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이건 좀 긴장되네.’
회장님이 부르신다는 양실장의 연락을 받았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혼자서 회장실 직통 엘리베이터를 탄 순간부터 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굳이 혼자서 오라고 하신 이유는 뭘까?’
지금까지 회장실을 방문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양실장의 동행이라는 포지션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부름을 받고 단독으로 회장실로 향하고 있다.
자격을 얻지 못한 자는 결코 발을 들일 수 없는 금역.
최종보스의 거처!
하지만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반가운 얼굴을 보게 된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도 시크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연아다.
‘주변에 사람도 없는데······.’
아무도 없는 비서 데스크에 앉아 업무를 보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문득 연아가 평소 외롭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을 반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지만, 막상 또 출근하면 반가운 얼굴들이 있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업무를 처리하는 것은 그 나름의 재미가 있기 마련.
하지만 언제나 혼자서, 업무를 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요.”
“네?”
내가 데스크에 두 팔꿈치를 얹고 얼굴을 연아 쪽으로 향하자, 연아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 마.’
‘할 건데.’
‘하지 말라고 했어.’
‘한다고 했어.’
나는 몸을 빼려는 연아의 손을 잡고 더욱 몸을 기울여 그녀와 입술을 포갰다.
순간 그녀의 몸이 살짝 떨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내 포기한 것인지, 얌전히 눈을 감았다.
짧지만 한편으로는 결코 짧게 느껴지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에 나는 몸을 일으켰다.
“아빠······. 아니, 회장님께 들키면 정말 농담으로는 안 끝나. 족벌경영 소리 듣기 싫어서라도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알아.”
지금까지 회장님의 보상은 확실했다. 그 말은 반대로 벌칙도 확실할 것이라는 의미다.
지난번 양실장이 말한 대로, 동남아 발령도 각오해야 할지 모른다.
“나 동남아 지사로 발령 나면, 같이 가줄 거지?”
“요즘 영상 채팅 화질 좋대.”
연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하긴 그렇게 되면 너라도 제대로 벌어야지.”
“그럼! 청소 잘하지?”
“하, 원래 군 생활 제대로 한 애들은 여자보다 청소 잘하거든? 너는 상대도 안 돼.”
“모르지, 안 해봐서. 해보면 나도 잘할 수도 있어.”
그래. 청소를 안 해봤구나. 전부 이모님이 해주시는구나.
가끔 보면 확실히 부잣집 딸이라는 티가 난다.
“진짜 나중에 네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조신하게 집안 살림이나 하며 살고 싶다.”
“풋,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긴.”
왜 웃지? 진심인데?
“알겠으니, 이제 그만 들어가.”
“알겠어. 다녀올 게.”
나는 회장실 앞에서 가볍게 목을 좌우로 스트레칭 한 뒤, 노크했다.
“왔냐?”
“부르셨습니까?”
회사의 정점이자, 자신의 손으로 국내 최고의 반열에 오른 게임 회사를 일궈낸 인물이 그곳에 있었다.
겉모습은 60대 남성치고는 군살이 별로 보이지 않는 날씬한 체형.
키는 작지만, 특유의 생생한 눈빛 때문일까? 실제보다 한없이 커 보이는 인상.
IT업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자산가인 동시에······.
‘예비 장인어른.’
자택을 방문했을 때와는 또 다른 감상이다. 회장과의 독대.
좀처럼 익숙해질 만한 상황은 아닌 것이다.
‘그래도 익숙해져야지.’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나도 연아가 우리 부모님께 하듯이, 스스럼없이 다가가고 기회를 틈타, 애교도 부려야겠지.
“뭐하나?”
내가 잠시 딴생각에 잠긴 것을 알아챈 모양.
“감히 회장을 앞에 두고 딴생각을 해?”
“죄송합니다.”
“무슨 생각 했냐?”
“예비 장인어른과의 향후 커뮤니케이션 방향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내 말에 조회장은 피식 웃었다.
