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20화 (20/346)

20.

“아니, 그러니까 형평성이 안 맞지 않습니까.”

“······.”

오형빈 팀장의 열변에 하성열 부장은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해 곤궁했다.

“그리고 클래식 빌드인데 왜 그래픽을 일신해야 하냐 이 말입니다. 애초에 개발자들의 과부하를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기획이었던 거잖습니까. 그게 아니면 차라리, 신규 컨텐츠를 만들고 말지, 클래식 빌드가 매출에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실한 근거도 없지 않습니까?”

오형빈 팀장이 무서워서? 하성열 부장이 불같은 성격은 아니라고는 하나, 그렇다고 마냥 부처같이 허허 웃기만 하는 성격도 아니다.

그가 오형빈 팀장의 말을 그저 듣고만 있는 이유는, 사실 하성열 부장 역시도 클래식 빌드라는 플랜에 확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프로그래머 출신이라는 것이 한몫했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프로그램팀이 버그만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니지. 균형을 앞세워서 그래픽팀 부담을 줄여줄 겸, 프로그램팀에도 뭔가 컨텐츠 개발을 하나 더······.’

애초에 클래식 빌드에 확신이 없었던 탓에, 차츰 오형빈 팀장의 말에 설득되고 있을 때였다.

“부장님.”

성난 멧돼지 같은 몰골로 달려든 한명수 팀장이 들어왔다.

그 뒤로 요즘 사내 화제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표세인이 함께였다.

“니들은 또 왜 왔냐?”

뻔히 알면서도 하성열 부장은 너스레를 떨었다. 그와 동시에 표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재빠르게 하성열 부장과 오형빈 팀장의 안색을 가늠했다.

“지금 무슨 이야기 중이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생각 바꾸십시오.”

“무슨 이야기 중인지도 모르는데, 생각을 바꿔?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냐?”

“아, 그게······.”

흥분한 나머지 앞뒤가 안 맞는 말을 뱉고 말았다.

이것은 한명수 팀장 본인도 알고 있는 자신의 약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이 다혈질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

머리는 혼란스럽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남들 대화 중에 갑자기 들이닥쳐서 말을 끊는 것은 매너가 아니지 않습니까?”

오형빈 팀장 역시 한명수 팀장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프로그래머들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모든 프로그래머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공대 테크를 탄 인원이 대부분이다 보니,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타입들이 종종 있고 그 선봉에 있는 것이 바로 한명수 팀장이 아닌가?

‘차라리 잘 된 건지도.’

오형빈 팀장은 오히려 한명수의 등장이 호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는 등장하자마자, 혼란에 빠졌고, 이미 하성열 부장은 자신의 의견에 반쯤 넘어온 눈치.

하지만 오형빈 팀장은 한가지 간과하고 있었다. 프로그래머인 한명수 팀장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함께 온 표세인은 혓바닥 하나로 먹고사는 기획자라는 것.

그는 좋지 않은 흐름을 그냥 놔둘 생각이 없었다.

*

*

*

“부장님. 한명수 팀장의 말은 그게 아닙니다.”

우선은 선수교체. 나는 모두의 시선을 한팀장에서 내 쪽으로 전환했다.

“그럼 뭔데?”

“클래식 빌드에 대한 논의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 부분을 먼저 논의한 뒤에 클래식 빌드에 대해 논의해도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죠? 한팀장님?”

한팀장이 엉겁결에 흘린 두서없는 말을 사태의 급박함으로 재포장한다.

이것만으로도 분위기는 180도 달라진다.

“어? 어, 어.”

내 말에 한팀장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점에 클래식 빌드 보다 중요한 안건이 있다고?’

한팀장의 당황을 상황의 심각성으로 전환해버리니, 모두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 올랐다. 한팀장의 빈틈을 공략하던 오팀장 마저, 말을 멈추고 내 말을 기다릴 정도.

“뭔데?”

“이건 두 분께서 따로 논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오팀장님, 저와 함께 나가시죠.”

“그렇게 심각한 일이야?”

“아, 아니. 표과장. 너는 같이 있자. 기획팀 의견이 필요할 수도 있잖아.”

“그렇네요.”

“그래픽은 따돌리는 겁니까?”

“오팀장. 지금 그런 농담이나 할 때야? 한팀장이 심각한 상황이라잖아.”

애초에 자기들 야근하기 싫다고 징징대러 온 것이었지 않나? 마침 컨텐츠 하나 정도 더 밀어 넣고 싶었던 심정이라 고분고분 들어주었던 것에 불과했었다는 듯, 하부장의 음성에는 살짝 짜증이 배어 있었다.

‘하여튼 그래픽팀 놈들은 하나 같이······.’

하부장의 얼굴에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하부장 역시 프로그램팀 출신이지.’

게임 개발사에 뿌리 깊게 자리한 파트간의 갈등은 그의 안에도 탑재되어 있었다.

