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57화 (57/346)

57.

“아나.”

“예. 무슨 일이시죠?”

“당분간 세인을 서포트해줘. 통역을 비롯해서 전반적인 업무 보조까지.”

“알겠습니다.”

아나라고 불린 여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에게 다가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나 알론소입니다.”

“한국어가 유창하시네요?”

“어버지가 한국분이세요. 어머니가 한국에서 복무하시던 시기에 제가 태어났죠. 일단은 저도 한국 국적입니다.”

그러고 보니, 얼굴에 흐릿하게 한국적인 느낌이 배어있다.

확실히 한국계 기업인 덕분일까? 예상보다 한국어가 가능한 사람들이 많다.

“반갑습니다. 표세인입니다.”

간단한 통성명 이후, 제임스는 인사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정말 찬바람 쌩쌩 분다는 표현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제임스가 좀 태도가 냉랭하죠?”

“그렇네요.”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만만치 않은 퀘스트라는 느낌.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제임스의 성격이 아니다.

그의 성격에 대한 고민은 노닥거리는 낙오자들의 문제를 해결한 후에 고민해도 늦지 않다.

“그래서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사내 견학?”

“일단 저기 크리에이티브 존에 있는 사람들의 인사기록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회화는 어려워도, 독해는 가능하신 모양이네요? 한국에는 그런 분들이 많으시죠.”

아니, 달라고 했지, 제가 읽는다고는 안 했잖아요.

*

*

*

아나는 화이트 보드에 제프리와 케빈을 비롯한 낙오자 명단을 적어 놓고 브리핑을 시작했다.

“제프리와 케빈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알아야 할 것?”

아나는 화이트 보드에 제임스라는 이름을 적었다.

“당신이 보시기에 제임스는 어떤 느낌이었나요?”

“느낌?”

“제 기준에서 그는 지극히 한국인스러운 비즈니스 맨입니다.”

“그런가요?”

“미국 IT업계의 기조는 스티브 잡스 이래 혁신이라는 단어에 중독되어버린 상황입니다. 크리에이티브 존에서 직원들이 얼마나 시간을 보내건 참견하지 않는 것도 그렇죠.”

전설적인 기업인인 스티브 잡스의 첫 직장은 아타리라는 게임 개발사였다.

그는 당시 히피 정신에 물들어 있던 탓에, 제대로 씻지도 않아서 악취를 풍기고 성격도 좋지 않아서 남들과 매일 같이 언쟁을 벌였더랬다.

그의 직장 상사였던 놀런 부슈널은 스티브 잡스의 천재성을 눈여겨보고, 수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자유로운 업무시간을 보장하는 등 적극적인으로 지원했다.

그리고 그 결과 스티브 잡스는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깨 브레이크 아웃(벽돌깨기)라는 히트작을 개발해냈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런 조치 없이 방관만 하는 것도 곤란하지 않습니까?”

직원들의 창의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해주는 것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스티브 잡스는 아니고, 과거와는 달리 현재의 게임 개발은 수많은 개발자의 공동작업이지 않나?

이제는 스티브 잡스 같은 1인의 천재가 혼자서 기적을 이뤄낼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조치는 있습니다. 그들은 월 1회 성과보고서나, 성과물을 제출해야 합니다. 이를 지켜내지 못하면 해고입니다. 미국은 한국과는 달리 해고가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방임주의와 더불에 철저한 성과주의. 이것이 근래 미국 IT업계의 기조다, 이건가?

“하지만 지난달 그들이 내놓은 성과물은 회사가 제시하는 허들을 넘지 못했습니다. 아마 이번에도 그렇다면, 그들은 상당히 난처한 처지에 놓이게 되겠지요.”

“그리고 그것에 대한 부담감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다?”

“정확하십니다. 사실 저들은 나름대로 주목받는 인재들이기도 하니까요.”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네요. 그들의 창의력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 자유를 주었는데, 그것이 도리어 부담이 된다면 지금이라도 방향을 선회해야 하지 않습니까?”

“마커스가 그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마커스?”

미국지사의 센터장. 마커스의 이름이 나오자 그의 코를 뭉개버린 일이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비록 사고였다고는 해도 정말 괜찮은 걸까?

“마커스와의 첫 만남에서 그의 코를 뭉개버리셨다죠?”

“그건 사고였습니다. 갑자기 뒤에서 달려드는 탓에······.”

“예. 그는 종종 다른 직원들에게, 아니 임원 레벨인 미스터 문에게조차 그런 장난을 걸곤하지요. 사실 우리 지사의 상당한 골칫거리기도 합니다.”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나를 힐난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다행이다. 정말로······.

“그보다 그는 어째서 현재 상태를 방관하고 있는 겁니까?”

