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65화 (65/346)

65.

“게임은 즐거우십니까?”

제임스가 던진 폭탄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회장님과 게임이라는 단어가 동시에 튀어나온 것은 양실장과의 대화를 제외하면 처음 있는 일이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이걸 위협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나?’

짧은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갔다.

“복잡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제임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심플하게, 저도 회장님과 게임 비슷한 것을 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긴장이 풀리지 않은 탓인지, 다소 방어적인 말투가 나왔다.

“아직은 업무 중이니, 이 건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논의하기로 하지요. 어차피 함께 본사로 귀국하는 동안, 시간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제임스의 말을 듣고 보니, 정작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아직은 업무 중이지 않나, 더군다나 지금부터가 진짜 협상의 중요한 단계이지 않나.

*

*

*

“근처에 마땅한 곳이 없어서 면목이 없습니다.”

사이프는 햄버거의 포장지를 벗기며 싱긋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실제로는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문이사의 돌발 행동으로 이렇게 일이 급하게 진행된 셈이니까.

스니커를 신은 캐쥬얼한 복장의 젊은 CEO와 햄버거는 무척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었다.

“무엇을 먹는지보다는 누구와 먹냐가 더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문이사 역시 햄버거 포장을 벗기며 말했다.

“안 드십니까?”

유독 제임스만 햄버거에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저는 통역을 해야 하니까요.”

“어차피 이제 제 역할은 없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지 않습니까?”

내 말에 제임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 사이프가 입을 열었다.

“매우 감명 깊은 브리핑이었습니다. 오히려 저보다도 NFT 시스템의 미래를 오랫동안 고민한 것 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깨비몬이라고 했던가요? 대체 언제부터 그런 아이템을 준비하고 계셨습니까? 도저히 하루아침에 나올만한 계획은 아니라는 느낌이었습니다만?”

사이프의 말에 문이사는 물론 제임스까지 피식 웃어버렸다.

“솔직히 처음에 우리가 준비했던 것은 다른 경쟁사들에 비해 딱히 우위를 점할만한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여기, 이 친구 덕분이지요.”

문이사가 나를 가리켰다.

“솔직히 우리는 비전보다는 자금력에 무게를 둘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친구의 등장으로 모든 계획을 수정하게 되었지요. 정말로 하늘이 도왔다고나 할까요?”

“그렇습니까?”

“예. 베타코인에서 제시한 비전이라는 단어와 NFT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즉시 이런 기획안을 들고 오더군요.”

“즉시?”

“네. 정말로 즉시입니다.”

문이사는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조금 뻘쭘한 분위기다.

“대단한 분이시군요.”

“아닙니다.”

나는 사이프의 말에 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솔직한 감상이었다. 사업 분야가 아닌 오직 개발 분야에 속해있기에 떠올릴 수 있던 것뿐.

이만한 기획 정도야, 기획서 레벨이라면 어느 회사에나 한 번쯤 고려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 내 상황은 순풍을 맞이했다고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일 뿐.

여러 복합적인 이유 들이 얽혀 내 말에 힘이 실린 덕분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에 머리 좋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것만은 잊어서는 안 되지.’

운이 좋다. 그렇다.

연아와의 만남과 회장님의 성향. 그리고 때마침 문이사가 겪고 있던 문제. 그 모든 것들이 그저 내게 유리한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굴곡 없는 인생은 없는 법이다.

지난 회사에서도 초기에는 탄탄대로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곧 송부장이라는 암초도 나타나고 이런저런 문제들도 엄습해오면서, 내 입지는 기획팀의 에이스에서 그저 그런 월급쟁이 1호로 전락하지 않았던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겸손. 그렇죠. 한국인들은 그것을 미덕으로 삼는 경향이 있죠.”

“한국인들과 교분을 나누신 경험이 있습니까?”

“대학 시절에 몇몇 유학생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사이프는 담담하게 오래지 않은 추억을 음미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뭡니까?”