그가 신입일 때는 크런치라는 단어조차 없던 시절이 아닌가? 매일 같이 회사에서 숙식하느라 좀비꼴인 자신에 비해, 언제나 깔끔한 모습으로 출근하는 그래픽팀 직원들이 좋게 보이지는 않았을 터.

“오팀장은 나가보고.”

“아, 알겠습니다. 하지만 부장님 제가 말씀드린 것을······.”

“어허, 사람 참 걸거치네.”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는 방언까지 튀어나왔다. 오팀장은 찔끔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

“자, 말해봐. 이렇게까지 했는데, 단순히 오팀장 쫓아내려고 수작 부린 거면, 니들 아주 한딱가리 하는 거다.”

“하모요.”

하부장을 따라 한팀장도 저도 모르게 방언을 뱉었다.

“저 지금 문이사님께 불려갔다 오는 길입니다.”

“아, 그건 너무 쎄잖아.”

하부장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가뜩이나 머리 아파 죽겠는데······.’

난데없는 대규모 조직개편 때문에 본부장이나 실장 더러는 이사급이 맡아야 할, PM(Project manager) 직책을 대행하느라, 골머리를 썩이던 하부장이 아닌가?

‘지금 부장님에게 문이사의 이름은 숨이 턱 막히는 심정이겠지.’

“자세히 들어보자.”

“자세히 말할 것도 없습니다. 민규 이름까지 들먹이면서 자리 좀 비우라더군요. 미국지사에 자리 하나 있다고 합니다.”

“너 미국 가게? 가만······. 문이사님이 왜 너를 신경 써? 그렇지 너를 신경 쓸 리가 없으니, 정차장을 신경 쓰나?”

“왜 저를 신경 쓸 리가 없습니까?”

“몰라서 묻냐?”

하부장은 입맛을 다시는 한팀장을 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언제?”

“이르면 다음 달이나, 늦어도 조직개편 때에는 발령조치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어이구, 빠르네. 역시 문이사님이 손이 빨라.”

확실히 빠르다. 나도 속으로 동의했다.

버그 픽스의 핵심인 한명수 팀장이 빠질 경우, 일정은 순항을 기대하기 어렵다.

하필이면 굴러들어온 신세인지라, 다른 프로그래머들과의 변변한 유대도 없는 상황.

예전이었다면 눈앞이 캄캄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요즘은 이럴 때마다 회장님과의 내기가 떠오른다.

이 모든 상황이 게임이고, 미션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고, 힘들다기보다는 승부욕이 솟구친다.

“그래. 축하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팀장인데, 이건 축하해 마땅한 일이지.”

“저 아직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닙니다만······.”

“웃기고 있네! 이것까지 내치려고? 아니, 막말로 문이사님 말이 백번 옳지. 너 똥차야. 팀원들 앞길 다 막을 거야? 정차장도 팀장 달아야지!”

“네. 그건 그렇죠. 아무튼 생각해 보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이고, 속 터진다 정말. 됐고, 가봐. 표과장은 잠시 남고.”

“표과장은 왜요?”

한명수 팀장이 살짝 놀랐다.

“표과장이 니 새끼도 아닌데 뭘 감싸려고 들어? 니가 말대로 기획하고 논의 좀 해봐야 할 것 아냐?”

“저 아직 확실히 결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손 놓고 있다가 폭탄 터지면?”

“가보겠습니다.”

한팀장은 넙죽 인사하고 자리를 비웠다.

“자,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이 시점에 한팀장 아웃되면 잘 끌어갈 수 있겠어? 지금이라도 방향 선회해? 아니지, 그건 더 골치구나.”

과분한 직책을 대행하고 있다는 부담감과 클래식 빌드라는 불확실한 계획.

거기에 더해 한팀장이라는 강력한 맨파워까지 상실할 위기.

매출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일정이 틀어지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만약 매출도 안 나왔는데, 일정도 늦었다? 이건 감당이 안 된다.

‘일단, 오팀장의 칭얼거림은 머릿속에서 사라진 것 같군.’

일단 +1템 방패는 훌륭하게 역할을 완수했다. 이제부터는 컨트롤 승부랄까?

“어떻게 생각해? 함께 왔다는 것은 무슨 생각이 있다는 것 아냐?”

나도 이야기를 듣고 바로 한팀장을 쫓아온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기획자가 생각이 없다는 말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생각할 시간을 주고 질문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나?

생각 없는 놈이라는 말은 기획자가 절대로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이다.

일단 뭐라도 던지면서, 흐름부터 장악한다. 그러다 보면 흐름이 대화를 만들고 설득력이 생겨난다.

아니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일단 이 상황을 너무 높은 위치에서 보셔서 복잡하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높은 위치?”

“단순하게 팩트만 놓고 보면 결국 맨파워 하나입니다.”

물론 프로그램팀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한명수 팀장이 고작 맨파워 하나라고 치부하기는 어렵지만, 상황만 놓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그게 말처럼 쉽나?”

