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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59화 (59/346)

59.

“이걸로 크리에이티브 존 그룹을 판단하시려고요?”

아나의 질문에 나는 피식 웃었다.

어떻게 이런 허접한 설문지 하나로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나?

‘중요한 것은 오직 1번과 2번 항목.’

1번 리더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인가?

2번 현재 리더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누구 인가?

나머지는 의미 없는 짜깁기한 항목에 불과하다.

내가 판단한 이 그룹의 문제는 각팀에서 떨어져 나온 낙오자들이라는 점.

이들의 맨파워에는 문제가 없기에 회사는 그들을 해고하지 않고 기회를 주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어영부영 이곳에 도착한 이들에게 적절한 이정표나, 통솔자를 붙여주지 않은 탓에 이들은 지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

‘다소 아웃 사이더 기질이 있다고 하더라도, 제 손으로 뽑은 리더라면 어느 정도 인정하겠지.’

사실 이것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사전에 입수한 정보대로 후보자는 제프리와 케빈으로 정해진 상황.

‘둘 중에 누가 이 팀의 리더로 적합한지.’

그것을 확인하고 낙점자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이 정도일 것이다.

‘그것을 위한 미끼도 준비해왔고.’

나는 달러로 가득한 서류 가방을 챙겼다. 지폐라는 것이 은근히 무게감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가시죠.”

“알겠습니다.”

아나는 군말 없이 나를 따라나섰다.

“다들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크리에이티브 존에 도착하자, 아나가 모두의 이목을 내게로 집중시켰다.

“본사 디자인팀 소속의 치프인 미스터 세인이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모두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이것은 제임스가 요청한 사안이니, 협조 바랍니다.”

아나의 말에 나를 향한 시선에 호기심이 서리기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표세인이라고 합니다. 저는 제임스의 요청대로 여러분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왔습니다.”

“문제?”

“하, 또 시작이군.”

이미 업무 정상화를 위한 접촉이 사전에도 있었던 모양.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하거나 수근대는 작은 소요가 발생했다.

“여러분.”

“?”

“저와 게임 한번 하시겠습니까?”

“게임?”

내 말에 모두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나는 사전에 준비한 달러를 꺼내 들었다.

“여기 백달러 지폐가 있습니다.”

“······.”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간단한 미션을 성공하시면 여러분은 이 돈을 가져가시게 됩니다.”

“!”

뭐지? 나는 작은 웃음 정도를 생각했었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놀란 얼굴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식 유머와 코드가 너무 다른가? 설마 고작 백 달러 정도에 이런 반응은 뭔가 이상한데?

“스, 스퀴즈 게임?”

“오오! 딱지치기?”

뭐야? 뭔데?

나는 아나에게 슬쩍 귓말했다.

“스퀴즈 게임이 뭐죠?”

“한국인 아니셨어요?”

“맞는데······.”

“드라마 안 보세요?”

아나는 내게 한 한국의 유명 드라마가 지금 세계적으로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노라고 설명해 주었다.

“질문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말씀하세요.”

“실패할 경우의 벌칙은 뭡니까? 설마 따귀?”

따귀? 아니요. 절대 안 되죠. 저한테 맞으시면 이빨 나가십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럼 총살?”

미국식 조크인가? 총이라니······. 그런데 다들 표정이 왜 이렇게 진지해?

“우리는 리더를 선출할 예정이고, 벌칙은 리더가 부담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벌칙은?”

“그건 비밀입니다. 그럼 시작하죠. 안타깝지만 여러분께 선택권은 없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아나가 내 말을 통역하자, 갑자기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이번에는 또 뭐지?

“5, 5분! 아니, 10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

몇몇 인원들이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어디론가 우르르 달려갔다.

잠시 후, 달려나간 인원들은 가슴에 번호표가 달린 트레이닝복을 입고 달려왔다.

“준비됐습니다!”

“?”

대체 무슨 준비를 하고 온거야? 저 트레이닝복은 뭐지? 여기는 체육대회에 유니폼도 맞춰 입나?

“미리 말해주셨으면 나도 마스크를 준비해오는 건데······.”

아나는 뭔가 분하다는 듯이 속삭였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이 서류를 제한 시간 안에 작성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간은 5분. 그럼, 시작하죠.”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가 우르르 달려들어서 설문지를 낚아챘다.

‘호응이 없는 것보다는 나은데······. 대체 왜들 이렇게 눈이 뒤집혀서 달려드는 거지?’

뭔가, 내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이건 의외네?”

모두가 제프리와 케빈의 이름을 동시에 언급했었기에, 그 둘의 지지율은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제프리의 이름이 압도적이었다.

더군다나, 케빈조차 제프리를 리더로 추천한다고 기재한 상황.

“상냥하고 꼼꼼하게 챙겨준다.”

“시니어급이면서도 권위적인 면모가 없다.”

