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조회장님이 예약한 상견례 장소는 여의도에 위치한 고급 호텔 레스토랑의 프라이빗 룸이었다.
평생 호텔과 연이 없던 우리 부모님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올라 있는 호텔의 위용에 기죽지는 않으실까, 조금 염려가 되었다.
“아버지, 엄마. 혹시라도 기죽······.”
“이야, 이거 대접이 으리으리한데? 이 정도로 애써주시는데, 오늘은 제대로 벨트 풀어야겠어!”
“한복은 많이 먹기 힘든데······.”
그래, 내가 뭔 걱정을 하는 거람? 우리 부모님이 어디 가서 기죽을 위인들은 아니시지.
“형.”
“응?”
“이런 데는 엄청 비싸지?”
아마 엄청 비싸겠지?
“역시 사장이 되어야 하나.”
“그래. 직장인 월급으로 이런 곳은 좀 버겁지.”
세종이는 뭔가 고민에 잠긴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결혼은 백년대계라는 말이 있다. 인생의 2번째 장의 시작이자, 마지막까지 이어질 인생 최대의 이벤트.
그리고 결혼에 앞서 가장 중요한 행사가 바로 상견례가 아닌가?
호텔 정문을 앞두고 나는 가볍게 목을 스트레칭하며 긴장을 풀었다.
딱히 대단히 긴장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운동하던 시절부터 이어져 온 나의 루틴이다.
“들어가시죠.”
“가자!”
표씨 일가, 출격!
“이쪽입니다.”
데스크에서 조회장의 성함을 꺼내기가 무섭게 전담 안내직원이 우리를 예약장소까지 안내해주었다.
“오셨습니까.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먼저 자리에 도착해 있던 조회장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부모님을 향해 깍듯이 인사를 했다.
회사에서는 최종 보스 포지션인 탓에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는 모습 따위 상상도 할 수 없는 절대자의 이런 모습은 퍽 낯설었다.
“아이고, 늦어서 죄송합니다.”
“연아가 아버님을 쏙 빼닮았네요. 미남이세요. 사돈어른.”
“하하하. 그렇습니까? 저도 표세인군의 훤칠한 얼굴은 사돈 부인의 덕인 것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회장님의 말씀대로 나는 엄마를 닮았고, 세종이는 아버지를 닮았다.
짧은 인사가 끝나고 모두는 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넷이지만, 상대 쪽은 회장님과 연아 단둘뿐이었다.
“부끄럽게도 다른 식구들은 모두 외국에 있는 상황이라서 이렇게 단둘만 나오게 되었습니다. 모쪼록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이고, 별말씀을.”
연아는 위로 두 명의 오빠가 있다. 오래전부터 외국에서 생활하시는 덕분에 연아도 보지 못한지가 꽤 되었다고 했다.
모두가 착석하자, 잠시 후 음식들이 하나, 둘씩, 테이블을 채우기 시작했다.
한식의 특징이랄까? 한 번에 차려지는 가짓수로는 세계 어떤 나라의 음식도 명함을 내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으리으리한 상차림에 식충이 동생 놈의 눈이 반짝인다.
“원래는 이쪽에서 추천하는 코스요리도 고려해봤었지만, 오늘 같은 자리에 이곳 직원들이 자주 들락거리는 것도 좋지 않을 듯하여, 이쪽으로 준비했습니다. 모쪼록 마음에 드시기를 바랍니다.”
“찔끔찔끔 나오는 것보다야, 이편이 훨씬 낫지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한잔 받으시죠.”
“제가 먼저 따라드려야 하는데······. 염치 불고하고 먼저 받겠습니다. 자, 이번에는 제가 한잔.”
“감사합니다.”
술은 회장님과 아버지, 두 분의 몫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차려진 음식들로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형은 앞으로 맨날 이런 거 먹고사는 거야? 대박인데?”
응. 아니야.
어떻게 맨날 이렇게 먹냐? 나는 기본적으로 음식 남기는 것을 극혐하는 성격이라서, 이런 으리으리한 상차림보다는 남기지 않을 수준으로 차리는 것이 좋다.
