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표차장! 진급 축하해!”
“차장님 축하드려요!”
출근하기 무섭게 사람들의 축하가 끊이질 않았다.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전달된 메일에는 표세인 차장 진급이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차장턱! 차장턱!”
옆에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홍켓몬의 턱을 살포시 돌려주고 나는 사람들의 축하에 일일이 고개 숙여 화답했다.
“기억해라, 표세인! 당신은 나에게 빚이 있어!”
얘는 진짜 전생에 소고기와 무슨 악연이 있었기에 목을 돌려놔도, 기세가 살아있네?
“알겠으니까, 그만하고 회의 준비하자.”
“지금 알겠다고 하셨습니다.”
갑자기 정색 씩이나······. 이건 먹이를 던져주기 전까지는 안 끝날 것 같다.
“알았어. 안 떼어먹어, 빨리 회의 준비해.”
“라져!”
결국, 거듭 확답을 듣고서야, 홍대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회의실로 향했다.
“오늘은 저도 참석해도 괜찮을까요?”
“어? 양실장님?”
야생의 양실장이 나타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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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으로 앉으시죠.”
“아닙니다. 저는 여기가 좋습니다.”
“그래도 양실장님이 기획팀장 아니십니까?”
“이름뿐인 직책이지요. 실제로 업무는 표차장님께서 진행하시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곧 정식 팀장이 되실 테고요. 남의 집, 상석을 차지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요.”
양실장은 기어코 상석을 사양했고, 하는 수 없이 내가 회의실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뭔가 말하지 않은 꿍꿍이가 더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보다······.
‘차장이라······.’
표차장.
어감이 나쁘지 않다.
‘그보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기획 회의에 참석하신 거지?’
지금까지 양실장은 정말로 이름뿐인 기획실장 역할을 자처했다.
어쩌면 내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은 것 같은데······.’
한사코 나를 상석에 앉힌 것은 아마도 기획팀장으로서의 내 입지를 배려한 것이리라.
‘솔직히 우리 팀 분위기를 고려하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팀에 내가 정식 팀장이 아닌, 대행이라는 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이제 막 파티 구성이 끝났다고는 해도, 결속력도 나쁘지 않다.
물론 홍대리와 남궁대리가 이따금 티격태격하기는 한다.
듣기로는 신입사원 시절부터 견원지간이었다고 한다.
확실히 능글맞은 홍대리와 철두철미한 남궁대리의 성향은 물과 기름이나 다름 없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본 봐, 기본적으로 남의 일에 간섭하는 스타일들이 아닌 탓에 크게 부딪치는 일은 없다.
‘그리고 신입은······.’
“여기서 IF 달고 조건 값을 다르게 가져가면······.”
좀비 로얄 스크립트를 본 뒤로는 캐릭터가 진짜 좀비스러워졌다.
가만히 두면 끝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업무에 지장은 없다니까, 일단은 내버려 두자.
어쨌든 함송희도 문제는 없다.
현재 우리 팀원들은 양실장의 존재를 개의치 않고 타블렛을 살펴보며 보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럼 시작하지. 홍대리부터.”
“네.”
게임 회사는 회사마다 업무 스타일의 양상이 크게 차이가 난다.
하지만 대체로 주간 업무의 시작을 회의로 스타트하는 것은 대동소이하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
“주말 전에 말씀드린 부분에서, 별다른 변동사항은 없습니다. 문주 누나······. 아니, 안차장이 그래픽팀을 잘 독려해주고 있고, 오팀장도 허튼짓 안 하······. 아니, 잘 하고 있습니다.”
그래. 우리만 있는 회의 아닌 거 알지? 정신 좀 차리자.
나는 살짝 턱을 괴고 홍켓몬을 향해 온화한 미소와 함께 트레이너의 전용기인 각성 눈빛 발사를 시전했다.
“남궁대리는?”
