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확실한가?”
“예, 아무리 계산해봐도······.”
문상훈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알겠어. 그만 나가 봐."
"예..."
패배였다. 확실한 패배였다.
자신이 미국에 가 있는 사이, 한국 유저들의 체질 변화를 완전히 놓치고 있었다.
더 이상 겉만 번지르르한 미끼에 미친 듯이 달려들 던 호구들로 가득한 시장이 아니었다.
물론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쾅!
문상훈이 눈앞에 있는 키보드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이럴 수는 없어······. 천하의, 천하의 문상훈이가 패배했다고?”
문상훈은 눈을 부릅뜨고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개발2실과 개발3실의 실적. 양쪽 모두 확실한 성장세를 나타내고 있었으나, 승패는 명확했다.
“빌어먹을! 으아악!!!”
문상훈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키보드를 때려 부쉈다.
코딩에서 손을 뗀, 이후로는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나쁜 습관.
“하아······.”
문상훈은 의자에 몸을 기댄 후, 다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한참을 미쳐 날뛴 덕분에 다소 진정이 되었다.
“패배라······.”
패배였다. 확실한 패배였다.
100배 이벤트 개시와 동시에 유저들은 앞다투어 지갑을 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 지속 되지 않았다.
블랙프라이데이나, 기타 대형 할인 시즌이 되면 생각 없이 지갑을 열어 제끼는 미국인들과 조목조목 까다롭게 상황을 분석하는 한국인들의 소비패턴은 확연히 달랐다.
그렇다고 문상훈의 계획이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매출 상승은 명백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클래식 빌드의 성장과 그로 인한 오리지널 빌드가 누리는 수혜는 막강했다.
더군다나, 커뮤니티의 평가를 보면 자신의 이벤트에 질린 유저들이 모두의 부동산으로 흘러들고 있다는 평이 지배적이지 않은가.
더 황당한 것은 100배 이벤트로 인한 유저들의 반발심을 같은 회사 게임인 모두의 부동산이 메워 주기에, 별다른 수습 대책도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는 것.
마치 누군가 이 모든 것을 예상하고서 개발2실의 문제까지 수습해준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들었다.
‘설마 양성태는 이것을 예상하고······. 하긴, 그럴 일은 없지.’
아무리 그래도 이런 상황까지 예측하는 것은 무리다. 문상훈은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은 이상무까지 동원해 마케팅 추가 지원까지 막았더랬다.
그에 비해 자신은 이번 이벤트에 얼마나 많은 자원을 동원했던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현재로는 정확한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좀비 로얄의 성장세.
무려 정식출시도 아닌데, 디젤 스토어 베스트셀러를 석권하는 무시무시한 폭주.
곧 정식으로 매출 현황에 대한 발표가 있겠지만, 현재로서 개발2실과 개발3실간의 성과는 확연히 차이가 드러난 상황.
예년보다 비용까지 절감했음에도, 놀라운 성과.
그야말로 회사가 바라는 이상적인 성과 그 자체였다.
졌다. 정말로 핑곗거리 하나 찾을 수 없는 완벽한 패배.
‘졌으면 깨끗하게 인정하자. 나 문상훈이다. 찌질하게 굴지 말자.’
문상훈은 이를 악물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스마트폰을 들었다.
천하의 문상훈이를 쓰러트린 이들이다. 그에 합당한 경의를 받아 마땅하다.
“양실장.”
-예. 문이사님.
“식사 장소는 준비됐나?”
-그렇습니다.
“거기서 보지.”
-알겠습니다.
*
*
*
“내가 졌다. 깨끗이 승복하지.”
문상훈은 앉은 자세에서 고개를 숙이며,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나르시시즘을 지닌 남자답게 패배하는 순간에도 꼴사나운 모습은 보이지 않겠다는 각오가 물씬 배어났다.
“네. 지셨습니다.”
양성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특유의 담담한 태도에 문상훈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재수 없기는······. 그는 역시나 양성태가 지닌 특유의 도도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는 투가 아닌가?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던 일이지요.”
‘얼씨구?’
생각한 그대로 말하는 양성태를 보고 있자니, 문상훈은 어이가 없을 지경.
“하, 양성태 정도 되면 문상훈이 정도 쓰러트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명심해, 여기는 자네의 홈그라운드였어. 내 기반은 미국 지사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순간적으로 깨끗이 승복하려던 자신의 결의가 흔들렸다.
대체 양성태는 어디까지 자신을 농락하려는 걸까?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문이사님은 저에게 패배하신 것이 아닙니다.”
“뭐?”
“문상훈 이사님은 표세인 차장에게 패하셨습니다. 저는 사실 이번 일에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나 문상훈이가 고개까지 숙였는데도, 부족하다 이건가? 고작 차장 따위에게 패배한 거다? 나 따위에게는 손 쓸 필요도 없었다, 이건가?”
자신이 기대했던 아름다운 패배의 그림이 바탕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느낀 것일까? 문상훈의 몸이 살짝 떨렸다.
