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홍기도가 양실장과 한팀장과 만나기 얼마 전.
“그래? 파트너쉽 계약을 성사시켰다고?”
-그렇습니다.
조양길 회장은 문상훈의 말에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자금은 얼마나 투입했나?”
지난번 올라온 보고에서 문상훈은 자신의 사활을 걸고 무리수를 감행할 것이라는 통보를 보고한 바 있었다.
NFT와 블록체인이라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 앞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으나, 조양길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안건이었다.
-기존 예상금액의 절반입니다.
“뭐?”
절반. 요즘 같은 불경기에 그야말로 기적이나 다름없는 성과였다.
지나친 자부심과는 별개로 문상훈은 업무적인 내용에서 허세를 부리는 남자가 아니다.
“정말로?”
실리콘밸리에서도 근래 가장 핫한 아이템으로 주목받은 기술. 그런데 그것을 절반 가격으로 인수했다?
필시 외부에서는 가늠하기 어려운 곡절이 있었을 것이었다.
-정말입니다.
문상훈의 말에 조양길은 검지로 테이블을 툭툭 두들겼다.
자세한 내막을 물어볼까? 글쎄 어떨지. 어떤 이유가 있었건 이 건은 분명한 문상훈의 실적이다.
굳이 내막을 질문하는 것은 현장 지휘관의 사기를 꺾는 것일 수 있다.
너를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은 셈.
하지만 조양길의 예상과는 달리 문상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회장님.
“뭐지?”
-이번 일의 숨은 공로자는 다름 아닌 표세인입니다.
“!”
순간 탄성을 터트릴 뻔한 것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불끈 주먹을 움켜쥐는 것으로 속내를 숨긴 조양길은 넌지시 물었다.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영어도 못 하는 녀석이지 않나? 넓은 세상 구경도 시킬 겸. 제임스를 데려오라는 시답잖은 퀘스트를 딸려 억지로 등 떠밀었다.
어차피 미래 게임 산업에 NFT와 블록체인은 피해갈 수 없는 기술인바, 그것도 견식해볼 기회가 있다면 좋겠거니······. 정말로 그뿐이었다.
-사이프 바수가 요구한 것은 NFT기술과 게임산업의 시너지. 그리고 비전이었습니다.
“그걸 표세인 그 녀석이 제시했다? 그놈이 원래 그쪽에 조예가 좀 있었나?”
프로그래머가 아닌 기획자가, 이러한 신기술에 조예가 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한 법.
-아닐 겁니다. 설명하는 내내, 처음 듣는다는 눈치였습니다. 기술적으로는 100% 문외한이지요.
“그런데 비전을 제시해?”
-예. 그 비전에 감명받은 사이프 바수가 직접 금액까지 깎아가며, 접근했습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영어도 못 하는 녀석이 회사의 미래가 달린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결정적인 공로를 달성한다?
-지난번 본사를 방문했을 때, 양실장의 자신감이 이해가 가질 않았더랍니다. 그 뜬금없이 웬 과장 직급의 인물을 들먹이기에, 무슨 수작인가 싶었는데······.
“싶었는데?”
-회장님도 아시겠지만, 이 업계에는 결국 갑작스럽게 등장한 슈퍼스타가 판도를 뒤바꾸기 마련이지요.
스타 개발자.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게임 업계에는 양국이 낳은 스타 개발자들이 존재했다.
그 이름값만으로도 유저들을 열광시키고 업계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존재들.
안타깝게도 한국은 국내시장을 넘어 세계에 통하는 수준의 스타 개발자를 탄생시키지 못했다.
영웅을 바라지 않는 한국이란 나라의 특성이랄까?
이성계가 그랬고, 이순신이 그랬다. 영웅이라 할만한 이들을 향한 질시와 공격.
그리고 개인보다 조직을 우선하는 문화가 이러한 토양을 만들었다.
“그래서 그놈이 스타 개발자가 될 만한 인재다?”
