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그건 그렇고.”
“다른 용건이 더 있으십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팀장에 대한 용건입니다.”
“한팀장이요?”
“네. 우리 진영에 합류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의외군요. 한팀장은 지난번 문이사의 제안도 거절했을 정도로 파벌이나, 사내 정치에는 질색하는 타입인 줄 알았습니다.”
양실장의 말대로,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었다.
“말로는 우리 진영보다는 제 쪽에 서고 싶다고 말하기는 했는데······. 그건 아마 낯가림이겠지요?”
“표팀장님 쪽에 서겠다?”
순간 양실장의 표정이 돌변했다. 뭔가 굉장히 꺼림칙하다는 얼굴.
“아니, 그냥 농담일 겁니다.”
지금은 나도 팀장이지만, 얼마 전까지는 차장이었다. 자신보다 아래 직급의 상대 밑에 서겠다는 말이 어찌 진심이겠나?
“농담이라······.”
하지만 양실장의 표정은 여전했다. 뭐지? 왜 이렇게 정색하지?
“한팀장은 나쁘지 않은 인재입니다. 뭐 사실 사내 정치에 팀장급의 맨파워가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개발 프로세스에서 그만한 사람이 차지하는 비중을 따져보면······.”
“그렇게는 안 됩니다.”
“안된다고요?”
설마 안된다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저희 쪽에 합류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스탠스를 새로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 합류에는 찬성이시구나. 다행이다.
“스탠스를 정리한다?”
“표팀장님 직속에 서겠다는 것은 시기상조입니다. 이 부분을 분명히 주지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확실히 한팀장이 제 쪽에 서는 것도 웃기는 일이죠.”
나도 마침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다. 조직에는 위계가 있기 마련이지.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만······. 쯧,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이해했습니다. 표팀장님은 한팀장을 신용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거겠죠?”
아직 한팀장과 그리 오래 알고 지낸 것은 아니지만, 그는 겉과 속이 한결같은 사람이다.
순박하고 개발밖에 모르는 순수한 개발자. 정치력은 제외하더라도 신용할만한 사람이냐는 질문에는 무조건 YES.
“네. 조직에는 때로 한팀장 같은 타입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전원이 책사들로만 구성되기보다는 한걸음 떨어진 위치에서 한결같은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때때로 조직의 등대 같은 역할을 해줄 테지요.”
“알겠습니다. 어쨌든 조금 전에 말한 문제만 확실히 한다면 저는 찬성입니다.”
“알겠습니다.”
이로써, 한팀장은 우리 진영에 본격적으로 합류했다.
“그리고 출장 건에 대한 일입니다만.”
아! 드디어 출장지가 정해졌나?
“아무래도 미국으로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역시 미국이군요.”
아, 영어······. 영어라니······.
다른 나라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지만, 그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다른 외국어는 몰라도, 한국인은 영어를 못하는 것에 큰 콤플렉스를 느끼는 경향이 크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
분명 회장님이 난이도를 올리신다고 말씀하시기는 했지만 이건 엑셀을 너무 격하게 밟으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영어는 가능하십니까?”
역시 이 질문을 피해갈 수는 없겠지.
“전혀 못 합니다.”
“그렇군요. 일단 이것 받으시죠.”
양실장이 건넨 것은 핸즈프리 통역기였다.
“이거 쓸만합니까?”
“때로는 안 쓰느니만 못할 때도 있지만, 급한 경우에는 그럭저럭 쓸만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리고 미국지사에서는 문이사에게 의지하십시오.”
문이사에게 의지해라? 문이사라는 단어와 의지라는 단어가 한 문장 안에 있으니, 무척 낯설다.
첫 만남부터 껄끄러웠고 얼마 전까지는 서로 대놓고 경쟁까지 치르지 않았던가?
