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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28화 (28/346)

28.

늘 그렇듯이 사내 체육대회는 몇몇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행사다.

자신이 행사를 베풀었다고 생각하는 높으신 분들과 운동에 자신이 있는 젊은 직원들.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귀찮은 행사에 불과하다.

입사 2년 차까지는 나도 즐거웠다. 하지만 점차 업무에 시달리면서 귀한 주말을 사내 행사 때문에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에 점차 의욕이 사라졌다.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 슬쩍 발을 빼고 남들의 활약을 지켜보며 무성의한 박수를 보내는 것이 나의 역할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차장.’

예전 회사에서는 송부장의 견제로 반쯤 포기했던 직책.

그런데 그 기회가 눈앞에 찾아왔다.

평소에도 짬이 나면 운동을 계속해왔더랬다.

시간이 남아도는 후배 놈들을 불러서, 풋살장에서 몸도 풀고 예전의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다소 하드한 트레이닝을 병행했다.

체대 출신의 장점 중에 하나라고 한다면, 시간이 남아도는 후배들이 많다는 것과 한 놈만 연락해도, 그 밑으로 후배들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난다는 것.

운동선수는 먹는 것도 훈련의 일환이기에 맛있는 음식을 양껏 먹여준다고 미끼를 흔들면, 손쉽게 필요한 인원수를 채울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몸을 만드는 사이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

*

*

체육대회 당일.

나는 운동복을 챙겨입고 집을 나섰다.

체육대회가 열리는 장소는 여의도 공원이었다.

“오셨습니까?”

웬일로 홍켓몬이 나보다 일찍 도착해있었다.

“너는 웬일로 또 일찍 왔냐? 설마 여기로 콘돔 배송시켰냐?”

“하하, 저야, 집이 코앞이잖아요.”

“너 이 근처 살아?”

“저기요!”

홍대리가 가리킨 곳은 한눈에도 가격이 어마어마할 것 같은 높게 솟은 한강뷰 아파트였다.

“너 금수저였냐?”

잘 사는 집 자식인 것은 알았는데, 설마 이 정도라고는 생각 못 했다.

“음······. 제가 뭐라고 해야, 덜 재수 없을까요? 하하.”

그 말이 진짜 재수 없게 들리거든?

이놈은 본능적으로 재수 없게 보이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예전의 나라면 질투가 났을 법한 상황임에도,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 그냥 아무 감흥이 없다.

“저런 집은 얼마쯤 하냐?”

나도 얼마 후면 신혼집을 알아봐야 할 테니, 집에는 관심이 간다.

“글쎄요? 관심이 없어서.”

그래,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너희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시냐?”

“그냥 평범하게 회사를 운영하세요.”

저기요. 평범한 사람은 회사를 운영하지 않아요. 그때였다.

“오셨어요. 과장님.”

남궁대리와 함송희도 한발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남궁대리의 복장이 심상치가 않다.

하늘거리는 원피스에, 끈으로 된 스트랩 샌들을 신고 있지 않나?

평소에는 사무 정장만 입던 친구가, 이렇게 입으니 사람이 달라 보인다.

“오늘 체육대회야. 끝나고 소개팅 가?”

“체육대회라서 이렇게 입은 거야.”

“뭐?”

“건들지 말라고.”

그러니까, 자신은 체육대회에 참가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어필하기 위해 이런 차림을 했다는 건가?

얘도 가끔 보면 확실히 깨는 캐릭터다. 진짜로 홍대리 기수에 무슨 문제가 있던 걸까?

“체육대회는 자율참가잖아요.”

“그렇지.”

사실 나도 작년까지는 유령이나 마찬가지였디. 홍대리와 함께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며 은신술을 펼치기에 바빴다.

특히나 업무보다 체육대회 같은 행사에 더욱 목숨을 거는 송부장은 자신이 아끼는 프로그램팀의 우승을 위해, 나의 체육대회 출전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덕분에 그동안 나는 느긋하게 관중석을 데울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남궁대리의 말에 동의한다. 원하는 사람끼리 즐기면 그만인 거다.

그리고 나는 오늘 제대로 즐겨볼 생각이다.

“얘가 뭘 모르네, 적어도 복장 정도는 제대로 챙겨 입어줘야. 은신술이 더 쉽거든? 너 그러다 밉보인다.”

그래. 그래야 우리 홍켓몬이지. 간만에 트레이너로서 홍켓몬을 제대로 트레이닝 시켜줘야겠다.

“그래도, 함송희씨는 잘 챙겨 입었네. 뭐 신청했어?”

“2인3각이요.”

평소에도 목소리에 힘이 없는 편인데, 오늘따라 더 목소리가 기어들어 간다.

다크 서클까지 보이고······.

“잠 제대로 못 잤어?”

“아니요. 안 잤어요.”

“뭐?”

“어제 뭐 좀 하느라고······.”

“게임?”

“게임은 게임이죠.”

함송희는 그렇게 말하며 살짝 기지개를 켯다.

“표과장!”

