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25화 (25/346)

25.

요즘 들어 조양길 회장은 매일이 즐거웠다.

오랜만에 자신의 취미인 TRPG 마스터링을 시작한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도 표세인에 관한 보고를 들을 때가 더욱 즐거웠다.

작년 매출 이상의 성과를 내라는 미션은 딱히 크게 기대하고 내린 것이 아니었다.

어디 어떻게 하나 보자.

그저 아끼는 딸과 결혼할 남자라는 생각에 조금 장난을 친 것에 가까웠던 것.

하지만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모두의 부동산의 클래식 빌드를 개발하고 사업비로 전달한 돈으로 좀비 로얄을 인수해버렸다.

이놈 재미있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인지, 인디 게임 주제에 레이버 검색 순위 1위를 차지하는 묘기까지 부린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도 오늘 양성태 실장이 전달한 내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말로 확신해?”

“예.”

“한번 시작하면, 도중에 멈출 수 없다는 것은 알지?”

“알고 있습니다.”

흔들림 없는 양성태 실장의 표정을 말없이 지켜보던 조양길 회장은 느릿하게 턱을 쓰다듬었다.

이것은 그가 고민에 빠졌을 때, 으레 나오는 습관.

“정말 자신 있나?”

“그렇습니다.”

“함전무와 이상무는 쉬운 상대가 아니야.”

함성준 전무와 이걸영 상무는 조양길 회장의 대학 후배들로 그와 함께 대학 시절 인디게임부터 지금까지 한배를 타온 창업공신들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사내 양대 파벌의 수장이 되었고, 그들의 경쟁 구도는 지금까지 회사에 적지 않은 활력과 긴장감을 주었다.

경쟁은 중요하다.

조양길 회장이 스스로 파벌을 만들지 않은 것은 막대한 사내 지분을 통한 절대왕권이 확립되어 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두 공신이 힘겨루기를 통한 실적 경쟁에 임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점차 혁신과 도전보다는 안정을 택하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이미 게임 시장의 생태계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 상황.

조양길 회장은 과거 이점을 간파하고 양성태 실장을 키워서 제3의 파벌을 만들 계획을 세웠었다.

정정(正鼎)이라는 단어가 있다.

올바른 솥이라는 뜻으로 3개의 다리는 적절한 견제와 균형을 상징한다.

하지만 당시 상황상, 양성태 실장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무리라며, 조양길 회장의 제안을 거절했고, 조양길 회장 역시 동의했었다.

이후, 국내 게임 업계의 위상이 하락하며 이 일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한 채로,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이제와 양성태 실장이 전에 없던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네. 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해보겠다고?”

“예.”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

상황이 나아진 것 없고, 혼란한 상황을 틈타, 함전무와 이상무는 나날이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각자 본사에 한 파트씩을 틀어 쥔 것도 모자라, 각 파벌의 에이스들은 중국 지사와 미국 지사를 장악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양성태가 제3의 파벌로 대두된다?

“묻지 않을 수가 없군. 어째서지? 뭐가 네 생각을 바꿨지?”

“몰라서 물으십니까?”

오히려 양성태 실장이 의외라는 듯이 조양길 회장을 바라보았다.

“설마 싶은 부분은 있는데······. 그래도 네 입으로 직접 들어야겠어. 이 설마는 ‘혹시?’ 라는 느낌이 아니라, ‘이게 가능한가?’ 하는 느낌이거든.”

억지로 짐작해보자면, 어렴풋이 짚이는 것은 있다. 하지만 설마 정말로?

“표세인 과장.”

“아!”

조양길 회장은 저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뱉고 말았다.

“아주 그놈에게 단단히 빠졌군. 보통 반대가 되어야 하지 않아?”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양성태 정도의 남자가, 자기보다 한참 아래의 과장급 인물에게 홀려서, 험난한 전쟁터에 뛰어들 용기를 갖게 되었다?

직접 듣지 않았다면 결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김대표를 붙여준다고 했을 때도 거절하더니, 고작 과장 하나 주워서 뭘 어쩌려고?”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뭘?”

“표세인 과장, 정말로 고작 과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직급이야, 과장 맞지. 하지만 조양길 회장은 더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혹시 표세인과 조연아의 관계가 탄로 난 것은 아닐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양성태는 그런 음흉한 속내를 품는 남자가 아니다.

