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첫 만남부터 미슐랭을 언급하던 문이사였기에 굉장히 으리으리한 레스토랑을 상상했지만, 의외로 현지인들이 자주 찾는 로컬 레스토랑을 소개 받았다.
한국 레스토랑의 스테이크와는 볼륨에서 비교가 안 되는, 그러면서도 푹신함이 인상적인 스테이크는 퍽 흡족한 퀄리티였다.
“입맛에는 맞았나?”
“아주 맛있었습니다.”
식사 후, 위스키 한잔으로 가볍게 마무리. 깔끔한 식사라는 느낌이다.
“제임스는 어떻던가? 혹시 그의 말투 때문에 기분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나를 붙여주신 덕분에 적응하기도 손쉬울 것 같고, 테스트도 명확하게 제시해줘서 후련할 정도입니다.”
“테스트?”
나는 제프리와 케빈을 비롯한 크리에이티브 존의 낙오자 그룹에 대한 내용을 전달했다.
“그렇군. 자네 입장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만약 그 일을 처리해 준다면 내게는 큰 도움이 될 것 같군.”
“그렇습니까? 잘됐군요.”
한 건으로 제임스와 문이사 모두를 만족 시킬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얼마후에 주주총회에서 센터장 자리를 두고 투표가 있을 거야.”
“문이사님도 후보시죠?”
“그렇지.”
문이사의 현재 포지션은 CAO(행정책임)와 CFO(재무책임)을 겸임하는 상황이라고 들었다.
“고작 3년. 나 스스로는 이제 겨우 마커스와 힘겨루기가 가능할 정도의 입지는 확보했다고는 생각하지만, 센터장 자리를 차지하려면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아.”
문이사가 글래스 안의 아이스볼을 살짝 흔들자, 맑은소리가 울렸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적, 이 문제는 이번 협상의 결과에 따라서 해결될 가능성이 있지.”
“남은 문제는?”
“사내에서의 존재감. 기억하지? 자네가 마커스의 코를 납작하게······.”
“정말로 실수였습니다. 애초에 회사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태클을 거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내 말에 문이사는 피식 웃었다.
“그게 그 나름의 이미지 메이킹 방식이지.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지만, 어쨌든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
문이사는 위스키로 목을 축인 후, 말을 이었다.
“미국은 그런 과격한 이미지도 하나의 캐릭터로 인정해주는 풍토가 강하지. 우리처럼 예의에 대해 엄격하지 않아. 아니, 예의라는 개념이 좀 더 느슨하달까? 그 친구 특유의 웃음소리 기억하나?”
“그럼요. 쉽게 잊기 어려운 캐릭터죠.”
특유의 과장된 웃음소리. 그것도 캐릭터 메이킹의 일환이라는 말이다.
나라가 달라서일까? 확실히 수가 다르다는 느낌.
“대학 미식축구부 주장 타이틀을 앞세워 그런 터프가이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 이게 의외로 이곳에서 먹히는 이미지야. 일견 딱딱하게만 보이는 월가의 금융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그런 친구들이 많아.”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몇몇 미국 영화에서 과격한 웅변으로 사무실을 경기장 응원석과 같은 풍경으로 바꿔버리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자네도 체대 출신이라고 했지?”
“예.”
“어쩌면 자네는 이곳에서 더 먹히는 스타일일지 몰라. 공부 벌레 보다는 운동부 계열의 리더쉽이 더 선호 받는 경향이 분명히 존재하거든.”
문이사는 남은 위스키를 비웠다.
“어떤가? 나 문상훈이는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은 못해. 나와 손잡지. 나는 올해 안에 미국 센터를 손에 넣고 몇 년 후, 최소 이사A 타이틀로 본사에 복귀할 거야.”
다른 게임사들이 직급제도를 개선하거나 최소화 하는 가운데, 맥베스는 오히려 다른 업계 대기업들을 쫓아 임원직급에 등급을 더했다.
노력에 따른 보상.
그리고 회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은 바로 승진이 아니던가?
조회장의 경영마인드는 확고했다.
“그 후에는 상무 그리고 전무. 마지막으로 대표자리를 손에 넣겠지. 나는 자네가 내 후임으로 미국지사 센터장이 되어주면 좋겠어.”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이제 겨우 팀장인데, 고작 몇 년 후에 미국지사 센터장?
남들은 차장 막바지, 혹은 부장초임 수준일 때, 계열사 CEO 타이틀을 달 수 있다는 것.
아니, 이렇게 빨리 포섭을 시도한다고? 확실히 양실장과는 수가 다르다.
판단이 섰다면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오는 것.
문이사의 YES or NO가 너무나도 확연한 캐릭터다.