“아, 한팀장님.”

“운동복 입으니까, 체대 출신이라는 느낌이 나는데?”

와! 회사에서 체대출신이라는 단어가 긍정적으로 느껴진 것은 처음이다.

“오늘 파이팅 해야죠!”

“아, 그래야지 파이팅해야지.”

“?”

뭔가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다. 뭐지? 이 미적지근한 반응은?

한팀장의 성격을 미루어 이런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타입이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부끄럽지만 우리 개발3실은 항상 꼴찌야.”

“아, 그렇습니까?”

“함전무님의 개발1실과 이상무님의 개발2실에 비하면 아무래도 남자 숫자도 적고 인원수도 적다 보니······.”

고작해야 체육대회 꼴찌가 무슨 대수라고 한팀장은 눈에 띄게 침울한 기색이었다.

아마도 캐릭터 자체가 열정적이다 보니, 그 열정이 비례하여 만년 꼴찌라는 것에 풀이 죽은 모양.

“한팀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

“올해 우승은 저희 겁니다.”

“와, 역시 표과장은 사람이 참 멋지단 말이지. 그런 자신감 좋아!”

“하하하.”

그나저나, 양실장은 안 오네? 잘하라는 격려라도 하러 올 줄 알았다.

고개를 둘러보니, 건너편에 있는 임원 전용 관람석에 있는 양실장이 보였다.

‘뭐 상관 없지.’

양실장이 체육대회 승진 내기에 참가를 희망해준 덕분에 어쩌면 포기했던 차장 진급의 길이 열릴지 모른다.

‘밥상을 차려줬으니, 떠먹는 것은 내 몫이지.’

나는 관심을 끊고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로 운동 좀 하게 생긴 사람들은 죄다 저쪽이네요?”

“그러냐?”

홍대리의 말에 따라 고개를 돌리자, 윤차장과 해병대 콤비가 몸을 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반드시 우승한다! 알겠나!”

“예!”

김차장이 나서서 기합을 외치자, 개발2실의 프로그램팀이 고함을 질렀다.

“와, 진짜 수컷 냄새 진동하네.”

홍대리는 질색이라는 얼굴로 부르르 떨었다.

“왜? 가끔 저런 것도 좋지.”

“극혐!”

“너 군대 안 다녀왔냐?”

“다녀 왔으니, 극혐이죠!”

음······. 듣고 보니 일리 있다. 살다 보니 홍대리 말에 설득되는 날이 있다니.

“그런데 과장님은 무슨 경기 신청하셨어요?”

이번 체육대회의 종목은 2인3각, 줄다리기, 단체 줄넘기, 그리고 축구였다.

“전부.”

“예?”

“전부 신청했다.”

“갑자기 왜요?”

생각해보면, 홍대리와 엮인 이래로 나는 한 번도 체육대회에 제대로 참가한 적이 없다.

“우승하려고.”

“그러니까, 그걸 왜?”

생각해보니, 나와 한팀장을 제외하면 우리 개발실에서 체육대회의 숨은 포상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다.

“우승하면 회식이고, MVP 먹으면 특별 보너스 300만원 준다더라.”

“아······. 회식. 하지만 운동은······. 하지만 회식.”

회식이라는 말에 홍켓몬은 자신의 정체성과 회식에 대한 갈망으로 혼란에 빠졌다.

“먼저 2인3각입니다. 출전자는 나와주세요.”

“과장님, 저랑 과장님이 한 조래요.”

“아, 그래? 운 좋네. 다리 긴 여성분 드문데.”

함송희는 170cm가 넘는 장신이다. 내 키가 큰 탓에 너무 작은 여성 파트너와 함께 달리는 것은 어렵다.

뭐, 딱히 함께 달린 생각은 없지만.

“저 그런데 사실 운동을 정말 못해요.”

“어, 상관없어요.”

“정말요?”

“그럼요. 어차피 달리기잖아.”

“2인3각인데요?”

“잠깐 실례할게.”

나는 함송희의 허리를 잡고 살짝 들었다.

“꽉 잡아.”

-타앙!

경쾌한 총소리와 함께 나는 시작부터 치고 나갔다.

“와! 빠른데?”

“표과장님 힘 장난 아니네? 사람 하나를 그냥 들고 달리네?”

“저거 반칙 아니야? 함송희씨 발은 거의 땅에 안 닿는 것 같은데?”

주변의 환호가 들려왔다. 나는 거의 독주하듯이 결승선을 통과했다.

다른 이들이 채 절반에 도착하기도 전에 우리는 서로의 발목에 묶은 끈을 풀었다.

“괜찮아요?”

“어, 어지러워요.”

거의 짐짝처럼 내게 매달려 있던 함송희는 살짝 현기증을 호소했다.

“와! 표과장! 아주 야생마가 따로 없네.”

한팀장이 박수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고 우리 개발실 사람들 모두 밝게 웃으며 우리를 축하해주었다.

‘몸풀기는 끝났고, 슬슬 제대로 해볼까?’

