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김차장님 나가시죠.”
퇴근 시간이 되자, 김순영의 곁으로 한 직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윤현창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김순영 곁으로 다가갔다.
오늘 개발2실에 퇴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체육대회가 끝나기가 무섭게, 윗선에서 내려온 숨 막히는 크런치 요구에 개발2실 전체가 며칠째 야근을 하고 있었다.
“식사하러 가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혹시 저희도 함께.”
윤현창이 말한 저희란 항상 함께 다니는 해병대 콤비를 일컬은 말이었다.
“오늘은 ‘그런’ 자리가 아닙니다. ‘서울대’ 동문끼리 함께 하는 자리입니다. 가끔 보면 윤과장님, 참 눈치 없어요?”
김순영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사원도 함께 피식 웃었다.
‘아, 이 빌어먹을 놈의 서울대 새끼들.’
과거 IT산업 초장기, 정부는 해당 산업에 막대한 지원을 약속함과 동시에 방위산업 특례라는 혜택을 무한정 배포했다.
덕분에 게임사들은 서울대 출신의 인재들을 방위산업 특례를 미끼로 확보할 수 있었다.
회사의 격을 높이고 싶었던 몇몇 회사는 전공도 무관하게 서울대 출신들을 입사시킨 후에, 프로그래밍 공부를 따로 시켰을 정도.
그리고 현재, 그렇게 게임업계에 자리를 잡은 서울대 출신들은 독특한 유대감을 자랑하며 자신들만의 라인을 확고하게 다져놓은 상태.
여기에는 평소에 함께 어울리는 무리에 대한 의리 따위는 없었다.
“그, 그럼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예. 윤과장님도 맛있게 드십시오. 가죠.”
김차장은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렸다.
“예. 그런데 저분 동문 아니셨어요? 항상 함께 어울리시기에, 그런 줄 알았습니다?”
“같은 팀이니까, 챙긴 거지요.”
“이야, 김차장님은 역시 주변 관리에 철저하십니다.”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김순영의 등을 보며 윤현창은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이거 제대로 삐딱선인데······.’
맥베스로 넘어온 이후,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송부장의 소개로 알게 된 김순영은 그럭저럭 든든한 라인을 쥐고 있는 남자였다.
그 밑에서 굴러들어온 돌이라는 주홍글씨를 지우고 날개를 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표과장, 아니 표차장을 처음 만났을 때도, 학벌을 들먹였었지?’
그때는 자신 역시 줄을 잡기에 여념이 없어서 김순영의 캐릭터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전형적인 명문대 자부심에 도취한 남자였다.
평소에는 프로그램팀 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을 포함한 해병대 콤비들과 함께 행동하지만, 가끔 이렇게 선을 긋는다.
게다가 프로그램 팀장과는 소 닭 보듯 하는 관계인지라, 김순영 라인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그가 없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자신들이 붕 뜬 처지가 되어버린다.
‘줄을 잘 못 섰어. 표세인 그놈은 차장까지 달고 승승장구하는데, 이게 무슨 꼴이야?’
지난번 체육대회 이후 차장으로 승진해버린 표세인을 생각하니, 절로 속이 쓰리다.
안 그래도 표세인의 차장 진급을 두고 이곳저곳에서 말들이 많은 상황이었다.
‘결론은 양실장이겠지.’
체육대회로 승진이 결정됐다는 말을 누가 믿겠나? 결국은 양실장이 표세인을 팍팍 밀어준 것이 틀림없다.
‘아, 오늘은 일단 이팀장에게 붙어야 하나?’
윤과장은 슬쩍 이팀장을 바라보았다. 해병대 콤비는 이런 상황에 익숙한 듯, 김순영이 없을 때는, 다른 동기들과 시시콜콜한 농담을 나누며 그들 사이에 녹아 들어간다.
하지만 굴러들어온 처지라는 딱지를 극복하기 위해 김순영에게 올인한 윤현창은 그동안 그런 작업을 게을리했다.
“그럼, 우리도 식사하러 가지.”
“예.”
이팀장의 말에 프로그램팀 전원이 업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윤과장은 오늘 누구랑 먹나?”
“에? 아, 그게······.”
슬쩍 끼려고 했는데, 이팀장이 기어코 자신을 지목했다.
백조들 사이에 숨어있던 오리의 신분이 탄로 났을 때의 느낌이랄까?
‘김차장 없다고 지금 여기 끼려는 거야?’
‘눈치 없네.’
해병대 콤비와 윤현창의 입장은 명백히 달랐다.
“아, 아닙니다. 저도 따로 선약이 있어서요.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요. 맛있게 드세요.”
프로그램팀의 시선이 화살처럼 등에 박히는 심정이었다.
‘빌어먹을······. 분위기를 이 꼴로 만들어 놓고 나만 덩그러니 놓고 가다니.’
윤현창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현재 윤현창의 입장이 애매해진 것은 다름 아닌 김순영의 폭주 때문이었다.
“이번 분기, 다들 목숨 걸어야 합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뜬금없이 문이사가 개발2실을 들락거린다 싶더니, 김차장이 이팀장을 제쳐두고 업데이트 일정을 두고 팀원들을 닦달하기 시작한 것.
