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미국은 자본주의의 정점임을 자랑하는 나라.
그리고 그 뒤를 바짝 쫓는 것이 한국과 일본이 아닌가?
돈이 있다고 무개념으로 행동하거나, 돈 없다고 기죽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돈이 있는데도 피부색 때문에 무시당하는 것은 용납이 안 된다.
무엇보다 내 일을 방해받았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마침 현찰도 두둑하고.’
모두가 불안한 시선으로 나를 주목하는 가운데, 나는 포크를 들어 바닥에 떨어트렸다.
-챙강!
금속제 식기가 비닐타일과 충돌하며 맑은 쇳소리를 냈다.
“?”
종업원들은 내 행동에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내지만,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다시 한번.
-챙강!
이번에는 나이프.
두 번의 쇳소리에 종업원들 말고도 몇몇 손님들까지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래도 안 움직여?
나는 이번에는 접시를 들었다. 그러자, 드디어 우리를 조롱하던 종업원들이 화들짝 놀라 외쳤다.
“Hey!”
종업원이 내 앞에 도착하려는 그 시간, 나는 접시를 떨어트렸다.
-쨍그랑!
쇳소리와는 엄연히 다른 날카로운 소리에 식당 안의 모두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요즘 시대답달까?
모두의 손에 스마트폰이 들려있는 상황.
“아나, 통역하세요. 내 늬양스 그대로 순화하지 말고.”
“예.”
아나는 당차게 대답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너는 뭐 하는 거냐?”
“뭐?”
“왜 가게 앞에 안 써 붙였어.”
“뭐라고?”
“인종차별을 하고 싶으면, 인종차별을 하는 가게라고 주의하라고 했어야, 할 것 아냐! 니들 그런 것 잘하잖아! 유색인종 금지! 그런 것 붙여 놨어야지!”
아나는 오히려 내 톤보다 훨씬 크게,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소리쳤다.
“역겨운 소리 내뱉지 말고 영어로 말해라!”
“내쫓아 버려!”
한 종업원이 내 멱살을 잡으려는 순간, 나는 역으로 그의 손목을 잡아 살짝 비틀었다.
“악!”
“매니저 불러와.”
“너 이 새끼······.”
뒤에 있던 종업원까지 나에게 달려들려는 찰나였다.
-챙강!
뒤쪽에서 들려오는 금속성.
-챙강!
-챙강!
-챙강!
금속성은 계속 이어졌다.
“무, 무슨······.”
“매니저 불러와.”
“매니저!”
“매니저 나오라고 해!”
“???”
우리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다른 손님들이 연달아 포크와 나이프를 바닥에 떨어트리며 이구동성으로 매니저를 호출했다.
“아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왜 우리가 더 늦게 왔는데 저쪽은 주문도 안 받는 거야?”
“우리는 벌써 반이나 먹었다고, 지금 뭐하 자는 거야?”
“아메리카에 레이시스트가 설 곳은 없다!”
상황이 이쯤 되자, 종업원들은 당황하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밖의 소란이 전해진 것인지, 주방에 있던 매니저가 달려 나왔다.
“대체 이게 무슨 소란이야?”
매니저는 바닥에 즐비하게 널브러진 식기들과 손님들의 불쾌한 얼굴을 보며 당황했다.
“저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손님들을 차별했어!”
“요즘 세상에 이게 말이나 돼?”
“내가 식사 중에 이런 불쾌한 상황을 목격해야겠어?”
정작 내가 뭐라 한마디를 하기도 전에 다른 손님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너희들은 해고야.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본사 차원의 법적 대응이 있을 테니까, 각오해둬.”
매니저는 빠르게 해고와 함께 법적대응을 요구했다.
그 사무적이고 담담한 태도에 종업원들은 말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빠른 조처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손님들께 불편을 끼쳐드려 면목이 없습니다. 사실 홀 담당 직원들이 다른 지점에 지원을 나간 탓에 새로운 직원을 고용했는데······.”
