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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29화 (29/346)

29.

“이야, 과장님 시작부터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함송희씨를 거의 들고 뛰시는 것 같던데요?”

“어, 괜찮아.”

“그런데 왜 돌아오셨어요? 어차피 계속 경기 나가셔야 하지 않았어요?”

“아, 그렇네. 그런데 너는 무슨 경기 신청했냐?”

“음······. 장염이 좋을까요? 감기가 좋을까요?”

그래. 내가 괜히 물었다. 사실 작년에는 나도 이 녀석과 함께 장염 환자 신세였지.

“홍대리!”

“네?”

하부장이 다가왔다.

“넌 왜 아무것도 신청 안 했어. 대리급까지는 무조건 출전해야 하는 것 몰라?”

“예? 아, 제가 장염이······.”

순간 하부장이 나를 바라보았다.

“진짜야?”

“아니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과장님이 제 속사정을 어떻게 아세요!”

“병원 진단서 제출할래? 아니면 그냥 참가할래?”

“······사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늦게 등장한다. 아시죠? 표과장님, 가시죠.”

“표과장. 네가 고생이다.”

하부장이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고, 나는 대답 없이 피식 웃으며 운동장으로 나갔다.

“자, 지금은 당기지 마세요. 신호총과 함께 시작입니다.”

줄다리기 첫 상대는 개발2팀이었다.

“표과장, 아까 달리기 잘 봤습니다.”

김차장은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입가를 씰룩이고 있었다.

“모처럼 2인3각에서 고군분투를 하셨는데, 안타깝게 되셨습니다. 아쉽게도 우리 회사 체육대회는 단체 종목 점수가 크거든요.”

“그렇습니까?”

“그러고 보면 표과장님은 항상 그런 역할이시네요. 업무는 설거지, 행사는 들러리.”

“하하, 표과장이 좀 그런 편이죠.”

윤과장까지 합세해서 까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말대로, 줄다리기는 우리 쪽에 승산이 없다.

남자가 부족하다.

오죽하면 하부장이 홍대리 등까지 떠밀었겠는가.

여자까지 끼어있는 우리 팀과 비교하면, 저쪽은 덩치 큰 남자들이 가득하다.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하지만 지는 것은 지는 거고······.

“체육대회라는 것이 참 그래요. 아무리 조심을 하려고 해도 사고가 벌어지기 마련이죠.”

“네?”

-타앙!

“시작!”

“앉아! 앉아!”

“당겨, 당겨!”

서로가 구호를 외치며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중과부적이었다.

잠시 팽팽했던 줄이 상대 팀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아앗!”

결국, 우리 쪽에서 줄을 놓치는 사람이 나타나고 줄은 상대진형으로 휙 넘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그 반동으로, 아니, 반동을 이용해 앞으로 몸을 날렸다.

“으악!”

수박 깨지는 소리가 들린 것은 내 착각일까? 내 머리에 얼굴을 들이박은 김차장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어이쿠, 괜찮으세요? 그 쪽팀이 힘이 워낙 좋으셔서.”

“아우윽.”

김차장은 피가 흐르는 코를 부여잡고 일어나지 못했다.

잠시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란이 벌어졌고, 나는 최대한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내 속마음을 숨겼다.

“와, 거의 준프로급 실력이신데요?”

“티났냐?”

“혐의 입증은 어려울 겁니다.”

“아, 그래도 피까지 볼 생각은 없었는데, 좀 미안하네.”

“정말로?”

“이것도 티나냐?”

“이건 아웃.”

“아, 내가 바르게 자라서 거짓말을 못 해. 이러면 안 되는데······. 크크크.”

“키키키.”

나와 홍대리는 몰래 키득거렸다.

“다음은 단체 줄넘기입니다.”

단체 줄넘기는 시간을 재서, 1명이라도 가장 오래 살아남은 팀이 승리하는 방식이었다.

“개발2실 15분!”

“와아!”

선공은 상대팀이었다. 윤과장을 포함한 해병대 콤비는 사력을 다해 뛰었고, 결국 그들 3명이 아웃 될 때까지, 무려 15분을 버텨냈다.

“다음 개발3실 차례입니다. 모여 주세요.”

심판의 말에 따라, 나와 홍대리는 줄넘기 장소로 향했다.

“저 바로 죽어도 괜찮죠?”

“응. 귀찮으니까, 빨리 비켜.”

나 혼자 이길 거니까. 그리고 줄넘기가 시작되었다.

“아! 제대로 좀 돌려!”

“타이밍 좀 맞춰라!”

“더 높이 뛰어!”

응원과 한탄이 번갈아 터져 나왔고, 금세 나 혼자만 남았다.

“와 표과장님, 잘 뛰시는데?”

“표과장님 땀도 안 흘리시는데?”

집중력을 잃지 않는다면, 체력이 뒷받침되는 한, 줄넘기에 실패할 일은 없다.

-탁! 탁! 탁!

어느새 줄이 바닥을 스치는 소리만, 들린다. 고요했다.