“예비 장인과 향후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할 예정인가?”
“얼마 전에 연아와 함께 부모님을 뵈러 갔습니다. 차장 진급 소식도 전해드릴 겸 해서요.”
“그래, 체육대회 끝나기 무섭게 집으로 뛰쳐 가더니, 뭘 바리바리 싸 들고 집을 나서더구나. 그래서 부모님께서는 기뻐하시던?”
“저희 부모님 스타일이 막 대놓고 기뻐하시지는 않는데, 은근슬쩍 맛난 반찬을 제 쪽으로 밀어주시더라고요. 동생 놈이 삐져서 툴툴댔죠.”
“화목하구만.”
“네. 그런 편입니다.”
“그래. 그게 최고지.”
조회장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디 편찮으신 곳은 없으시고? 두 분 모두 건강하시지?”
“예. 건강하십니다.”
“매년 건강검진은 잘 받으시나? 그······. 우리 회사 복지 제도 중에 가족 건강 관련해서, 이것저것 있지 않나?”
“안 그래도 조만간 그 유명한 맥배스 복지 혜택 좀 누려볼 계획입니다.”
“그래, 기껏 돈 들여서 만든 시스템인데, 이용해야지. 그리고 내가 준 카드.”
“네.”
“아끼지 말고 사용해, 가끔 부모님 몸에 좋은 것도 사다 드리고, 모처럼 로또 맞았는데 효도해야지.”
“로또요?”
“어쭈? 연아가 너에게 로또가 아니다, 이거냐?”
아니, 그게 아니라······.
로또 너무 작잖아요. 그거 1등 해봐야, 10억? 20억? 뭐 그 정도나 되나?
맥배스 회장 딸, 클래스가 고작 로또라니, 말이 안 되죠.
“사실 그런 부분은 연아가 잘 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난처할 정도로요. 저도 회장님께 뭘 해드려야 하는데······.”
나는 슬쩍 조회장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원하는 건, 내 입으로 말할 테니, 쓸데없는 일에 골치 썩을 필요 없다.”
요컨대, 시키는 일이나 잘하란 말이다. 뭐랄까······. 편해서 좋다?
“그래도 조만간 한번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왜?”
“연아가 저희 부모님에게 점수를 저렇게 따는데, 저도 득점 좀 해야죠. 안 그래도 이미 한참 뒤처져 있는데······. 협조 좀 부탁드립니다.”
“크큭. 아주 심판 매수할 기세네?”
“매수 가능합니까? 저 요즘 좋은 카드 한 장 들고 있어서, 돈 걱정 없는데.”
내 어쭙잖은 농담에 조회장은 흰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공과 사는 구별해야지. 밖에서 만나면 회사 일은 잊어라.”
“명심하겠습니다.”
뭐랄까, 드디어 예비 장인과 예비 사위다운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럼, 이제 일 이야기로 돌아가지.”
“예.”
조회장은 만년필 같은 것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뭐지? 나 주려고 꺼낸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아, 이거 녹음기야. 신경 쓰지 마.”
노, 녹음기요? 대뜸 녹음기를 꺼내고 신경 쓰지 말라고?
조금 전까지는 뭔가 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는데, 갑자기 녹음기?
“내가 요즘 기억력이 예전 같지가 않아서, 중요한 대화는 이놈에게 좀 의지하는 편이지. 긴장할 것 없어.”
회장이 녹음기를 꺼냈는데, 직원이 어떻게 긴장을 안 합니까?
원래 부자들은 이런가? 세상 낯선 관습이네.
“그러고 보니 곧 점심시간이군. 자네는 뭐 좋아하나? 젊은 사람이니, 역시 고기인가?”
녹음기까지 꺼낸 뒤에 첫 질문이 좋아하는 음식? 뭐지? 이거 교란 작전인가?
마왕의 술책은 실로 교묘하여, 순박한 용사는 도무지 갈피를······.
내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하도 황당해서 잠깐 이성이 날아가 버렸다.