“아닙니다. 이미 충분합니다. 저도 점잖지 못한 대응을 했습니다. 다른 손님들의 식사를 방해한 것에 대한 사죄로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의 식사는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내 말에 휘파람 소리와 함께 박수와 환호가 터졌다.
“아, 아닙니다. 저희 쪽의 실책이니 제가······.”
“아닙니다. 앞으로도 저희 직원들이 이곳에서 계속 식사를 해야 할 텐데, 좋은 인상으로 마무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매니저는 즉시 우리가 주문한 음식들을 대령했다. 주문한 음식보다도 서비스가 많아 보일 지경.
“문이사님, 실례했습니다. ······이사님?”
“···머, 멋있잖아?”
“?”
뭔가 문이사의 상태가 이상하다. 뭐 일단 급한 것은 제프리니까, 일단 무시.
“제프리, 아까 나누던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할까요? 나는 당신이 그룹의 리더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계획입니다.”
“미스터 세인이 저를 지원해 주신다고요?”
“그렇습니다. 아마도 안 좋은 경험들 덕분에 자신감이 부족······.”
“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스터 세인이 도와준다면!”
“?”
얘는 또 갑자기 왜 이러지?
“당신은 넷플릭스에서 튀어나온 히어로 같군요.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봅니다.”
뭔가 상태가 이상하다.
하지만 소극적인 것보다는 나으려나? 일단 뜻은 전했으니, 앞으로 슬슬 손발을 맞춰보며 그룹을 컨트롤 할 방법을 찾아봐야겠지.
“세인.”
“응?”
갑자기 아나가 나를 불렀다.
“혹시 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서 넷플릭스 볼 생각 없나요?”
넷플릭스?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죄송하지만 밤에는 여자친구와 통화하고 싶습니다. 사양할게요. 그런데 뭐 좋은 영화라도 나왔습니까?”
“쯧, 씨알도 안 먹히네.”
“?”
다들 상태가 너무 안 좋은데?
*
*
*
조금 유치하다는 소리가 나올 수도 있는 미니게임으로 나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고 보상을 미끼로 차츰 게임에서 업무로 이동시키려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정신적 지주인 제프리의 입지를 키워 낙오자 그룹의 업무 탠션을 끌어 올리면 어느 정도 정상화 가까이 가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러니까 세인이 그 인종차별주의자 웨이터들에게 소리치는데, 그때 소름이······.”
“웨이터들은 가만히 있었어?”
“가만히 있긴! 세인이 팔을 낚아채고 노려보니까, 돌처럼 굳어버리는 거지!”
“동양의 신비?”
“무슨 동양의 신비냐! 포스 그립이잖아!”
“오오! 제다이!”
“그러고 보니, 세인은 첫날 마커스를 쓰러트렸지?”
“마커스 지금도 코에 밴드를 붙이고 있잖아.”
“딱 한방이었지?”
아침부터 뭔가를 열심히 수군대고 있는데, 각자 자신의 노트북을 펼치고 열심히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설마? 우리에게 시험을 내린 것은 오징어 게임이 아니라, 파다완 테스트?”
“나 포스센서티브였던 거야?”
몇 가지 단어는 알아들을락 말락 할 것 같기도 한데······.
“제프리?”
“마, 마스터 세인!”
“오오! 마스터 세인!”
마스터? 이건 또 뭔 소리야?
“이건 돌려드리겠습니다.”
제프리는 지난번에 내가 건네준 달러들을 반납했다.
“돌려줄 필요 없는데?”
라고 말하면서도 소시민의 설움이랄까? 내 손은 넙죽 달러 뭉치를 받아들었다.
“미스터 세인의 가르침 덕분에 정신을 차렸습니다. 어제 식당의 매니저가 상황을 수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죠?”
“네?”
“문제가 발생해도 올바른 행동을 하면, 주변의 성원과 보상이 뒤따른다. 식당 손님들의 환호와 미스터 세인이 다른 이들의 식사비까지 부담하는 것을 보며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아······. 뭐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나? 나는 단지, 제프리가 기가 죽을까 봐, 그리고 내 일이 방해 받았다는 것에 화가 났었을 뿐인데.