“15분 이미 지나지 않았어?”

“한참 지난 것 같은데?”

“왜 심판이 가만히 있지?”

사람들이 술렁이자, 심판은 슬쩍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돌려 김차장을 바라보았다.

김차장은 코에 휴지를 꽂은 채로,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그리고는 슬쩍 문이사의 안색을 살피고는 남몰래 심판에게 손짓했다.

“그만! 개발3실 승리!”

“와아아!”

“꺄아! 표과장님 멋져요!”

그래픽팀의 여직원들의 비명이 유독 컸다. 항상 상대 팀의 승리만 구경했던 덕분이겠지.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아직 족구와 축구가 남아있는데요?”

“아직 괜찮아.”

정말로 숨도 안 찬다. 밥만 주면 온종일 뛸 수 있을 것 같다.

차장 진급이 걸려있는데, 이 정도가 힘들겠나?

“그런데 과장님 족구 잘하세요?”

“아니.”

나는 군대에서도 족구를 해본 경험이 없다. 사실 축구 외에는 제대로 해본 구기 종목이 없다.

“그래도 이기고 싶으시죠?”

“왜, 네가 이겨주게?”

“음······. 소고기를 위해서는 하는 수 없죠.”

어쩌면 이렇게 믿음이 1도 안 가지?

“자신 있냐? 너 족구 해본 적이나 있어?”

“족구는 경험이 없네요. 족구는······.”

“?”

족구 시합할 건데? 족구 경험이 없어?

“시작!”

족구 경험이 없다는 홍대리의 말은 잠시 뒤에 확인할 수 있었다.

상대 팀의 선공으로 날아온 서브를 내가 겨우 받아서 올린 순간!

-휘릭!

“어!”

“어?”

“어?!”

홍대리가 360도로 수직 회전하며, 공을 내리찍었다.

“······.”

심판도 선수도, 관중도 모두 넋이 나갔다.

“홍기도! 홍기도!”

한발 늦게 우리 팀 천막에서 난리가 났다.

“너 뭐냐? 유학파라더니, 소림사에서 유학했냐?”

“제가 호주에서 동남아 친구들 덕분에 세팍타크로 클럽에서 활동했거든요.”

세팍타크로? 그게 뭐야?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다.

“친구들? 여자가 아니고?”

“당연히 여자죠. 엄청 예뻐요. 나중에 사진 보여드릴게요.”

아니, 사진은 됐다.

“지금처럼만 해라!”

“라져!”

홍켓몬은 말 그대로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그래 이 맛에 트레이너 하는 거지!

-콰앙!

홍대리 발이 땅에서 떨어질 때마다, 여지 없이 득점이 터졌다. 이건 애와 어른의 싸움이나 다름없다.

공이 네트 위로 떠 올랐다 하면, 냉큼 날아서 내리찍는데, 이건 내가 봐도 사기다!

“저건 너무 하잖아!”

결국, 화가 난 김차장이 심판에게 소리쳤다.

너무해? 그럼 니들도 세파 어쩌구 해보든지.

아니, 나도 한번 해볼까?

“이런 느낌인가?”

나는 홍대리의 동작을 떠올리며 떠오른 공을 세차게 내리찍었다.

“와, 과장님 운동신경 장난 아니시네요.”

“마, 나 태권도 하던 놈이야.”

“아! 540도턴?”

“언제적 얘기냐, 요즘에는 시범단에서 900도 턴 아니면 동세에 넣지도 않아.”

우리가 키득거리는 사이에, 하부장이 김차장에게 말했다.

“김차장. 휴지 빠졌다. 가서 바꿔.”

김차장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씩씩대며, 교체되어 나갔다.

“개발3실 승리!”

“와아!”

홍대리가 360도 회전 킥을 날린 순간부터 정해진 일이었다.

상대팀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살살 했을 정도다.

저렇게 날아다니는데, 어떻게 기가 죽지 않을 수 있을까?

“저 소고기값 했죠?”

“아니. 돼지값.”

“너무하신다.”

“너 축구도 좀 하지? 그거까지 이기면, 소 먹자.”

“축구까지는······.”

홍대리는 슬쩍 천막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콧김을 씩씩 뿜고 있는 하부장을 보고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죠! 소고기!”

아니, 일단 축구부터 이기자고. 그런데 부잣집 아들내미가, 왜 그렇게 소를 밝히는 거야?

*

*

*

“이거, 놀랍군요.”

만년 꼴찌 역할이던 개발3실이 물 만난 고기처럼 매 경기 연거푸 활약을 펼치자, 임원석의 분위기는 심각해졌다.

아니, 정확히는 임원석 좌측에 포진한 함전무와 이상무 진영만 초상집 분위기였다.

“하하하! 양실장이 세게 나올 만했는데?”

평소에도 스포츠 관람을 즐기는 조회장은 표과장과 홍기도의 활약에 흥이 났는지 흥이 잔뜩 오른 얼굴이었다.

“가만, 그런데 이러면 게임 끝난 것 아니야?”