모두가 침묵하는 와중에 윤현창은 김순영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조했고, 이것이 프로그램팀들의 눈총을 사버렸다.
‘제길, 어쩐다······.’
밥을 혼자 먹는 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일이다. 단순히 외롭다거나 하는 문제 따위가 아니다.
회사생활을 오로지 줄서기로 생각하는 윤현창에게 있어서, 이것은 경험해보지 못한 최악의 위기였다.
“어? 표과장?”
“?”
마침 복도를 지나던 표세인과 마주쳤다.
“아, 아니지. 이제 차장이지.”
윤현창은 씁쓸하게 직급을 정정했다.
“오, 소식이 거기까지 전해졌나? 자, 쌈박하게 한번 불러봐. 표세인 차장님. 한번 해봐.”
평소에도 얄미운 녀석이 오늘은 더 얄밉다.
“나 지금 기분 안 좋다. 번지수 잘 못 짚었어.”
“왜? 무슨 일 있냐?”
지금은 비록 원수지간이 되어버렸지만, 애초에 입사 동기요, 한때는 가까운 사이였다.
신입 시절에는 술잔을 기울이며, 갑갑한 윗선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보다 웬일로 혼자냐? 김차장은? 니 해병대 부하들은?”
“지금 나가리 되게 생겼다. 넌 좋겠다. 좋은 줄 잡아서?”
윤현창의 말에 표세인은 잠시 고민하더니 엄지를 치켜들었다.
“완~~전 좋지! 아, 제대로 라인 탔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었구나? 내가 이제 알았네.”
“고작 그 멘트 생각하려고 뜸을 들인 거냐? 순발력 많이 죽었네.”
“아······. 좀 약했나? 미안하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줄 끊어진 놈, 약 올려 보는 것이 처음이잖냐. 조금만 기다려봐, 내가 더 기똥차게 염장 질러준다. 아, 하필 이럴 때 홍대리가 없네. 이건 걔가 짱인데.”
“뭐야, 너도 팀원들에게 버림받았냐?”
윤현창의 말에 표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다들 바쁘거든. 홍대리는 그래픽팀과 식사하라고 보냈고, 다른 팀원들은 외근이고.”
똑같이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신세인데도, 이렇게나 다르다.
세상 끝난 것처럼 머리가 복잡한 자신에 비해 표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
‘하긴 이놈은 송부장에게 갈굼 당하던 시절에도 저 혼자 당당했지.’
새삼 그릇이 다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아니,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부러웠고, 차츰 질투가 되었다.
“아주, 세상 지 혼자 살지.”
“어? 아니, 무슨 밥 한번 혼자 먹는다고 그런 말까지······. 가만,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니가 나한테 밥을 샀지?”
표세인은 지난번 일이 기억난 듯,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쳤다.
“왜 오늘은 니가 사려고?”
“고민 중. 우리가 그런 거 일일이 갚아주고, 그런 사이인가 계산해 봐야지.”
“미친! 니 주제에 무슨, 또 컵라면이나 사려고?”
지난번 값비싼 오마카세와 자판기 커피를 맞교환했던 일을 떠올리자, 윤현창은 절로 이가 갈렸다.
“아하하! 내가 생각해도 지난번에는 진짜 웃겼는데, 아, 니 얼굴 찍어놨어야 했는데······.”
“뒤진다 진짜.”
지난번 옥상에서와는 정반대 상황, 표세인은 시한폭탄 같은 남자다.
언제 폭발할지 눈에 훤히 보이기 때문에, 그 전에는 오히려 100% 안전하다.
그렇기에 윤현창은 거리낌 없이 자신의 기분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러자 표세인은 아, 뜨거! 하며 한발 물러난다.
현재 표세인 입장에서 윤현창이 무서울 리가 없음에도 그는 분위기를 맞춰준다. 이런 것이 표세인의 인기 요인임을 윤현창은 알고 있다.
큰 그릇이다. 그래서 밉다. 윤과장은 입맛이 씁쓸했다.
“나가자, 내가 산다.”
“뭐?”
“내가 산다고.”
“니가 돈이 어디 있어서?”
자신도 유부남이기에 와이프에게 용돈 받아 쓰는 처지라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표세인이 오랫동안 가족의 채무를 감당하느라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지낸 것쯤은 알고 있었다.
“우리가 서로 지갑 사정까지 걱정해줄 사이는 아니잖아?”
“이래놓고 구내식당 갈 거지? 아니면 김밥 지옥?”
“에이, 나 차장이에요. 윤과장님. 정신 차리세요. 차장이 과장한테 가오 떨어지게, 그렇게 하겠어?”
“씨발, 차장 다니까 좋냐?”
“그럼, 기분 째지지. 아, 너는 모르겠구나. 내가 설명해줄게. 인트라넷에 사내공고 떴을 때, 내 이름 석자 뒤에 차장이라고 딱 박혀있는 것을 봤을 때, 진짜 심장이 막!”
“적당히 해라.”
