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그래픽팀이 타 파트에 비해서 야근이나 철야가 적은 이유는 그들의 업무적 특성에 있다.
보다 아티스트적이며, 다른 파트에서 재단하기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에 그들의 독립성을 보장받는 것.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그래픽팀 팀장의 역량까지 더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픽팀은 원화, 배경, UI, 모델링, 이펙트 등으로 각 파트별로 개성이 뚜렷한 탓에 실력으로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그래서 대개 그래픽팀장은 정치질의 고수인 경우가 많고, 그것이 그래픽팀의 독립성을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진다.
오팀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래픽팀의 AD(Art Director)인 안문주 차장을 제치고 팀장을 달 수 있었다.
그는 기획팀의 홍대리가 전달한 폭탄(빡센 일정)에 섣불리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았다.
“하하, 이거 한 방 먹었네? 한팀장이 표과장의 손을 들어준 이유가 이거였나? 나를 한 방 먹이겠다는 건가?”
예전부터 야근과 철야에 면피권을 지닌 그래픽팀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한팀장이었다. 왠지 그의 그림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장님쪽으로 시작을 해야겠지.”
보통은 먼저 실무자와 논의를 하는 것이 수순이겠으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기획이나, 프로그래머처럼 개발자간의 의리나 유대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특히 한팀장 같은 케케묵은 의리니, 개발자의 열정이니, 하는 것들을 강조하는 타입의 부류는 정말로 딱 질색이다.
회사에 그런 것이 어디 있나?
결국에는 각자 맡은 역할만 충실하면 그만이다.
왠지 안문주 차장을 중심으로 팀원들 반응이 고요한 것이 의아했지만, 상관없다.
팀원들을 위해, 아니 앞으로의 원만한 회사 생활을 위해서라도 선을 그어둘 필요가 있다.
‘쯧, 모처럼 잘 지낼만한 타입의 기획자라고 생각했더니······.’
애초에 클래식 빌드라면 예전 것을 그래픽 리소스를 사용하면 될 것을 왜 우리를 닦달하나?
오팀장은 그 길로 한부장을 찾았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던 안문주 차장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도야. 팀장님 출발하셨다.’
‘행선지는 모르시죠?’
‘글쎄? 어차피, 너희 팀 아니면 부장님 아니겠어?’
‘그건 그렇지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아니야. 내가 고맙지.’
홍기도 대리는 때마침 난처한 상황이었던 자신을 도와주었고, 현재 그와 약속했던 대로 팀원들의 멘탈을 다잡고 오팀장의 움직임을 전해주었다.
‘이게 뭐 하는 일인가 모르겠네.’
‘그래도, 만약 또 힘든 일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안차장님이 원활하게 업무를 보실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제 역할이니까요.’
기획의 업무 바운더리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하는 말마다 예쁜 녀석이라는 느낌.
‘그래. 고마워. 다음에 밥 한 번 살게.’
‘감사합니다. 누님.’
*
*
*
“오팀장님 움직였답니다.”
“그래? 어디로?”
“거기까지는 누님, 아니, 안차장님도 모르신대요. 하지만 여기 아니면, 부장님이겠죠?”
뭐 그렇겠지. 하지만 오팀장의 동향을 파악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알겠다. 나 다녀온다.”
홍대리가 정찰 임무에 성공했으니, 이제는 내 임무를 수행할 차례다. 이번 탱킹까지만 끝내면 아마도 그래픽팀은 한동안은 조용할 것이다.
‘본격적으로 그래픽팀 멘탈이 갈려 나가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단단히 붙들어 매야지.’
나는 탱킹에 필요한 장비를 챙기기 위해, 프로그램팀으로 향했다. 지금 나의 가장 강력한 방패인 한팀장을 장착(?)하기 위해!
“한팀장님 지금 자리에 안 계신대요?”
“어디 가셨어요?”
“글쎄요?”
표정을 보니, 정말로 모르는 눈치였다.
‘이걸 어쩐다.’
탱커는 장비빨이 생명이지 않나? 맨몸으로 오팀장의 짜증을 감당하는 것은 좋은 수가 아니다. 더군다나, 만약 하부장이 오팀장의 손을 들어주기라도 하면, 내가 먼저 뻗어버릴 수도 있다.
무엇보다, 좀비 로얄 문제로 문이사가 무슨 수작을 걸어올지 모르는 상황. 적어도 모두의 부동산 클래식 빌드는 무탈하게 진행하고 싶다.
‘그래도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애초에 한팀장 자체가 운 좋게 손에 넣은 인맥이지 않나.
‘가급적 언성 높이는 일 없이 가고 싶었는데······.’
“아아, 음. 음.”
잠시 목청을 가다듬고 부장님실로 향한다. 그때였다.
“표과장?”
“한팀장님······.”
마침 한팀장을 만났다. 그런데,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그게······. 하아, 커피 한잔할까?”
