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갑작스러운 양실장의 전화.
“여보세요? 양실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문이사에게 항복선언을 받았습니다. 축하드립니다. 표세인 차장님의 승리입니다.
“하하, 양실장님과 문이사님의 승부였지 않습니까? 저야 장기말에 불과하지요. 축하드립니다.”
솔직히 나야 그저 회장님이 내려주신 퀘스트 처리를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양실장의 파벌에 한발 담그긴 했지만, 내가 뭐라고 축하를 받겠나?
-지금은 그런 것으로 하지요.
지금은? 나중이 되면 뭐가 달라지나?
-그리고 출장 건에 대해 들었습니다.
아, 다시 한번 걱정이 물 밀 듯이 밀려온다. 이놈의 영어 울렁증.
“하하, 이번만큼은 저도 좀 긴장되네요.”
-일단 제 선에서 손을 쓸 수 있는 부분은 손을 썼습니다.
“손을 쓰셨다고요?”
-곧 알게 되실 겁니다. 그럼 회사에서 뵙지요. 아마 임원회의에 다시금 참석하시게 될 겁니다.
“그렇습니까?”
-보상받으셔야죠. 아마 퀘스트 클리어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되실 겁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
뭐가 먼저랄 것 없이, 두 가지 모두 기쁘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고생 많으셨습니다.
“양실장님도 편히 쉬십시오.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통화가 끊어졌다.
“누구냐?”
“응. 우리 회사 실장님.”
“그래? 잘 보여라. 지난 회사처럼 밉보이지 말고.”
아버지의 핀잔에 나는 피식 웃었다. 이번에는 다릅니다. 아주 많이 달아요.
나는 오늘 부모님 댁에 방문했다.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상견례에 관해 이야기를 하기 위해.
하지만 그보다 먼저 말해야 할 것이 있다.
“그래서 연아 아버님이 어쨌다고?”
“우리 회사 회장님이시라고.”
나는 부모님과 함께 멸치 내장을 손질하며 넌지시 조회장님에 대해 언급했다.
“그랬구나. 어쩐지, 애가 부티가 나더라.”
뭐지? 이 밋밋한 반응은?
아무리 우리 부모님이 좀 특이한 캐릭터라고는 해도, 이것보다는 반응이 조금 더 있을 줄 알았는데?
“흠흠, 잘 모르시나 본데, 맥베스 조회장님이라고 하면······.”
“IT업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자수성가의 대명사! 국내 게임사 BIG3 중에 자사 주식 보유율 넘버 원!”
갑자기 방에서 튀어나온 동생 놈이 스마트폰의 검색 결과를 줄줄 읊어내기 시작했다.
“형수님 집이 그 정도였어?”
“너 지금 뭐 하냐? 취업준비 안 해?”
“지금 열공하다 나온 거거든?”
“비켜 봐봐, 너 컴퓨터 좀 보자.”
“아, 프라이버시 보호 모름?”
나는 방에 들어가 동생놈의 컴퓨터를 확인했다.
“어? 뭐야. 너 코딩 배우냐?”
“아······. 들켜버렸군.”
“그래, 작년부터 컴퓨터 배운다고 낑낑대더라.”
“어머님! 더이상 말씀하지 마십시오! 무려 8개월 동안 절치부심 공부에 매진하며,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주십시오. 저는 노력을 숨기는 그런 남자입니다.”
세종이는 호들갑을 떨며 나에게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그래, 8개월 동안 공부했다, 이거냐? 잘도 그동안 티 내지 않고 숨기고 있었네.
그런데 그것을 이제 와 폭로한다? 목적은 뻔하다.
“옛다.”
안 그래도 슬슬 용돈 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온 봉투를 내밀었다.
“혀, 형님······. 보, 봉투가 바뀐 것 같습니다?”
평소와는 스케일이 다른 용돈 덕분에 동생놈 주둥이에서 님자가 절로 나온다.
