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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34화 (34/346)

34.

“양실장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이걸영은 조금 전 자신에게 선전포고를 날리던 양성태의 얼굴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래. 오랫동안 웅크려있던 호랑이가 이제야 기지개를 켠다, 이건가?”

아직은 위기감보다는 흥미가 더 컸다.

사실상 선전포고라고는 했지만, 이번 건은 어느 모로 보나, 문상훈에 대한 도전장에 가까웠다.

‘하긴 나도 궁금하기는 했지.’

어쩌면 문상훈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함성준 전무와 자신이 본격적인 파벌경쟁에 돌입했던 시점에 있었던 일.

파벌경쟁이란 뭐니, 뭐니해도 인재 충원이 최우선 과제.

따라서 시장에 나온 매물 중에서 가장 값어치 있는 물건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했다.

양성태와 문상훈.

이 두 매물은 가장 핫한 매물이었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평가는 역시 양성태가 한 수 위였던 것은 사실.

파트가 다른 탓에 업무역량을 직접 비교하기는 다소 애매했으나, 문상훈이 그저 불도저 같은 추진력을 앞세운 전형적인 돌격대장 스타일인 것에 반해, 양성태는 그 당시부터 이미 완성되어 있던 인재였다.

포지션부터가 비서실이었고, 과장을 달기도 전에 차기 비서실장이라고 암암리에 소문이 파다하기도 했었다.

‘그때는 찔러볼 엄두도 낼 수 없었지.’

이걸영은 당시의 일을 회상했다.

이제 막 걸음마 단계였던 자신의 파벌은 암암리에 회장의 총애를 받고 있던 양성태에게 입질을 넣어볼 엄두도 낼 수 없었더랬다.

그나마 함성준 전무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차례나 양성태에게 집요한 러브콜을 보냈다.

하지만 양성태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처세술의 교과서적인 반응으로 함성준 전무의 애간장을 녹이면서도 꿋꿋이 자신은 그저 조회장의 사람임을 자처했다.

반면, 함성준 전무의 이목이 양성태에게 집중된 사이, 자신은 문상훈에게 올인했다.

‘사실 문상훈의 자존심 덕분에 어렵지 않았지.’

자존심 빼면 시체나 다름없는 사람이 아니던가?

문상훈은 그 당시부터 양성태를 경쟁자라고 여기고 있었고, 은연중에 양성태가 자신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함성준 전무가 양성태에게 먼저 러브콜을 보낸 순간 문상훈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었다.

‘그런 융통성이 조금 있으면 좋았을 텐데······.’

이사를 달기 전까지는 그 미친 듯한 추진력이 모든 단점을 충분히 커버했다.

하지만 어느새 이사라는 직함을 달고 자신의 오른팔이 된 문상훈의 가치는 어떤가?

양성태가 물러간 지, 한참이나 되었음에도 초조한 기색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자신 앞에서는 조금 더 당당하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나?

‘아직 연륜이 부족한가?’

아직 쉰도 되지 않은 젊은 이사의 한계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양성태의 처세술이 너무나도 빛이 난다.

‘대체 회장님은 이런 인재를 어떻게 한눈에 알아 본 걸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조회장은 양성태가 신입이던 시절부터 주의 깊게 주시하고 있었다.

대학 선후배로, 밴처 창립 이전부터 함께해온 사이건만, 조양길이라는 인물은 자신의 사생활을 일절 공유하는 법이 없다.

젊었을 적에는 그래도 얼굴 마주하고 있는 시간이 길었기에 되려 그런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회장님은 정말로 양파 같은 사람이란 말이지.’

게다가 회사가 성장하는 속도는 좀 빨랐던가?

IT붐과 온라인 게임시장의 성황에 제대로 올라탄 세대였던 덕분에 과거를 돌이켜 보면, 자고 일어나면 회사가 껑충껑충 성장하는 것에 놀라곤 했었다.

하지만 기어코 게임 시장의 겨울은 찾아왔다. 아니, 어쩌면 사실은 오직 한국 시장만의 이야기.

정부의 갈대 같은 정책 덕분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MMO와 보드게임에서 모바일로 급변하는 시장 환경의 변화를 좇다 보니, 수십 년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

회사는 이제 성장이 아닌, 퇴보를 걱정해야 할 만큼 커져 버렸고, 자신과 함전무의 야망 역시 이미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팽배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쯤에서 재점검을 해본다고 생각하는 것도 좋겠지.’

