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제발······. 하느님, 부처님, 이순신 장군님 제발······.’
한명수는 속으로 생전 해본 적 없는 기도를 시작했다.
“준비됐습니다.”
그간 주변의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버그 픽스를 외쳐왔다.
하지만 신규 컨텐츠와 캐시 아이템에 번번이 밀려나기 일쑤였더랬다.
‘이게 마지막 기회다.’
오랜 시간이 지나 표세인이라는 인물의 등장. 처음부터 범상치 않은 등장과 함께 자신이 그토록 염원하던 버그 픽스 올인 계획을 지지해준 남자.
그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일변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결과가 중요하다.
지금까지 이 게임을 뒷받침해준 유저들이 이번 대규모 버그 픽스에 호응해주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허사가 된다.
결국, 예전처럼 산더미 같은 버그는 무시한 채로 돈벌이에 급급한 시스템으로 회귀할 것이 틀림없다.
“잘 될 겁니다.”
정민규 차장이 한명수에게 넌지시 말했다.
“그렇겠지?”
“그럼요.”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는 정민규를 보니,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진다.
자신 같은 똥차 덕분에 그 짬밥에 팀장 한 번 달아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사람 좋은 미소라니······.
‘이놈이 성깔만 조금 더 있었으면 팀장쯤은 금방 달았을 텐데.’
성격 좋은 사람은 성공하지 못한다.
역설적으로 남들을 짓밟고 올라가는 것에 매료되는 인격 파탄에 가까운 성향을 지닌 이들이 성공 가도를 질주하는 일그러진 세상.
문상훈 이사에게 자신 대신 정민규를 미국지사로 발령해달라는 뜻을 말했지만, 정민규는 문이사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애초에 순수한 호의가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었잖아.’
애써 마음을 털어낸다. 그러나 역시 초조함은 남았다.
‘다들 고생도 많았고.’
하성열 부장의 급발진으로 개발일정이 앞당겨지면서, 프로그램팀 전원은 야근과 철야를 감당해야 했다.
남들이 퇴근 후에 소주잔을 기울일 시간에, 에너지 드링크를 들이키며 영혼을 불살랐다.
그리고 드디어 중간 평가라고 할 수 있는 첫 번째 대규모 버그 픽스 업데이트 날을 맞이한 것.
“이제 시작이군요.”
그리고 그 힘든 시간 동안 자신들과 동고동락하며 끈질기게 QA와 개선사항을 짚어준 표세인.
“듣자 하니, 어제도 같이 밤새웠다며?”
프로그램팀이 교대로 야근과 철야를 반복하는 와중에 표세인은 아예, 퇴근하지 않고 곁에 남아서 프로그램팀을 지원했다.
교대 철야를 거친 프로그램팀들이 반송장 몰골로 골골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표세인은 며칠 밤을 거의 꼬박 지새운 상황에서도 멀쩡해 보였다.
“틈틈이 눈 붙였습니다. 그리고 저야 프로그램팀처럼 풀 시간 전력 질주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말도 참 예쁘게 한다. 자신의 고생은 숨기며, 끝까지 프로그램팀의 노고를 앞세우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게 다, 당근과 채찍의 일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기획팀장이 업데이트 전에 어떻게 퇴근합니까?”
표세인은 씩 웃었다. 아직 정식 팀장 발령은 아직이었지만, 이미 모두는 은연중에 표세인을 대행이 아닌 팀장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묘하게 양실장을 닮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
부드럽지만 어딘가 믿음이 가는 미소. 양실장과는 전혀 다른 타입이건만, 묘하게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한팀장님?”
“어?”
“진행하시죠. 다들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언제나 업데이트의 순간은 개발실 전체의 공기가 남다르다.
지난번 샤우팅이 신경 쓰인 탓인지, 근래 개발실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하부장도 멀리서 힐끔거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시작하자.”
“알겠습니다. 운영팀, 점검 공지 띄워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QA팀 테스트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메신저를 통해 운영팀과 QA팀에도 업데이트 소식을 전달했다.
“그럼, 어디······.”
“또 테스트하려고?”
“그럼요. 이게 진짜지 않습니까.”
점검 동안 일반 유저들은 접속할 수 없지만, 개발자 계정은 접속이 가능하다.
업데이트를 굳이 점검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것이다.
1시간 남짓한 점검시간 동안 개발자들은 마지막 점검을 시작한다.
업데이트 전의 가장 중요한 순간.
“행운 시스템, 오케이. 텍스트 깨짐 오케이.”
‘볼수록 신기하다니까.’
보면 볼수록 묘한 재주였다.
왼손으로는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오른손으로는 모니터에 띄운 체크리스트를 굉장한 속도로 점검해나가기 시작한다.
“표차장은 대체 어디서 그런 재주를 배운 거야?”
어떤 업계, 어떤 직종을 막론하고 이따금 주변을 놀라게 하는 달인의 경지에 도달한 재주를 선보이는 이들이 있다.
지금 표세인이 선보이는 재주 또한 그런 느낌이었다.
“오케이, 끝났습니다.”