“쉽지는 않은데, 키는 부장님께서 쥐고 계십니다.”

“내가?”

“결국은 프로그램팀에 국한된 문제고, 어차피 팀장은 스크립트보다 일정 챙기고 팀원들 관리하는 것 아닙니까? 결국은 기강 문제죠.”

한번 더 하성열 부장의 안색을 살폈다. 서서히 흥분이 가라앉으며, 집중하기 시작한다.

“부장님이 전체적으로 분위기 좀 무겁게 가져가 주시죠. 특히 프로그램팀에 푸쉬를 넣어주시는 겁니다.”

“가뜩이나 혼란스러울 텐데, 거기에 압력을 넣으라고? 그러다가 터지면?”

“마음이 무거운 한팀장과 새로 팀장을 달게 되는 정차장 입장에서는 차라리 정신없이 달궈지는 편이 머리가 편할 겁니다. 그냥 눈앞의 스크립트만 보게 하는 거죠.”

“자세히 말해봐.”

“차라리, 일정을 좀 더 당겨버리죠. 듣기로 부장님이 하드하게 쥐어짜시는 타입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인기도 좋으신 편이고요. 그러니 지금은 그 점을 이용하죠.”

“흠, 흠. 그래? 하긴 내가 인기가 없는 편은 아니지. 그래서 어떻게 하자고?”

표정이 조금 더 풀어졌다. 마치 게임 중, 보스의 약점이 드러나는 것을 발견했을 때처럼, 지금이 바로 극딜 타이밍이다!

“일정 당기고 압력 넣으시다 보면, 사소한 문제가 발생해도, 결국 여분의 일정이 남았으니, 대책을 마련하기도 쉬울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해냈다? 그럼 크게 칭찬해주시는 거죠. 아시지 않습니까? 백번 칭찬하다, 한번 호통치는 상사보다 백번 호통 끝에 한 번 칭찬하는 상사가 더 애틋하게 기억되는 법이 아닙니까?”

“그렇지! 표과장이 뭘 좀 아네. 나 때는 말이야. 칭찬이라는 개념이 없었어요. 일하라고 월급 받는 건데, 칭찬이 웬 말이야. 그러다 보니 칭찬 한 번이 포상이었다고.”

라떼 나왔다. 이건 게임 끝났다.

“시대가 변해도 사람은 안 변합니다. 다행히도 하부장님 인덕이 상당하시니, 시도라도 해 볼 수 있는 방법이죠.”

“그런데 정말 클래식 빌드 자신 있어?”

자신 있냐고? 마법 주문을 발동할 차례인가?

“믿어 주십시오. 무엇 보다. 양실장님이 안 될 일을 벌이시는 타입은 아니시지 않습니까?”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양실장의 과거사를 내가 어찌 알까?

나는 그저 주문 버튼을 누를 뿐!

‘오해가 풀리기 전까지는 이용해 먹어야지.’

하지만 이미 하부장은 나와 양실장 사이에 남모를 끈끈한 연이 있다고 생각하는 상황. 이걸 이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좋아. 이번 시즌은 표과장한테 올인해 본다.”

내심은 양실장에게 거는 것이면서도 굳이 내 이름을 언급하는 하성열 부장의 표정은 밝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마침 가려운 곳을 긁어 준 것이다.

분수에 맞지 않는 PM 대행 때문에 부장의 권위보다는 불똥이라도 튀지 않을까, 위아래로 눈치 살피느라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였다.

그런데 명분이 생겼다.

‘그래.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지. 다 우리 개발실을 위해서야.’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울컥울컥 차오른다.

‘그리고 이참에 그래픽도 한번 조져야지. 이것들이 언제까지······. 뭐 지들은 우리 개발실 아니야? 독립 스튜디오야?’

장급 논의도 거치지 않고 다이렉트로 자신을 찾아온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평소라면 자신을 의지한다고 생각하며 좋아했던 부분인데, 오늘따라 눈에 걸린다.

‘아주 한명수만 지랄쟁인줄 알지? 내가 팀장일 때는 새카맣게 잊었지?’

그 시절 하루가 멀다고 서로 멱살 잡고 고성을 내지르는 것이 개발과정 일부였더랬다.

남고, 공대 테크를 거쳐온 거친 올드스쿨 프로그래머의 피가 끓는다.

“좋아. 대신 내가 액셀 밟으면 너는 보조 맞춰. 할 수 있지?”

“물론입니다.”

순간 내 머릿속에 묘한 이명이 들리는 것 같닸다.

띠링!

+2검을 획득하셨습니다.

+1 방패(한팀장) 대신 +2 검(하부장)을 획득했다?

‘와, 이거 딜 좀 들어가겠는데?’

게이머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진리!

템빨이 깡패다!

나는 새로운 아이템을 얻었다는 흥분과 함께, +2 검(하부장)과 함께 던전(개발실)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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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그런 청춘 드라마 같은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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