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아~메리카! 어떤가 표팀장! 이 숨 막힐 것 같은 자본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나?”
문이사는 공항을 벗어나기가 무섭게 텐션이 급격히 높아졌다.
자본의 향기라······. 솔직히 그건 잘 모르겠고, 미국하면 세계 정상의 선진국인데, 좀 묘한 냄새들이 많이 나는 것 같은데······.
이게 말로만 듣던 정체불명의 미국 냄새인가?
하지만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문이사는 나를 포섭하겠다는 욕망을 숨길 생각이 없는지, 비행기 안에서부터 항공권을 시작으로 쉴 새 없는 어필을 쏟아붓는 것이 아닌가?
나 역시 질 수 없는 마음에 자신 없는 비위 맞추기를 시전하며 고군분투했다.
그 결과 우리는 고작 하루 만에 제법 가까워진 상황.
“그런데 표팀장.”
“네.”
“미국은 처음이라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 어드바이스를 해주지.”
“경청하겠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미국 생활에 관한 이야기만큼은 새겨들어야 한다.
한국 촌놈이다 보니, 솔직히 아직 멍한 기분이다.
“항상 강하게 나가야 해.”
“강하게요?”
“그래! 미국이 겉으로는 선진국입네, 어쩌네 하지만 보기보다 굉장히 마초적인 나라거든. 한국과는 달리, 운동부 출신 덩치들이 가장 인기가 좋다는 것을 알고 있나?”
오! 듣고 보니 그럴 듯하다. 메모, 메모. 쎄게 나가야 한다.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야망과 자신감, 그리고 노골적인 기 싸움! 한국과는 달리, 이런 것들이 장려되는 곳이 미국 사회지.”
문이사는 주먹을 불끈 쥐고 강조했다.
“그리고 이건 좀 별개의 이야기인데, 미국은 한국처럼 치안이 훌륭한 나라가 아니야. 잠깐 방심하는 사이에 소매치기부터 별 이상한 것들이 다 달라붙지.”
“미국은 총기도 위험하죠?”
“뭐 여기처럼 번화가에서 총 든 강도까지 만날 일은 없겠지만······. 무엇보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자기방어에 대한 처우가 관대해,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자기 몸은 자기가 지키라는 거지.”
“명심하겠습니다.”
강하게 나가고 자기의 몸은 스스로 지킬 것.
그래, 영화나 인터넷을 보며 상상했던 모습도 대강 이런 느낌이었지.
“아, 저기 우버 왔군. 타지.”
“우버가 벤츠네요?”
“하하하! 웰컴 투 아메리카! 자본주의의 향기는 정말로 달콤하지?”
달콤한지는 모르겠지만, 스케일이 다르다는 것은 알겠다.
나는 문이사와 함께 아메리카 스튜디오로 향했다.
“먼저 제임스부터 만나자고,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미국지부의 현황을 좀 점검해봐야지.”
제임스. 드디어 기다리던 이름이 나왔다.
“제임스는 어떤 사람입니까?”
“나 문상훈이의 오른팔이지. 솔직히 말해서 자네에게 밀리지 않을 만큼 걸출한 인재일세.”
나에게 밀리지 않을 정도라고 말해봤자······. 그걸로는 이해가 어렵다.
사실 요즘 사내에서 내 주가가 상당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회장님이 내려주신 퀘스트와 양실장을 비롯한 여러 가지 행운요소가 더해진 덕분이 아닌가?
“뭐 그래도 자네와 제임스의 역량을 단순히 비교하기는 어렵지, 자네는 개발자지만, 제임스는 경영 전문이니까.”
“이 업계가 좀 그렇죠. 개발 직군 안에서도 기획, 프로그램, 그래픽을 단순 비교할 수도 없고.”
“그래. 하지만 결국 어떤 포지션이든 본연의 가치가 드러나기 마련이지. 솔직히 나 문상훈이와 양성태 이후에는 자네들의 차례라고 생각해.”
“양실장을 높게 생각하고 계셨군요.”
“쯧, 처음부터 내가 손을 잡자고 했을 때, 잡았으면, 벌써 우리가 함전무와 이상무의 파벌을 능가하는 세력을 일궈낼 수 있었을 것을.”
와, 이건 의외다.
“흥미롭네요. 그 이야기.”
“그런가?”
“뭔가 멋집니다. 서로를 인정하는 라이벌이라니, 캬. 사실 요즘 운동권에도 그런 것 없거든요.”
“그런가? 하하하. 싫은 것은 싫은 거고.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지.”