“그러시죠.”
내 최고 장비인 한팀장을 관리하는 것은 오팀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보다도 중요하다. 최악의 경우 그래픽팀과 척을 지는 한이 있어도, 프로그램팀과는 그럴 수가 없다.
그래픽팀에게는 미안하지만, 기획팀 입장에서 두 파트는 무게감이 다르다.
“내가 표과장을 알게 된 것은 얼마 안 됐는데, 개인적으로 표과장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연아에게서도 못 들어 본 말을 한팀장님께 듣게 되네?
그렇지. 진짜 매력적인 남자는 남자들 사이에서 먼저 인정받는 법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버그 픽스 먼저 치우고 싶다는 내 마음에 호응해준 것도 고맙고, 지난번 김차장이랑 트러블 생겼을 때, 내 편 들어준 것도 고맙고······.”
뭐지? 살짝 불안해지는 데?
“나 지금 문이사님께 불려갔었어.”
아! 설마 좀비 로얄만이 아니라, 이쪽으로도 치고 들어오나?
수가 얕다고 생각했는데, 맹탕은 아니구나.
“뭐 좋은 이야기라도 들으셨습니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슬쩍 운을 뗐다.
“내년에 미국지사에 자리 있다고, 생각 있냐고 하시더라.”
“좋은 이야기네요.”
원래 중국지사의 파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해외 스튜디오 중에서 미국지사가 넘버 2다. 게다가 근래 외교적 요인으로 중국 판호 문제가 불거진 상황에서는 미국지사의 힘이 나날이 커지고 있는 추세.
“그런데, 그 전에 실적이 필요한데, 클래식 빌드는 우려스럽지 않냐고 하시더라.”
“아······.”
“내가 현재 맨파워로는 버그 픽스와 매출 상향을 노릴 수 있는 최선의 방향성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대 놓고 언짢아하시더라고.”
그렇겠지. 지금 문이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아 아닐 테니까.
회사의 미래 보다 자신의 파워게임이 훨씬 중요할 테지.
“그랬더니요?”
“양실장님 이름을 언급하면서, 이건 잘 되면 기획팀 공로고, 안되면 버그에만 매달린 프로그램팀이 독박 쓸 수밖에 없는 계획이라고 하시더라고.”
틀린 말은 아니다. 윗분들 관점에서 버그 수정이란 처음부터 프로그램팀의 실수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문제투성이인 상태로도 유저들은 지갑 열기 바빴는데, 이제 와 매출이 하락하는 시점에서 신규 컨텐츠 추가 없이 버그 수정에만 열을 올린다는 것을 윗분들이 좋게 볼 턱이 없다.
애초에 양실장의 그림자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하부장 선에서 커트 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나 솔직히 미국지사 같은 거, 승진 같은 거 관심 없다.”
한팀장은 필터만 남은 담배를 비벼끄고 새 담배를 하나 더 입에 물었다.
“그런데, 정차장을 언급하더라고.”
정민규 프로그램팀 넘버 2라고 할 수 있다. 원래대로라면 팀장을 달았어야 할 연차인데, 워낙 한팀장이 오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탓에 손해를 보고 있는 인물.
“그 녀석 이름을 언급하니까, 내가 할 말이 없더라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나 같은 똥차가 앞에 떡하니 길을 막고 있으니. 내가 죽일 놈이지.”
아, 이건 뭐라고 말을 못 하겠네. 수가 너무나 교묘하다.
한팀장의 심적 부담까지 건드린 묘수라니, 솔직히 이렇게까지 치고 들어 올 줄은 몰랐는데?
“아, 나 어쩐다냐. 진짜 머리 깨지겠네.”
“한팀장님.”
“응?”
“본인만 생각하십시오. 나쁜 일 아니고, 자격은 충분하다 못해 넘치시지 않습니까. 좋은 기회 같습니다.”
알고 지낸 기간이 길지는 않지만, 처음 악수를 시작으로 계속 내 편을 들어주었지 않나. 든든한 방패 하나 잃는 셈이지만, 그렇다고 남의 앞길을 막으면서까지, 내 기획에 욕심내고픈 생각 없다.
“내가 저쪽에 붙으면? 클래식 빌드랑 버그 픽스는 포기하려고?”
“하하하, 무슨 말씀입니까. 버그 픽스 중요합니다. 애초에 기존 유저분들게 쾌적한 환경을 선물하지 못했던 것 자체가 문제였지요. 저는 양보 못 합니다.”
“그럼 싸우자고?”
“원래 우리는 그런 관계 아닙니까.”
“하하, 표과장이랑은 싸울 자신 없는데.”
“에이, 왜 그러십니까. 저야말로 무섭습니다. 멱살만은 봐주십시오.”
그래. 복잡할 것 없다. 그동안 너무 순항했다. 출항 중인 배는 가끔 순풍을 만나기도 하고 역풍을 만나기도 하는 법이다.