“오해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조롱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저 확실히 해두고 싶었습니다. 문이사님께 승리를 거둔 것은 제가 아닌, 표세인 차장이라는 것을요.”
“확실히 해둔다고?”
밑에 부리는 사람의 공로는 당연히 관리자의 몫이다.
아니, 애초에 개발자 출신도 아닌 양성태와 어떻게 개발로 승부를 겨루겠나? 그래서 대리인 승부로 약속했었지 않나?
물론 문상훈 본인이야, 직접 나서기는 했었지만······.
“한잔 받으시지요.”
문상훈의 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양성태는 잔에 술을 따랐다.
“흥, 양성태가 이리도 공손히 술을 따르다니, 마치 내가 회장 자리라도 차지한 것 같군.”
조회장의 수발을 드는 양성태를 비꼬는 말이었지만 양성태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묘하군. 나는 상황이 잘 이해가 안 되는데? 내 항복선언을 마다하면서까지, 표차장을 띄우는 저의가 뭐지?”
“부탁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부탁?”
문상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쩌면 부탁이라는 표현은 상황에 맞지 않을 수도 있겠군요. 도움을 드리려 한다는 말이 정확할 수도 있겠지요.”
“도움?”
대화를 이어갈수록 점점 더 맥락을 파악하기 어렵다.
“미국 지사에서 마커스 센터장과 힘겨루기가 한창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커스 헹크. 맥베스 미국 지사의 CEO이며 아메리카 스튜디오의 수장.
본사와는 직위 체계가 다른 탓에 그는 흔히 센터장으로 통하고 있었다.
독립 스튜디오라는 인식이 강한 미국 지사의 수장답게 제어하기 어려운 인물인지라, 그에 대한 대항마로, 야심 넘치는 문상훈을 그곳에 배치해 상호 견제 체제를 이루려던 것이 본래 조회장의 뜻이었다.
하지만 마커스는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고, 개발자 대부분이 미국인인 덕분일까? 본사에서 파견된 문상훈조차 미국 지사 장악에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국 지사 장악에 한 손 거들어 주시겠다? 어째서?”
이번 싸움도 그렇지만, 애초에 문상훈과 양성태는 물과 기름 같은 사이다.
양성태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인형 같은 남자라면, 언제나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성격이 문상훈의 특징이다.
다른 모든 주변 상황을 배제하더라도 두 사람은 기질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런데 도움을 주겠다? 당연히 의심이 먼저 싹트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표세인 차장, 어떻게 보셨습니까? 사심 빼고 문이사님의 안목으로 냉정한 평가를 해주신다면?”
“음······.”
문상훈은 잠시 팔짱을 껸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표세인.
한국에 돌아와 양실장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인물.
다소 이색적인 학벌에 인수합병을 통해 얼떨결에 입사하게 된 남자.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지.’
사내 로비에서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훤칠한 키에 건장한 체격. 인상도 나쁘지 않아서 단순히 곁에 세워두는 용도로만 생각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느낌. 그래서 고작 과장에 불과함에도 직접 영입제의까지 건넸더랬다.
‘그리고 그 후에는······.’
그저 작은 실적용으로 눈여겨보던 좀비 로열이었다. 어차피 인디 개발사의 작품이었고, 눈에 띄는 요인은 있었으나, 그 잠재력은 결코 AAA급 게임에 미치지 못한다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나?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인지, 그 좀비 로얄은 정식출시도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임에도 디젤 스토어 베스트셀러에 등극하는 기염을 토했다.
“지금 텐션을 유지한다면, 차세대 스타 개발자로 이름을 날릴만한 인재지.”
아무리 평가를 낮춘다고 해도, 그 이상 낮출 수는 없다.
“물론 아직 평가 요소가 너무 적고 실적이 미진해. 알잖아? 히트작 하나 반짝 만들어내고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것이 이 업계 특징인 것 몰라?”
하지만 아직 실적이 적다. 놀라운 성과를 거두기는 했으나, 아직은 표본이 한참 부족한 상황.
“그렇지요.”
“그런데 감정평가까지 주문했으니,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지? 나는 본사의 능구렁이 같은 영감들과는 달라, 이런 선문답은 이 문상훈이의 스타일이 아니야.”
나이는 문상훈 쪽이 연상이었지만, 오히려 양성태 쪽이 올드 스쿨에 가까운 면이 있었다.
“미국 지사로 복귀하시는 길에 표세인 차장과 함께 가시죠.”
“뭐?!”
예상치 못한 양성태의 제안에 문상훈은 화들짝 놀랐다.
지금 자신의 오른팔을 적에게 빌려준다고 한 건가?
“반드시 도움이 되실 겁니다.”
“도움······. 도움이라······.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문상훈의 오른팔인 제임스는 어찌 보면 양성태와 가까운 타입이다. 출신 부터가 회계 전문으로 지분싸움이나 내부를 관리 감독하는 일에는 능하지만, 개발자 출신 인재는 아니다.