문이사는 호탕하게 웃었다. 잠깐 지켜본 결과 나름대로 자신만의 매력이 있는 캐릭터다.
바로 얼마 전 항복선언까지 해야 했기에 속이 매우 쓰릴 상황임에도, 군말 없이 양실장의 능력은 인정한다.
처음으로 순수하게 문이사에게 감탄한 순간.
“저도 제임스와 그런 관계가 될 수 있을까요?”
누군가에게는 낡은 감정이라 비웃음을 살지 모르지만, 나름 어릴 적에는 우정과 경쟁을 함께 나눈 이들도 몇 명쯤은 있었더랬다.
그런 느낌으로 은근슬쩍 친분을 다지면서 공사 들어간다는 방식도······.
“아니.”
뭐지? 이 단칼은?
“저 이래 봬도 사교성 좋다는 이야기 좀 듣고 자랐습니다만?”
“자네가 문제가 아니지······. 자네 문제가 아니야.”
“?”
“제임스 그 친구는 일은 잘하는데······. 사람이 좀 차가워. 진짜배기 아메리칸 비즈니스맨이라는 느낌이지. 차라리 로스쿨을 가서 변호사를 했으면 대성했을걸?”
순간 미국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냉랭한 인상의 변호사들이 떠오른다.
그렇군, 확실히 친해지기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보다 우선 자네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마커스야.”
마커스 카터.
아메리카 스튜디오의 수장. 본래 맥베스 아메리카 자체가 마커스의 회사를 인수하면서 출발했기에 그의 영향력은 본사의 입김마저 무시할 정도로 막강하다.
“정확히 제가 무엇을 하기를 바라십니까?”
내 질문에 문이사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나는 자네가 그의 높은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길 바라네.”
코를 납작하게 만든다. 지금으로서는 내가 정확히 무엇을 해야 해야 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문이사와 제임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일단 성과를 보이는 것이 급선무겠지.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좋아! 나는 벌써 자네가 마음에 들기 시작하는군.”
그렇게 우리는 아메리카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오.”
인터넷에서 본 적이 있지만 실제로 보니, 그 위용이 남다르다.
높게 솟은 한국 본사 건물과는 다르게, 은색의 금속 재질로 거대한 유선형 구조를 이루고 있는 다소 모던한 디자인이 인상적이었다.
“미국 지사에 온 것을 환영하네.”
문이사는 자신의 영역에 돌아오자, 한층 기세등등한 모습이었다.
일단은 같은 편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하다.
‘곧 뒤통수를 쳐야겠지만.’
내 출장의 가장 큰 목적 다름 아닌, 자신의 오른팔을 빼앗기 위해서라는 것을 깨달으면 문이사는 어떻게 돌변할까?
살짝 소름이 돋는 기분.
“여기는 검색대를 통과해야 해.”
“역시 미국이네요.”
마치 공항 게이트처럼 겨드랑이에 건홀더를 착용한 경호원들이 금속탐지기로 우리의 전신을 체크한 이후에야 건물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이것은 자유로워. 그러고 보니, 자네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모르겠군.”
“그게 무슨?”
“여기는 한국처럼 이름 뒤에 직급 붙여서 부르는 느낌이 아니거든. 나 역시 일반 사원들에게도 그냥 문이라고 불리지.”
“그럼 저도, 표라고 부르면 되지 않겠습니까?”
“표라는 발음은 이곳 사람들에게 좀 친숙하지 않을 것 같군. 차라리 이름으로 부르지. 세인. 어떤가?”
“네.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문이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곳 스튜디오의 센터장인 마커스에 대해서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이 있네.”
“뭡니까?”
“그는 아주, 아주 미국적인 남자라는 것.”
“미국적인 남자요?”
“정확히는 텍사스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대학 시절 미식축구부 주장 출신이라는 것이 이력의 가장 큰 자랑거리라고 여기는 남자니까.”
“그건 특이하네요.”
이만한 스튜디오의 총책임자가 자신의 이력 중에 대학 시절 운동 서클 경력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긴다니, 새삼 미국와 한국은 매우 다른 나라라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그가 자네에게 좀 짓궂게 굴 수가 있네.”
“짓궂게 굴어요?”
“그러니까, 그 친구가 말이지······.”
문이사는 마땅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 모양인지, 입맛을 다시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때였다.
등 뒤로 누군가가 빠르게 접근했다.
상대는 명백히 문이사를 노리고 있었고, 문이사는 그것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상황.
“엇!”