“그리고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제가 없는 사이에 저희 팀원들 좀 신경 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신규팀에 대해서는 당장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인수인계부터 시작해서 이래저래, 먼저 처리할 일들이 많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단 홍기도 그놈이 따지고 보면 제 오른팔 같은 포지션이긴 한데······. 원체 마음이 놓이지 않는 캐릭터라서요.”
“오, 오른팔이라고 하셨습니까?”
순간 양실장이 눈을 부릅떴다. 왜지? 아, 설마 홍기도의 진면모를 간파하신 건가? 부끄럽다.
고작 홍켓몬을 내 오른팔이라고 소개해야 하는 나의 부족한 인맥이······. 크흑.
“네? 뭐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고, 오랫동안 한솥밥 먹은 처지라서······.”
“오른팔, 홍기도 대리······. 알겠습니다. ‘똑똑히’ 기억해 두겠습니다.”
“아니, 그 녀석은 그렇게까지 무게감 있게 기억하실 필요가······.”
뭐지? 양실장의 표정이 아까 한팀장을 언급했을 때보다도 더욱 어두워졌다.
“어쨌든 이쪽 일은 제게 맡겨주시고, 부디 무사히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회장님께서 신규 퀘스트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씀 없으셨습니까?”
단지 미국에 다녀오는 것이 퀘스트 내용의 전부일 리는 없지 않은가?
“그 부분은 저도 조금 난감합니다. 표팀장님께서 미국에 도착하시면 직접 전달하실 계획이신 것 같습니다.”
깜짝 선물도 아니고 깜짝 퀘스트라니, 이번에는 정말로 칼을 갈고 계시는 것 같다.
하지만 영어에 대한 불안감을 제외한다면 가슴이 살짝 두근거린다.
회사 업무에 기대감이 생기다니, 만약 다른 사람의 일이었다면 나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아, 그런데 혹시······.”
“?”
“오늘 기획팀 회식이 있는데, 양실장님도 그간 기획팀의 일원이셨는데, 괜찮으시면, 참석하시겠습니까?”
“흠······. 원래라면 눈치껏 사양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만.”
“?”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좀 신경 쓰이는 일도 있고.”
신경 쓰이는 일? 고작 회식에 신경 쓸만한 건수가 있나?
“홍대리······.”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
*
*
“소고기!”
시곗바늘이 6시 30분을 가리키기가 무섭게, 홍기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마, 그래도 정리는 제대로 끝내······.”
“소고기!”
“아, 알았다. 진짜 한 대 칠 것 같으니까, 너무 들이대지 마라.”
“소고기!”
광폭화 상태의 홍켓몬에게는 나도 어쩔 방도가 없다. 때로는 채찍 대신 당근 아니겠나? 이것도 트레이너의 비애라면 비애다.
이런 놈을 양실장 앞에서 내 오른팔이라고 말했다니, 스스로의 처지가 참으로 처량하다.
나는 컴퓨터를 종료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가자.”
“예. 준비하겠습니다.”
차례로 컴퓨터를 종료하고 퇴근 준비를 했다.
“어디가? 아! 오늘 회식이랬지?”
하부장은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마주쳤다.
“그래. 잘 다녀오라고.”
“예.”
나 때문에 전체회식까지 미룬 하부장이 옅은 미소로 말했다.
“다들 맛있게 먹으라고!”
“소고기!”
“얘, 왜 이러냐?”
그저, 죄송합니다. 그냥 다 죄송합니다.
한창 폭주 중인 홍켓몬은 하부장에게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연신 소고기를 외쳐댔다.
“빨리 가라. 이놈 눈이 뒤집혔는데? 평소에 굶고 다니냐?”
아니요. 이놈 잘사는 집 아들내미입니다.
“제가 늦은 것은 아니죠?”
마침 양실장도 모습을 드러냈다.
“양실장님? 아아, 기획팀장이셨죠?”
“예. 전, 기획팀장이지만요.”
“소고기!”
“?”
홍켓몬에게 면역이 없던 양실장은 조금 당황했다.
“홍대리님은 대체 왜······.”