이걸영은 넌지시 문상훈을 바라보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문상훈은 자신의 시선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이곳에 함께 있다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좋게 말하자면 집중력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여유가 없다.

더군다나, 문상훈의 사내 입지를 고려할 때, 이렇게 매번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해서는 곤란하다.

‘어차피 양성태는 그림의 떡이야.’

한동안은 파벌에 전혀 관심이 없는 조회장의 행보를 지켜보며, 양성태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신 적도 있다.

하지만 어느새 준 이사급의 자리에 올라, 자신들에게 선전포고까지 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아쉽군.’

양성태의 선전포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상훈이 승리한다면, 자신 파벌의 기세가 한층 높아질 것은 당연지사.

만약 문상훈이 패한다고 해도, 이 일을 빌미로 콧대 좀 꺾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승승장구를 거듭한 덕분인지, 타고난 기질인지 때때로 안하무인처럼 날뛰는 문상훈이었다.

‘어쩌면 여기까지 계산을 끝마친 것이겠지.’

자신이 여기까지 생각할 것이라고, 양성태는 사전에 간파했으리라······.

양성태 정도 되는 남자가 아무 계산 없이 움직였을 리는 없다.

항상 두수, 세수 앞을 내다보고 점검까지 끝낸 이후에 움직이는 남자다.

게다가, 패배에 대한 패널티도 그저 상대의 안건에 찬성표를 던지는 것이 고작.

그에 비해, 양실장은 필요하다면 조회장과의 독대까지도 감당하겠다고 선언했다.

‘간만에 재미있겠군.’

체육대회 이후로 회사의 공기가 다소 달라졌다는 느낌이다.

“이상무님.”

“응?”

긴 침묵을 깨고 문상훈이 입을 열었다.

“저를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도와? 나는 심판인데? 그렇게나 자신 없어?”

이상무의 말에 문상훈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곳은 제 홈그라운드가 아니지 않습니까. 솔직히 본사에서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가 어떤 상황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것도 생각 안 하고 냉큼 받아들였나?”

“양성태의 도전장입니다.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왜? 라이벌이라서?”

자신과 함성준 전무 역시 비슷한 처지였으나, 자신이라면 코 꿰이듯이 낚이지는 않을 것이었다.

기회가 올 때까지, 참고 또 참는다. 덕분에 추진력은 좀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따라서 자신과는 성향이 많이 다른 문상훈을 영입하고 물심양면으로 그가 성장하도록 지원했다.

하지만 그 인내심과 처세술에서 다소 아쉬운 것도 사실.

“대단한 도움을 요청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상무님 이름으로 한가지 문제만 해결해 주십시오.”

“뭔데?”

탐탁지 않은 것은 탐탁지 않은 것이고, 그렇다고 오른팔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할 수는 없는 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양성태가 달고 온 표차장이라는 놈도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그래?”

체육대회에서 괴물 같은 운동신경을 선보인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운동과 업무는 전혀 별개의 것이기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이 업계는 눈에 띄는 운동신경을 가진 친구들 보다, 공 한번 못 차 본 샌님 같은 이들이 두각을 드러내는 업계가 아니었던가?

“우선 재무부장을 움직여 주십시오. 지난번 회장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저쪽 진영에 상당한 지원이 추가될 겁니다. 아마도 저들도 그것을 믿고 있겠죠.”

“그렇겠지.”

하지만 크게 걱정되는 것은 아니다. 김대표가 허수아비 신세인 덕에, 사내 NO3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이다.

그런 자신이 지원하는 프로젝트가 지원금이 부족할 리는 없지 않겠나?

“사실 지난번에 슬쩍 손을 써보려 했는데, 회장님의 지시인 탓에 재무부장이 들은 척도 하지 않더군요.”

“설마 나더러 회장님 지시에 맞서라고?”

일반 사원들 앞에서야 하늘 같은 상무라도 조회장 앞에서는 허수아비나 다름없다.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는 법.

“설마요. 그저 승부가 날 때까지, 그게 어려우면 분기 막판까지······.”