그런데 표정이 무척 밝다. 이전과는 달리 활력이 느껴지는 얼굴.
긍정적인 변화인 것 같으니, 일단 가만히 있자.
“덕분에 제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깨달았습니다.”
제프리가 자신감을 얻은 덕분일까? 낙오자그룹 인원들의 눈에도 생기가 넘쳐 보인다.
“쩝, 그럼 게임은 여기까지겠군요.”
슬슬 채찍을 숨긴 업무 몰아치기 들어가려고 했는데.
뭐, 내가 하는 것보다야 리더인 제프리가 알아서 진두지휘를 하는 편이 여러모로 낫지.
“아닙니다.”
“네?”
“다들 기대하고 있습니다.”
“기대해요?”
아니나 다를까, 모두가 허둥지둥 소란을 떨고 있는 것이 아닌가?
“광선검! 광선검!”
“내 제다이 튜닉!”
와, 헐리우드 촬영장에서 너드(오타쿠)들이 이렇게 시끌벅적하게 웃으며 일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얘들 진짜 장난 아니구나.
순식간에 코스플레이 장소로 뒤바뀌어 버린 상황.
“그냥 돈만 필요 없다는 의미입니다.”
“좋습니다. 자, 그럼 오늘의 미션을 시작하겠습니다! 금일 업무 처리하는 순서에 따라서 선착순으로 제가 점심 냅니다!”
“오오!”
“이, 이것은 제다이 배틀메디테이션(정신 버프)?”
낙오자 그룹 전원이 미친 듯이 키보드 연주를 시작했다.
‘덕중의 덕은 양덕이라고 하더니······.’
제다이 코스츔으로 무장한 너드들은 진짜 버프라도 받은 것처럼 키보드를 때려 부수고 있었다.
*
*
*
“세인. 정말로 해냈군.”
표세인이 달러를 흔들어 댄 이후, 며칠이 지난 지금.
낙오자 그룹은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지지부진하던 작업 진척속도는 예상보다 한참 빨라져 있었다.
중간보고를 통해 들은 성과 역시 기대 이상! 대체 왜 스타워즈의 제다이 코스프레를 하고 일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조금 겁나는데?”
마커스는 등을 돌려 곁에 있던 문상훈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 여유만만하던 얼굴에 긴장감이 생겼군.”
“인정하지. 하지만 이건 아주 작은 건에 불과해. 이사회를 움직이려면 어지간히 큰 건이 아니라면 소용없을 거야. 알고 있을 텐데?”
“이건 시작이야. 너는 과거의 실적을 방패 삼아서 계속 소극적인 전략으로 자리보전을 해왔지. 하지만 그 결과 우리 미국지부의 발전은 무척 더뎠어.”
“이 정도라도 훌륭하다고 말하는 주주들도 많아.”
“맞아. 하지만 결국 더 큰 돈! 더 큰 수익을 거부하는 주주는 없어.”
“그 협상 테이블에 저 친구를 대동할 텐가? 영어도 못 하는 이에게 배팅하다니, 미스터 문. 너는 진짜 크레이지해.”
마커스의 말에 문상훈은 씨익 웃었다. 언제부턴가 잊고 있었다.
개발팀의 미친개라 불리던 자신이 아니었나? 언제나 경쟁자가 10을 외치면 100을 외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본사에서의 패배? 그까짓 것쯤 아무것도 아니다.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큰 승부를 앞둔 상황.
전에 없이 피가 끓는다.
자잘한 실패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결국은 한방이다. 그것이 문상훈이라는 남자의 정체성이다.
‘게다가.’
지금 자신의 곁에는 표세인이 함께 한다.
표세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신도 모른다.
모르는데, 기대하게 된다.
저도 모르는 새에 눈앞의 칩을 몽땅 올인하게 만드는 마력.