-QA팀 끝났습니다.
파트별로 나뉘어 점검하는 QA팀보다도 표세인의 체크가 빨랐다.
“야, 완전 일당백이네?”
“그냥 잔재주입니다. 예전에 홍대리랑 둘이서 외주업무 진행할 때, 진짜 하루, 하루가 피 말랐거든요. 그리고 QA팀처럼 깊게 보지는 못하죠.”
라고는 하지만, 지금까지 QA팀들도 캐치 하지 못한 소소한 버그들까지 모조리 색출해낸 장본인이지 않나?
“서버 다시 오픈해.”
“네 알겠습니다. 서버 오픈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서버가 새로 열리며, 신규 버그 픽스에 대한 공지 또한 올라갔다.
-신규 컨텐츠가 없네?
-신규 아이템도 없네?
유저들의 초기 반응은 다소 미적지근했다.
-버그를 잡았다고? 과연?
-얘네는 항상 버그 하나 잡으면 또 다른 버그 만들어 오잖아. 오히려 두려움. ㅎㄷㄷ
그간의 불신감이 터져 나오기도 하고.
-장난치냐! 업데이트를 날로 먹으려고 하네?
-이제 이 게임 손 놓겠다는 거야?
신규 컨텐츠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투덜거림도 이어진다.
어쨌든 마냥 환영받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괜찮을 겁니다.”
“으응······.”
표세인의 격려에도 한명수는 크게 기꺼워하지 않았다.
겉으로 외향적으로 보이는 사람일수록 실제 성격은 내성적인 경향이 있다.
한명수는 전형적인 외강내유형 성격이었다.
“표차장은 불안하지 않아?”
“전혀요.”
“그, 그래?”
짧은 기간에 불과했지만, 한명수의 내면에는 어느샌가 표세인이 정신적 지주처럼 자리 잡은 상황, 표세인의 자신감 있는 미소에 한명수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표차장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
*
*
‘아, 불안하다.’
한팀장을 달래기 위해 조금 허세를 부렸지만, 나라고 왜 불안하지 않겠나?
하지만 내가 바로 이 플랜을 주도한 장본인이 아니던가?
기획자는 어느 때라도 불안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나는 짐짓 의연한 자세로 게임 로그를 주시했다.
“쫄리세요?”
홍대리가 능글 맞은 얼굴로 말했다.
“알면서 뭘 묻냐?”
신규 프로젝트의 첫걸음이다. 어찌 불안하지 않겠나?
“긴장 푸세요. 뭐 망한다고 차장 진급 취소되는 것도 아닌데.”
대신 부장 진급에 빨간 줄 긋는 거지. 뭐, 벌써 부장 승진 걱정할 짬밥은 아니지만.
“그러는 너는 잘 되어가고 있냐? 클래식 빌드도 초읽기야.”
내 말에 홍대리는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래, 그쪽도 지금 눈 돌아가게 바쁘지.
“아무튼, 잘 하고 있어 봐. 이쪽 일 끝나면, 그쪽도 좀 신경 쓸게.”
“안 그래도 그 말 하려고 했어요. 요즘 너무 저를 신경 안 쓰시는 것 아닙니까? 저 홍기도라고요?”
아, 문이사가 자기 이름 들먹일 때는 별생각 안 들었는데, 얘가 하니까 진심으로 조금 두렵다.
“그러고 보니, 우리 소고기 한 번 먹기로 했지?”
“오오! 드디어! 솔까, 반쯤 포기했는데, 그래도 차장 다셨으니, 지갑 사정 좀 나아지신 모양이네요?”
아직 차장 월급 안 들어왔다.
“그래. 이번 주 금요일에 기획팀 회식 한 번 할까?”
지난번 체육대회는 딱히 기획팀 회식이었던 것도 아니고, 그간 바쁘다는 이유로 기획팀 회식을 하지 않은 것은 나도 약간 부채의식이 있던 참이다.
“콜!”
“너야 언제나 콜이고, 남궁대리나 함송희씨에게도 말해서, 잘 조율해봐. 힘들다고 하면 너무 밀어붙이지 말고, 그냥 둘이서 따로 한잔하던가.”
“오, 오랜만에 우리 콤비 친목회입니까?”
우리가 콤비라고 생각했던 거냐? 트레이너와 홍켓몬의 관계가 아니고?
“아! 그런데 너 남자끼리 술 먹는 것 싫어하지?”
“에이, 차장님이 어디 남자인가요.”
그건······. 보통 이성에게 쓰는 멘트 아니냐?
아니, 신경 쓰지 말자 이 녀석과 오래 말을 섞어봐야, 정신만 산만해진다.
“알겠으니, 가서 물어봐.”
“라져!”
홍켓몬은 콧노래를 부르며 사라졌다. 저 녀석도 요즘 클래식 빌드 컨트롤 하느라, 바쁠 텐데, 어째 바쁘든 한가하든 티가 안 나는 놈이다.
“저걸 일을 잘한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뺀질이라고 해야 하나······.”