-솔직히 이전에도 시간문제라고 생각은 했었는데, 제 오판이었습니다.
“오판?”
-이미 판만 깔아주면 해내고도 남을 인재입니다. 회장님께서도 이 부분을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하하하. 얼마 전까지 서로 물어 뜯기 바쁘지 않았었나?”
-제가 보내드린 파일 한번 열어 보시죠.
평소라면 한참 아래 직급과 자신을 비교한다며, 볼멘소리 한 번쯤 할거라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차분함이었다.
이건 상대를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 탄복했다는 느낌이 전해진다.
나는 그와 비교될 깜냥이 아니다. 문상훈의 태도에서 조양길은 그것을 감지했다.
양성태에 이어 문상훈까지.
맥배스의 차세대를 담당할 인재들이 연거푸 표세인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 모양새가 아닌가?
조양길은 문상훈이 보낸 문서를 열었다. 그리고 표세인이 미국에서 작성한 기획안을 확인했다.
“이, 이거 되겠나?”
소켓몬과 블록크레프트의 장점을 한데 모은 파격적인 기획.
육성과 수집 양쪽을 모두 충족시키는 NFT시스템과의 상호작용 역시 훌륭하다.
하지만 기획서상의 훌륭함과 실제 개발단계에서 감당해야 할 고충은 전혀 다른 법.
-저는 대답해 드릴 수 없습니다.
“자네가 담당자인데 대답을 못 하면 어쩌겠다는 건가?”
-마침 표세인을 위한 팀을 만들 계획이지 않습니까?
“아직 첫걸음도 못 뗀 스튜디오에 이렇게 큰 프로젝트를 던져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영상미디어 사업과 완구산업까지 아우르는 이 거대한 스케일은 맥베스, 아니 국내 개발사 어디도 소화해 본 적 없는 미증유의 영역이다.
-반대로 생각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반대로 생각해?”
-표세인이 아니면 누가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킬 수 있겠습니까? 저는 감도 오지 않습니다.
“!”
천하의 문상훈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사는 남자가, 남의 이름 외에는 떠올릴 수가 없게 되었다.
-하나만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뭔가?”
-······.
“자네답지 않게 망설이기는.”
조양길은 피식 웃었다. 어떤 순간에도 망설임 따위는 모르던 문상훈답지 않은 모습.
-저 이걸영 상무에게서 독립해도 되겠습니까?
“하하······. 하하하!”
조양길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문상훈은 야심이 넘치는 남자다. 그렇기에 언제고 이런 말이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더랬다.
하지만 어차피 이걸영과 문상훈의 연배는 한참 차이가 있다. 이걸영의 은퇴 이후 그 파벌을 모두 흡수하고 사내 파벌의 일각을 취하는 것이 문상훈 본인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었을 터.
“이걸영이 보다 표세인이가 낫다?”
-그 친구가 그러더군요. 삼두정치의 쌍두마차.
“쌍두마차는 자네와 양성태인가? 그런데 삼두정치라면······. 그 마차에는 누가 앉아 있으려나? 설마 표세인 그놈이 제가 앉겠다고 하던가?”
-그런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카이사르와 마그누스 운운하며 저와 양실장이 한배를 탄 그림을 내밀더군요.
“그래. 자네는 옛날부터 이상하게 양실장을 좋아했더랬지.”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경쟁자라는 것은 좋은 거야. 자네도 양성태도 서로의 존재에 감사하는 것이 좋아.”
-······.
“그래서 쌍두마차의 일익을 담당하시겠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는 조양길이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사내 양대산맥의 일축인 이걸영 파벌의 에이스가 빠진다?
이것이 향해 회사에 득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해가 될 것인가?
해가 된다면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조양길은 결단을 내렸다.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하지. 이미 마음 떠난 사람을 어찌 붙잡겠나?”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그래. 남은 일 잘 수습하고, 앞으로 자네도 바빠질 텐데······. 잘 끝내달라고, 내 노고는 잊지 않겠네.”
