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솔직히 믿기 어렵습니다.”
“그렇습니까?”
나는 조수석에 앉은 터라, 자연스럽게 문이사와 양실장의 대화가 들렸다.
“좀비 로얄의 인수 추진을 정말로 표과장이 독단으로 처리했다고요? 솔직히 믿기 어렵군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백밀러를 통해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양실장의 얼굴이 보였다.
좀비로얄? 그거 회장님이 내게 맡긴 사업비로 투자한 인디게임의 이름이다.
하지만 인수라고?
“그리고 과장급 사원을 외부개발사 이사급 자리를 앉힌다? 설마 이것도 회장님 뜻이라고 하실 생각이십니까?”
“생각이 아니고, 사실이 그렇습니다. 왜 그렇게 조바심을 내십니까? 오늘 저녁에 회장님께 직접 여쭤보시면 되실 일이지 않습니까?”
“회장님이 대답해 주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어찌 감히 회장님의 의중을 파악하겠습니까?”
별것 아닌 대화 속에서 숨겨진 칼이 춤춘다. 안색은 평온하지만, 뒷좌석에서 흐르는 서늘한 한기가 앞좌석까지 스며들 정도.
과장급 사원을 외부개발사 이사급 자리에 앉힌다?
과장급 인사라면 나일텐데, 정작 나는 금시초문이다.
그러는 와중에 차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고급 호텔에 위치한 레스토랑.
“양식은 좋아하십니까?”
지난번에는 한식, 이번에는 양식이다. 어쩐지 이것이 양실장과 문이사의 성향 차이로 느껴진다.
“미국지사에서 오래 근무하다 보니, 입맛이 변해버렸습니다. 게다가 어차피 제 저녁은 한식일 것 같아서.”
미국지사.
맥베스 아메리카 스튜디오라는 뜻이다. 맥베스는 프로젝트 단위로 법인을 분리해 독립 스튜디어로 운영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하지만 아메리카 스튜디오를 비롯한 몇 개 주요 국가에 한해서는 단순 개발사 이상으로 독립성을 보장받고 있다고 알고 있다.
‘그곳의 이사급이라면······.’
일반적으로 독립 스튜디어 이사급이라면 본사 부장이나 실장급과 동일하지만, 아메리카 스튜디오 이사라면 본사 기준에서도 이사급 대우를 받을 것이다.
“뭐든 상관없습니다. 그렇죠?”
양실장이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다르다.’
한식과 양식이라는 차이점 때문에라도 인테리어의 느낌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꼭 그것만이 아닌, 무언가 분위기가 달랐다.
앉는 느낌이 다르기 때문일까? 한식당에 비해서 상대방과 다소간의 거리감이 느껴진다.
사적으로 이런 레스토랑을 방문했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내가 예민한 상태라서일까?
평소에는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차이.
‘계약 이후 라면 양식당도 나쁘지 않겠지만, 계약 전이나, 조금 더 친밀한 느낌을 강조하고 싶을 때는 한식당이 더 나으려나?’
양실장이 나에게 왜 처음 한식당을 소개해주었는지, 알 것 같다.
만약 내가 누군가를 제대로 대접하고 싶다면, 양식 보다는 한식이 나을 것 같다고 절로 실감하게 된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양실장과 눈이 마주쳤다.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마치 나에게 이점을 알려주고 싶었다는 느낌이 전해진다.
“여기 음식 맛이 아주 좋습니다. 예전에는 제 단골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미슐랭을 받았다지 뭡니까? 제 입맛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서,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답니다.”
문이사는 가벼운 자랑으로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표세인 과장님?”
“네.”
“눈썰미가 좋으십니다. 어떻게 내가 주목하던 좀비 로얄을 찾으셨습니까? 따로 외부에 공개된 적이 없는 프로젝트였을 텐데요.”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좀비 로얄 개발사의 박대표님과는 전 회사에서 함께 근무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 그런 루트는 생각 못 했군요.”
문이사가 손가락을 튕기자, 고요한 레스토랑 안에 경쾌한 울림이 퍼졌다.
“이제 제일 중요한 궁금증을 좀 해소해야겠습니다. 표세인 과장님 정체가 뭡니까?”
“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문이사 옆에 앉아 있던 양실장이 씨익 웃었다.
‘뭐지? 이건 또 다른 테스트인가?’
“죄송합니다만, 질문의 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이거, 실례. 딱히 무시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대체 어떻게 과장급 인사에게 사업비의 재량권과 인수 개발사의 요직까지 앉게 되었냐는 겁니다. 내 말은.”
재량권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 하지만 요직은 대체 무슨 말이지?