“저희는 이번 주부터 몇 가지 수정 사안과 건의를 좀비 로얄 측에 전달할 예정입니다. 특히 서버 부분에서 본사 서버를 이용하기로 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한 추가 기획을 작성해서 다음 주 중에 전달할 예정입니다.”
역시 남궁대리는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인재다.
특히 저 포커페이스. 속마음이야 어떻든 남궁대리는 조회장님 앞에서도 따박따박 제 할 말 다하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수정 사안과 건의에 대해 간략하게 말해줘.”
“수정 사안은 지난번 차장님께서 좀비 로얄 측에 제시하셨다는 아이디어의 기획 부분입니다. 일률적으로 좁혀지는 기존의 자기장 시스템과는 달리, 불특정하게 움직이는 좀비들로 자기장을 대체하는 것에는 여러 변수가 예상되기에 치밀한 트리거가 준비되어야 하는데, 좀비 로얄 개발팀에서는 그 부분에 대한 기획이 다소 주먹구구식으로 안일한 상태인지라, 한번 명확하게 문서화 해서 제공할 예정입니다.”
“그렇지, 좀비 숫자를 무작정 늘릴 수도 없으니까.”
한 맵에 등장시킬 수 있는 오브젝트에는 한계가 있다. 더욱이 다중접속 게임인 만큼 수많은 유저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수많은 좀비들을 목격하게 될 것인데, 이를 무작정 좀비의 숫자로 해결하려다가는, 컴퓨터가 터져나갈 것이다.
“낙오된 유저의 주변에 좀비를 스폰포인트를 생성시키는 방향도 고려해봐.”
무엇보다, 이 게임은 국산 게임이다. 다시 말해 국내 유저들을 타겟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의미.
한국인이 어떤 종족이던가?
세계인들의 상식을 파괴하는 기상천외한 기행으로 개발자들을 엿 먹이는 일에 특화된 게임종족이다.
이 부분, 철저해야 한다.
“아! 맵에 스폰 포인트를 준비하는 것보다도 그게 나을 수도 있겠네요. 확실히 변수 제어에는 그 방법이 낫겠네요.”
맞아. 분명 의도적으로 낙오하면서 상상도 못 한 기발한 전략을 찾아내겠지.
이 부분은 개발자와 게이머의 영원한 술래잡기 게임 같은 영역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패배한다. 그렇기에 더욱 더 신경을 써야 한다.
“그렇지. 그리고 기존의 드롭 생성방식 보다. 오브젝트가 지면에 닿을 때까지는 투명 값으로 처리하고, 동시에 지면 아래서 기어 올라오는 이벤트 이팩트도 곁들이면 괜찮을 것 같네.”
“와, 차장님 진짜 아웃풋 빠르시네요.”
“내가 기획자 생활 몇 년짼데, 이 정도는 기본이지.”
“예전 팀장님은 연차가 더 오래되셨는데도······.”
아니,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양실장 앞에서 다른 팀, 팀장 깎아내리는 소리를 하면 안 되지!
아까 한 말 취소다. 역시 이 녀석들 기수에는 뭔가 문제가 있다.
“그보다 건의는 뭐지?”
“함송희가 몇 가지 코딩에 개선점을 발견해서, 그걸 전달해 보려고요.”
“코딩을? 그거 좋아할까?”
나는 살짝 걱정이 들었다. 각 파트별로 저마다의 자부심이 있기 마련이다.
프로그래머의 경우는 당연히 코딩이 밥줄인 셈이라서 같은 프로그래머끼리도 상사가 아니라면 타인의 코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리기 마련이지 않나?
“하지만 제가 봐도 좋은 개선점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어요. 무엇보다 퍼포먼스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하거든요.”
퍼포먼스? 그러면 안 되지. 다른 것은 몰라도 최적화와 관련된 문제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아야 한다.
“오케이, 접수했어. 만약 잡음 생기면 바로 나한테 토스 해줘.”
