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표세인 팀장.
차장으로 승진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번에는 팀장이 되었다.
나는 인트라넷으로 전달받은 승진 공고를 보며 웃음을 참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물론 IT업계의 특성상 나보다 어린 나이에 무려 이사 직함을 지닌 이들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승진에 대한 기쁨이 퇴색하는 것이 아니다.
“팀장님,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려요.”
남궁원과 함송희가 차례로 축하 인사를 건넸다.
요즘 이 말을 너무 자주 듣는 기분이다.
하지만 축하한다는 이 한마디는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가 않다.
“고마워. 그보다 오늘 회식한다는 것, 홍대리에게 들었지?”
“네.”
“혹시 좀비로얄 건으로 바쁜데 괜한 이벤트인가?”
“아니에요. 기획팀 회식 한번은 해야 했는데, 오히려 너무 늦은 거죠.”
이래저래 정신없이 달려온 탓에 어련히 챙겼어야 할 부분을 미루고 말았다.
의기투합의 자리 한번 마련하지 않고, 시작부터 크런치에 시달리게 한 셈이다.
그런데도 군말 없이 모두들 열심히 해줬다. 새삼 팀원들에게는 감사하다는 마음뿐.
“그런데 팀장님.”
“응?”
“이거 뭐에요?”
사내 공지에는 내 승진 소식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규 개발실의 발족에 대한 사안도 적혀 있었다.
“이거 팀장님하고 관련 있는 거죠?”
“뭐, 그렇지.”
신청자는 담당자에게 메일로 신청서를 보내라 되어 있었는데, 그 담당자 부분에 떡하니 내 사내이메일이 적혀 있었다.
“우리도 신청해야 해요?”
남궁원의 질문에 나는 피식 웃었다.
“우리 팀에 새로운 롤이 부여되는 것뿐이야. 너희는 신경 쓸 것 없어. 좀비로얄 잘 진행되고 있지?”
얼리엑세스 상태에서 이미 베스트셀러. 오히려 굉장한 숫자의 오브젝트(좀비)로 인한 퍼포먼스 테스트까지 겸할 수 있는 상황이기에, 좀비로얄의 개발은 더없이 순항 중이다.
“물론이죠.”
예상대로 남궁원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리고 조만간 나 해외출장을 좀 다녀올 것 같은데.”
“어디로요?”
“글세?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좀비로얄은 외부프로젝트고 담당자는 남궁대리, 너니까. 알아서 잘 할 거라고 믿을게. 하지만 만약에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고, 만약 이래저래 어렵다 싶으면 양실장님께 곧바로 도움을 청해.”
“알겠습니다.”
이제 이 회사에 나와 양실장이 한배를 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남궁원은 별다른 질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 팀은 무조건 선조치 후보고니까. 눈치 보지 말고 네 재량껏 잘 해봐. 믿는다.”
“잘 처리하겠습니다.”
남궁원은 자신있게 대답했다. 얼마나 든든한가? 홍켓몬에게서는 느낄 수 없던 안정감.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남궁원은 오늘도 좀비로얄 개발사에서 퇴근하려는 모양.
“잠깐, 너 내 복지카드 가지고 있지?”
“아, 돌려드릴게요.”
“아니. 돌려주지마.”
“?”
“나 팀장으로 올라가서 금액 한도 늘어났을 테니까. 앞으로도 네가 관리하면서 잘 처리해. 외근 나가서 네 돈 쓰는 일 없게.”
“감사하긴 한데, 그러면 팀장님은요?”
남궁원은 내 지갑 사정이 걱정되는 듯했다.
“내 걱정은 말고, 한도액 전부 아끼지 말고 사용해.”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만약 거기서 야근이라도 하면 아끼지 말고 택시타고.”
임카(임직원 복지카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한 무리를 통솔해야 하는 팀장이다 보니, 복지카드 한도액은 차장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껑충 뛴다.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나에게 복지카드는 있으나 마나 한 상황.
회장님이 주신 블랙카드가 있는 이상, 돈 걱정할 일은 없다.
차라리 내가 신경 쓸 수 없는 곳에서 남궁원이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이 낫다.
“실례하겠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총무팀 직원들이 다가왔다.
“파티션 교체 지시를 받고 왔습니다.”