“마커스의 철학이죠. 스스로 각성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건 좀 비효율적이지 않습니까?”

“마커스는 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아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HAHAHA! 세인! 널 찾고 있었다!”

“마커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코에 큼직한 밴드를 붙인 마커스가 특유의 괴상한 웃음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미안합니다. 제가 놀란 나머지 실수했습니다.”

아나는 내 말을 빠르게 통역해 주었다.

“HAHAHA! 남자끼리 이 정도 해프닝에 사과가 웬 말인가! 그동안 너 같은 아시안은 본 적이 없어! 나는 흥분했다고!”

첫 대면에 니킥부터 꽂아 넣는 상황은 어느 나라를 통틀어도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지 않나?

“어쨌든 사과드립니다. 만약 치료비를 원하신다면 마땅히 배상하겠습니다.”

“노노! 그보다, 아까는 한방에 KO 당한 탓에 묻지 못했는데, 당신이 이곳에 방문한 이유가 뭐지?”

“미국 현지시장 조사와 미스터 문을 서포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표면적인 이유 말고, 진짜 이유가 듣고 싶은데?”

지금까지 곰 같은 체격과 과장된 행동만을 보이던 마커스였다. 하지만 역시나 센터장 정도 되는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다.

지금까지 유지해오던 터프하고 다소 생각없어 보이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날카로운 눈빛으로 내 허실을 탐색한다.

‘사람 겉보기로 판단하는 것은 아니라지만.’

순간, 마커스의 과장된 웃음이나, 태클을 시도하는 것 같은 일견 가벼워 보이는 행동들은 상대를 속이기 위한 기만전술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마커스에 대한 경계심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진짜 이유?”

“바로 얼마 전까지 한국 본사에서 문이사와 정면승부까지 벌이더니, 이제는 함께 미국 지사에 왔다? 뭔가 백그라운드 스토리가 숨어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허심탄회하게 말해줄 생각은 없나?”

네 당연히 없고요.

어쩌면 평소와는 다른 느낌으로 훅 들어오는 저 태도에 많은 이들이 당황한 나머지 마커스의 뜻대로 움직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평소와는 달리 진지한 모습으로 웃음기를 제거하면, 평소 그를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들은 퍽 당황했겠지.

미식축구 선수를 연상케 하는 거구의 남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예상 밖의 상황을 마주하게 될 테니까.

더군다나 상대는 센터장 신분.

‘하지만 나야 뭐, 힘으로 위협한다고 내가 질 것도 아니고, 미국지사 소속도 아니고.’

그렇게,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마커스의 시선이 화이트보드로 이동했다.

“제프리, 케빈······. 흠, 저 친구들에게 관심이 있나?”

나는 아나의 통역이 끝나는 동시에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 본사에는 이렇게까지 업무시간에 관대한 시스템이 없기에 관심이 가더군요.”

사실 제임스 때문에 알게 된 것이지만, 관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미스터 문이나, 제임스 때문이 아니고?”

눈치도 빠르셔라, 역시 곰의 탈을 뒤집어쓴 여우가 틀림없다.

“글쎄요?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일단 발을 뺐다.

아직 미국지사에 대한 파악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지만, 문이사와 마커스가 서로 힘겨루기가 한창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적어도 출장중에는, 아니 제임스를 포섭하는 그 순간까지, 내 포지션은 문이사를 조력하는 것.

상대의 패를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섣불리 속내를 내비칠 필요는 없겠지, 뭐 어차피 짐작은 하고 있는 눈치지만.

“흥미롭군! 좋아. 그렇다면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직접 부딪쳐 보라고, 내가 안내하지!”

마커스는 내 동의도 구하지 않고 내 손목을 잡고 끌어 당겼다.

뭐지? 일단 나를 안내해주겠다는 것 같기는 한데······.

기분이 나쁘다.

내 동의를 구하지 않는 것부터, 다짜고짜 힘으로 사람을 끌고 가려는 행동까지.

내가 아무리 미국의 문화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하다고는 해도, 이건 아니라는 느낌이다. 게다가 내 손목으로 전해지는 완력이 상당했다.

이건 노골적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수작이지 않나?

‘미국 스타일이라······.’

분명 미국은 자신감 넘치고, 직급 보다 개인의 퍼스널리티를 중시하는 풍조가 있다고 들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나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냥 내가 그걸 택하고 싶다는 기분이다.

이곳은 분명 내게는 어웨이다. 내 본진이 아니라는 말.

그 말은 뭐다?

나도 좀 막 나가도 괜찮지 않을까?

“어? 어?”

마커스는 나를 잡아당기려고 애를 썼지만, 내가 힘으로 저항하자, 줄에 묶인 개처럼 제 자리에서 안간힘을 쓸 뿐이었다.