“요즘 디젤 스토어의 핫한 제품인 좀비로얄. 그거 맥베스에서 개발했다면서요?”

순간 문이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것도 이 친구 작품입니다.”

아니죠. 저는 개발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습니다만?

“놀랍군요. 사실 근래 컴뱃그라운드나 파인드아크 같은 한국 개발사들이 개발한 게임들이 좋은 성적을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인들의 컨텐츠 개발력은 언제나 부럽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래서, 본론입니다만.”

일순 분위기가 돌변했다.

“금액에 대한 사안은 아마 계획하신 것의 절반이면 충분합니다.”

예상을 뛰어넘는 사이프의 말에 문이사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절반.

만약 예상한 액수의 절반을 아낄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롯이 문이사의 실적이 되고 마커스와의 힘겨루기에서 결정적 우위로 작용할 수 있으리라.

“어떤 옵션이 필요하십니까?”

무턱대고 절반이라는 말을 꺼냈을 리는 없다. 필시 그 이상의 무언가를 바라고 있겠지.

“깨비몬 판권 지분에 대한 옵션.”

이 부분에서는 문이사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어느정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두 번째는······.”

“보통 두 번째가 진짜인 경우가 많은데, 저희를 너무 놀라게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문이사가 너스레를 떨며 엄살을 부렸다. 더는 회의실에서 압도적인 기세를 떨치던 미친개다운 모습은 사라진 상태.

“이 기획을 탄생시킨 미스터 세인이 직접 개발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

그런 뜬금없는 요구가 두 번째 옵션이라고?

“크크큭. 미스터 사이프. 당신은 운이 좋습니다.”

“운이 좋다?”

“마침 세인은 곧 한국으로 귀국하고 자신만의 스튜디오를 운영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이 미스터 세인이 운영하는 스튜디오의 첫 프로젝트가 되는 겁니까?”

“아직 결정된 것은 없지만 제가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만들 것입니다. 저 역시 세인이 아니라면 안된다고 생각하니까요.”

나를 향한 문이사의 눈빛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이유를 물을 수 있겠습니까? 아셔야 할 것은 저는 아직 프로젝트의 시작과 끝을 운영한 경험이 없습니다.”

순간적인 재치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과 프로젝트의 완성까지 이끌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제프리를 알고 계십니까?”

“어?”

순간 나를 포함한 모두가 당황했다.

“제프리는 저희 고모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사촌이죠.”

“그건 몰랐군요.”

제프리는 이름부터가 미국식이지 않나? 미국 IT업계에 종사하는 인도인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얘네 집도 굉장하네. 전 누들 개발자 출신과 MIT출신의 실리콘밸리 젊은 CEO라니!

“예. 모르실 겁니다. 요즘만 말씀드리자면, 제 첫 번째 투자자는 제프리였습니다. 농담 같은 이야기지만, 구두 계약이랄까요? 일단은 주주라고 할 수 있겠죠. 뭐 본인은 필요 없다고 하지만 나중에 제가 톡톡히 갚아줄 겁니다.”

제프리 이 자식! 부자였구나! 그래서 내 돈을 돌려준 건가?

“제프리는 예전에는 굉장히 의욕적인 남자였습니다. 누들을 입사했을 때도 100명도 넘는 우리 가족 전체가 기뻐했죠.”

100명이면 가족을 넘어 일족에 가까운 수준인데? 인도는 스케일이 굉장하네.

“하지만 언제부턴가 기가 죽어있더군요. 그런데 며칠전 통화를 했는데, 그때 잃어버렸던 자신감과 의욕을 되찾은 것 같더군요.”

“그거 다행이군요.”

“이유가 뭐냐라고 물으니, 제다이 마스터를 만났다고 하더군요.”

“제다이 마스터?”

문이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딱히 모르셔도 됩니다.