“아껴 쓰란 말 안 할 테니까. 공부에 집중해. 부족해지면 나중에 또 말하고.”
“누, 누구냐 넌.”
헛소리가 길어질 것 같다는 예감에 나도 모르게 로우킥을 살포시 꽂아주고 방을 나섰다.
“크윽······. 자, 잘 생각해라. 나는 돈으로 포섭되지 않는 남자다.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다.”
등 돌리기가 무섭게 후회하게 만들다니, 내 동생이지만 가공할만한 비호감력을 지닌 녀석이다.
“쟤 왜 저렇게 오바냐? 얼마나 줬는데?”
“100만원.”
“뭐?!”
내 예전 봉급 수준으로는, 다소 과한 금액인지라, 부모님도 당황하셨다.
국내 굴지 재벌가와 사돈을 맺어야 한다는 말에는 콧방귀도 안 뀌시던 분들이 고작 동생 용돈에는 이런 반응이라니······.
“엄마랑 아버지도 받으세요.”
나는 지난번 체육대회 상여금과 확 늘어난 월급 덕분에 요즘 지갑 사정이 너무나 풍족했다.
무엇보다, 요즘 내 돈을 쓸 일이 없다. 회장님이 주신 카드 덕분에 버는 족족 통장에 쌓이기만 할 뿐.
“자, 장남아!”
“역시 장남이 집안의 기둥이구나!”
아니, 이 집 말고 처가댁 기둥이 될 예정입니다. 큰일 날 소리 하지 마시죠.
그보다 내가 드린 용돈에 덩실덩실 춤을 추시는 부모님을 보고 있자니······.
회장님께 송구스럽다는 마음이 든다.
‘죄송합니다. 이런 부끄러운 사돈밖에 준비하지 못해서. 제가 좀 더 부모님을 잘 관리해야 했는데······. 크흑.’
어쩐지 상견례가 살짝 걱정된다. 그때도 이렇게 체통 없는 모습을 보이시면 어쩐다지?
“상견례 이야기가 나왔어.”
“상견례?”
“뭐, 당장 결혼 날짜 잡을 생각은 아닌데······.”
“니놈 생각 따위가 뭐가 중요하냐? 연아가 결정해야지.”
아, 용돈 버프가 10초면 끝나다니······. 버프 걸어주는 보람이 없다.
“연아 생각도 똑같거든?”
“근데, 진짜로 연아는 너 같은 놈을 왜 만난다냐?”
“훗, 알다시피 내가 얼굴이 좀······.”
“낳기는 잘 낳았는데, 이것들은 죄다 이상하게 커가지고선. 에잉.”
“이게 다 당신 탓이지.”
엄마의 말에 아버지는 펄쩍 뛰었다.
“왜 내 탓이야? 당신이 낳았잖아!”
“종자가 글러서 그래.”
“꼭 실력 없는 농부가 종자 탓, 하지.”
“당신 닮아서, 운동하겠다고 설치더니, 두 놈 다 올림픽 구경도 못 했잖아.”
와, 팩트 공격 쎄네. 엄마의 일갈에 아버지는 입맛을 다시며 물러났다.
운동 이야기가 나오면 나도 지은 죄가 있는지라, 뭐라고 말을 할 수 없다.
올림픽 대표 선발이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 그런 사고를 치고 자격 박탈을 당했으니, 입이 열 개인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옛날이야기 그만하시죠.”
“맞아! 나는 형이랑 다르잖아. 나는 사고 안 쳤어!”
“맞아. 너는 실력이 없지.”
“이 타이밍에 팀킬?”
“트롤은 팀 아님.”
“와, 진짜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났음을 감사해라.”
“그만 까불고 들어가서 코딩 공부나 계속해라, 그렇게 해서 게임사 취직할 수 있겠냐?”
“형도 들어갔는데, 내가 못할까 봐? 게다가 나는 코딩 스킬을 학습했는데? C++이라고 들어보심?”
세종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놈이 전국체전 금메달 하나를 못 따는 반푼이더라고.”
