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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56화 (56/346)

56.

체격이나 외모의 문제를 떠나, 만만치 않은 인상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작은 키에 날카로운 인상. 한 치의 빈틈도 용납되지 않을 것 같은 꽉 조여진 긴장감이 엿보인다.

제임스는 첫인상부터가 만만치 않은 남자였다.

“그쪽의 요구사항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정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한에 맞추는 것은 비즈니스의 기본입니다. 그쪽의 문제를 이쪽에 떠넘기지 마십시오.”

제임스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착용한 체, 통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문이사를 향해, 살짝 손을 들어 기다리라는 제스쳐를 보냈다.

직속 상사에게 이런 태도라니? 이것이 미국 오피스의 풍경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문이사는 이런 태도를 용인하는 사람인가?’

자존심의 대명사 같은 문이사이건만, 정작 제임스의 행동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태도였다.

“잠시 기다려야겠군.”

문이사는 얌전히 제임스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런 모습은 의외네?’

문이사는 본사에서와 미국 지사에서의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

어쩌면 이쪽이 본 모습이고 본사에서는 그곳의 분위기에 맞춰 행동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나는 제임스의 새카만 검은 머리가 신경 쓰였다.

“한국인? 저분 한국인입니까?”

“맞아. 정확히는 한국계 미국인이지만.”

국적이야 아무렴 어떤가,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어의 여부!

“한국말 가능합니까?”

“그럼, 저 친구 중학교까지는 한국에서 생활했을걸?

불가능할 것만 같던 퀘스트에 한 줄기 광명이 비춘다.

됐다! 일단 다른 건 몰라도, 말이 통한다면야 가능성이 있다!

“무슨 일이십니까?”

통화가 끝난 제임스는 다짜고짜 용건을 물었다. 출장 이후 복귀인데, 대화 흐름이 무척 삭막하다.

하지만 평소에도 두 사람은 이런 느낌인지, 문이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람 하나 소개하려고.”

“용도는?”

용도? 이거 아무래도 한국어가 서툴다는 문제는 아닌 것 같지?

첫 인상은 마이너스로 스타트. 이것이 제임스에 대한 솔직한 감상이었다.

“올라운더. 무슨 일을 맡겨도 기대 이상으로 해내는 친구지.”

“포지션이 뭡니까?”

“디자인 파트지.”

한국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기획자를 설계자라는 의미에서 디자이너라고 부르고, 그래픽 파트는 아티스트라고 부른다.

“한국 기획자라니······. 써먹을 수 있는 것 맞습니까?”

뭐지? 지금 시비 거는 건가? 이렇게 대놓고 시비 걸어오는 경험은 정말 오랜만이다.

부모님께서 원체 큼직하게 낳아주신 덕분에 누가 면전에서 스트레이트로 시비를 걸어온 적이 별로 없다.

하다못해, 차대리도 등 돌리고 소심하게 찔러오지 않았던가?

“흠······.”

제임스는 잠시 나를 위아래로 노골적으로 품평이라도 하듯이 훑어보았다.

“한국 기획자들은 하나 같이 카피캣이나, 사탄도 내뺄 만한 BM(Business Model) 개발 외에는 쓸모가 없지 않습니까?”

제임스가 한 말은 국내 업계에서도 흔히 지적되는 문제점 중에 하나다.

특히 모바일 시장이 열리면서 개발의 규모가 축소되고 유니크한 시스템이나 컨텐츠를 연구하기보다는 잘나가는 게임의 주요 요소들을 그대로 ctrl+c, ctrl+v 만 반복하는 덕분에 국내 게임업계의 기획 포지션에 입지는 날이 갈수록 좁아진 상황.

하지만 이게 왜 기획 잘못인가? 위에서 지시가 그렇게 내려오니까, 그런 거잖아!

나 역시도 송부장 밑에 있을 때는 몇 날 며칠 밤을 새워가며 쥐어 짜낸 회심의 기획은 컷당하고, 잘나가는 게임이나 베껴오라는 잔소리에 시달렸더랬다.

“게다가 지금 당면한 문제는 개발 이슈는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나, 올라운더라니까. 좀비로얄 알지? 그거 이 친구 작품이야. 개발이면 개발, 마케팅이면 마케팅. 손대는 족족 살벌한 성과를 거두고 있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인재는 협상 테이블을 이끌어 가야 할 인재지, 기획이나, 마케터가 아니지 않습니까?”

제임스의 말에 문이사는 피식 웃었다.

“협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나?”

“그런 선문답에는 취미 없습니다.”