“결혼식 일정은 아이들끼리 알아서 정한다고는 했지만, 혹시 사돈어른께서는 탐탁지 않으시다거나 하는 부분은 없으십니까?”
“웬걸요.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요. 게다가, 연아가 보통 똑똑합니까? 우리 못난 아들놈이 연아 말만 잘 들으면 별문제 없을 겁니다.”
“겸양이 과하십니다. 제가 살면서 많은 젊은 친구들을 지켜보았지만, 표세인군처럼 영특한 인물은 본적이 없습니다.”
“하하, 영특하다니요. 평생 운동만 하던 놈이라서 부족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저 넓은 아량으로 어여삐 봐주시기만 바랄 뿐입니다.”
몇 차례 덕담이 이어지는 가운데, 모두들 적당히 배를 채웠다. 아무래도 자리가 자리인지라서 배부르게 먹을 생각은 없었다.
한 놈만 빼고.
“뭐야, 벌써 그만 먹게? 운동 그만두더니, 식사량 많이 줄었네?”
“너 많이 먹어라. 게장 맛있다. 이거 더 먹어.”
“땡쓰!”
세종이는 생전 처음 맛보는 고급 한식에 정신을 못 차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표세인 군도 크지만, 동생분은 더 크군요. 원래 큰 키가 유전입니까?”
회장님이 세종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저었다.
“저도 평범하고 이 사람도 평범한데, 어쩌다 이런 놈들이 태어났습니다. 식충이 두 놈을 키우느라, 기둥뿌리 몇 개는 아작났습니다.”
“허허허, 그렇게 정성껏 키워주신 덕택에 회사로서는 든든한 기둥 같은 인재를 얻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이놈이 쓸만하기는 합니까? 사실 운동할 때야, 경기 구경도 가고 했는데, 사회생활은 그럴 수도 없어서, 말입니다.”
“제가 겉치레하는 성격이 아닙니다. 표세인군이 우리 회사에 온 것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이미 든든한 기둥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기둥.
기둥.
기둥이라는 단어가 벌써 몇 번째인가? 하지만 내가 바라는 기둥과는 삼만 광년쯤 떨어진 기둥인지라, 조금 헛웃음이 날 것 같다.
“어쨌든 사돈어른께서 이렇게 솔선해서 상견례 자리까지 마련해주신 덕분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이런 일이 경험이 없다 보니······.”
“우연히 연아 오래비들 혼례를 경험한 적이 있기에 먼저 말을 꺼낸 것뿐입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그래서 말인데······.”
“?”
“제가 사돈어른께 선물을 하나 준비해왔습니다.”
“선물이요?”
조회장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아버지의 통화 내용이 떠올랐다.
뭘까? 뭘 준비하셨을까?
“TRPG라는 것을 즐기신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예. 이 나이 먹고도 아직 철이 덜 들어서 보드게임에 애착이 있는 편입니다.”
“인터넷에서 보니, 주사위를 이용하는 게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것을 준비했습니다.”
아버지는 안경집 정도 크기의 작은 목재함을 꺼내셨다.
‘오! 생각보다 그럴 듯한데?’
윤기 나는 검은 바탕에 야광패로 장식한 나전칠기 함이었다.
“이, 이건?”
“아는 지인 중에 목공예하는 친구가 있기에 억지를 좀 부려서 준비한 물건입니다. 마침 귀한 벽조목이 있다기에······. 모쪼록 마음에 드시길 바랍니다.”
내가 봐도 결코, 볼품없는 취급을 받을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조회장이 함을 열자, 그 안에는 정갈하게 옻칠이 된 목재 주사위 7개가 들어 있었다.
7개 모두 색이 달랐지만, 절반은 일반적인 옻칠 마감된 검붉은 색채에 하단은 하늘색, 녹색, 노란색, 백색 등등의 색이 들어가 있었다.
“어떻게 마음에 드십니까?”
“······.”
-탁!
조회장은 말없이 함을 닫았다. 뭐지? 마음에 안 드시나?
나는 힐끔 연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연아 역시 놀란 눈치로 조회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상황이야?