“그냥, 전부 죄송합니다.”
“?”
“소고기!”
“서두르시죠. 저놈 게거품 물기 전에······.”
어째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가?
우리는 허둥지둥 홍대리가 예약한 고깃집으로 향했다.
“투뿔! 제가 예약한, 섬세한 마블링과 폭포수 같은 육즙을 머금은 투뿔 한우 주세요!”
“그, 그런 메뉴는 없습니다만?”
“죄송합니다. 이 녀석은 신경 쓰지 마시고 아무거나 좀 빨리 부탁드립니다.”
일단 주둥이에 뭔가를 채워 넣기 전까지 광폭화가 해소되지 않을 것 같다.
이윽고 주문한 고기가 나왔다.
고기가 등장하자, 드디어 사라졌던 홍기도의 눈동자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가위.”
“여기 있습니다.”
내가 손을 내밀자, 홍기도가 잽싸게 내 손위에 가위를 올렸다.
나는 잠시 가위의 상태를 점검했다. 많은 사람이 신경 쓰지 못하는 부분이지만, 고기를 굽는 데 있어서 연장의 상태는 의외로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가위는 무척이나 중요하다. 날이 제대로 서지 않은 가위는 단면이 깔끔하지 못해 식감에 영향을 미치거나, 고기를 짓눌러 육즙을 소모 시킨다.
더군다나 자르는 시간이 길어지면, 불판 위에서 공기에 닿는 시간이 길어서 감칠맛을 저해할 수 있다.
(표세인 개인의 헛소리이므로, 검증된바 없는 유사과학이라는 점을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평생 고깃집 아들내미 타이틀을 달고 자랐다. 나는 고기 굽기에 진심이다.
“집게.”
“여기.”
이번에도 홍기도는 잽싸게 움직였다.
“무, 무슨 의학 드라마의 수술장면 같군요.”
“에휴, 표팀장님도 평소에는 멀쩡하신데, 가끔 홍기도랑 탠션이 맞을 때가 있으세요.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실 거에요.”
“흠, 이것이 표세인 팀장님의 새로운 면모로군요.”
-치이이익!
달궈진 불판 위에서 최고급 한우가 맛깔스러운 갈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직, 아직이야. 피 냄새가 완전히 가시기 전, 고소한 향기가 조금 배어나는 그 시점이야말로······. 바로 지금!”
“오오오!”
나는 고기가 익기 무섭게 홍기도의 그릇에 고기를 넘겨주었다.
“맛있냐?”
“아옳옳옳옳!(진짜 죽을 거 같음.)”
홍기도는 엄지척! 하며 세상 다 가진 얼굴로 드디어 광폭화에서 탈출했다. 대신 좀 이상한 디버프가 걸린 것 같기는 한데, 광폭화 보다는 낫겠지.
“흠, 저런 과장된 행동으로 회식 분위기를 띄운다. 참신한 방식이군요. 역시 표팀장님이 인정하는 인재다운······.”
“아니에요. 잘 못 짚으셨어요.”
양실장의 중얼거림에 남궁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라고요?”
“그냥 정신 나간 놈이에요.”
“설마요. 표세인 팀장님께서 오른팔로 곁에 두시는 인재인데요.”
“오른팔? 그게 무슨 말이죠?”
순간 남궁원의 눈빛이 희번덕거렸다.
“홍기도 대리가 표세인 팀장님의 오른팔이라고······.”
“진짜 짜증나네······.”
“?”
“반칙 아닙니까? 새로운 팀인데, 채점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지!”
“으음······. 남궁원 대리까지······.”
맞은편에 앉은 양실장과 남궁원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고기 앞에 두고 인상 쓰는 거 아니야. 너도 먹어. 양실장님도 드세요. 송희, 너도 많이 먹어라. 자, 막내는 큰 거 먹어야지.”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 맛있어요!”
최고급 소고기가 장인(?)의 손을 거쳤는데, 맛이 없으면 쓰나.