홍켓몬은 늘 그렇다. 대박은 없어도 언제나 쪽박치는 경우 없이 일정한 텐션을 유지하는 것이 녀석의 업무 스타일이다.
“표차장.”
“네? 아, 부장님.”
어느새 이렇게 가까이 왔지? 내가 피로가 쌓이긴 한 모양이다.
하부장이 내 자리까지 찾아온 것도 모르고 멍하니 있었다.
“내방으로.”
“예.”
나는 부장실로 불려갔다.
“어떤 것 같아? 유저 반응은 어때?”
“이제 막 업데이트했으니, 조금 더 지켜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싱긋 웃었다. 이건 진짜 웃음이다. 한팀장이나, 하부장이나 대범한 캐릭터는 아니다.
이런 유형은 섬세한 업무에는 강하지만, 사실 리더쉽 부분에서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그렇기에 더욱 단호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불안한 마음에 딴생각이라도 품으면 곤란하지.’
이럴 때 있을수록 고삐를 단단히 쥐어야 하는 법!
게다가, 노림수가 없는 것도 아니지 않나?
“부장님.”
“응?”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건 분명히 되는 일입니다.”
얼마 전 양실장이 내게 해주었던 멘트를 떠올린다.
뭐, 정확히 같은 의미는 아니겠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버그 픽스에 이은, 클래식 빌드 후속타. 이거 보증수표입니다.”
어느새 가능성이 보증수표로 돌변한다.
“이미 윗선까지 통과된 기획입니다. 그리고 하부장님께서 고삐를 단단히 조여주신 덕분에 일정도 예상보다 빨라지지 않았습니까? 잘 되고 있습니다.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확실해?”
“예. 확실합니다.”
다행히, 책임 운운하는 소리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하부장은 지난번 +2 화염검 포스는 온데간데없이 피시식! 허연 연기를 뿜으며 열기가 식어버린 상태였다.
‘역시 말장난만으로 완전히 안심시키는 것은 무리겠지.’
그나마도 근래 내 이미지가 나쁘지 않은 덕분에 이 정도 선에서 정리가 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도 뭔가 확실한 건수 하나가 더 있으면 좋겠는데······.’
그때였다.
“표, 표차장!”
“?”
한팀장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부장실에서 표차장부터 찾냐?”
하부장이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부, 부장님 뭔가 이상합니다.”
“뭐, 뭔데? 사고라도 터졌어? 설마 서버 떨어졌냐?”
서버에 관련된 상황은 무엇이든 최악이다. 물론 유저들의 플레이 타임 자체가 사라지는 롤백 사태가 가장 위험하지만, 그저 작은 접속 문제도 충분히 치명타다.
서버라는 말이 나오면 심장부터 덜컥 내려앉는 것이 이 업계의 특성 아니겠나?
그것은 나라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다.
“무슨 일이십니까?”
“운영팀에서 로그를 보냈는데······.”
“휴우, 서버 문제는 아니구나.”
하부장이 천주교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성호를 긋는 모양새가 무척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뭔데? 접속이 팍 늘었어? 아니면 줄었어?”
“그, 그런 게 아니고······. 저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는데······.”
“아이고, 이 답답한 사람아, 그냥 말을 해!”
하부장은 속 터진다는 듯이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매출이 치솟고 있습니다.”
“어?”
“어?”
이건 나도 놀랐다.
“매출이 왜?”
“설마 니들 나 몰래 신규 아이템이라도 추가했냐? 뭐 새로운 랜덤 박스라도 들어갔어?”
이 바쁜 와중에 어떻게 그런 일을 벌이겠나?
아이템 하나를 추가하려면 거쳐야 하는 테스트만 해도 산더미다.
버그 픽스 만으로도 프로그램팀은 전멸 직전인 상황이다.
“정확히 뭐 때문에 매출이 상승하는데?”
“아이템 판매량이 평소 3배입니다.”
“3배?!”
와······. 이 정도까지 생각은 못 했는데?
*
*
*
한 유저는 생각했다.
“그동안 들쑥날쑥하던 행운 아이템의 버그가 수정됐다?”
이것의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순히 주사위 놀음에 불과하다고는 하지만, 고인물들에게 모두의 부동산은 엄연한 전략 게임이다.
보다 높은 승률을 위해 필승 메타를 연구하거나 상황에 맞춰 다양한 아이템을 이용한다.
그중에서도 행운 아이템은 주사위 눈값이나 자금 획득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핵심 아이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용이 안 되거나, 효과가 들쑥날쑥하다는 평가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유저들이 왕왕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 그 버그가 고쳐졌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것 없이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었던 승률에 큰 차질이 빚어진다.
하지만 반대로 빠르게 손에 넣는다면? 한발 늦은 이들을 상대로는 순조롭게 순위를 상승시킬 수 있다는 것!
“이러면 이거······. 얘기가 달라지지.”
행운 아이템을 얻는 방법은 뽑기 시스템을 이용하는 것.
그동안 쟁여놓은 루비의 사용처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떠라! 떠라! 행템(행운 아이템)!”
닫혀있던 유저들의 지갑이 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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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