“미안, 미안. 근데 오늘은 내가 사니까, 계속 들어. 내가 자랑할 곳이 없거든. 체육대회 끝나고 여자친구랑 부모님 댁에 갔거든? 그런데······.”
아, 이 미친 똘아이. 그냥 혼자 먹을까? 윤현창은 생각했다.
하지만 공짜 밥이라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표세인과 보폭을 맞추고 있었다.
‘진짜 싸구려로 퉁치기만 해봐, 아주.’
*
*
*
업데이트는 끝났지만, 아직 버그픽스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1차는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2차 픽스까지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김밥과 에너지 드링크로 끼니를 때우며 오늘도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프로그램팀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기획자인 내가 곁에서 함께 하고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비효율. 허례허식. 모두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 언제나 이성적일 수는 없다.
우리는 야근 하는데, 지들은 집에 가? 라는 생각이 프로그래머들의 뇌리에 싹트는 순간, 작업 효율은 현저하게 떨어진다.
덕분에 나는 오늘도 야근할 생각에 홀로 대충 끼니를 때우려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러다 마침 윤과장을 발견했다.
딱 봐도 불만 가득한 얼굴. 아마도 체육대회에서 내가 설친 덕분에 입지가 좁아진 것이겠지.
녀석도 사실 발재간은 좀 있는 편이다. 신입 시절에는 그래도 나와 보조를 맞출 수 있는 몇 없는 사람 중에 하나였으니까.
‘가만, 지금 저 녀석이 있는 개발2실이 문이사 라인이지?’
양실장과의 내기가 시작된 이후, 문이사가 구두 굽이 닳도록 개발2실을 들락거리며 그곳을 들쑤시고 있다는 소식은 내 귀에까지 전해졌다.
‘이참에 와드(ward) 하나 심어?’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하지 않던가? 윤과장이 어떤 고급정보를 쥐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한 눈에도 낙동강 오리알 신세라고 주변에 광고라도 하는 듯한 표정.
게다가 조금 전 연아와 주고받은 메시지 때문에라도 김밥 지옥에서 때우는 것도 고민되던 참이었다.
-일 방해하고 싶지 않으니까, 야근하지 말란 말은 안 할게. 그래도 밥은 제대로 먹어. 그 카드 아끼지 마. 반대로 어머니가 내가 선물한 백을 사용하지 않으시면, 내 기분이 좋겠어?
김밥에 야채 들었으니, 몸에 좋은 거 아님? 이라고 썼다가 황급히 지웠다. 이런 쓸데없는 농담보다는 순종 모드가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비싼 거 먹겠습니다! 먹어도 되겠습니까?
-사진 찍어서 제출하세요. 기대보다 약하면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마침 이런 상황.
‘뭐, 혼자서 으리으리하게 먹는 것도 모양새 빠지지.’
어차피 유부남 등골 뽑아 먹었다는 생각에 조금 찜찜하던 차였다.
‘그래도, 이놈에게 공짜 밥을 먹여 주는 것은 싫으니까.’
나는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이게 과장일 때는 몰랐는데!”
“과장인 너는 모르겠지만!”
“과장과 차장의 차이가 뭔지 알아?”
중간부터는 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헷갈릴 정도였지만, 어쨌든 윤과장을 약 올리기 위해 나는 최대한 노력했다.
그리고 서서히 윤과장의 뚜껑이 열리려는 시점.
“진짜 적당히 좀······.”
“아, 도착했다!”
“어? 또 여기야?”
지난번 윤과장이 내게 오마카세를 쐈던 바로 그 일식집이었다.
“런치 메뉴 보다, 저녁 메뉴가 더 비싸단 것은 알지?”
오히려 윤과장이 내 지갑 사정을 걱정해주었다.
“에이, 나는 차장이잖아. 여기 특선 2개하고요. 술은 뭐가 좋으려나?”
“술까지?”
“가볍게 한잔하자.”
일단 경계심을 부수려면 술이지.
“술 먹고 들어가면······.”
윤과장은 야근 업무 중간에 술을 마시는 것이 껄끄러운 기색이었다. 아마도 술 냄새 풍기며 들어가거나, 들어가지 못하면, 김차장이 좋게 볼 턱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돼야지.’
이미 윤과장과 김차장의 갈등은 멀리서도 금이 간 것이 훤히 보일 정도, 살짝 밀기만 해도, 와르르 허물어질 것이 틀림없다.
“여기 쥰마이 한 병.”
“야, 미친놈아 그거 가격이 10만 원도 넘어!”
어, 알아.
설마 한 병에 10만원 넘는 술까지 시켰는데, 발 빼지는 않겠지?
와드 하나 심는데, 이 정도면 싸지.
“궁상 그만 떨고, 한잔하자. 야, 그래도 옛날에는 우리 좀 친했잖냐. 나는 지금도 가끔 그때 생각난다. 그땐 우리 자주 마셨잖아.”
“그, 그러냐.”
아니. 미안. 지금 처음 생각했어. 그것도 억지로······.
“고생 많지? 너나, 나나, 굴러들어온 처지에 이래저래 눈치 볼 일도 많고······.”
나는 서서히 공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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