“겁나나?”
“HAHA. 건방지긴. 하나 말해줄까? 이번 주주총회에서 불신임안을 계획하는 것은 너뿐만이 아니야. 실패하면 너도 본사로 돌아가게 될 거다.”
마커스의 협박에 문이사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아직 마커스와 문상훈의 이름값에는 무게감이 달랐다.
그러기 위해 곧 다가올 협상에 모든 것을 걸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말의 여지는 남겨두고 있었던 상황.
‘문이사님이 저희 쪽에 합류하시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불현듯 지난번 표세인의 말이 떠올랐다.
‘삼두정치, 쌍두마차.’
“크크큭.”
“?”
“크하하하하!”
별안간 광소에 가까운 큰 웃음소리에 마커스는 당황했다.
평소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큰 웃음소리가 경쟁자에게서 튀어나오자, 절로 긴장하게 된다.
“내가 실패하면 본사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내 기반 전부를 남김없이 포장해서 넘겨주지.”
“핫, 내게도 같은 조건을 제시할 생각인가? 나는 너 같은 미치광이가 아니야.”
마커스의 말에 문상훈의 미소는 한층 더 짙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문상훈은 자신이 지금 조커를 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상대가 알지 못하는 정보를 쥐고 있다는 것이 요즘 세상에 얼마나 강력한 무기이던가?
이제는 지를 때다. 그리고 지를 때는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
“쫄리면 뒈지시든지.”
“뭐 뭐라고?”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한국말에 마커스는 당황했다. 하지만 문상훈은 가타부타 설명 없이 등을 돌렸다.
이해할 수 없는 멘트였다.
‘쫄리면 뒈지시든지.’
그 뜻 모를 단어에 마커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
*
*
“상대측에 제시할 금액을 재조정하기로 하지.”
“네?”
문상훈의 말에 제임스가 드물게 당황했다.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동시에 상대를 납득시킬 수 있는 최적의 금액을 산출하기 위해 그간 얼마나 애를 썼던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던 출발점에서 이제는 그나마 한번 도전할만하다는 선까지 겨우 도달했다.
그런데 이 시점에 그 모든 것을 뒤집겠다?
“이유를 묻지 않을 수가 없군요.”
“내가 바보였어. 본사의 늙은이들을 두고 발톱 빠졌다고 비웃었는데, 정작 발톱이 빠진 것은 나였어.”
“······.”
“어쩌면 자네의 영향도 있었는지 모르지. 배수의 진 전략 같은 것은 자네 스타일이 아니잖아?”
“그렇습니다. 리스크를 무시한 올인 전략은 칭찬할 수 없습니다. 만약 이번에 실패하더라도 시간을 조금 들이면 될 뿐입니다. 성급함은 용기가 아닌 무모한 행위일 뿐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지.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 소극적인 전략을 취하다가 무너지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행보야.”
“아무리 그래도······.”
“파이널 판타지. 그 타이틀에 어째서 파이널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줄은 아나?”
파이널 판타지. 오랫동안 JRPG계의 양대산맥으로 통했으며, 현재는 명실상부한 JRPG의 상징.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는 여지를 두면 안 돼. 여기에 모든 것을 건다.”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제임스의 뜻은 단호했다. 하지만 그것은 문상훈 역시 마찬가지.
“그래도 진행해야 해.”
“이해할 수 없군요.”
“자네 말대로 여지를 남겨둔 이후 실패 후 재기를 노려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만한 아이디어와 기회를 다시 만난다는 보장이 있나?”
“협상에 실패해서 자금이 무사하다고 하더라도, 주주들은 반발할 것입니다. 그만한 자금을 대책 없이 올인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일 테니까요.”
“어차피 마커스도 동의한 사안이야.”
“그건 마커스의 함정입니다.”
“맞아. 하지만 그거 아나?”
“?”
문상훈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함정까지 모조리 초토화한다면······. 얼마나 짜릿하겠나?”
< 너는 감당할 수 있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