다들 육즙의 향연을 즐기며 행복에 젖은 얼굴로 바뀌었다.
“여기 5인분 더 주세요!”
“네!”
처음 주문한 5인분이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지고 나니, 나에게도 조금 여유가 생겼다.
“다들 그동안 고생 많았어. 처음부터 만만치 않은 업무량이었을 텐데도, 다들 정말 잘해줬어. 회식을 이제야 하게 돼서, 정말 미안해.”
“아니에요. 재미있었어요.”
“저도요.”
남궁원과 함송희는 정말 말도 예쁘게 한다.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르시죠! 진짜 그동안 말은 안 했지만!”
이놈은 진짜 답이 없고······.
“그리고 신규팀 말인데, 그건 당장은 신경 쓸 일 없을 거야. 그러니 한동안은 각자 맡은 일에만 집중하자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나 조만간 미국으로 출장 갈 것 같거든?”
“출장이요?”
모두가 놀란 눈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됐어.”
“팀장님 영어 못 하······. 윽!”
나도 영어 못하는 거 안다. 그러니 그만해라. 이미 소고기 먹였으니, 당근은 끝났다. 이제 모진 채찍뿐!
“아무튼, 지난번에 남궁대리에게는 말했지만,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뭔가 처리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양실장님께 말씀드려. 잘 해결해 주실 거야.”
그렇죠?
“예. 눈치 보지 마시고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지난번 기획팀장 때는 이름만 올리고 아무 도움도 못 드렸지만, 이번에는 성심껏 여러분을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다들 들었지?”
“예!”
뭔가 든든한 분위기다.
지금까지 회사 생할을 하면서 위, 아래 할 것 없이 이렇게 합이 딱딱 맞는 모습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위에서는 언제나 송부장이 눈을 부라리고, 밑에서는 홍대리가 사고치고······.
아아, 그 시절은 얼마나 힘들었던가!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정말로 옛말에 틀린 말이 없다더니, 진짜다.
이제 미국 출장만 잘 처리되면, 문제없다. 그런데 진짜 영어 어쩐다지?
*
*
*
“흐흐흐. 표세인. 지난번까지와는 다를 거다. 이 문상훈이의 진면모를 보여주지.”
문상훈은 자신의 계획을 모니터 속에 빼곡한 이동 루트를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미국지사 인근의 맛집으로 소문난 유명 레스토랑들의 위치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볼거리까지!
마치 누가 본다면 출장은커녕, 관광 스케쥴이라 오해할 법한 일정표였다.
“양실장은 사람이 너무 빈틈없어서, 이런 기발한 수를 생각해내지 못하지. 자고로 접대라는 것은 아주 혼을 쏙 빼놓는 것부터 시작하는 법!”
우선은 친해진다. 뼈가 흐물흐물해질 정도의 환대로 일단 환심을 산 이후, 서서히 자신의 곁으로 끌어들인다!
적이었을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곁에 두고 휘두를 수 있는 칼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눈부신 광채를 뽐내는 보검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제임스에 이어, 표세인. 이 원투펀치를 손에 넣으면 두려울 것이 무언가? 미국 지사를 시작으로 나 문상훈이의 시대가 시작된다.”
문상훈은 얼음장 같은 제임스와 불꽃 같은 기세를 지닌 표세인을 좌우에 대동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자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문이사의 야망은 단순히 이상무의 오른팔 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지금이야 창업공신이랍시고 전무와 상무라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이들지만, 어차피 그들은 늙었다.
곧 자신의 시대가 온다. 그리고 그때 자신의 좌우에, 제임스와 표세인이 나란히 서있는 그림이 그려지자, 심장이 요동친다!
“여기 디저트가 일품인데, 표세인 팀장이 스위츠를 좋아하려나?”
문상훈은 열과 성을 다해, 표세인을 위한 출장(접대) 계획을 작성했다.
< 사냥감이 먼저 나를 유혹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