하지만 내가 나설 것도 없이 양실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 부분은 노코멘트입니다.”
“지금 실드치시는겁니까? 저 문상훈입니다.”
“네. 그리고 저는 양성태입니다.”
살짝 입꼬리를 일그러트린 채, 양실장을 바라보는 문이사와 그 와중에도 평온한 표정으로 물잔을 들어 입을 축이는 양성태.
딱히 누구에게 들은 것이 아니더라도, 차후 회사의 중핵이 될 인재들의 기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뭐, 양실장 고집이야 일전에 익히 겪어봤으니, 이 건은 내가 양보하죠.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다른 것은 양보 못 합니다.”
“그 건 외에는 관여할 생각 없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하시죠.”
양실장의 말에 문이사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표과장님.”
“네.”
“아마 모를 거라고 생각하시지만, 표과장님은 본의 아니게, 제게 크게 한 방 먹이신 겁니다.”
무슨 말인지 모를 때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낫다.
예상대로 문이사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좀비 로얄이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제가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저희 미국지사의 새 IP로 들일 예정이었다, 그겁니다. 이를 위해서, 제가 물밑작업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모르실 겁니다.”
설마, 박영수 대표가 그 좋은 프로토타입을 완성하고도 투자처를 못 구해서 전전긍긍하던 것이 그런 이유였나?
“이제 이해하셨습니까? 표과장님은 제게 빚 하나 지신 겁니다.”
뭐지? 온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듯한 이 사고방식은?
“원래는 웬놈이 가로챘는지, 본때를 보여줘야겠다 싶었는데, 이게 웬걸? 본사 기획팀이야. 그런데 본사 기획팀장 이름에 양성태라는 석자가 적혀 있던 거지, 제가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정작 이 모든 일을 진두지휘한 것이 표과장 당신이라고 하는데······.”
문이사는 말끝을 흘리며 한 번 더 양실장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양실장은 말한 대로 더는 나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회장님과의 내기 외에는 관여하지 않겠다 이거구나.’
“양실장이 극구 실드치고 있으니, 이 부분은 깊게 파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냥 넘길 수도 없지요.”
“그 말씀은?”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제 쪽으로 줄 서세요.”
예상치 못한 제안에 나는 눈을 껌뻑였다. 양실장은 이 시점에도 조용히 웃고 있을 뿐.
“우리 회사에는 세 파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습니까? 아,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하셨지. 어쨌든 김대표, 함전무, 이상무님을 필두로 각각의 파벌이 존재합니다.”
이건 기억해둬야겠다. 이런 정보를 물어볼 만한 인맥을 만들지 못한 탓에 이런 부분에는 어둡다.
아니, 솔직히 별로 관심이 없기도 하고.
“사업부를 관장하시는 이상무님을 필두로 제가 속한 미국지사는 근래 가장 눈에 띄는 성과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참나, 내가 이것까지 말해야 하나······.”
문이사는 잠시 목을 축이고는 다시 말했다.
“솔직히 과장급 인사에게 손을 내민 것 자체가 파격적인 일입니다. 양실장이 눈여겨본 인재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양실장은 철저히 회장님의 사람이고 회장님은 따로 파벌을 두시지 않습니다. 본인 권력 기반이 워낙 튼튼하거든.”
아무래도 회장님의 이름을 언급했기 때문일까, 문이사는 다시금 슬쩍 양실장의 안색을 살핀 후에 다시 말했다.
“양실장도 딱히 라인 형성해서 이끌어주는 타입도 아니야. 지금까지 그런 사람 한 명도 없었거든.”
“그건 맞는 말씀이십니다.”
양실장이 동의하자, 문이사의 얼굴이 활짝 폈다. 마치 자신의 의견에 양실장이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생각한 모양.
“표과장을 당신 사람으로 만들 생각이십니까?”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습니다.”
양실장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짝!
“들었죠? 얘기 끝났네. 제 쪽에 붙으세요. 후회 없으실 겁니다.”
가끔 이런 사람이 있다. 자신의 제안이 거절당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하는 사람. 자신의 작은 머리로 그린 계획이 모든 사람을 매료하고도 남으리라 확신하는 타입.
사업부의 수장 이상무를 주축으로 미국지사의 든든한 지원.
확실히 예전의 나라면 이런 강력한 줄을 잡을 기회에 가슴이 뛰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런 귀여운 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기적 같은 행운을 거머쥐지 않았나?
‘자네 게임 좋아하나?’
왜일까? 갑자기 회장님과 처음 대면했을 때의 질문이 떠올랐다.
“혹시 제안을 거절하면 불이익이 돌아옵니까?”