“고기를 제일 좋아하긴 하는데, 나가서 주로 먹는 것은 생선입니다.”
“왜?”
“저희 부모님 고깃집 운영하십니다.”
부모님은 신림동에서 오랫동안 정육점을 운영하셨고 수년 전 정육식당으로 업종을 변경하셨다.
덕분에 어려서부터 나와 내 동생 놈은 고기 하나는 남부럽지 않게 먹고 자랐다.
운동하는 애들이 으레 그렇듯이 고기 뷔페라면 사족을 못 쓰지만, 나는 고기 뷔페가 싫다.
고기 뷔페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집에서 맨날 먹는 고기를 밖에서 돈 주고 또 사 먹는 것이 싫을 뿐.
물론 비싼 고기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아! 그랬지. 들었는데, 그 둘을 따로 놓고 생각하고 있었군.”
조회장은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생선으로 하지, 오늘 식사나 함께하자고.”
갑자기 웬 식사? 아니, 뭐 밥 사주신다는 데, 거절할 생각은 없는데, 정말로 이런 이야기에 녹음기가 필요한가?
“게임은 어떤 장르를 좋아하나? MMO? 오픈 월드? 근래 가장 재미있게 한 게임이 뭐야?”
이번에는 갑자기 게임 회사 면접 때나 들을 법한 주제로 넘어갔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회장의 질문에 답하지도 않을 수 없는 노릇.
나는 조회장의 질문에 조목조목 대답하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AAA급 게임은 죄다 오픈월드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MMO나 FPS 같은 시나리오 없는 단순 경쟁 장르는 좀 손이 덜 가게 되더라고요.”
“왜? 보니까 잘할 것 같은데?”
예. 살면서 게임 못한다는 소리는 못 들어 봤습니다.
“어려서부터 운동한 덕분에 항상 치열한 경쟁에 시달린 탓인지, 게임을 하면서까지, 사람들과 경쟁하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좀비로얄도 경쟁이지 않나?”
“일은 다르죠. 어떤 게임을 만들든지, 유저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저희의 사명 아니겠습니까? 머리 쥐 나게 아이디어를 짜면서도, 유저들이 기뻐할 생각을 하면 힘이 나는 법이죠.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알지, 하도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조회장은 동의한다는 듯이 끄덕였다.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게임 외의 취미에서부터, 이전 회사에서 맡았던 업무와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교우 관계와 운동하던 시절의 이야기까지······.
‘뭐지? 이건 거의 취조 받는 느낌인데?’
면접이라 하기에도 지나칠 정도의 세세한 질문이었다.
“그렇군. 이런 캐릭터였군.”
“······.”
상황파악이 덜 된 탓에 나는 그저 조회장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조회장은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전화의 어떤 버튼을 눌렀다.
‘전화를 걸지 않고 버튼만 눌러? 뭐지?’
하지만 대화의 배경에 비하면 큰 의문은 아니었고, 업무 모드인 이상, 회장에게 질문할 짬도 아니니 그저 오도카니 회장만 바라볼 뿐.
“지난번 체육대회부터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자네를 너무 오판했던 것 같아.”
“오판이요?”
“내 실수야. 내가 자네를 너무 얕봤어. 그래서 이번에는 제대로 준비해보려고.”
아, 이거 칭찬이라고 생각해도 되나? 상당히 불안해지는데?
“다음 퀘스트는 조금 다를 거야.”
하지만 나도 참 문제다. 퀘스트라는 말이 나오자, 살짝 가슴이 요동친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회장님과의 게임. 이거 재미지다. 살면서 이렇게 즐거웠던 적은 손에 꼽을 정도.
나이를 먹을수록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즐거움들은 점차 밋밋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회장님과 게임을 시작한 이후로 하루, 하루가 얼마나 즐거운가?
“기대하겠습니다.”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그러자 회장님도 피식 웃었다.
“고작 한, 두 번 클리어했다고, 자신 있다, 이거냐?”
