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23화 (23/346)

23.

“회장님 안에 계십니까?”

“예.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상훈 이사는 회장의 전담 비서인 조연아를 슬쩍 내려 보고는 특유의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조연아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노리는 타고난 야심가.

타고난 자신감이 지나쳐, 지난번 귀국 때처럼 마이페이스로 행동하는 경우가 왕왕 있지만, 그럼에도 연거푸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며, 캐릭터를 굳혀버렸다.

‘저런 사람을 컨트롤하는 법도 배워야겠지.’

조연아는 짧은 한숨과 함께 내선 버튼을 눌렀다.

“회장님. 문이사가 왔습니다.”

“어. 들어 오라고 해.”

평소라면 통화 종료를 알리는 붉은 불이 들어오기 마련이지만, 오늘은 녹색불이 켜져 있다.

“들어가시죠.”

문상훈 이사는 대답 없이 거침없이 회장실로 향했고, 조연아는 이어폰을 꺼내 귀에 걸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려나?’

과거 왕들이 정무에 임함에 있어, 왕자를 곁에 두고 지켜보게 했듯이, 조양길 회장 역시 자신을 비서 자리에 앉히고 가르침을 내리고 있다.

후계자 수업.

오늘도 그런 것이다. 연아는 하던 일을 멈추고 회장실 안에서의 대화에 집중했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보고는 받았다. 잘 하고 있네.”

“감사합니다.”

누구나 두려워하는 조양길 회장 앞에서도 문상훈 이사는 주눅 들지 않았다. 이러한 타고난 기개를 높이 산 조양길은 한때, 문상훈을 적극 지원했다.

덕분에, 그는 여러 주요 프로젝트를 맡았고,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사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모두가 조양길 회장의 안목에 감탄했지만, 정작 조양길도 문상훈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만한 자들의 세계.

어느 업계나 정상급 레벨에 도달한 이들은 저마다의 자부심을 품고 있기 마련.

“그런데, 이번 귀국은 비서팀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들어 왔다면서?”

몰래 들어왔다. 라는 단어에 문상훈의 눈썹이 살짝 떨렸다.

아무리 조양길 회장이라고는 하지만 천하의 문상훈이를 작게 표현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저 양실장과 먼저 나눌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무슨 얘기. 좀비 로얄?”

역시나 모두 알고 있다. 이 능구렁이 같은 영감은 대체로 모르는 것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양성태의 공로.

‘내시 같은 놈.’

대체로 비서라고 한다면, 완성된 인물들이 즐비한 마굴 같은 곳으로 여겨진다.

한국 최대 기업인 산성 그룹의 사장단만해도 비서실 출신들이 그득하다.

하지만 IT업계는 아직도 신생주자라고 할 수 있는 포지션이기 때문일까? 개발자 출신들에 비해 비서실 출신들의 입지는 아직까지 넓지 않다.

그렇기에 매번 자신과 비교되는 양성태 실장에 대한 분노를 숨길 수가 없다.

“알고 계시니, 따로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저 미국지사 사업부의 계획에 작은 차질이 빚어졌는데, 거기에 양실장 이름이 튀어나와서, 확인차 먼저 만난 것뿐입니다.”

‘양실장이 아들도 아닌데, 더럽게 감싸고 도는군.’

문상훈 이사는 언제나 조양길 회장과 양성태 실장의 관계가 고까웠다.

“미국지사에 영상제작 외주건에 대해서 자네를 거치라고 따로 지시했다면서?”

벌써 이것까지 알고 있다고? 이 대목에서는 문상훈 이사라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임스는 분명 들어온 요청이 없다고 했는데······.’

그 철두철미한 녀석이 실수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둘.

하나는 자신이 여기까지 오는 짧은 시간 안에 요청서가 반려되었을 가능성.

다른 하나는 양성태 실장의 정보수집 능력이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었다는 것.

“왜 대답이 없지?”

“죄송합니다. 별것 아닌 일이라서 잠시 떠올리는 것이 늦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지시했습니다. 영상제작실의 업무가 과중해서 업무 프로세스를 조금 손 볼까 하여······.”

“그래? 양실장 생각은 다른 것 같던데?”

조양길 회장이 직접 양성태 실장을 언급하자, 문상훈 이사의 입가가 묘하게 씰룩거렸다.

평소처럼 이를 갈고 싶지만, 감히 조양길 회장 앞에서 그럴 수는 없는 것 아니겠나?

“그래서 닭 쫓던 개가 된 심정이 어떤가? 지붕 위로 올라갈 방법은 없을 텐데, 다른 수를 찾아내야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양성태 실장의 이름을 들먹이며 두 사람을 저울질한다.

도발과 부추김의 절묘한 조화.

알면서도 당하는데,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이것이 조양길 스타일의 독려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언제나 불쾌하다는 기분을 감추기 어렵다.