“가끔씩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시하거나, 타인의 아이디어를 능숙하게 보완해준다.”

대충 어떤 느낌인지 파악이 된다.

“하지만 이건 문제로군.”

문제는 정작 제프리 자신이 작성한 1번 항목이었다.

리더에게 필요한 자질은 무엇인가? 라는 항목에 제프리는 자신감 넘치고 강력한 카리스마로 주변을 이끄는 사람이라고 기재한 것.

“자신과는 정반대 스타일.”

상냥함과 카리스마는 대게 양립하기 어려운 자질이다.

하지만 양쪽 모두 장단이 있기 마련.

“이걸 좀 픽스해야겠지.”

정작 모두의 지지를 받는 제프리는 케빈을 리더로 지목했다.

“아나.”

“네?”

“케빈을 불러줘.”

“알겠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존에서 기타나 만지작 거리고 있었기 때문일까, 케빈은 곧장 내 앞에 도착했다.

“부르셨습니까?”

“혹시 휴가 계획 있습니까?”

“휴가요?”

“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제프리가 그쪽 그룹의 확고한 리더가 되도록 지원할 계획입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십니다.”

케빈이 거짓말을 하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케빈이 방해가 됩니다.”

“그렇습니까?”

케빈도 전혀 예상 못 한 일은 아니었던 모양. 조금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가능하시다면 모두에게는 비밀로 며칠 정도만 휴가를 다녀와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제프리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래야죠.”

다행히 케빈은 순순히 휴가에 동의해 주었다.

“다만, 회사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SNS 활동도 자제해 주시고요. 만약 회사 사람들이 연락해도 무시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휴가 중에는 원래 그렇게 하지만, 이번에는 좀 더 철저히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협조에 감사합니다.”

케빈과 대화가 끝나자 어느덧 점심시간이 가까워진 상황.

“아나, 제프리에게 식사를 함께하자고 전해줘요.”

“알겠습니다.”

아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방문이 열리며 문이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인, 식사해야지?”

“혹시 제프리와 함께해도 괜찮겠습니까?”

“문제없지.”

문이사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감사합니다. 사실 문이사님이 곁에 계셔주면 제 말에도 더욱 힘이 실릴 테죠.”

“하하, 불청객의 기분을 살려주는 것도 능숙한데?”

문이사는 짧게 웃었다.

“그리고 저와 제프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은 무조건 제게 맞장구를 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무조건?”

“나중에 모두 설명드리겠습니다.”

“호오, 흥미로운데? 그건 양실장에게 배운 수법인가? 그런데 그런 기밀을 이 문상훈이에게 보여줘도 괜찮겠어?”

문이사가 눈을 반짝였다.

“아닙니다. 그냥 제 방식입니다. 다소 음흉하더라도 귀엽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만큼은 우리는 한배를 탄 사이가 아니겠습니까?”

“이곳에서만큼은이라······.”

문이사는 뭔가 고민하는 투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때마침 제프리가 도착했다.

“부르셨습니까?”

“네. 식사하셨습니까? 괜찮다면 함께 식사했으면 좋겠는데요.”

“알겠습니다.”

대충 짐작하고 있었던 듯, 제프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시죠.”

“오늘은 이탈리안으로 하지.”

“기대되네요. 문이사님은 맛집을 많이 알고 계시니까요.”

빈말은 아니었다. 문이사가 추천한 레스토랑치고 맛이 없는 곳은 없었으니까. 물론 그만큼 가격도 상당한 곳이었지.

“혹시 제프리, 가리는 음식 있나?”

아, 역시 미국은 미국이다. 이런 부분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구나.

아마도 문이사는 제프리의 종교를 신경쓰는 것 같았다.

“소고기 좋아합니다.”

“좋아!”

제프리 산지브. 이름 그대로 인도계 미국인. 다갈색 피부에 작은 키가 인상적인 남자.

유독 동글동글한 작은 얼굴에 웃는 상이 무척 호감이 갔다.

“기억하게, 미국은 인종의 용광로라고 불리지 않나, 별것 아닌 식사권유에도 신경써야 할 것들이 많아.”

“그렇네요.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문이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문이사는 흡족해 보였다.

“제임스도 이런 맛이 있으면 좋을 것을······.”

레스토랑은 멀지 않았다.

“이곳은 라쟈냐와 로스트비프가 일품이지.”

“로스트비프는 우리 어머니의 장기죠!”

“하하하하!”

제프리가 무언가 농담을 던진 것 같은데, 문이사와 아나가 곧장 웃어버린 탓에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함께 식사하는 것은 처음이군. 마커스가 누들에서 영입한 인재라며 호들갑을 떨던 것은 기억이 나는데 말이지.”

누들.

세계 최고의 검색엔진을 자랑하는 포털사이트.

아무리 애사심을 불태워줘, 맥베스가 누들과 견줄 수는 없다.