“재미없긴.”

문이사는 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본사 방문 중에 가장 놀랐던 일이 뭔지 아나?”

“양실장에게 패배한 것?”

제임스의 말에 문이사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정말로 가까스로 참는다는 얼굴로 그는 화를 억누르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보다 더 놀란 것은 한팀장이라는 친구 때문이었지.”

한팀장? 여기서 한팀장이 왜 나오지?

“오랫동안 팀장에서 승진이 멈춘 친구야. 나는 그 친구에게 미국 지사 발령을 제안했어, 당연히 직급은 한 단계 올려서. 하지만 그는 거절하더군.”

“그게 지금 상황에서 무슨 관계가······.”

“그 친구에게 이유를 물었지. 왜냐, 대체 왜 거절한 거냐. 그러니 그가 말하더군. 표세인 이 친구와 함께 일하고 싶다고.”

“······.”

“놀라운 일이지,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래 직급의 인재가 매력적이라는 이유로 승진 제안까지 거절한다는 것이 믿어지나?”

“매력. 그것이 이 사람의 능력이란 겁니까?”

“그래. 뭐, 자네에게는 수치로 재단할 수 없는 불확실한 요소에 불과할지는 모르지만, 나 같은 올드 스쿨에게는 이거 아주 중요해 보이거든.”

문이사의 말에 제임스는 당황했고, 나는 더 당황했다. 지금까지 한팀장이 문이사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를 단순히 버그 픽스를 위해서라고만 생각했었더랬다.

“일단 검증되기 전까지는 평가가 어려운 요소군요.”

“기대하라고 본사를 완전히 뒤집어 놓은 친구야. 분명 여기서도 자신의 가치를 확실히 증명할 거야.”

“알겠습니다. 협상 테이블에서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인재. 일단 그렇게 기억해 두겠습니다.”

다시 한번 협상 테이블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아마도 이 건이, 문이사가 내게 기대하는 안건. 그리고 제임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

드디어 내가 미국지사에서 처음으로 손대야 할 안건의 윤각이 드러나는 것 같다.

“그런데 협상 테이블을 이끌어 가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그렇군. 그게 말이지······.”

“그건 제가 설명하기로 하죠. 미스터 문은 그간 쌓인 결제들 먼저 처리해 주시죠. 이 이상 결제가 딜레이되면, 지부 전체가 마비될 지경입니다.”

“자네가 나서겠다고?”

문이사는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다.

“가시죠.”

“간다고? 어딜 가려고?”

“본인 일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세인은 우리에게 중요한 인재야. 일단 부드럽게 포섭을······. 아니, 좋은 관계를 구축해야 해, 그러니 내가 직접!”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와, 제임스 이 사람 포스가 장난이 아니다. 문이사가 뭐라고 씨불이건 말건, 신경도 안 쓰고 나가버렸다.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음······. 하나만 기억해 두게, 저 친구가 어쩌면······. 아니, 분명 신경 거슬리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결코 악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야.”

문이사는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제임스와의 독대는 나도 바라던 바다.

타겟을 이해하지 않으면 사냥은 성공할 수 없다. 현실은 몬스터볼 하나 던지면 포획이 완료되는 꿈과 희망으로 가득한 세계가 아니니까.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저녁 식사는 함께하자고! 내가 끝내주는 스테이크 하우스를 예약했어!”

문이사도 정말 고기 좋아하는구나, 의외로 홍기도와 궁합이 잘 맞을 것 같다.

“기대하겠습니다. 그럼······.”

나는 제임스의 뒤를 쫓았다.

“영어는 가능하십니까?”

“전혀 못 합니다.”

통역기가 제 몫을 해주길 바라지만, 짧은 몇 마디라면 모를까,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면 무용지물이 되겠지.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우리는 M&A에 관한 문제로 애를 먹고 있는 상황입니다.”

M&A.

근래 게임 업계의 가장 뜨거운 이슈다. 개발력에 투자하기보다는 인수에 열을 올리는 것이 근래 대형 게임 개발사의 트랜드.

더군다나 이곳은 미국 자본주의의 첨단을 달리는 나라가 아닌가? 당면한 문제부터가 미국지부답다는 느낌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아직 그것에 대한 설명을 해드리기에는 미스터 세인에 대한 신용이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

하긴 그렇겠지. 의외로 회사 안에서도 각자의 프로젝트를 숨기거나, 부서간 협조에 인색한 경우는 적지 않다.

하물며 외부자 신분에 잠시 출장 나온 것에 불과한 나를 어떻게 신용할 수 있겠나?