신규팀 편성에 대비해서 파티션 위치를 바꾸려는 모양이다. 새로운 책상까지 준비해온 것을 보아하니, 이건 시간 좀 걸리겠다.
마침 남궁원과 함송희는 외근이고, 홍기도는 어디를 쏘다니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파티션 교체를 시작하면 부산스러워서 일하기도 쉽지 않으니, 차라리 이럴 때, 니코틴 충전이라도 하고 오는 편이 낫다.
“표팀장.”
“?”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침 한팀장이 다가왔다.
“한팀장님? 무슨 일이세요?”
한팀장의 얼굴이 별로 밝지 않았다.
“나랑 같이 부장님 좀 뵙자.”
“무슨 일 있으세요?”
“가보면 알거야. 지금 시간 있지?”
“네. 가시죠.”
나는 한팀장을 쫓아 부장실로 향했다.
“뭐야, 왜 또 둘이서 함께 온 거야? 뭔일 났어?”
하부장은 불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 기획팀장과 프로그램팀장이 함께 부장실을 방문하는 것은 좋은 일인 경우가 없기는 하다.
주로 업데이트 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허겁지겁 달려오는 경우가 태반. 더군다나 오늘따라 한팀장 표정은 묘하게 어둡지 않나?
“부장님, 이번에 새로운 팀 공고 난 것 아시죠?”
“어, 그래 들었어. 안 그래도 표팀장에게 물어보려 했었는데, 표팀장, 자네가 담당자야? 이거 양실장님 일이냐?”
“예.”
지난번 임원회의에 하부장은 참석하지 않은 탓에 자세한 사정은 모르는 모양.
하지만 회의 말미에 조회장이 폭탄처럼 투하한 안건인 탓에 나조차도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이렇게 곧바로 시작될지도 몰랐고.’
새삼 기업 오너의 힘이 느껴진다. 말 한마디에 일사천리.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이다.
“그래서 무슨 용건인데?”
“저 신규개발실로 옮기겠습니다.”
“뭐?”
한팀장의 말에 하부장은 아, 뜨거 하는 얼굴이었다.
개발3실의 터줏대감인 한팀장이 팀을 옮기다니?
“아니, 표팀장이 새로운 프로젝트 간다니까, 따라가겠다. 이거야? 회사가 친목회야? 친구 간다고 따라가게?”
친구라고 하기에는 한팀장과 내 나이 차이가 좀 나긴 하지만······.
“그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민규 말입니다.”
“민규가 왜?”
“민규도 팀장 달아야죠. 지난번 문이사님께 미국지사는 민규를 보내주십사 부탁했지만, 감감무소식인 것을 보니, 아무래도 짬된 것 같은데······.”
“아,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정차장을 위한 배려다?”
“그렇죠.”
“그럼 정차장을 새로운 개발실로 보내면 되겠네?”
하부장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살짝 한팀장을 골려주려는 의도인 듯. 하지만 정작 한팀장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아, 아니······. 그, 그게······.”
“맞잖아. 팀원들 손발 맞추는 문제도 있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도 있잖냐. 거기다가 표팀장 입장에서도 너 같은 늙다리 보다, 그나마 나이 차가 덜 나는 정차장이 낫지 않겠어?”
하부장의 말에 한팀장은 세상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그리고는 나에게 애타는 시선을 보냈다.
“확실히 그렇네요.”
“표, 표팀장······.”
하부장의 농담에 장단 좀 맞추려고 했는데, 한팀장의 표정이 장난이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 호기롭게 악수를 청하던 그 모습은 어디에 팔아먹으셨는지······.
“하지만 마침 신규 팀에는 무게감을 잡아줄 연륜 있는 맨파워가 필요하기도 하죠. 게다가 정차장 입장에서도 팀장 달자마자, 새로운 팀에서 정신없기보다는 익숙한 곳에서 팀장 업무에 감을 잡는 것도 좋겠죠.”
“그, 그렇지! 부장님 들으셨죠?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겁니다!”
“바로 이거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하여튼 말은 잘해요. 이래서 기획이랑 길게 말 섞으면 안 되는데······. 뭐, 좋아. 표팀장이 괜찮다면, 나야 불만 없지. 어차피 이 지긋지긋한 똥차도 치워야 하니까.”