“이미 준비는 해두었습니다. 저는 그저 조금 더 효율적으로 접근하려고 프로세스를 다지던 상황에, 양실장이 먼저 손을 뻗은 것뿐입니다. 어쨌든 저는 미국에 발이 묶인 상황이니까요.”

내가 양성태 보다 못나서 늦은 것이 아니다. 내가 먼저 밥상을 차리고 있는데, 양성태가 얌체같이 냉큼 수저를 들이민 것에 불과하다.

문상훈 이사는 이 점을 어필하려 했고, 그 모습에 조양길 회장의 입가에는 느슨한 미소가 걸렸다.

‘아직 솜털이 덜 지워졌어. 그래도 이 정도 귀여움이 남아 있으니, 키우는 맛이 있지.’

라는 생각을 하며 조양길 회장은 톡톡 책상을 두드렸다.

“미국지사가 발판이 아니라, 발목을 잡는다고? 그러면 안 되지.”

순간 문상훈은 아차했다. 하지만 이미 배는 떠난 상황.

“당분간 본사에서 지내라고, 그간 발목이 붙잡혀서, 지체되었던 사업들도 직접 컨트롤하면 되겠네.”

“현시점에 제가 미국지사를 오래 비우는 것은 상책이 아닐 듯합니다.”

뒤늦게 뱃머리를 돌려보려 애써보지만.

“마침 곧 있으면 체육대회 아닌가? 그거까지 보고가. 이번 체육대회는 개인적으로 좀 기대되는 이벤트가 있거든?”

고작 체육대회 때문에 자신을 붙잡는다?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이 능구렁이라면 별것 아닌 체육대회라 할지라도 무슨 꿍꿍이를 숨겨 놨을지 모른다.

현재 미국지사는 자신과 이대표가 박빙의 영향력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자리를 오래 비운다면?

‘제임스가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오른팔의 능력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거절해도 되지만, 분명 후회할 거야.”

“······알겠습니다.”

아직은 능구렁이를 상대로 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방법이 없다.

조금 더 힘을 키워야 한다.

문상훈은 씰룩이는 입가를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좋아. 차라리 잘됐다. 여기 있는 사이에 양실장과 표과장 두 놈을 지근지근 밟아주지.’

위기를 기회로! 생각을 바꾸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좋아. 재무팀을 이용해서, 놈들의 목줄을 틀어쥐자.’

어차피 외부개발 프로젝트다. 재무팀은 원래 이런 외부 프로젝트에 인색한 법!

‘기대해라. 나 문상훈이가 어떤 남자인지 가르쳐주마.’

문상훈은 자신의 아이디어에 쾌재를 불렀다.

*

*

*

“다들 오늘 할 일들 많나?”

“왜요?”

“특별히 바쁘지는 않습니다.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하부장의 샤우팅 이후, 전달하는 기획서마다 군소리 없이 열일하는 상황.

한가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다른 파트처럼 미친 듯이 바쁜 상황은 아니다.

애초에 버그 픽스에 관한 사항은 사전에 전달했으니, 남은 것은 그래픽 컨셉 기획 정도인데, 이 부분은 의외로 홍대리가 안차장과 잘 협의해서 기획서를 최소화한 상태로 진행 중이다.

‘하여튼 잔머리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자신이 굴러들어온 돌이라는 것과 안차장이 모두의 부동산의 원년 멤버라는 것을 이유로, 그래픽팀의 자율성을 보장하겠다며, 자잘한 사안은 기획서 없이 그래픽팀 내에서 자체적으로 진행하기로 합의한 것.

‘뭐 좋아. 한가하면 다른 일 시키면 그만이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일반적으로 기획서 없이 말빨로 일 처리 하는 기획자들은 미움받기에 십상이지만, 때로는 이게 일을 잘하는 거다.

그래픽팀이 자체적으로 좋은 퀄리티를 완성해준다면, 홍대리는 그 기회비용을 다른 일에 투자할 수 있다.

‘문제는 이놈이 그 기회비용을 다른 곳에 투자할 의지가 없어서 탈이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에게는 홍대리에게 던져줄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현재 나는 기획팀장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탓에 예전처럼 내가 기획서 작성에만 몰두할 수는 없는 상황.

안 그래도 기존의 내가 맡아야 할 일들을 차츰 홍대리와 남궁대리에게 이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것들을 논할 생각은 없다.

“이건 일단은 대외비인데, 현재 우리 기획팀에는 히든 프로젝트가 있다.”

“히든 프로젝트요?”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말을 기다렸다.

“지금까지는 나와 양실장님, 둘만의 비밀이었지만, 이제 너희도 알아야 하니 공유한다. 우리는 현재 좀비 로얄이라는 게임에 투자했고 앞으로 기존 업무 외에 그 게임에 대한 지원을 병행할 예정이다.”