나는 문이사를 옆으로 밀고 상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상대의 의도는 명확했다. 낮은 자세로 달려드는 모양새는 태클을 걸겠다는 의도!
설마, 이렇게 보안이 철저한 장소에서 이런 일을 벌이다니? 원한 관계일까?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내 몸이 먼저 반응해버렸다.
-빠각!
“크악!”
태클 반격에는 니킥이 국룰 아닌가? 소싯적에 재미 삼아 배운 종합격투기의 타격 모션이 튀어나왔다.
내 무릎에 안면을 강타당한 괴한은 그대로 제 코를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꺄악!”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주변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과 당황 섞인 외침이 울려 퍼졌다. 하필이면 타격 부위가 코인 탓에, 금세 바닥에 핏불이 흩뿌려졌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갑자기 뒤에서 태클을 걸어와서, 저도 모르게 반응해버렸습니다. 이 사람 아는 사람입니까? 경호원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질문에 문이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떡하니 벌린 상태로 돌처럼 굳어버렸다.
‘뭐지? 이거 불안한데?’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마커스!”
누군가가 쓰러진 사람을 향해 그렇게 외쳤다.
마커스 카터.
내가 의도치 않게 사냥(?)해버린 남자는 다름 아닌, 맥베스 아메리카의 총책임자였다.
“AH~HAHAHA! 쎄다! 존나 쎄다!”
피가 철철 나는 코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거구의 사내. 마커스는 비어있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설마 이거 악수를 청하는 건가?’
나는 슬쩍 문이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문이사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슬쩍 손을 저었다.
이것은 내 생각이 맞다는 의미겠지.
“표······. 아니, 세인입니다.”
“오우! 이름부터 강력하구만, 사담 후세인과 같은 혈통인가? 최고야! 그레에이트!”
뭔가 이상한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피를 철철 흘리는 꼬락서니치고는 텐션이 이상하게 높고 표정도 지나치게 명랑하다.
“헤이, 문!”
“왜?”
“아주 제대로 된 남자를 데려왔구만!”
“닥치고! 의무실에나 가! 그러니까 그런 위험한 짓거리 하지 말라고 했지!”
“HAHAHA! 수컷끼리 처음 만나면 서열 정리부터 해보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
“그럼 네가 졌으니까, 앞으로 세인을 센터장이라 불러야겠군.”
“승부는 삼세판!”
“저 머저리, 의무실에 처박아!”
문이사의 말에 뒤에서 멀뚱히 구경만 하던 경호원들이 허둥지둥 달려와 마커스의 양쪽 팔을 붙잡고 연행하듯 끌고 갔다.
“우리의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후세인의 혈족이여! HAHAHA! 최후의 승자는 언제나 아메리카니까!”
경호원들의 손에 끌려가면서도 나를 향해 뭐라 뭐라 지껄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진짜 제대로 한 방 날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샘솟는다.
“······저게 이곳의 센터장인 마커스라네.”
“음······.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그래, 어쨌든 정말로 저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었군. 물리적인 의미는 아니었는데······.”
이, 이건 정말 억울하다!
“이럴 때가 아니라, 사과하고 치료비라도······.”
“아니, 신경 쓰지 마. 저 혼자 머리통 깨진 적도 있는 친구야. 자네가 귀찮을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
“그래도······.”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이거 꿀맛인데? 한번 쯤 저 망나니 같은 녀석을 된통 혼내주고 싶었었는데, 하하하.”
“하. 하. 하.”
뭐, 별일 없으면 다행이고······.
*
*
*
“표팀장님은 잘하고 계실까요?”
표세인이 출장을 떠난 후, 양성태는 매일 같이 기획팀에 얼굴을 내비쳤다.
기획팀장을 내려놓고서야, 기획팀 사람들과 대화할 기회가 많아진 것.
정작 기획팀장일 때는 표세인하고만 잠깐 대화하거나 그를 호출했었던 것을 고려하면 다소 우스운 상황.
“흠, 다른 것은 몰라도 영어가 안되시니. 아, 서양 애들 영어 안되는 동양인 아주 우습게 볼 텐데.”
남궁원의 걱정에 양성태도 말없이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걱정되지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
홍기도의 말에 양성태와 남궁원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 수년간 표팀장님을 지켜본 결과, 새로운 판이 깔리면 언제나 기선제압부터 시작하시거든, 아마 지금쯤 타겟 하나 잡아서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놨을걸?”
그렇게, 홍켓몬은 새로운 스킬 ‘예지력’을 습득했다.
< 한국 기획자를 어떻게 써먹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