“그때 미스터 세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회의실에서의 브리핑과 지금 제 마음을 사로잡은 이 프로젝트 기획안의 작성자가 미스터 세인이라는 말을 듣게 되니, 확신할 수밖에 없더군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젊음의 치기라고 해야 할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성급하다는 느낌이지 않나?

“창의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주변 사람들을 사로잡는 남자. 스티브 잡스나 일론 머스크를 비롯해서 요즘 세상에 반드시 성공하는 타입 아닙니까? 저는 유니콘을 발견했다는 느낌인데요? 가능하다면 미스터 세인의 스튜디오에 투자도 하고 싶군요.”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스튜디오에 투자까지 하겠다니? 이게 미국 스타일인가?

일견 섬세해 보여도, 이거다 싶을 때는 굶주린 짐승처럼 내달리는 것.

미국 사회의 또 다른 면모를 보게 된 것 같은 기분이다.

*

*

*

“흐아아암!”

홍기도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입, 찢어지겠다.”

“응.”

“너 일은 다 끝났어?”

“응.”

“끝났다고?”

“응.”

남궁원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홍기도의 모니터를 확인했다. 믿을 수 없게도 정말로 홍기도는 자신에게 할당된 오늘치 업무를 모두 끝내버렸다.

아직 점심시간도 30분이나 남았는데, 벌써 오늘치 일을 끝내버린 것!

“아니, 손이 이렇게 빠른데 그동안 왜 어영부영······.”

순간 남궁원의 말이 멈췄다. 생각해 보니, 평소에도 이리저리 쏘다니느라, 일은 언제하나 싶으면서도 결국 제 할 몫은 다 끝내던 캐릭터가 아니었나?

“진짜 마음에 안 드는 놈이네.”

남궁원도 손이 느린 타입은 아니지만, 타고난 꼼꼼함이랄까? 딱히 월등한 속도로 기획서를 뽑아내는 타입은 아니었다.

“응. 나도 너 별로야.”

“죽고 싶냐?”

“진짜, 심심해서 죽겠다. 내 한우는 언제 오지?”

“표팀장님 곧 돌아오신다면서?”

“아, 언제 오냐. 심심해 죽겠네. 함송희씨 커피라도 한잔?”

“아! 커피 사올까요?”

“니가 왜 사와! 그럼 난 뭐하라고!”

“?”

홍기도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 심부름이라도 하지 않으면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어 보였다.

“두 분도 드실래요?”

홍기도의 말에 성과장과 차대리가 어물쩍 모니터 위로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될까?”

얼마 전 임원회의에서 새프로젝트들이 연거푸 허들을 넘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게다가 표세인을 중심으로 새팀을 꾸리라는 지시가 내려온 탓에 성과장과 차대리는 모두의 부동산 팀에 복귀한 상황.

“그럼요. 어차피 캐리어에는 커피 4개 꽂히잖아요.”

“그럼 부탁할게. 아! 카드 줄게.”

“아니에요. 오늘은 제가 살게요.”

“지가 사긴, 개뿔. 그거 표팀장님 복지카드 잖아.”

남궁원의 핀잔에 홍기도는 파티션에 턱을 기댄채로 빤히 남궁원을 바라보았다.

“뭐?”

“약해.”

“뭐?”

“재미있는 이벤트 없나?”

홍기도가 다시 한번 하품을 하려는 찰나, 차대리가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하품은 다른 곳에 가서 하지? 지금 사람들 일하는 것 안 보여?”

차대리는 복귀한 이래 내내 짜증이 난 상태였다.

입사 이후 처음으로 새 프로젝트 팁에 합류했다는 기쁨도 잠시, 허들 넘기에 실패한 팀은 공중분해 되어버렸고 다시금 모두의 부동산으로 복귀하지 않았나?

설상가상으로 문이사 라인의 김순영의 비위를 맞추며 탄탄대로를 걷겠다는 자신의 꿈도 부서졌다.

