하는 척하며, 슬쩍 연아와 비서실 직원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이사님 입국 소식을 왜 지금에서야 말씀하시는 거죠?”

“죄송합니다. 제가 경황이 없어서 그만······.”

“이사급 임원이 귀국하게 되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아실 텐데요?”

“죄송합니다.”

비서는 대체로 내근직 여비서와 외근직 남비서로 양분화된다.

남비서들은 주로 임원들의 외부일정에 동행하는데, 경호업무를 대신하는 때도 있어서, 남자 비서들은 체격이 좋은 경우가 많다.

체격 좋은 남성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쩔쩔매고 있는 가운데, 연아를 비롯한 여비서들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 회사는 여비서는 학벌, 남비서는 피지컬로 뽑는 경우가 많다고 연아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일까?

종종 일 처리가 야무지지 못한 남비서들이 여비서들에게 깨지는 경우가 흔하다고······.

‘파워게임에서 상대가 안 되니, 그렇겠지. 그런데 연아는 평소에 저런 느낌이구나?’

평소와는 달리 찬바람 쌩쌩 부는 차도녀 느낌이 물씬 풍긴다.

이럴 때, 아이컨택이라도 하겠답시고 주변에서 배회하는 것도 멍청한 짓이니, 못 본 척 눈에 띄지 말고 사라져야겠다.

“우리, 나가서 걸으면서 검색할까?”

내가 팀원들을 이끌고 회사를 벗어나려는 찰나, 정문에서 약간의 소요(騷擾)가 발생했다.

‘양실장? 그 옆에는 누구지?’

양실장과 한 남자가 회사 정문으로 들어서자, 비서들이 일제히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고, 직후 누군가가 잰걸음으로 달려들었다.

김차장과 그의 단짝인 윤과장이었다.

나와 같은 굴러들어온 돌인 윤과장이 이사급 인사와 연이 있을 리는 없으니, 그저 떡고물이라도 기대하고 헐레벌떡 김차장을 쫓아온 느낌.

“문이사님 오셨습니까.”

김차장은 디스크가 염려될 정도로 깍듯한 90도 인사를 했다. 하지만 문이사는 대답도 없이, 슬쩍 손짓만 보내고는 연아를 향해 말했다.

“갑자기 일정을 변경해서 죄송합니다.”

“차량 픽업도 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양실장님이 마중 나와주셔서 덕분에 불편함 없이 도착했습니다. 비서실 바쁜 거야, 제가 잘 알지요.”

“아, 양실장님께서······.”

문이사의 말에 뒤에 있던 양실장이 싱긋 웃었다. 그 모습에 연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저건 극대노 전 단계의 싸늘함인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 수 있다. 사무적 스마일로 위장했지만, 아마도 저 옅은 웃음 내면에서는 이를 갈고 있음이 틀림없다.

‘연아랑 양실장이 사이가 안 좋나?’

하기사, 회사 중역의 의전행사를 비서실이 아닌 양실장이 챙겼다는 것은 결코 좋은 그림이 아니긴 하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연락이라도 해주시지요. 마침 식사 전이시면······.”

의외로 김차장이 문이사와 연이 있는 모양인지, 부장급들을 제쳐두고 먼저 말을 걸었다.

“찾았어요.”

안 그래도 슬슬 자리를 뜨고 싶던 참이었는데, 마침 남궁대리가 검색을 끝냈다.

“그래. 가자. 눈에 띄지 말고 구석에 딱 붙어서······.”

“표과장님?”

“?”

몰래 빠져나가려는 찰나, 누군가 나를 불렀다.

“양실장님······.”

“마침 잘 됐군요. 문이사님, 궁금해하시던 표과장입니다.”

순간 문이사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궁금해했다고?

나를?

어째서?

“지금 식사하러 가시는 길이시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팀원들과 함께’ 나가는 참이었습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나는 팀원과 함께라는 단어에 살짝 강세를 주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표과장님을 제가 좀 가로채도 되겠습니까?”

“네? 아, 네.”

남궁대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폈지만, 별수 있나? 임원의 권유인데.

나는 피할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닫고, 슬쩍 카드를 남궁대리에게 건넸다.

‘나 신경 쓰지 말고 맛있는 것 먹어라.’

‘네.’

“먼저 가보겠습니다.”

남궁대리는 함송희를 이끌고 정문을 벗어났다.

“무례한 청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이 길지 않아서요.”

문이사는 이사치고는 젊고 젠틀한 이미지였다. 물론 속내를 들여다보기 전에는 속단할 수는 없겠지.

“무, 문이사님?”

자신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문이사가 나에게 식사를 권유하자, 김차장은 아주 울상이 되어 버렸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중요한 논의가 있어서, 시간을 내기는 좀 빠듯할 것 같으니, 다음에, 상무님과 함께 봅시다.”

“주, 중요한 논의를 왜 저 표과장과······.”

“지금 제가 그걸 설명해야 합니까?”

가만? 지난번에도 지금과 똑같은 상황이 있지 않았나?

무슨 역사는 반복된다. 도 아니고, 이 회사 임원들 사이의 유행어라도 되나?

“아, 알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그러면서 김차장은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향해 도끼눈을 발사했다.

윤과장 너는 뭘 흉내 내고 있냐?

“당장 차량을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양실장님 차로 이동해도······.”

“준비하겠습니다.”

연아가 눈짓을 보내자, 조금 전에 혼난 남비서가 황급히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여전히 조비서님은 무섭네요.”

“예. 저는 회장님보다도 조비서님이 무섭습니다.”

문이사와 양실장은 가볍게 웃었고 연아의 미소 위로 드리워진 그늘은 조금 더 짙어졌다.

‘뭐지? 느낌 별론데?’

연아의 반응이나 상황을 놓고 볼 때,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딱히 사내 정치에 조예가 있다고 할 수는 없는 처지지만, 뭔가 숨겨진 배경이 있다는 것쯤은 느껴진다.

‘마음에 안 드네.’

다른 것은 모르겠고, 그냥 연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원흉이라는 점에서 문이사라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양실장은 뭐지?’

그간 보여온 행보나, 사내 입지를 고려해도 양실장은 철저한 회장님의 심복이고 연아의 정체까지 알고 있다.

그런데 분위기가 묘하다.

“그럼 가시죠.”

“예.”

사내 정치 따위는 관심 없었는데, 일단 연아가 끼어 있으니, 관심이 생긴다.

‘그래 어디 한번 보자. 지금 이게 무슨 그림인지.’

일단 그림부터 파악하고 나서, 문이사는 물론 양실장에 대한 평가도 점검 좀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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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 해본 적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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