“그 역할은 이사님의 오른팔인 제임스에게 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원래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와 제임스는 자네와 양실장처럼 긴밀한 관계가 아니야. 포지션상 한배를 타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이지. 아니, 솔직히 나는 그 친구의 머릿속을 읽을 수가 없어.”
확실히 제임스는 사적으로 친해지기 쉽지 않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제임스는 내 생각에 한국과 일본에서 더 먹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프로세스가 엉망진창인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어쨌든 이건 내 진심이야.”
“제안 감사합니다. 하지만 양실장을 저버리기에는 양심이 걸리네요.”
“양심?”
“우습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전 의리······. 그거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사내 정치라는 살벌한 전장 속에서 의리 따위를 앞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일지, 그 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제 잇속 챙기자고 의리 없게 행동한다? 이건 아니지.
엄마한테 혼날 일이지 않나. 내가 효자는 아니더라도, 의리 없는 아들놈이라는 딱지를 붙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예전 회사에서도 상무님과의 의리 지킨답시고 송부장 눈밖에 낫더랬지.’
하지만 그 덕분에 지금도 자신에게 떳떳했다는 자부심은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 곁에는 연아가 있고, 그 뒤에 회장님이 계신다.
회장 사위가 지조 없이 여기저기, 붙어먹을 수는 없지 않나.
“의리라고? 한팀장도 그렇고······. 대체 자네들은······.”
그야말로 벙찐 표정.
중요한 사내 정치의 한복판에서 의리를 운운하는 내 모습에 문이사는 대체 얘들 왜 이래? 라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사실 문이사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당연히 문이사가 정상이고 나와 한팀장 같은 캐릭터가 좀 유별난 편이지.
“이곳에 있는 동안 전적으로 문이사님을 보필할 겁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아직은 오월동주라 이거군.”
문이사는 피식 웃었다.
“의리. 멋있다. 그래. 뭐 그런 것들 나쁘지 않기는 한데······.”
무언가를 곱씹는 듯한 얼굴. 이 분위기가 길어지면 문이사의 머릿속에 나에 대한 마이너스 감정이 자리 잡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한번 밀어냈으니, 이번에는 살짝 당겨볼까?
“그런데 말입니다.”
“음?”
“문이사님이 저희 쪽에 합류하시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당연히 안되는 소리란 것은 알고 있고, 그냥 나는 우리가 함께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라는 요지의 뉘앙스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
“뭐? 설마 나 문상훈이에게 양실장 밑으로 들어가라는 말인가?”
문이사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하지만 나는 문이사가 불쾌감을 느낄 틈도 없이 치고 들어갔다.
“에이, 그렇게는 안 되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천하의 문상훈이가 양성태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듯이.
느긋하지만 확신에 찬 어조. 나는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 전해지도록.
“삼두정치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로마?”
“예.”
“삼두라는 것은 남은 일각은 자네?”
나는 급히 손을 휘저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제가 두 분 사이에 어떻게 낍니까? 그리고 삼두정치라고는 해도, 결국 카이사르와 마그누스의 쌍두마차 아닙니까, 크라수스는 그냥 물주 겸 들러리 아니겠습니까?”
“······.”
“양실장과 문이사님. 본사 최고의 인재가 힘을 합쳐서 마차를 이끄는데, 이 속도를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삼두정치······. 쌍두마차라······.”
그냥 반쯤 농담 삼아 한 말인데, 문이사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어? 설마 진짜로 고민하시나?’
그 짱짱한 이상무 파벌의 오른팔이라는 타이틀을 걷어차고 우리 쪽에 붙는 것을 고민한다고?
고작 위스키 한 잔에 취하고 그런 타입은 아니겠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와 양실장이 이끄는 마차에는 누가 앉아 있는 거지?”
“네?”
작은 혼잣말이라서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어쨌든 제프리와 케빈의 일을 자네가 해결해 주면 기쁘겠군. 일단 이곳에서 자네는 내 사람으로 통하고 있으니, 부족한 사내 인지도를 올리는 계기가 될 수 있겠어.”
“노력하겠습니다.”
“영입제의와는 별개로 자네라는 사람에게는 호감이 가는 군, 처음에 한팀장의 입에서 멋있다는 말이 나왔을 때는, 얼마나 황당했던지.”
“하하, 한팀장이 좀 그런 멘트를 사용할 때가 있죠.”
“한팀장 말버릇인지, 자네가 끌어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이번에도 잘 들리지 않았다. 문이사가 오늘따라 혼잣말을 많이 한다.
이게 술버릇인가?
*
*
*
“점심 먹었어?”
-아직. 미국은 어때?
나는 숙소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침대에 누워 연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굴이 보고 싶었지만, 연아는 근무시간이기에, 영상통화는 하지 않았다.
“걱정한 것보다는 좋아. 다행히 말 통하는 사람도 많고.”
-다행이네.
“아, 그리고 나 돈 좀 써도 돼?”