위로 보낼 수가 없으면, 옆으로라도 보내야 한다. 끝까지 개발자로 있겠다는 한팀장이 지금껏 망부석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던 탓에 정민규 같은 이들의 진급까지 애로사항이 있던 상황이었지 않나?
“좋았어!”
한팀장은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했다.
“좋~단다. 언제는 딴 팀 좀 가라고, 가라고 해도 안 가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야? 진짜 표팀장이 좋아서 그 이유 하나로 가는 거야?”
“후훗.”
“왜 웃어?”
한팀장의 미소에 하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아십니까?”
“뭐가?”
“회사 생활은 줄을 잘 서야 하는 법입니다.”
“그, 그 이야기가 네 주둥이에서 나올 말이냐?”
하부장도 딱히 사내 정치에 재주가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한명수가 누구던가?
당장 얼마 전에 문상훈 이사의 제안까지 거절한 정신 나간 캐릭터가 아닌가?
그런 한명수에게 회사 생활 조언을 듣게 될줄은 몰랐다는 표정.
“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그런 말을 하면 날 모욕하는 거야!”
진심 100%라는 것이 느껴진다.
하부장 입장에서 한팀장에게 줄 잘 서야 한다는 조언을 듣는 것은 용납이 안 되는 일인 모양이다.
“그래서 양실장님 라인 타겠다, 이거냐?”
“뭐, 정확히는 아니지만······.”
“아니야?”
“그냥 그렇게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한팀장은 슬쩍 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양실장님 라인이라······.”
하부장은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는가 싶더니······.
“표팀장.”
“예. 부장님.”
“거기 부장은 안 받나?”
“!”
부, 부장 레벨까지는 좀······.
*
*
*
부장실을 벗어난 나는, 그 길로 양실장을 찾았다.
신규개발실 발족에 관한 문제는 해외 출장 이후라는 생각에 서두르지 않았는데, 역시나 회장 명령이기 때문일까?
일이 진행되는 속도가 눈부실 지경이다.
“양실장님.”
“오셨습니까?”
양실장 역시 비서실로 둥지를 옮긴 탓에 자리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바쁘십니까?”
“그냥 조금 부산스러울 뿐입니다. 일단 앉으시죠.”
나는 양실장의 제안대로 자리에 앉았다.
“신규 개발실 관련으로 오신 겁니까?”
“네. 이게 정확히 규모도 모르겠고 말이죠.”
최소한 TO는 알아야, 거기에 맞춰 개발 규모를 짐작이라도 할 것 아닌가?
“신경 쓰지 마십시오.”
“네?”
“우선 표세인 팀장님이 원하시는 프로젝트를 구성하시고 거기에 필요한 인력과 지원을 결정하시면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영화에 보면 백지수표라는 물건이 종종 등장하지 않습니까?”
“백지수표요?”
현실에서는 볼 일이 없는 환상 속의 물건 아닌가?
애초에 한국에는 백지수표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그나마 유명한 일화라면 국내의 한 음향 디자이너가 펩시콜라 병따는 효과음을 제작하고 받은 백지수표를 받은 적이 있다는 것을 주워들은 기억이 있다.
“다름 아닌, 회장님의 퀘스트 보상입니다. 첫 보상부터 융단폭격을 날려서, 혼을 쏙 빼놓는 것이 요즘 업계의 트랜드가 아니겠습니까?”
분명 요즘 게임 시장의 트랜드는 그렇다. 내가 입사 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컨텐츠 소모를 우려해서 가랑비에 옷 적시듯이 서서히 단계적인 보상을 제시했지만, 그게 대체 언제적 이야기이던가?
“무엇을 원하십니까? 원하는 것이 있다면, 하세요. 그 뒤는 회장님의 보증이 뒤따를 것입니다.”
경험치 버프 정도의 보상이 아니었다. 이건 확률 100%, 돈 주고도 못하는 확정 강화석을 루팅해버렸다.
‘진짜 한번 제대로 저질러 버려?’
업계마다 한 번쯤 상상해 볼 법한 꿈의 프로젝트가 있기 마련이지 않나?
게다가 게임 업계는 그 형태가 좀 더 명확하기 마련.
아, 내 입술이 자꾸 왜 이러지?
제멋대로 씰룩거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 고기 굽기는 장비부터 신경 써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