슬슬 발동이 걸린 것인지, 조금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양학은 언제나 즐거운 법이지!

*

*

*

임원 관람석.

조회장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김대표와 양실장등이 포진해있었다.

반면 좌측에는 함전무와 이상무 진영의 인사들이 포진.

직급상 김대표가 우측에 앉아 있었지만, 사내 파워 밸런스는 확연히 좌측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 단면이랄까? 함전무와 이상무 진영은 체육대회에 걸린 숨겨진 포상, 차장 진급 결정권을 두고 상당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반면, 우측은 대조적으로 고요했다.

“심심하지 않으십니까?”

“······하하,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인데요. 그나저나 저 친구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굉장하군요. 사람 하나를 들고 저런 속도라니.”

양실장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것은 드문 일이었기 때문일까? 김대표의 반응이 조금 느렸다.

“외람되지만, 다른 집안 잔치 구경인셈인지라, 무료하실까 걱정했습니다.”

김대표가 비록 양실장과 깊은 교분을 나눈 관계는 아니었지만, 평소와 확연히 다르다는 것쯤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설마······. 이 친구 결심이 섰나?’

양실장이 누구던가? 공공연히 왕의 남자라 불리며 조회장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다.

비록 직급에는 상당한 격차가 있지만, 사내 파워에서는 김대표라고 해도 허투루 여길 수 없는 존재였다.

“그게 사실인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미 사내 파벌은 함전무와 이상무의 양강구도다. 자신은 외부에서 영입해온 경영전문인.

결국, 철새 취급이었다.

텃세를 부릴 것도 없었다. 손 닿을 만한 높이에 있는 직급들은 하나 같이 양대 세력의 입김이 닿은 이들뿐.

애초에 김대표가 날개를 펼칠 기회는 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국내 게임 업계 전반에 몰아닥친 불황.

혁신 대신 돈벌이에 급급했던 국내 게임 시장은 급격히 체격을 키운 패키지 시장과 콘솔을 놓치며 서서히 말라붙고 있었다.

‘길어야, 2년. 짦으면 1년일까?’

이대로라면 자신이 이 회사에 발을 붙일 기회는 길지 않다.

“회장님은 아직 김대표님에 대한 신임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체육대회 건을 제안하신 것도 회장님의 지시였지요?”

조회장에게 언질을 듣지 않아도 양실장은 직감적으로 이 그림이 조회장의 손길이 닿은 작품이라는 것쯤은 간파하고 있었다.

“흠, 글쎄요.”

“제게 속을 터놓기 어려우신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부터 드리는 제안은 조금 심사숙고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안?”

대체 양실장이 자신에게 제안할 수 있는 것이 뭐란 말인가?

설마 뜨기도 전에, 저물어버린 자신과 양실장이 손을 잡는다?

함전무와 이상무의 밥그릇 싸움에 정면으로 도전이라도 하겠다는 것일까?

“제안이 뭡니까?”

“이번 체육대회 우승이 유력한 팀은 어디일까요?”

동문서답이었지만 김대표는 일단 양실장의 뜻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결과를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이상무님 아니겠습니까?”

함전무 파벌은 연륜, 이상무 파벌은 젊음으로 구분되는 이미지가 있다.

비록 개발3실의 표세인이 엄청난 퍼포먼스를 선보였지만, 그 밖의 경주에서는 모두 다른 팀들이 승리를 따냈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네?”

“제가 이깁니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십니까?”

비밀병기가 있으니까. 하지만 양실장은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제안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은 내기에 가깝습니다. 만약 체육대회의 결과가 끝나고 MVP를 손에 넣는 사람이 차장이 된다면, 김대표님은 그 사람을 전력으로 키워주시는 겁니다.”

보통 체육대회는 신입이나 대리급의 젊은 인재들이 두각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과장 정도만 해도 고된 업무에 혹사 된 탓에 몸뚱이가 성하지 않다.

다른 파벌이야, 팀이 우승만 하면 진급은 전무나 상무가 알아서 결정하지만, 양실장은 그럴 권한을 얻지 못했다.

그렇다면 과장급 중에 아주 운동능력이 뛰어난 인재가 있다는 말인데······.

하지만 운동능력이 뛰어나다고 무작정 키워준다? 내용도 이상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양실장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만약 양실장님 말대로 된다고 하더라도 고작해야 차장급 인사입니다. 그 정도 레벨이면 양실장님이 직접 키워줘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저 혼자로는 부족합니다.”

“?!”

순간 김대표가 화들짝 놀랐다. 천하의 양실장이 부족하다고?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곧 알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제가 김대표님께 드리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기회?”

“아시지 않습니까? 사회생활은 줄을 잘 서야 하는 법입니다.”

“그 말씀은······.”

“줄, 제대로 서십시오.”

양실장은 그 말을 끝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운동장 쪽으로 고정했다.

‘줄을 서라고?’

회사원이라면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단어가 아니던가?

‘이거, 흥미가 생기는데?’

남의 잔치에 불과했던 체육대회에 흥미가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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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차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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