“이, 이게 왜······.”

나 못지않은 장신에 어지간한 성인 남성보다 배는 두꺼운 건장한 체격. 아마도 지금까지 그 커다란 체격에서 기인한 완력에 자신감이 많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10살 어린 유도선수인 동생 놈과도 힘 싸움에서 밀린 기억이 없다.

게다가 상대는 이미 전성기가 한참 지난 나이.

“마커스.”

이번에는 내가 그의 손목을 잡아, 내 손목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을 떼어냈다.

자신의 완력을 가볍게 능가하는 내 힘에 마커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휘우~”

상황을 지켜보던 아나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저는 아직 조금 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뜻은 고맙지만, 준비가 끝나면 그때 가도록 하겠습니다.”

“······HAHA! 세인! 너는 정말로 터프한 남자였어! 이건 너무 멋지잖아!”

또 한 번 특유의 과장된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이제 확실히 알겠다.

평소에는 모르겠지만, 지금 저 미소는 자신의 당황을 숨기기 위한 과장된 행동.

“지금 저는 아나와 일을 하던 중이니,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평소의 나답지 않은 조금 차갑고 딱딱한 말투.

너의 무례한 행동에 나는 지금 기분이 좋지 않다는 의미가 명백하게 전달되도록. 나는 그렇게 내 기분을 가감 없이 전달했다.

“미스터 세인.”

뭘까? 단순히 내 이름 앞에 미스터라는 이름이 붙은 것 같은데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는 느낌이다.

이제 상대도 본격적인 전투모드에 돌입하려는 건가? 마커스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눈에 띄게 진지해져 있었다.

“예스?”

“지금까지 본사에서 출장을 나온 사람들 중에서 내게 이렇게 까지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당신이 처음이야.”

“그렇습니까?”

“기대하지. 드디어 미스터 문이 방아쇠에 손을 올렸다, 이건가?”

그건 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 괜히 더 길게 말을 섞는 것은 좋지 않겠지.

“······.”

“제프리와 케빈이란 말이지. 좋아. 나중에 또 보자고.”

“······.”

나는 마커스가 방을 나설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임원급 인사에게 인사를 하지 않은 적은 처음이다.

나름 재미있다, 는 것이 솔직한 감상.

“멋져요!”

“?”

“세인 당신 정말 멋지네요! 반지가 없는 것을 보면 결혼은 하지 않은 것 같은데, 혹시 오늘 시간 있어요?”

와, 놀래라. 이렇게 훅 들어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진심으로 조금 당황했다.

“애인 있습니다.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흠, 아까운데······.”

아니,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러다 다쳐요.

진짜로.

*

*

*

아나에게 낙오자 그룹에 대한 브리핑을 듣고 나자, 어느새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세인, 정말 관심 없어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하는 아나. 이쯤 되니, 진심인지 장난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몇 번을 물어도 제 대답은 같습니다. 정중하게 사양하겠습니다.”

“여자친구의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인가요?”

아나의 질문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너무 많아서 고르기가 어렵네요.”

“하하하! 오케이, 확실히 이해했어요. 세인의 여자친구는 행운아네요.”

양심상 인정하기가 껄끄럽다. 솔직히 제가 행운아죠.

전생유공자 혜택이 아니라면 꿈도 못 꿀 행운.

“행운아는 접니다.”

어서 숙소에 돌아가서 연아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다.

마커스, 제임스 등의 시작부터 만만치 않은 사람들을 연달아 상대한 탓에 살짝 피로한 느낌이었지만, 곧 연아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벌컥!

“세인!”

문이사가 등장했다.

“각오하라고! 오늘 최고의 대접을 선사해줄 테니까!”

아! 잊고 있었다.

마음은 고마운데······. 타이밍 참 못 맞추시네요. 미스터 문.

내가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짓자, 문이사는 그것을 빠르게 캐치했다.

“설마 이 문상훈이의 접대를 거절하겠다는 건가?”

일단 그의 환심을 사는 것도 출장 중의 주요 임무 중에 하나.

제임스를 포섭하기 전까지는 문이사와 한배를 타야 한다.

나는 싱긋 웃었다.

“오늘은 스테이크 집으로 가지. 내가 자신하는 맛집이야. 아무나 쉽게 데려가는 곳은 아니란 것을 명심하게.”

문이사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먼저 성큼성큼 나가버렸다.

‘하는 수 없지. 여기서는 문이사가 내가 가진 유일한 에픽템이니까.’

탱커의 주요 역할은 장비 관리 아니겠나? 나는 장비(문이사) 관리를 위해서 순순히 문이사의 뒤를 쫓았다.

< 남자는 의리!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