더군다나, 애초에 몇 없는 조연아의 신분을 알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이면서도, 언제나 일정 거리를 유지하던 양성태였다.

만약 표세인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되었다면, 십중팔구 되려 거리를 벌렸을 터.

“김대표 보다 표세인 그놈이 낫다?”

“단순히 이해득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양성태 실장은 철저한 계산 끝에 행동하는 남자다. 그런데, 이해득실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럼?”

“표세인 과장은······. 음, 이걸 뭐라고 설명해 드려야 할지.”

천하의 양성태가 말문이 막히다니, 이건 또 새로운 모습이다.

조양길 회장은 넌지시 미소지으며 양성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재미있습니다.”

“재미있다?”

“매력적이기도 하고요.”

“묻지 않을 수가 없군. 대체 그 녀석의 매력이 뭐지?”

이건 단순히 회장으로서의 질문만은 아니었다. 예비 사위를 향한 예비 장인의 호기심.

아버지의 눈으로 봐도 도도하기 짝이 없는 딸의 마음을 앗아간 표세인이 아니던가?

재벌 2세나 연예인 같은 연아에게 흑심을 품은 겉만 번지르르한 놈팽이들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팔불출이라 욕먹을까 싶어,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딸이라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조연아는 출중한 미모와 모나지 않은 성격을 가진 100점짜리 신붓감이다.

‘야망이 문제라면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그거야 재벌집 딸로 태어난 그녀가 짊어져야 할 숙명과도 같은 것이니, 딱히 흠이라고 볼 수도 없다.

“출중한 창의성과 추진력. 거기에 주변을 매료하고 장악하는 능력. 뭐하나 빠지는 것이 없더군요.”

“그것이 매력이다? 하하하.”

양실장의 말에 조양길 회장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놈이 그 정도다?”

“그걸 알고 저를 붙이신 것 아니었습니까?”

“거기까지 꿰고 있지는 않았지.”

“그렇습니까?”

양성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했다. 어차피 그는 이미 표세인과 손을 잡고 함전무와 이상무라는 쌍두마차에 정면 승부를 걸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실수 같은데?”

짙은 미소와 함께 조양길은 마지막으로 양성태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여전히 일말의 동요도 없는 모습.

“실수는 회장님께서 하신 것 같습니다.”

“내 실수다?”

“저를 표과장에게 보내면 안 되셨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단순히 양대파벌의 견제 세력 정도를 목표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출사표 한번 거창하군.”

창업 공신들에 비해, 스타트라인도, 성과도, 인맥도 무엇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상황임에도 양성태의 의지는 확고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퍽 재미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이 또 있어?”

“처음에는 제가 표과장의 러닝메이트라고만 생각했는데, 반대로 보자면 결국 그 역시 저의 러닝메이트인 셈 아니겠습니까?”

“급이 안 맞지.”

“노력할 생각입니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지 않나!

어째서 노력이 필요한 대상이 양성태란 말인가?

하지만 양성태는 진심으로 자신이 노력해야만, 표세인과 보조를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체육대회가 더 재미있어지겠군.”

“체육대회요?”

“판이 점점 커지는데?”

“기쁘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아마 이 기쁨 역시 표세인 덕분이리라, 양성태는 생각했다.

자신이 조양길 회장을 보필하는 동안, 둘은 합이 잘 맞는 관계였지만, 조양길 회장의 즐거움을 끌어내는 재주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조양길 회장의 얼굴을 보라.

인수합병 이후,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만에 대체 몇 번이나 조양길 회장의 흥미를 자극하고 그를 기쁘게 만드는가?

“좋아. 접수했어.”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미 한번 거절했던 제안이니, 순순히 지원해 줄 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해.”

“미션을 주십시오. 해결하겠습니다.”

이제는 양성태가 직접 조양길 회장에게 딜을 건다.

이전까지는 결코 있을 수 없던 일!

“그렇게 자신 있어?”

“어차피, 표과장과의 게임과 연결되어있을 거라 예상합니다. 저야 묻어가는 처지니까요. 별 부담 없습니다.”

“묻어가? 하하하하!”