크라우드 펀딩 금액이 사상 최고를 갱신할 가능성이 엿보이는 상황.
박대표는 현재, 내 말이라면 죽는 시늉도 불사할 기세다.
이런 건 써먹어야지.
“제 선에서 안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쩐지, 남궁대리가 나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 이런 타입을 부릴 때는 내가 좀 더 신경을 써야겠지.
홍대리와는 전혀 다른 타입이지만, 역시 손이 가지 않는 부하직원이라는 것은 드라마 속에나 존재하는 개념인 것 같다.
“그럼 끝인가?”
대략적인 향후 일정 논의까지 마무리되자, 어느새 훌쩍 1시간 가까이 흘렀다.
이제 슬슬 회의를 끝낼 시점이다. 나는 양실장을 바라보았다.
“끝났습니까?”
“예. 그런 것 같습니다. 뭐 하실 말씀이라도?”
“그럼, 제가 잠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간 기획팀 여러분 모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허울뿐인 기획팀장 덕분에 한 명 몫의 맨파워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여러분은 훌륭한 성과를 내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아니, 모르셔서 그렇지. 양실장님의 마법(이름값)은 톡톡히 제 역할을 하셨습니다.
“아마 곧 발표가 나겠지만, 표차장님은 곧 정식 팀장으로 발표가 나실 겁니다. 그러면 허울뿐이었던 저를 대신에, 새롭게 TO가 한 자리가 비는 셈이니. 기획팀에 걸맞은 새로운 인재가 충원될 것입니다.”
새로운 인재? 그렇구나. 원래 우리팀 TO가 다섯 명이었지?
“잠깐만요! 아직 기획팀 회식도 못 했는데,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갈 때는 가더라도, 팀장 노릇은 하고 가셔야죠.”
홍대리가 세상 억울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 부분은 제가 미처 생각을 못 했군요. 만약 여러분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조만간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소! 실장급이시니, 당연히 투 뿔 급 콜이죠?”
아니, 이 녀석이 정말! 나는 다급히 홍켓몬에게 트레이너의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적당히 안 하냐?’
‘나는 이것도 챙기고, 새로운 팀원 들어오면 환영회도 챙길 것임! 그리고 족구 때, 따로 소고기 약속한 것 잊지 않고 있음.’
아, 안 통해? 홍켓몬은 광폭화 상태였다. 요즘 너무 말을 잘 듣는다 했는데, 역시 과부하 상태였던 모양이다.
이럴 때는 고삐를 풀어줘야지, 안 그러면 터진다.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그저 홍대리의 폭주를 지켜보았다.
대체, 부잣집 아들놈이 왜 이렇게 소고기에 환장을 하는 거지?
“설마 돼지로 퉁 치시려는 것 아니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그렇게 쩨쩨한 사람 아닙니다.”
양실장은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김대표도 그렇고 양실장도 그렇고 사람들이 배포가 크다.
만약 예전의 송부장 같은 캐릭터였다면······. 하긴 그런 상대 앞에서는 이놈은 탈주 닌자로 변신하지. 하여튼 눈치는 귀신 같은 놈이다.
“일단 기획팀에 관한 제 용건은 여기까지입니다.”
라는 것은 내게는 남은 용건이 있다는 뜻. 나는 나머지 인원들을 자리로 돌려보낸 후, 양실장과 독대를 시작했다.
“표차장님.”
“네.”
“재무팀에서 요청한 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 그거 무시하기로 했습니다.”
“무시?”
내 말에 양실장이 당황했다. 이 사람이 이런 표정을 짓기도 하는구나. 하지만 곧바로 양실장은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
“언제나, 예상을 벗어나시는군요. 일단 이유라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뭘 그렇게까지, 저 자세로 말씀을 하시는지. 어차피 아직 정식 팀장 발령이 난 것은 아니니, 아직까지 기획팀의 팀장은 양실장이다.
안 그래도 오늘 중에 보고하려던 참이었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입니다.”