이런 일에 일회일비할 필요 없다. 저쪽이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새로운 방법을 준비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혹시 문이사님께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설마 싫다고 하신 것은 아니죠?”
“미쳤어? 생각해보겠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나왔지.”
“아, 그것도 딱히 좋은 그림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요?”
그저 식사 한번 했을 뿐이지만, 문이사 성격을 조금은 파악했다. 자신의 제안을 덥석 물고 꼬리를 흔들지 않는 것을 결코 달가워할 리가 없다.
“그래, 좀 탐탁지 않은 표정이셨는데, 뭐 어쩌겠어. 버그 픽스 진짜 중요한 일인데······.”
진짜 한팀장도 출세할 타입은 못 된다. 하지만 정말 좋은 개발자다.
“그래. 바쁠 텐데 괜히 붙잡았네, 먼저 내려가.”
“한팀장님은요?”
“나는 부장님께 잠시 들르려고.”
“설마 이 건에 대해서 부장님께 의견을 구하시려고요?”
“그것보다는······. 우리 개발실 운영에 관한 문젠데, 부장님은 아셔야지.”
의리 있네. 사람이 정말 진국이다. 보통 이런 일은 행여나 새나갈까 봐서 다들 꼭꼭 숨기다가 폭탄처럼 터트리기 마련인데.
“그러면 함께 가셔야겠네요.”
“어딜?”
“부장님실에요.”
“어? 나 아직 마음 못 정했어. 바로 붙어보자는 뜻 아니야.”
“저도 당장 한팀장님이랑 붙을 생각 없습니다. 저는 다른 건이에요.”
“다른건?”
“지금 오팀장이 부장님을 찾아갔거든요. 자기들 파트에 업무가 과중하다고.”
“뭐?”
“아마도, 프로그램팀은 버그 픽스나 하는데, 왜 우리들은 싹 다 새로 그리라는 거냐면서,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시위를 하고 있지 않을까요?”
잘은 모르지만, 뭐 대강 그렇지 않겠나?
“형평성? 진짜 이 그래픽새끼들은 제정신인가······. 우리가 백날 야근, 철야 밥 먹듯이 할 때, 지들은 칼퇴한 주제에.”
솔직히 칼퇴까지는 아니겠지만, 뭐 어쩌겠나, 주요 업데이트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철야 업무에 그래픽만 열외라는 것 때문에 프로그래머 중에는 그래픽을 고깝게 보는 이들이 더러 존재한다.
아니, 애초에 프로그래머들은 자신들이 고되다는 생각에 모두까기 인형이나 다름없긴 하다.
“아, 이거 진짜 열 받는데, 좋아. 안 그래도 내가 오팀장 벼르고 있었어.”
“네?”
“지금 부장님실이라고?”
“네. 아마도?”
“가자. 가서 이참에 지들도 우리 개발실의 일원이라는 것을 똑똑히 기억하게 해주자고.”
“아니, 한팀장님 문이사님 제안은요?”
만약 문이사의 제안을 한팀장이 받아들일 생각이라면, 차라리 지금 오팀장의 행동은 나쁘지 않다. 편승해서 부장님을 흔들어서, 클래식 빌드 일정을 재설계하도록 해야지 않나?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뚜껑이 열린 한팀장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승진보다도 오팀장에 대한 분노가 우선인 듯했다.
이래 주면 나야 고맙기는 한데.
“내가 정말 몇 번을 말해! 버그 픽스 정말 중요하다니까! 표과장도 알잖아?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버그 픽스를 최우선으로 밀어준 것 아니냐고.”
“버그 픽스 중요하죠. 유저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아니 막말로 하자 있는 제품을 고치지 않는 것은 도의적으로도 문제가 있죠.”
“그래! 바로 그거야! 대체 왜 그런 당연한 것을 모르는 거냐고! 누구는 버그 픽스가 재미있어서 하는 줄 아나!”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버그 픽스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다 보니,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걱정마. 내가 만약 떠나더라도 이렇게는 못떠나지. 표과장 걱정마. 내가 이 건은 확실하게 처리할게.”
-띠링!
[강화에 성공했습니다. +1 방패를 획득했습니다.]
뭐랄까, 이것이 진짜 게임이었다면 이런 연출 정도는 있지 않을까?
타이밍이 너무나 절묘하다. 문이사의 거절할 수 없는 제안과 오팀장의 견제.
이 두 가지 압박이 한팀장이 꿈꾸는 버그 없는 게임이라는 이상과 충돌하며 그의 분노를 끌어낸 것.
‘사용횟수에는 제한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쏠쏠한데?’
오팀장은 물론, 하부장의 공격에도 끄떡없을 방패가 탄생한 것.
어쩌면 내가 해야 했을 부장님 설득을 한팀장이 대신해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가자!”
“가시죠!”
나는 +1 방패(한팀장)를 앞세워 부장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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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이 깡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