“내가 유도인들을 너무 사랑하는 마음에 모질지 못해서 그래. 애초에 내가 누구와 경쟁하는 성격이 아니잖아. 누구랑 달리 마음이 넓잖아?”
“맨날 깨지고 징징 짜기나 하더니.”
“언제적 이야기냐!”
“작년에 울었잖아.”
“그런 오랜 과거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시대!”
“헛소리 그만하고 들어가라. 어른들 이야기하는 거 안보이냐?”
“틀딱 셀프 인증임?”
“확!”
내가 몸을 일으키려고 시늉하자, 세종이는 후다닥 달아났다. 그런데 달아나는 방향이 이상하다.
“너 어디 가냐?”
“현종이 만나고 올게!”
“너 아직도 걔랑 붙어 다니냐? 니들 너무 붙어 다니지 마! 동네 땅값 떨어진다고, 이웃들이 싫어해!”
“나, 나의 존재감이 부동산 업계를 움직일 정도라니······.”
이건 지능지수의 문제일까? 아니면 단순히 하도 패대기쳐져서 머리가 망가진 걸까?
어쨌건 세종이는 밖으로 휭하니, 사라졌다.
“저놈 공부는 제대로 해요?”
“모르지. 그래도 죽어라 싸돌아다니던 놈이, 요즘에는 방에 틀어박혀 있긴 하더라.”
아버지는 사과를 씹으며 관심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래서 언제냐?”
“일단 엄마랑 아버지 편한 날에 맞추겠다고 하시던데?”
“뭐 식당 같은 것 알아봐야 하나? 가만, 요즘에는 니들이 알아보는 게 트랜드 아니냐?”
“어디서 또 영어 단어는 주워 들으셨대, 일단 회장님이 직접 준비하시겠다고 하셨어, 부담 갖지 말라고 하시더라고.”
“훗, 공짜 밥에 부담 느끼면 운동하는 식충이 두 놈 못 기르지.”
회장님, 정말 죄송해요.
“그런데 그런 자리면 한복 입어야겠지?”
엄마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안 그래도 연아가 엄마랑 같이 한복 맞추러 가고 싶다던데?”
“그래? 근데 요즘 한복은 얼마나 할까?”
“돈 걱정 말고, 여기 카드.”
나는 내 카드를 내밀었다. 회장님이 주신 카드가 아닌 내 카드다.
이런 것까지 회장님 손을 빌릴 수는 없지.
“나 요즘 지갑 사정 괜찮으니까, 가격 너무 신경······.”
“걱정 마! 제일 좋은 거로 살게!”
미안, 엄마. 연아 레벨의 한복집 가서 제일 좋은 물건이면, 내 카드 한도 초과야.
아직 아들이 그 정도는 아냐. 미안.
“그리고 아버지도 이참에 정장 한 벌 맞추고.”
“오! 요즘 좀 버나 보다?”
다름 아닌 맥베스 차장이다.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연봉이 껑충 뛴 것은 사실이다.
“한도 초과면 나머지는 알아서들 하시고.”
“내가 이렇게 배포 없는 놈으로 낳지는 않았는데.”
“마! 말이라도 쎄게 해야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모님! 저 요즘 잘나갑니다! 뭐 이런 거 모르냐? 드라마 좀 보고 배워라!”
아쉽게도 여러분께서 드라마에 등장하는 멋진 부모님 레벨은 아니시잖아요. 뭐 숨겨둔 자산가 친척 같은 거 없습니까?
요즘 세상에 그런 거 하나 안 숨겨두고 뭐 했대?
“어쨌든, 상견례 준비는 그쪽에서 한다 치면, 우리는 선물을 준비해야겠네?”
“선물?”
“원래 그게 예의잖냐.”
처음 조회장님 댁을 방문했을 때도, 선물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답을 못 찾겠다. 도대체 그렇게 돈 많은 집에 무슨 선물을 해야 급이 맞을까?