“흠, 비용을 줄여서 순이익을 끌어 올린다?”
역시 바로 알아듣는다. 머리 좋은 사람들은 이래서 무섭다.
“그렇습니다. 예정에 없던 지원들은 결국에는 비용이란 말인데, 그것도 따지고 보면 순이익에 마이너스 요소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처음에 내게 주어졌던 30억과는 달리, 이건 완전히 재량권이 주어진 자금도 아니다.
그렇다면 일반 마케팅비란 말인데, 이 부분은 기존에 사업부에서 계획하는 방향으로 따라가도 무리가 없다.
공모전을 이용한 노이즈 마케팅이야. 랜덤성이 강한 종목에 도박성 배팅으로 잭팟 터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케팅은 쉽지 않은 분야다. 그 분야에 전문가가 아닌 내가, 그들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다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저 클래식 빌드에 대한 추가 편성 정도만 요청하면 될 것 같습니다. 세부전략은 사업팀에 맡기고요. 그들도 밥값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럴듯하군요.”
나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양실장을 통해 전달받은 미션 내용은 작년 매출 이상의 ‘성과’였다.
무지막지한 마케팅비용을 동원해서, 단순히 매출만 무작정 불리는 것을 미션 클리어라고 회장님이 판단하실까?
내가 회장님의 속내를 파악했다고 할 만큼 회장님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왜, 게이머의 본능이라고나 할까?
나는 확실한 클리어를 바란다.
‘조회장님이 트집을 잡을 건덕지가 없어서 곤란해하시는 얼굴이 궁금하기도 하고.’
그 밖에도 문이사를 비롯해, 걸림돌 같은 작자들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와 제동을 걸지 모른다.
이제 좀비로얄은 기세를 탔고, 클래식 빌드의 준비도 순조롭다.
지금은 외부의 지원 보다는 잡음 제거에 주력할 때였다.
“차장님의 뜻은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시지요.”
내 말을 들은 양실장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제가 틀렸다면 확실하게 말해주십시오. 괜찮습니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궁리한 끝에 내린 선택이지만, 언제나 100% 완벽한 정답은 없는 법이다.
양실장이라면 내가 생각지 못한 변수를 간파할 수도 있다.
애초에 그것을 위한 러닝메이트가 아니었던가?
“표차장님?”
“네.”
“제가 충고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물론입니다. 경청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양실장은 넌지시 나에게 소소한 경험이나 지혜들을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충고라는 단서를 단 적은 없었다.
나는 주의 깊게 양실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앞으로 표차장님의 회사생활은 이전과는 많이 달라지실 겁니다.”
“그렇습니까?”
나는 짐짓 모르는 척 잡아뗐다. 물론 양실장의 머릿속을 훤히 꿰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양실장 조차 알지 못하는 비밀. 나는 연아와 결혼을 약속했으며, 이미 양가 부모님들의 허락도 받은 상황.
재벌가 예비사위.
그 이름이 갖는 무게감. 평소에는 종종 까먹지만,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정도의 얼간이는 아니다.
결국, 양실장의 가르침은 내게는 더없이 귀중한 도움이 된다.
배워야 한다. 나는 더 많은 경험치가 필요하다.
연아의 얼굴에 먹칠하는 남편이 될 수는 없지 않나?
“확신이 섰을 때는 망설이지 마십시오. 조언을 구하되 의지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표차장님의 계획은 그저, 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저나 팀원분들 같은 표차장 주변의 사람들의 역할은 그것을 지원하는 입장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의지하지 마라.
그렇군. 만약 심각한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조언을 구할 사람이 없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깊이 새기겠습니다.”
“좋군요.”
양실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럼 가실까요?”
“어디를 갑니까?”
“게임 홍보 계획은 정리가 된 것 같으니, 이제는 저희를 홍보해야지요.”
우리를 홍보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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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팅이 예술인데, 뭐가 겁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