김순영은 지난번 문이사의 샤우팅 이후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찬밥신세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너처럼······.”

굴러들어온 돌에게 미운 말 한마디라도 던지지 않고서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잠깐, 스탑.”

“?”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던, 일단 멈춰.”

“대체 무슨······.”

“나는 못생긴 인남캐와 의미 없는 감정 교류 따위는 하지 않는다.”

홍기도는 차대리의 속사정 따위에는 1도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는 정말로 등을 돌려 휑하니 사무실을 떠나버렸다.

‘이벤트, 뭔가 화끈한 이벤트가 필요해.’

표세인의 출장 이후 한동안 즐거웠던 회사 생활이 다시금 우중충한 잿빛으로 물들었다. 지난번 표세인의 갑작스러운 부탁으로 그래픽팀에 예정에 없던 업무까지 부탁한 상황이라, 그곳에 놀러 갈 수도 없게 되어 더더욱 그랬다.

“남궁원은 재미없고, 함송희는 바쁘고.”

회사에 놀 사람이 없다. 이것은 홍기도에게는 심각한 위기였다.

“홍대리?”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양성태와 한명수가 있었다.

“양실장님. 한팀장님. 안녕하세요.”

홍기도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벌써 식사하러 가시는 길이세요?”

“어쩌다 보니.”

한명수는 이른 시간에 사무실을 벗어난 것이 조금 부끄러운 듯했다.

요즘 양성태와 함께 표세인이 이끌 새로운 팀의 구성에 대해 논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와 어울리는 시간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하기에는 회사 밖이 편했기에 자주 밖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업무 시간 내내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만이 업무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지낸 한명수에게는 이런 상황이 무척 낯설었다.

“흠······. 마침 잘됐군요. 홍대리님도 함께 식사하러 가시지요.”

직급은 대리에 불과하지만 현재 상황에서 표세인과 가장 가깝고, 표세인 스스로도 오른팔이라고 언급한 홍기도였다.

비록 신규 팀을 구성하는 일에 크게 도움 될 일은 없다고 하더라도, 친목 도모의 의미에서라도 나쁠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요?”

“네. 시간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것도 업무의 일환니까요.”

“그래! 우리 놀러 다니는 것 아니야.”

한팀장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으음······. 남자 셋이서 식사라니, 안 땡기는데······.”

순간 양성태가 멈칫했다. 설마 자신의 제안이 거절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리고 어떻게 홍기도와의 관계를 구축해 나가야 할까?

워낙 경험해본 적이 없던 캐릭터인지라, 양성태는 그답지 않게 고민에 잠겼다.

“죄송하지만······.”

“마! 너도 여직원들하고만 어울리지 말고 남자들하고도 어울려야지!”

“어, 엄마한테 혼나요!”

“헛소리 말고 가자! 그리고 실장님.”

“네?”

“이런 놈은 머리 써가면서 상대하시면 안 됩니다. 왜냐면 이 녀석 진짜로 아무 생각 없거든요.”

다른 것은 몰라도, 이런 캐릭터를 다루는 것은 양성태 보다 한명수가 한 수 위였다.

“······한 수 배웠습니다.”

-띠링!

[양성태는 조련 스킬을 획득했다.]

“남자끼리 식사 이벤트라니! 용납할 수 없어!”

홍기도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한명수의 굵은 팔뚝은 표세인 정도가 아니라면 뿌리치기 쉽지 않았다.

“저도 함께해도 괜찮을까요?”

“조비서님?”

양실장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조연아를 보며 당황했다.

“제가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죠?”

“음, 그게······.”

유일하게 조연아의 정체를 알고 있는 양실장이 머뭇거릴 때였다.

“가시죠! 아니, 가셔야 합니다!”

홍기도는 이것이 재미있는 이벤트란 것을 직감했다.

< 저도 함께해도 괜찮을까요?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