“내가 그렇게 옹졸한 사람은 아니지. 하지만 잘 생각해보세요. 이런 큰 기회 좀처럼 없습니다. 게다가 양실장이 기대할 정도의 인재라면 나는 결코 소홀하게 대우할 생각 없습니다. 약속드리지요. 어딜 가도 이런 제안은 받지 못하실 겁니다.”
라고 말은 하지만, 그 눈빛 속에 타오르는 집념의 불길이 엿보인다.
옹졸함을 넘어서, 체면 때문에라도 내가 거절한다면 그냥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느낌.
그 직감이 내 뇌리를 스친 순간, 잠시 잊고 있던 연아의 불쾌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뭘 어쩔건데?’
다른 것은 몰라도 이런 문제라면, 회장님이 충분히 해결해 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다.
그러니까, 내 여자 기분을 잡친, 고약한 녀석의 기분 정도는 똑같이 해줘도 되겠지.
“사양하겠습니다.”
“네? 지금 뭐라고?”
설마 단칼에 제안을 거절할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는지, 문이사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제가, 지금 잘 못들은 것 같은데······. 혹시 정말로 거절하신 겁니까?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문이사는 눈매를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앞서 말한 불이익 따위 없다는 것은 겉포장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미 문이사는 내 안에서 각이 나왔다.
“말씀하신 대로 고작 과장급인 제가, 발을 들일 자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사양해?”
“예.”
“하하,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문이사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일그러졌다. 정말로 내가 거절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표정이다.
‘나도 참 사회생활 못 한다.’
재벌집 사위? 사람 앞일을 어떻게 장담하나? 게다가 배경이 어떻든 간에 이런 거대 파벌의 핵심 인사와 척을 져서 좋을 일은 없다.
하지만 왠지 모를 직감이, 이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이유나 한번 들어볼까요?”
이유?
“하하······. 하하하. 이게 무슨 그림이지? 아무래도 내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고 있나 본데.”
문이사는 다시금 양실장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슬쩍 확인하는 것이 아닌, 노골적인 탐색.
“말씀드렸다시피, 그 부분은 노코멘트입니다.”
“양실장, 진짜 이럴 거야? 나 문상훈이라니까? 알잖아?”
“네. 그리고 저는 양성태지요. 우리 통성명은 그만할까요? 10년 가까이 알고 지냈는데, 새삼스럽네요. 마침 음식 나왔네요. 표과장님, 맛있게 드십시오.”
“양실장님도, 문이사님도 맛있게 드십시오. 감사하게 먹겠습니다.”
따라 부르기도 어려운 이름의 송아지 스테이크는 너무나도 부드러웠다.
“이, 이 사람들이······.”
왜일까? 임원급 인사가 주먹을 부르르 떨며 노려보는 와중에도, 스테이크가 너무 달다.
‘역시 이런 곳은 연아랑 오는 것이 좋겠다.’
양식은 데이트, 한식은 업무용. 오케이 입력 완료.
*
*
*
“먼저 가보겠습니다.”
“네. 살펴가십시오.”
“식사 감사히 먹었습니다.”
문이사는 먼저 볼일이 있다며 혼자 차를 타고 떠났다.
“마침 잘됐습니다. 궁금하신 것도 많으실 텐데.”
“안 그래도 답답해서 혼났습니다. 외부개발사 임원이야기는 뭡니까?”
“어렵지 않습니다. 저희가 좀비 로얄에 대한 투자 조건으로 양도받은 주식, 그에 대한 의결권을 대행할 임원석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 그러니까 그게 저랑 무슨······.”
“표과장님이 맡게 되시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전무? 정확한 직책명칭은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습니다. 요즘은 예전처럼, 대표, 전무, 상무 이런 식으로 딱딱 가르지 않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저, 전무요?”
물론 전무라고 해봤자, 고작 열 명도 안 되는 작은 영세개발사의 직함이지만······. 몇 차례 투자를 거친 후, 계획대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면······.
“앞으로 조금 바빠지실 겁니다.”
양실장은 살짝 기지개를 켰다.
“설마 이게 새로운 보상입니까?”
내 혼잣말에 양실장이 피식 웃었다.
“이런 건 보상 축에도 못 낍니다. 그보다, 오늘 아주 잘 하셨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했습니다만······.”
“제가 문이사님 손을 덥썩 잡기라도 할까 봐요?”
“뭐, 문이사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사업부와 미국지사의 연계도 탄탄하고.”
“그쪽이 회장님이 주실 보상보다 큰 걸 줄 수 있을까요?”
“훗, 그럴리가요.”
양실장은 단호하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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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를 보고 까불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