-돈?
제프리와 케빈의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던 중에 한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조미료랄까? 약간의 금전적 지원이 필요했다.
군대에서 얻은 가장 큰 격언, 포상은 개구리들을 춤추게 하는 법 아니겠나?
“회장님이 주신 카드, 이거 여기서 현금서비스 가능하지?”
-응.
“이게 액수가 좀 클 것 같은데.”
-얼마나?
막상 말하려니, 액수가 너무 커서 살짝 겁이 난다.
“일억?”
-뭐라는 거야, 정말.
여, 역시 너무 큰가? 순간적으로 내가 요즘 너무 개념이 없어진 것 같다.
얼마 전까지 수십억의 사업비를 재량껏 굴린 덕분에 금전감각이 마비된 걸까?
“미안. 내가 헛소리했어. 일억은 너무 크고······. 한······.”
-무슨 소리야. 대체.
“아니, 내가 처리할 일이 있는데, 보너스를 미끼로 좀 흔들어 보려는데······.”
-그게 아니라, 고작 그 정도 액수를 왜 시시콜콜 보고 하느냐고, 이러면 내가 무슨 눈치 주는 사람 같잖아.
와, 진짜 고마운데······. 새삼 우리가 서로 돈 관념이 얼마나 다른지가 느껴진다.
-그 카드 회원자격 유지 때문에라도 좀 써야 한다니까?
“안 그래도 틈틈이 쓰고 있어.”
-오빠 성격에 안 봐도 훤하지, 끽해야 직원들 밥이나 몇 번 사줬겠지.
네. 정확하십니다.
-그보다 옷이나 사 입어. 옷 안 샀지?
첫날이라 좀 바빴어요.
-고르기 어려우면 문이사님께 여쭤봐. 그분이 그래도 좀 센스가 있어.
“그래? 그건 몰랐네.”
문이사는 항상 정장만 입고 있어서, 센스가 있는지, 없는지, 감도 못 잡겠다.
학창시절 내내 트레이닝복, 아니면 가끔 청바지나 입던 내가 뭘 알겠나?
-어차피 미국은 명품 아니면 볼 것 없어. 오빠는 이참에 정장이나 몇 벌 사. 아마 문이사님이 애용하시는 테일러샵이 있을 거야.
“그래. 그렇게 할게.”
출장을 계기로 문이사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그 정도 부탁은 흔쾌히 들어주겠지.
-그리고 문이사님 곁에 있을 때, 잘 배워둬.
“배우라고?”
그러고 보니, 양실장도 문이사에게 배울 점이 많다고 했었다.
-혹시 지난번 장난 같은 내기 때문에 본사 임원 수준을 얕잡아 보는 것은 아니지? 임원은 원래 개발하라고 달아주는 타이틀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모르긴 몰라도 수년 이상 개발에 손대지 않은 사람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게임 시장, 더군다나 오랫동안 미국에 있던 사람이, 국내 유저들의 입맛 변화를 캐치하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할 일.
-아빠 말로는 개발자 출신이지만, 진가는 사업 파트에 가치가 있다고 했어. 이번에 추진중인······. 내 정신 좀 봐. 미안 못 들은 것으로 해줘.
누가 회장님 딸 아니랄까 봐, 공사 구분 하나는 칼이다.
더군다나, 자고로 비서란 입이 무거워야 하는 법이 아닌가?
“신경 쓰지 마.”
-아무튼 몸조심하고.
내 몸은 괜찮은데······. 마커스도 괜찮았으면 좋겠다.
“그래. 내일 또 연락할게.”
-하나만 기억해. 어디서든 기죽지 말고.
“알겠어.”
-그럼 난 이제 점심 먹으러 갈게.
“맛있게 먹어.”
통화는 끝났다.
“일억······. 적은 돈은 아니지.”
연아의 반응이야, 어쨌건 나도 서서히 금전 감각이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수준에 있는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우습다.
원래 그렇지 않나? 게임 초반에는 1골드도 아쉽지만, 나중에는 1000골드도 우스운 법.
“레벨에 맞게 가자.”
1억. 큰돈이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별 것 아닌 액수다.
표세인. 너는 연아의 남자친구고, 회장님의 예비 사위다.
쩨쩨한 액수에 연연하지 말자!
“그래도 역시 1억은 좀 큰가? 아니지. 아니야.”
서민 근성을 완전히 떨쳐내기 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
*
*
“좋은 아침이에요.”
“마침 잘 왔어요.”
“?”
나는 아나가 출근하기 무섭게 미리 준비해둔 자료를 넘겨주었다.
“이제 뭐죠?”
설문지 형식의 간단한 테스트 문서를 확인한 아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작은 게임을 하나 해볼까 해서요.”
게임이라 읽고 덫이라 쓴다는 느낌이랄까?
< 인종차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