개발자들은 대체로 순진무구한 경향이 있다. 게임을 좋아해서 발을 들인 경우가 많기에, 사내 정치보다는 눈앞에 놓인 프로젝트의 성공에 열을 올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쓸만한 개발자일수록 그런 경우가 강하다. 한명수 같은 극단적인 타입은 드물지만, 어쨌거나 괴짜 타입이 많은 것은 사실.
쓸만하면서 정치력까지 겸비한 문무겸전의 인재는 좀처럼 드물다.
그 유명한 스티븐 잡스도 첫 직장이었던 아타리에서 다른 개발자들의 성토로, 홀로 야간 출근을 지시받은 일화는 유명하다.
“흐흐흐. 흥미롭군.”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표세인이라는 보검을 휘두를 기회를 어찌 마다할 수 있을까?
“괜찮겠어? 내 쪽에 붙으면 어쩌려고?”
본사에서는 지지기반이 미약했고 시간도 짧았다. 하지만 미국 지사에서라면 다르다. 긴 시간 충분한 공을 들인다면······.
사람 앞일을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양성태는 묵묵히 자신의 술잔을 비우고는 다시금 문상훈의 잔을 채웠다.
“그렇게 하실 수 있다면야, 문이사님의 수완이겠지요.”
“흐흐흐. 재수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내 색으로 물드는 것 정도는 피할 수 없을 텐데?”
“문이사님의 색이 덧씌워지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요.”
이제는 맞장구까지 쳐준다? 문상훈은 지금 자신이 양성태의 장단에 놀아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도도한 양성태가 띄워주는 와중에 표세인이라는 보검을 휘두를 기회까지 손에 넣는다?
“크크큭. 이거 재미있군. 이번 귀국은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횡재를 한 느낌인데?”
이미 문상훈은 표세인을 반쯤 자신의 사람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모쪼록 표세인 차장이 견문을 넓힐 수 있도록 좋은 가르침을 많이 내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하하. 내 손에 쥐어지면 내 사람이지! 신경 끄라고.”
문상훈은 대답 대신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양성태는 초조하지 않았다.
문상훈은 그림자가 없는 사람이다.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가 전부인 사람.
화가 나면 얼굴을 붉히고, 기분이 좋으면 호탕하게 웃는다.
권모술수가 판치는 사내 정치의 한복판을 오직 타고난 기질 하나로 밀어붙여 승승장구해온 남자다.
어찌 보면 한명수 팀장 이상으로 희귀종에 가까운 타입.
하지만 외국에서는 흔한 인재상이기에 미국 지사 발령에는 모두가 이견이 없었을 정도.
그리고 양성태는 그 점에 배팅했다. 문상훈은 표세인을 포섭하려는 욕심 때문에라도, 출장기간 동안 표세인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리라!
이것은 이 시점에서 양성태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 주문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왜 오른팔을 갑자기 내게 맡기겠다는 거지?”
아무리 양성태라도 표세인 차장을 보내서 미국 지사에서 큰일을 도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다.
“이번 일에 한해서 일절 다른 속셈은 없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속셈은 없다?”
“그저 이쪽에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 정도로만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흥, 거창하게 출사표씩이나, 던지더니, 뭔가 일이 꼬인 모양이군?”
이번에는 문상훈이 양실장의 술잔을 채웠다.
남들 눈에는 두 사람 모두 꽃길만 걸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빠른 승진에는, 그만한 드라마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꼬였다라······. 뭐, 예상치 못한 일인 것은 확실하지요.”
양성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조회장과의 대화를 회상했다.
*
*
*
문상훈과 양성태가 대작(對酌)하기 하루 전의 일.
양성태는 조회장에게 뜻밖의 통보를 받게 되었다.
“그놈, 미국 지사로 출장 좀 보내야겠다.”
다름 아닌, 표세인의 미국 출장!
“미국이라고요?”
“그래.”
“표세인 차장이 영어도 가능합니까?”
“크크큭, 그럴 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모습을 보니, 속이 다 후련하더군.”
조회장은 해외 파견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표세인의 표정을 떠올리며 키득거렸다.
“서서히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시점입니다. 지금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것은 시기상조가 아닐는지······.”
“일반적인 녀석들에게는 그렇지. 하지만······. 그놈이라면 또 뭔가 해낼 것 같지 않나?”
“목적하시는 바가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안되지. 너는 이미 선 그었잖냐. 표세인 그놈 뒤에 서겠다면서?”
각오는 했었지만······. 막상 이렇게 음흉한 꿍꿍이가 닥쳐오자, 양성태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모쪼록 처음 드린 부탁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쪽이 어느 정도 체급을 갖출 때까지는 직접 적으로 손 쓰는 일은 지양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알아?”
“네?”
“이번 일로 그놈이 체급을 확 키워 올지?”
조회장은 짙은 미소를 지은 채, 창밖을 바라볼 뿐, 그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뭔가 준비를 해야겠군.’
그때였다. 스마트폰이 진동하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문이사.]
상대의 이름을 확인한 양성태의 머릿속에 한가지 꾀가 떠올랐다.
그는 새로운 마법 주문을 외울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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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안 해도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