“그렇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그 부분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저길 보시죠.”

미국 지사의 건물은 건물 중앙부가 뚫려 있는 개방형의 구조였다. 제임스가 가리킨 곳에는 많은 직원이 다양한 취미를 즐기고 있었다.

오락실을 연상케 하는 아케이드 게임기가 즐비한가 하면, 한쪽에서는 보드게임을 즐기거나 헤드셋을 착용하고 악기를 조율하는 이들도 있었다.

“휴게실입니까?”

“휴게실은 따로 있습니다. 저곳은 크리에이티브 존입니다.”

그건 뭐지? 아무리 봐도 잘 갖춰진 휴게실 아닌가?

“게임이나, 취미를 통해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겁니다.”

“역시 미국답네요. 한국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죠.”

한국의 IT업계에도 저런 공간들을 마련한 회사들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어차피 근무자들이 한국인이 아닌가?

업무시간에 저렇게 대놓고 마음 편히 놀 수 있는 문화는 아직 한국에 자리 잡지 못했다. 결국, 유명무실해지거나, 커피나 마시며 대화공간으로 변질되는 것이 태반.

“저분들은 보통 몇 시까지 저기에 계십니까?”

“요즘은 출근 후, 퇴근 시간까지 저곳에만 있더군요.”

일을 안 하고 온종일 저러고 있다고? 이건 복지 운운할 수준이 아니잖아?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말씀드릴까요?”

“제가 겉치레를 좋아하는 성격은 아닙니다.”

“월급이 아깝네요.”

게임 개발사에는 대개 업무 중에 1시간 정도 게임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존재한다. 이것이 잘 지켜지는 곳도 있고, 아닌 곳도 있다.

인풋은 중요하다.

개발자 중에서 ‘나는 게임에 빠진 너드가 아니다.’라며 게임을 즐기지 않는 것을 자랑처럼 내세우는 이들이 있지만, 이건 자신의 업무에 열정이 없다고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최소한 시장 조사는 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상 저렇게까지 업무에서 멀어진 모습은 또 어떨는지······.

태생적으로 워커홀릭 기질을 타고나는 한국인이기 때문일까? 솔직히 부럽다기보다는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사실 저곳에 있는 분들은 각 팀에서 차출된 인원들입니다.”

“차출이요?”

돌아가면서 휴식을 취하라는 의미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또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한데?

“대인관계나, 업무성과 미진 등의 여러 요소 때문에 차출된 인원들은 저곳으로 보내지고 저 안에서 각자 서로의 마음에 맞는 프로젝트를 발굴하여 새로운 팀을 이루게 됩니다.”

아······. 그래, 이것이 선진적인 기업문화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러면 조금······.

“표정을 보니 좀 당황하신 것 같군요.”

“예. 솔직히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억지로 틀에 끼워 맞추기보다는, 본인이 원하는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최대의 맨파워를 끌어내도록 유도한다. 요지는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한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보이는군요.”

“어떤 문제입니까?”

“저기서 어떤 식으로 리더가 탄생합니까? 회사가 정해주지는 않을 테지요?”

내 말에 제임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미스터 문이 주목할 정도의 식견은 갖추고 계시군요. 정확합니다. 솔직히 저 안에서 아직 이렇다 할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회사는 친목동호회가 아니다. 굳이 직급은 단순히 연차 쌓였다고 대접해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언젠가는 저런 자유로운 문화가 IT를 넘어, 모든 업계에 당연하게 적용되는 세상이 올지 모르지만, 당장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로 어떤 성과를 이뤄낼 수 있겠나?

“그리고 분산된 와중에도 파벌은 있습니다. 저기 보드게임을 리드하는 제프리와 기타를 쥐고 있는 케빈이 주축이지요.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다른 이들을 이끌어 주길 바라지만,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케미스트리가 발생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프리와 케빈. 이해했다.

“재무담당으로서 저들이 급여만 축내고 있는 상황은 반갑지 않습니다. 매력이 무기라고 들었습니다만, 이 문제 해결 가능하시겠습니까?”

제임스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역시 중학교 이후, 미국으로 넘어온 탓에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완벽하지 않은 것 같다.

“하나 가르쳐 드리죠.”

“뭡니까?”

“직원이란, 까라면 까는 겁니다. 그것만 가르쳐 놓으면, 그 뒤는 걱정할 것이 없죠.”

이제 미필과 군필의 차이를 가르쳐 드릴게. 정신교육이라고 들어 보셨으려나?

< 네가 처음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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