“자신보다도, 재미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 나도 요즘 네 녀석 덕분에 재미있다.”
“그러고 보니, 요즘 TRPG 마스터링 준비하신다고······.”
“하하, 연아가 그러더냐?”
연아만이겠습니까? 양실장도 그러던데요?
“그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나도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감이 많이 무뎌졌어. 은퇴 복귀전인데, 배려 좀 해줘.”
대체 뭘 어떻게 준비하고 있기에, 복귀전이라는 거창한 단어까지 사용하시는 걸까?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저도 명색이 기획자인지라, 관심이 많습니다.”
“일단 플레이하는 것 지켜보고 판단하자. 룰북은 사서 읽었냐?”
“네. 틈틈이 읽고 있습니다.”
내 말에 조회장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기획자에게 도움 많이 된다. 읽어둬서 손해 볼 것 하나 없어.”
보드게임의 역사는 비디오게임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 오랜 시간 오직 누군가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한 노하우의 집합체.
당연히 기획자에게는 바이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추천해주신 것 말고 다른 룰은 예전에 몇 번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기회가 없어서 플레이해본 적은 없었지만요.”
“그래. 그래. 이건 그냥 내 취미니까······.”
예. 저도 부담 없이 즐기려고 생각······.
“똑바로 해라.”
···하면 안 되겠군요. 퇴근 후에 연기 수업이라도 수강해야 하나?
가끔 이렇게 취미에 진심인 사람은 무섭다. 오히려 업무보다 이게 더 긴장되다니······.
“그래서 다음 퀘스트 말인데.”
“예.”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예비 장인과 예비 사위로서의 대화도 좋지만, 솔직히 이것이야말로 나와 회장님 사이의 메인 이벤트가 아닌가?
“영어는 좀 하나? 아니면, 다른 외국어라도?”
아······. 결국 올 것이 왔구나. 내가 이것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체대 출신이라는 족쇄가 내 발목을 잡는다.
이런 것이 바로 엘리트 체육의 비애 아니겠나? 남들 공부할 때, 체육관에서 땀 흘리기 바빴던 탓에 남들 다 하는 영어는 알파벳 겨우 외는 수준에 불과하다.
“전혀 모릅니다. 초등학교 영어 시험도 자신 없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확실하게 말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허세로 무장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불가능한 일이 있다.
나에게 영어가 바로 그런 부분이다.
“잘됐네.”
“?”
“그러면 난이도 패치 적절하겠어.”
“?”
“해외 출장 좀 다녀와.”
“해, 해외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영어 한마디도 못 한다고 분명 말씀드렸는데?
“저 영어 못한다고 분명히 말씀을 드렸는데요?”
“어. 그러니까 난이도 패치가 적절히 된 셈이잖아.”
“?”
대체 무슨 꿍꿍이지? 아무리 그래도 귀머거리에 벙어리를 어디에 쓰려고?
“어디로요? 아니, 그보다 얼마나? 아니, 아니, 출장 내용이 뭐죠?”
영어라는 말에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렸다. 아아, 체대생 후배 여러분, 영어는 하셔야 합니다.
틈틈이 영어는 해두세요.
“네놈이 당황할 때도 있구나?”
내 일그러진 얼굴을 본 조회장은 신난다는 듯이 낄낄 웃었다.
“자, 함께 밥 먹으러 가지! 오늘 아주 밥이 맛있겠어!”
“아직 시간이······.”
“나 회장이야.”
네, 뭐······. 그렇네요.
나는 조회장과 함께 회장실을 벗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연아가 물었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다르다. 얼굴은 애써 평온을 유지하고 있지만, 주먹이 살짝 떨린다.
뭔가 분한 것을 참고 있을 때의 느낌이랄까?
“이 녀석과 밥 먹으러 간다.”
“두 분이서요?”
“셋이서. 너도 함께 가자.”
“저도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연아도 조금 당황한 듯.
“니들에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같이 가자.”
“알겠습니다.”
연아도 함께?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부신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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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드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