“크큭. 그때 말씀하신 것이 이거였군요?”

남궁대리는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고.

“아시죠? 저 지금 그래픽팀 컨트롤하느라고 손발 다 묶였어요.”

급한 기획서 한 장 없는 홍대리는 엄살을 부렸다.

“일단 보여줄게.”

나는 준비한 영상을 출력했다.

“베이스는 컴벳그라운드 느낌이네.”

“좀비······. 이건 언제나 핫하지.”

“몇 가지 흥미로운 시스템이 있네요. 한번 스크립트 뜯어 보고 싶네.”

남궁대리, 홍대리 그리고 함송희까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한참 게임 영상을 분석했다.

“좋네요. 이거 먹히겠는데요?”

“한국 시장도 그렇지만, 오히려 해외반응이 기대되는데요?”

“이거 스크립트 한번 볼 수 있어요?”

질문의 홍수가 터졌고 나는 꼼꼼하게 답해주었다.

“좀비 수가 늘어날수록 빨라지고 강해지는 부분이 키 포인트네요. 누구 아이디어인지는 몰라도 기발해요. 무엇보다 시스템과의 연계가 좋다는 점에서 탁월해요.”

남궁대리의 찬사에 살짝 어깨가 으쓱해진다. 순간적으로 떠올린 아이디어였지만, 내 생각에도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라는 느낌이다.

“이거 컨트롤 할 수 있겠어?”

“네?”

뭘 놀라고 그러나.

“이걸 제가 컨트롤해요?”

남궁대리는 의외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마케팅이나 사업부쪽 일에 신경을 써야 할 것 같거든. 나도 전문가는 아니지만, 박대표는 그 부분은 진짜 맹탕이거든.”

아무리 문이사의 뒷공작이 있었다고는 해도, 이렇게 좋은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놓고 투자자를 못 구했다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하지만 제가 이걸 받으면······.”

남궁대리는 홍대리의 눈치를 살폈다. 입사 동기인데다가, 나와 오랜 시간 함께한 홍대리를 제치고 자신이 이렇게 먹음직한 프로젝트를 잡는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 모양.

‘둘이 안 친하다더니, 얘가 아직 홍기도 캐릭터를 파악 못 했구나.’

절로 웃음이 난다.

“홍대리 관심있냐?”

“이거 개발은 외부 스튜디오에서 개발하는 거죠?”

“어.”

“야근 마이너스. 거기에 여자 많아요?”

“한 명도 없더라.”

원래 여성 개발자가 드물다. 그래픽팀이 아닌 기획팀에는 더더욱.

“전 패스. 지난번 차르봄바 제가 담당했으니, 거부권 3회 정도는 가능하죠?”

“2회로 하자.”

“지금 하나 쓰겠음.”

“딜.”

애초에 외부개발사 컨트롤은 야근과 외근이 강제된다.

그런 일을 홍대리가 받아들일 턱이 있나?

“저, 저도 좀 관심이 있는데······. 좀비로 자기장을 대체하는 부분의 스크립트를 좀 보고 싶네요.”

아무래도 새로운 시스템이 많이 접목된 게임이라서인지, 함송희도 관심이 가는 모양.

“함송희씨는 어차피 남궁대리와 홍대리, 양쪽을 백업해야 하니까, 걱정할 것 없어. 그리고 스크립트라면, 보내달라고 할 테니, 여유 있을 때 살펴봐.”

“감사합니다!”

새로운 큰 프로젝트를 컨트롤 하게 되어 살짝 상기된 얼굴의 남궁대리.

귀찮은 일을 피해냈다고 안도하는 홍대리.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는 함송희까지.

모두가 기뻐하는 좋은 회의였다. 그런데, 누군가 회의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표과장?”

“누구시죠?”

“나 재무팀의 윤정훈 부장.”

“아, 네.”

재무팀이 왜 나를 찾아왔지?

듣도 보도 못한 상황에 나를 포함한 기획팀 전원이 눈만 껌뻑일 뿐.

그러나 윤 부장은 태연하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번 신규 프로젝트 건으로 사업비 추가 지원하라는 말을 듣고 왔어. 아니, 지시가 내려온 지 며칠이 지나도록 왜 나를 안 찾아와?”

재무팀이 먼저 돈을 주겠다고 찾아와?

가만, 설마 양실장이 지난번에 말한 판을 키운다는 것이 이거구나?

“일단 초기 금액으로 얼마나 필요해? 얼마면 되겠냐?”

얼마나 줄 수 있는데요?

나 돈 필요해요.

‘지금 나 보물 상자를 발견한 건가?’

순간, 재무부장의 얼굴이 금빛 찬란한 보물상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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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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