“크큭.”
짧은 침묵을 깨고 조회장의 입에서 웃음이 새 나왔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저 빈말 안 하는 사람입니다.”
“그 말씀은?”
“이런 귀한 선물 처음 받아봅니다. 이거, 그냥은 못 넘어가겠군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아버지도 내심 걱정하셨었는지, 가슴을 쓸어내리셨다.
“TRPG가 아시아에서는 큰 주목 못 받는 게임인 덕분에 이런 한국적인 느낌이 물씬 배어나는 주사위 같은 것은 생각도 못 했더랍니다. 게다가, 이렇게 고급진 물건이라니! 이 광택, 이 촉감!”
원래 핸드메이드는 대개 기성 제품보다 품질이 좋은 법이다.
하지만 굳이 저렇게 장광설까지 늘어놓으시다니······.
‘원래 저런 분이 아니시지 않나?’
‘나도 처음 봐.’
연아도 가식 없이 놀란 표정이었다.
“이거 제가 제대로 한 방 먹었군요.”
“그 말씀은?”
“답례는 차후에 하겠습니다. 정말로 이런 귀한 물건을 선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별것 아니니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누누이 말씀드립니다만.”
“?”
“저 빈말 하는 사람 아닙니다.”
뭔가, 분위기가 쓸데없이 비장하다.
*
*
*
“그럼 살펴 가십시오.”
“먼저 가보겠습니다.”
우리 가족은 콜택시를 부른 덕분에 조회장은 먼저 자신의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아! 택시 왔다. 형, 우리 갈게!”
“그래, 부모님 잘 모시고 들어가.”
세종이는 스마트폰을 흔들며 요란스럽게 부산을 떨었다.
“그런데 상견례날인데, 회장님과 함께 집에 가야 하는 것 아냐?”
연아는 조회장을 먼저 보내고 내 곁에 남았다.
“이제 상견례도 끝냈으니까, 어디서 자든 눈치 볼 것 없잖아?”
“어? 오늘 내 방에서 자고 갈 거야?”
“아니.”
“?”
“여기 호텔이잖아.”
아! 그렇구나. 여기 호텔이구나. 흐흐흐.
“오늘 분위기 좋았지?”
“응. 진짜 우리 아빠 저렇게 기뻐하는 모습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러게, 정말로 취미에 진심이시구나.”
“아주 목숨 걸지.”
새삼 회장님과 함께하는 TRPG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감이 증폭된다.
“그래도 아버님이 정말 좋은 선물 준비해주셨다. 내가 다 감사하네.”
“그러게, 소 뒷걸음질로 쥐 잡은 느낌이긴 한데······.”
목공예를 하시는 윤씨 아저씨가 이렇게 멋진 솜씨를 부려 주실 줄이야.
마침 이런 인맥이 아니었다면, 우리 집 형편에 회장님 수준에 맞는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했을까?
“손편지를 써서 줬어도 기뻐하셨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에이, 설마.”
순간 손편지를 받고 기뻐하는 회장님의 모습을 떠올리자, 웃음이 난다.
“어쨌든 이제 양가 공인받은 거네.”
“역시 조금 미안하네.”
“뭐가?”
“사실 내 사정 때문에 결혼 일정 미루는 거잖아. 오빠 나이 때문에라도 어머님과 아버님은 하루빨리 결혼하시길 바라실 텐데.”
누가 들으면 내가 거진 마흔쯤 된 줄 알겠네.
“아직 내 친구 중에도 결혼 안 한 애들 많아. 별걱정을 다하네.”
“그래도······. 회사에서도 비밀이고, 이런 거 좀 신경 쓰이지 않아?”
연아가 살짝 내 눈치를 살폈다.
“솔직히······. 나 요즘 회사가 너무 재미있어.”
“정말?”
“응. 진짜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나 신경 쓸 것 없어.”
“흠. 좋아! 지금 그 말 아주 좋았어.”
“좋았어?”
“올라가자.”
연아는 내 팔을 잡고 나를 호텔 안으로 끌고 갔다.
“왜 이렇게 서둘러?”