줄넘기와 족구를 개발3실이 연거푸 승리한 상황.

“아직 모릅니다. 2인3각은 저희쪽 1등이 많습니다.”

“주, 줄다리기는 2실에서 승리했습니다.”

함전무와 이상무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력히 어필했다.

애초에 개발3실의 출전자 중에서 2인3각의 1위를 차지한 것은 표세인과 함송희뿐.

가장 포인트가 높게 책정된 축구 경기 결과에 따라 상황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런가? 다행이네, 흥이 식을 뻔했는데. 그건 그렇고 개발3실은 응원 열기도 아주 뜨거운데? 보기 좋아. 아주 좋아.”

조회장은 원피스 차림의 여사원을 필두로 여성 직원들이 앞장서서 응원 댄스를 추는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

*

*

‘분위기가 좋지 않다. 대체 어디서 저런 놈들이 굴러들어와서는······.’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이상무가 직접 이번 체육대회의 우승을 지시했다.

개발2실은 주말마다 시간을 내서 서로 합을 맞춰왔을 정도.

‘그래. 축구는 다르지. 축구는 혼자서 어찌할 수 있는 종목이 아니야.’

김차장은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이미 이상무와 문이사에게는 우승은 문제없다고 공수표까지 남발한 상황이 아니던가?

“명심들 해! 만약 우리가 축구까지 놓치면 앞으로 회사 생활 지옥이 되는 거야. 알겠어?”

이미 김차장에게 이것은 단순한 체육대회가 아니었다.

이상무와 문이사가 단단히 경고한 일을 망친다?

그날로 자신은 끈 떨어진 연이 되는 셈.

“윤과장?”

“윤과장!”

“아, 네······.”

이 녀석은 또 왜 이래?

굴러들어온 돌치고는 싹수가 있어 보였다. 비위도 잘 맞추고, 해병대 출신임을 앞세워 다른 프로그래머들 사이에서도 금방 자리를 잡았다.

학벌이 조금 처지는 점은 탐탁지 않았지만, 어차피 밑에 두고 부리기에는 조금 부족한 타입이 좋다고 생각했다.

특히 요즘 눈엣가시 같은 표과장과 앙숙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그런 윤과장의 상태가 이상했다.

“끝났습니다.”

“뭐?”

“줄다리기와 족구에서 끝냈어야 했습니다.”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김차장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표과장이 축구 좀 잘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우리도 연습 많이 했잖아. 그리고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저쪽 팀 허당이라니까? 축구는 혼자하는 경기가 아니야. 족구와는 달라! 윤과장도 공 좀 차봤잖아?”

결국, 윤과장은 그간 축구 연습 내내 숨겨왔던 사실을 토로했다.

“저놈 축구 혼자 합니다.”

“뭐?”

“못 이겨요. 절대.”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아니, 표과장이 체대 출신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송부장님이 저놈을 그렇게 미워하는데도 저놈이 꿋꿋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를 아십니까?”

“그게 뭔데?”

“일도 잘하지만······. 몸뚱이가 다릅니다. 야근, 철야도 끄떡없는 이유가 저놈 몸뚱이 성능이 저희 같은 일반인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그렇다고 해도······.”

물론 김차장도 표세인이 사람을 들고 전력 질주하거나, 줄넘기하면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것을 눈으로 보기는 했다.

“거기다가 발재간은 또 어찌나 예술인지. 끝났습니다.”

“윤과장! 진짜 이럴 거야?”

김차장이 윤과장에게 한마디 하려는 찰나.

“운동장으로 나와주십시오.”

심판이 그들을 불렀다.

“들었지? 일단 나가자.”

윤과장이 마음에 안들기는 하지만, 윤과장 역시 나름 발재간이 있는 축이었기에, 이제와 명단에서 제외할 수도 없었다.

“다 끝났어······.”

김차장의 말에 따라 윤과장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터덜터덜 운동장으로 향했다.

‘내가 사람을 잘 못 봤나? 이거 완전······.’

김차장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심판의 호각과 함께 김차장은 윤과장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철썩!

시작과 동시에 뭔가 휙 지나가더니, 골네트가 춤을 췄다.

“꺄아아악!”

“표차붐! 표차붐!”

사내 체육대회에 생태계교란종이 등장했다.

“표차붐! 표차붐!”

시작하자마자, 번개처럼 달려나가 선취점을 득점해버린 표세인은 응원석 앞으로 달려가, 골 세리머니를 터트리며 관중들을 열광시키고 있었다.

“자, 자. 정신 차리자. 우리가 좀 방심한 거야. 그렇지?”

“족구에서 잡았어야 했는데······.”

“넌 좀 닥치고!”

김차장이 윤과장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그 순간, 휙! 하고 뭔가가 지나갔다.

-철썩!

“와아아아아!”

일반적인 사내 체육 대회에서는 볼 수 없는 미친 듯한 열광이 터져 나왔다.

“차붐!”

이전 회사에서는 잠들어 있던, 신림동 표차붐이 운동장을 찢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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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서브 퀘스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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