“쓸데없이 머리 쓰지 마라. 이런 건 마음이야. 마음.”
“돈 없는 걸 너무 당당하게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마! 나도 IMF 전에는 지갑 빵빵했어!”
진짜 언제 적 이야기입니까.
“혹시 사돈어른 취미라든지, 뭐 아는 거 있냐?”
취미······. 취미라······.
사실 회장님과 안면 튼 것도 최근의 일이라서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다.
“TRPG밖에 모르는 데.”
“그게 뭐냐?”
“주사위 가지고 하는 게임인데.”
“주사위 놀음?”
진짜 식은땀 난다. 회장님 앞에서 해맑게 웃으며 주사위 놀음을 즐기신다고 들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철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니, 소름이 돋는다.
“놀음이 아니라, 건전한 보드게임이야. 외국에서는 원래 귀족들이 시작한 놀이라고 들었어.”
“그래? 그런 게 있어? 역시 돈 많은 집은 다르구만, 우리는 끽해야, 고스톱이나 치는데.”
“행여라도 노름 같은 소리 입에 담지 마요.”
자격지심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서로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겠나?
“그 주사위 어떻게 생겼냐?”
“주사위 선물하시려고?”
“잔말 말고 보여줘 봐.”
나는 스마트폰으로 TRPG용 주사위를 검색해서 보여드렸다.
“야, 예쁘네. 내가 생각하던 그런 주사위가 아니구나?”
“그렇지. 게다가 종류도 많아. 4면체, 6면체, 10면체, 이건 무려 20면체야.”
“오케이, 접수.”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 어딘가에 전화를 거셨다.
“야, 나다! 이 새끼가, 형님 목소리도 못 알아듣고! 너 지난번에 벼락 맞은 대추나무······. 그래. 인마!”
아버지는 통화를 하시며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셨고, 이제 나와 엄마만 남았다.
“근데, 뭔가 좀 느낌이 묘한데?”
“뭐가?”
“보통 부잣집과 결혼한다고 하면, 기죽지 말라거나, 아니면 반대로 책잡히지 않게 잘하라거나, 뭐 그런 애정 어린 격려나, 충고 같은 것이 오가야 하는 것 아냐?”
내 말에 엄마는 피식 웃으며, 멸치 대가리를 뜯어내셨다.
“연아를 봤잖아.”
“뭐?”
“애가 얼마나 올바르니. 걔 보면 다 아는 거지. 연아가 너 기죽게 가만 놔둘 애가 아니라는 것쯤은 그냥 다 보여.”
“오, 이건 좀 뭉클한데?”
“그리고 니가 어디 가서 기죽을 녀석도 아니고.”
음······. 그건 그렇지.
“그래. 아무튼 손은 멈추지 말고.”
“네.”
나는 다시 멸치 손질에 매진했다.
역시 엄마는 다르다. 며느리 모드의 연아 밖에 보지 못하셨을 텐데도, 의외로 강단 있는 연아의 진면모를 이미 파악하고 계셨구나.
“하하하! 그러니까 그때 내가 후회하지 말라고 했지? 분명히 네 입으로 약속했잖아? 마! 다 네 조카를 위한 거야!”
아버지는 역시 좀 불안하긴 하지만······. 3대 독자시면서 또 어디의, 무슨 삼촌을 구워삶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즐거워 보이시니, 문제는 없겠지.
“아, 그리고 나 얼마 후에 미국 출장 갈 것 같아.”
“니가? 미국? 너 영어도 못 하잖아.”
“그렇지. 나도 잘은 몰라.”
“선물이랍시고 열쇠고리 같은 거, 사 오면 니 아빠랑 세종이 사흘은 앓아누울 거다. 잘 고민해.”
지금 영어도 못 하는 아들이 미국 출장 간다는데, 그게 문제입니까?
“엄마는······. 말 안 해도 알지?”
역시 우리 집은 뭔가 크게 잘 못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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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임 밸런스 실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