“지금 내 기분이 좀 그래.”
그래. 기분이 좀 그렇구나.
나는 살짝 목을 풀었다. 지난번에 체육대회 준비로 몸 좀 준비하지 않았나?
드디어 진정한 목적(?)에 사용할 때가 왔다!
*
*
*
‘풀. 풀. 풀.’
홍기도는 어머니께서 손수 준비해주신 녹내음 풍기는 아침상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어젯밤 오랜만에 귀국한 누나 부부 덕분에 홍기도는 부모님 댁에서 하루를 묵었다.
덕분에 오늘은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음식으로 아침 식사를 하게 된 된 것.
“왜 그렇게 깨작대? 입맛 없어?”
건강보조제 제조기업을 운영하시는 아버지는 채식주의자까지는 아니지만, 원체 육류를 즐기지 않으셨고, 그것은 어머니도 마찬가지.
덕분에 자연스럽게 홍기도는 집에서 고기 구경을 하지 못하고 자랐다.
“오늘 고기 먹을 거야.”
“그래? 야채도 많이 먹어야지.”
“여기서 더 먹으면, 내가 소가 될 것 같은데?”
어머니의 음식 솜씨에 불만은 없다. 하지만 달걀부침과 멸치가 유일한 단백질 공급원이라는 것은 어떨까?
“고기 너무 먹는 것도 몸에 안 좋다.”
“너무 안 먹어도 문제 아니에요?”
“네 엄마, 영양사 자격증도 있는 것 모르냐?”
“음식은 먹는 즐거움도 중요다고 생각하는 데요?”
“주가 떨어지는 소리 그만하고, 밥이나 먹어라. 그리고 넌 언제까지 애들 장난감 만드는 회사에서 허송세월 할 거냐.”
“맥베스 주식이 아버지 회사랑 비교도 안 될 텐데요?”
“그 회사는 네게 아니잖아.”
“아버지 회사도 아버지꺼죠. 나한테 용돈도 안 주면서?”
여의도 인근의 억 소리냐는 아파트는 마련해 줄지언정, 아버지의 회사가 아닌, 게임회사를 선택했다는 이유로 취업과 동시에 모든 지원이 끊겼다.
다른 부잣집 친구들과 비교하면 씀씀이가 헤픈 편은 아니지만, 워낙 부유한 태생인지라, 회사 급여만으로는 딱히 여유 있는 워라벨 유지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한국의 소고기값은 세계 최고가 수준이 아니던가?
“이제 그만 회사로 들어와.”
“슈슈슉!”
“뭐하냐?”
“탈주중이니, 말걸지 마세요. 엄마, 나 갈게.”
“하여튼 아들놈이라고 하나 있는 녀석이······. 언제 철이 들는지.”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면서 시금치를 질근질근 씹으셨다.
‘아후, 지겨운 잔소리.’
홍기도는 귀를 후비며 아버지의 잔소리를 떨쳐냈다.
‘하지만 상관없어! 오늘은 소고기다! 회식이다!’
무엇(소고기)을 누가(표차장), 사주느냐에 따라서 같은 음식도 맛이 다른 법!
더군다나, 이번에는 자신이 노력으로 얻어낸 소고기가 아니던가?
홍기도는 콧노래를 부르며, 회사에 도착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기도씨도 좋은 아침.”
데스크 여직원에게 상쾌한 아침 인사를 전하고 엘리베이터에 도착하자, 마침 표세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 왔냐?”
표세인은 오늘따라 얼굴이 밝아 보였다.
‘오늘따라 피부가 반질반질한데? 상견례 잘 하셨나?’
어쨌든 표세인의 기분이 좋은 것은 다행이다. 회식 날 우중충한 분위기는 용납할 수 없다.
홍기도는 씨익 웃었다.
“소고기!”
“알았어! 진짜 고기 못 먹고 죽은 귀신이라도 씌었냐?”
“10시간을 어떻게 버티지······.”
“10시간 동안 그 생각만 하려고? 너 진짜 제정신이냐?”
“아, 소고기······.”
홍기도는 진심으로 소고기를 원하고 있었다.
< 나도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