결국,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 올 것처럼 로봇 같던 녀석이······. 정말이지. 단단히 홀렸군.”

“그렇습니다.”

“좋아, 좋아. 일단 다가오는 체육대회, 우승해.”

“우승입니까?”

체육대회 우승!

업무와는 전혀 관계없는 뜬금없는 내용에 양성태 조차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체육대회라면 상황을 낙관하기 어렵다.

“거기다, 하나 더.”

하나 더. 점점 쉽지 않은 요구다.

“표세인, 그놈이 MVP를 따내야 해.”

“체대 출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애초에 그 친구 전공이 무엇인지는 알고 계십니까?”

“태권도 아니었나?”

체육대회의 메인은 주로 구기 종목이었다. 체대 출신이라고 해서, 구기 종목에 능하다는 보장은 없다.

“각오는 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예상을 뛰어넘으시는군요.”

“나 아직 개발자야. 아이디어 쌩쌩해!”

라고 말하며, 조양길 회장은 자신이 작성 중이던 TRPG 시나리오를 흔들어 보였다.

대기업 회장님이라는 소리보다도 개발자 조양길로 불리는 것을 기꺼워하는 남자.

그것이 조양길 회장의 정체성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장난기가 발동한 덕분에 시작한 일은 하나 같이 놀라운 성과를 이룬다. 당장 표세인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고분고분하네?”

“그럼요.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는 묻어 가겠다고, 표세인 과장이 잘 해결해 줄 겁니다. 2인자는 이래서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2인자? 너 미쳤냐?”

2인자라는 말에는 조양길 회장조차 놀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당장은 무리지만······. 일단은 비밀로 부탁 드립니다. 비밀 엄수 패널티는 아시죠?”

양성태는 검지로 입을 가리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

*

*

-이번에 제가 소개해 드릴 게임은 국산 게임의 또 다른 미래입니다!

-컴벳 그라운드가 고인물들의 잔치가 되어버려서 괴로우시다고요? 여러분들을 이제 우리가 뉴비에서 새로운 고인물이 될 찬스가 왔습니다!

-좀비! 좀비! 좀비 들어간 배틀 로얄이라니, 믿어지십니까?

레이버 검색 순위의 여파일까? 국내 정상급 미튜버까지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앞다퉈 좀비로얄에 대한 리뷰를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흐름을 타고, 드디어 해외의 거물 유튜버들까지 움직이기 시작했다.

-This game is special!!!!!(이 게임은 특별하다!)

-Thousands of tactics poped up in my head already!(이미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천 가지의 전략!)

-Zombie! Zombie! and Zombie!(좀비! 좀비! 그리고 좀비!)

-Survival!(서바이벌!)

-Shut up and take my money!(닥치고 내 돈 가져가!)

해외의 반응은 국내 이상으로 뜨거웠다. 단순 FPS보다 전략에 목마른 골수 유저들과 좀비 팬덤이 기묘한 캐미스트리를 일으키며, 각종 레딧과 커뮤니티를 달궜다.

‘이제 판이 깔렸네.’

나는 이제 준비가 됐음을 깨달았고 미리 준비해둔, 펀딩사이트 페이지를 업로드 했다.

-좀비 로얄 펀딩 시작!

이미 수조를 넘긴 크라우드 펀딩 시장의 규모, 게다가 게임은 크라우드 펀딩 사업의 최첨병이나 다름없는 분야였다.

기대감은 이미 충분하다. 입질 정도가 아니라, 그물 한가득, 아니, 어장 수준으로 물고기가 모여들었다.

“문제없어.”

계획 이상의 반응이었지만, 그것과 크라우드 펀딩은 또 다른 문제다.

나는 살짝 긴장한 상태로 모니터를 주시했다.

“긴장되시죠?”

“그렇지. 이게 본게임인데, 뭐 홍보 효과만으로도 충분한 성과기는 한데······.”

“그렇죠. 너무 욕심부리면 안 되죠.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죠.”

“파이팅!”

팀원들도 내 쪽에 바싹 붙어 한마디씩 보탰다.

그리고 드디어 내가 업로드한 페이지가 노출된 순간.

-촤라라락!

“어?”

“어?”

“어?”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후원금 카운터가 무슨 슬롯머신처럼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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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을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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