“시간만 좀 끌어 달라?”

“그렇습니다.”

문상훈의 눈빛은 결연했다. 양성태와의 대결에서 이걸영의 도움을 받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

평소 그의 자존심이면 이걸영이 직접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도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양성태.

그 이름 석 자가 가진 의미는 문상훈에게는 너무도 무거웠다.

‘어차피 요즘 게임 시장은 마케팅이 반이 아니던가?’

상대의 자금줄을 압박하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승리한 셈.

“만약 내가 그쪽을 손 써준다고 치자. 다음은?”

이 싸움은 결국 대리인 싸움이다. 어차피 이사급부터는 자신이 무언가를 하기보다 부하를 컨트롤해서 일을 진행 시키는 법.

따지고 보면 둘이 직접 대결을 하는 것보다도 더 적합한 승부다.

그러니 결국 표차장을 제압할 확실한 히든카드가 필요했다.

“그 건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럼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양성태에게 심판 역할을 부탁받기는 했지만, 아마 양성태도 자신이 마냥 손 놓고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뭐, 좋아. 확실히 본사에서의 경쟁은 자네에게 핸디캡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

이걸영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재무부장, 나 이상무야.”

-무슨 일이십니까.

“구절구절 설명은 안 하겠네. 이번에 자네가 내 체면 한번 살려주지.”

-음······. 무슨 일이신지요.

함성준 전무의 사람이라고는 해도, 이걸영의 부탁을 거절하기에는 그 무게감이 너무 무겁다.

“그 양성태 실장의 기획팀 말인데, 그쪽에 지원하기로 한 자금 말이야.”

-그, 그건 회장님께서······.

“아니, 그걸 걸고넘어지겠다는 것이 아니라, 리스크팀 핑계를 대든, 아니면 우리 사업부 핑계를 대든 지 해서 시간만 조금 벌어줘.”

-어느 정도나 필요하십니까?

“가능하다면 다음 분기까지 미뤄주면 고맙겠군.”

-······.

“많이 어려운 부탁인가? 내가 지금까지 자네에게 이런 부탁을 한 적은 없지 않나. 이번에 한번 신세 지자고.”

-알겠습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고마워, 나중에 이 신세는 톡톡히 갚아주지.”

이상무는 통화를 끊고 검지로 뒷덜미를 긁적였다.

‘괜한 빚을 만들었군.’

신세를 갚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상무쯤 되는 인사가 재무부장에게 빈말을 던질 수는 없다.

더욱이 상대는 함성준 전무의 사람이다.

“자, 그럼 내 역할은 끝난 거지?”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걸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문상훈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시작한 것, 좋은 성과를 내길 바라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자신의 사람이 아닌가? 기왕이면 이겨야 한다.

패했을 때, 기가 죽는 것은 그저 최악의 상황에도 건질만 한 요소가 있다는 의미이지, 그것이 최선이라는 것은 아니지 않나?

“믿어 주십시오. 저 문상훈입니다.”

“그래. 그럼 나는 가보겠네.”

‘그놈의 이름 타령은.’

이걸영은 짧게 혀를 차며 웃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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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번에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재무부장님을 뵈러 가는 길입니다. 어차피 계획 안건으로 한번 찾아뵈어야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군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정말 추가 지원금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한번 물리면 좀처럼 되돌리기 쉽지 않습니다.”

양실장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양실장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 있구나.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수익에는 비용 절감 요소도 적용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게다가 어차피 모두의 부동산은 마케팅팀에서 기존 마케팅 계획이 있을 테고, 좀비 로얄은 지금 시점에 추가 자금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이미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서 역대 게임 펀딩 사상 최고금액을 향해 내달리고 있지 않던가?

“언제나 자신감이 넘쳐서 좋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감 뒤에 확실한 계획이 있다는 것은 더욱 좋고요.”

“그런데 아까 문이사님 표정이 심상치 않던데······. 괜찮을까요?”

“글쎄요. 이런저런 꿍꿍이야 고민하겠지만, 저는 그저 표차장님만 믿을 뿐입니다. 하하.”

아니, 내가 양실장님을 믿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싸움은 자기가 걸어 놓고선.

우리는 그런 가벼운 잡담을 나누며, 재무부장님의 방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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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서 일을 저질렀다,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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