“솔직히 궁금한데, 왜 그곳에서 이곳으로 이직했지? 아, 성가시게 할 생각은 없어, 말하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돼.”

문이사는 뒤늦게 말을 덧붙였지만, 임원진의 질문이 그런다고 부담이 없을 리가 없지.

“괜찮습니다. 어차피 면접 때도 이유를 말했으니까요. 저는 원래부터 게임제작에 흥미가 있었지만, 누들은 게임 업계 진출에 소극적이거나, 잘못된 방향에만 초점을 맞췄지요.”

누들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IT 공룡 기업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게임 산업에 발을 들이고는 있지만, 번번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다른 이유는?”

“인종차별 문제입니다. 예전에 누들의 인종차별에 관한 기사로 제법 시끄러웠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아! 기억해. 아프리카계에 대한 차별 이슈였어.”

문이사의 말에 제프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누들의 현재 CEO는 인도계지 않았나?”

“그 이후에 그런 파격인사가 단행되더군요.”

“다른 이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아니다?”

“아프리카계의 숫자와 결속력은 견고하죠. 하지만 아시아인들은 그런 배경도 없고······. 달라졌을지도 모르죠. 어쨌든 그때 마침 맥베스 공고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시아계 회사니까, 차별이 좀 덜하지 않을까 했습니다.”

“음······. 혹시 무슨 문제는 없었나? 있었다면 내가 책임지고.”

문이사의 표정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인종차별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이 남다른 미국이기에 문이사도 가볍게 치부할 수 없으리라.

“하하하. 없습니다.”

그래. 같은 아시아인끼리 누굴 차별하겠나, 같이 뭉쳐야지.

“가끔 마커스가 저를 바벨처럼 들었다, 놨다 하는 정도가 골칫거리죠.”

“으음, 진지하게 묻겠는데 마커스, 그 머저리가 인종차별 따위를 하지는 않지? 그랬다가는······.”

“마커스가 음흉하기는 해도 그런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거면 한 방에 보내버릴 수 있을 텐데.”

문이사는 마커스와의 자리싸움을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런데 무슨 용건으로 저를 부르신 겁니까? 그리고 왜 케빈은 당신의 부름을 받은 이후에 말도 없이 퇴근한 거죠?”

제프리의 말에 나는 이제 슬슬 용건을 말해야 할 차례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당신이 그룹의 리더가······.”

그때였다. 아나의 표정이 이상했다.

“무슨 일이지?”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네요. 우리보다 늦게 온 테이블도 주문을 받고, 음식까지 나왔는데.”

아나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여기는 문제 없어. 안심해. 내가 이곳 매니저와 아는 사이야.”

하지만 문이사가 종업원을 향해 살짝 손을 들었음에도 종업원은 무시했다.

‘뭐지?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 무시해?’

문이사를 무시한 종업원은 다른 종업원에게 다가가 우리 테이블을 손짓한 이후, 뭔가 중얼거리며 키득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두 손가락으로 양쪽 눈끝을 늘어트렸다.

어? 저거 그거지? 대표적인 아시아인 인종차별?

“그러고 보니, 오늘 매니저가 보이지 않는군.”

“그렇군요. 나가시죠.”

“그래야겠어.”

뭐지? 이해가 안 되는데?

“왜 일어나십니까?”

“자네는 미국이 처음이라고 했지?”

“예.”

“미국이라는 곳이 겉으로는 인종차별 혐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손쓸 수 없을 정도로 곪아버린 부분도 존재해. 더 있어봤자, 좋은 꼴 보기 어려우니 나가자고.”

“하아, 그래도 여기는 낫습니다. 동부로 더 들어가면 어휴.”

인종차별 문제로 누들이라는 공룡 기업까지 박차고 나온 제프리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음······. 이거 기회인가?’

나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때마침 유색인종은 우리뿐인 상황.

‘그렇군. 마침 아시안은 우리들 뿐이라는 건가? 그걸 믿고 이렇게까지······.’

우리가 떠날 것 같은 기색을 보이자. 조롱의 눈빛을 보내는 20대의 젊은 청년 종업원.

그에 비해 제프리의 눈은 죽은 생선처럼 혼탁했다.

인종차별에 시달린 탓에 자존감이 낮아진, 제프리가 아닌가? 이대로라면 리더쉽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나만 기억해. 어디서든 기죽지 말고.’

어젯밤 연아와 통화한 내용이 떠오른다.

“다들 앉으시죠.”

“?”

“이건 일, 그냥 넘어가는 거 아닙니다.”

“세인, 자네가 몰라서 그러는가 본데, 여기는 미국이야. 흑인갱스터만 위험한 게 아니야. 화이트 트래시도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만약 문제가 생기면 경찰이 우리 편을 들어줄 거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경찰 오기 전에 끝납니다.”

말씀대로 여기 한국 아니잖아요. 미국 경찰은 느리다지요?

< 쨍그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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