문상훈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NFT와 블록체인 시스템 개발을 리드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의 중대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베타코인과의 파트너쉽이 발표되면 한동안 그늘이 드리워져 있던 주가가 껑충 치솟을 것이다.
-맡겨 주십시오. 그럼.
통화는 끝났다.
“잠깐 들어와.”
조양길은 비서실 내선을 통해 조연아를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그냥, 웃어라.”
이미 모든 내용을 엿들은 조연아는 씰룩이는 입술을 억지로 붙잡고 있는 티가 역력했다.
“아빠도 좋잖아요? 사위가 일 잘하는데?”
“나는 좋은데, 너는 계속 좋아해도 되겠냐?”
“네?”
조연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니들 이간질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봐라, 저놈 벌써 이 정도다. 네가 감당할 수 있겠냐? 자칫하면 나중에 넌 그냥 대주주 직함 가진 종이호랑이가 될 수도 있어. 네가 바라는 회장자리가 그런거냐?”
“······.”
“설마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닐테지?”
“생각은 해봤어요.”
“그래서?”
사랑은 사랑이고 일은 일이다. 더욱이 이런 부분에서 다소 결벽 적으로 보일 정도로 철저한 조양길의 딸이다.
“아시잖아요. 제가 따로 준비하고 있는 것들.”
“그래, 알지. 그런데 속도 차이가 너무 크잖냐. 알다시피 나 옛날부터 선언했던 것 알지? 난 애초에 전문경영인에게 회사 넘길 계획이었어. 니가 회장자리를 원한다고 하니, 기회는 주겠지만 내 생각 아직 안 변했다.”
조양길의 말에 조연아의 고운 눈썹이 살짝 치켜 올랐다.
친딸이니 후한 가산점은 주겠으나, 그걸로 낙점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 것.
오래전부터 아버지가 자신에게 누누이 강조해온 말이었다.
마치 자신이 미덥지 않다는 듯이······.
“그래서요?”
굳이 자신이 알고 있는 말을 거듭 언급하는 이유는 따로 있을 것이다.
“넌 아직 어려.”
“그런데요?”
젊음이 장점이 아닌 세계. 정점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에 젊음은 무기는커녕 약점에 불과하다.
“너도 바운더리를 좀 넓히는 것이 좋겠다.”
“네?”
“경영 말고 이참에 사업 쪽에 발을 들여보는 것이 어떠냐? 어차피 개발쪽이야 안 될 일이고.”
“사업?”
“마침 양성태가 움직이면서 사업부에 실장자리 하나 비었지 않냐. 그리고 네가 비서실에 계속 있으면 양성태, 그 녀석도 불편해. 이참에 옮겨.”
“20대에 실장. 이건 너무 파격적이지 않나요?”
연아는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았다. 끝자락이라고는 해도 엄연히 20대에 불과한 젊은 여직원을 사업부 실장자리에 앉힌다?
“이참에 데뷔해.”
“그 말씀은······.”
“홍길동 노릇도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지.”
“······.”
연아는 대답 대신 고민에 잠겼다. 이 시점에 자신에게 회장의 딸이라는 딱지가 붙는 것은 유리한가?
사업부로의 이전은? 이걸영 상무와는 어떤 관계를 구축해야 할 것인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다른 것은 차차 고민하고, 일단 지금 바로 양성태에게 가서, 사업부로 옮긴다고 전해.”
“굳이?”
비서실장에게 먼저 알리는 것이야, 이상할 것이 없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그 전에 이걸영 상무를 만난다거나, 여러 가지 방안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 우선 아닌가?
“네가 사업부 옮긴 이후 처음으로 맡아야 할 사업은, 이거 성공시키는 거다.”
조회장은 자신의 노트북을 반대로 돌렸다. 그곳에는 표세인이 만든 깨비몬의 기획안이 담겨 있었다.
“깨비몬?”
“창립이래, 최대 프로젝트다. 네 데뷔 무대는 손색이 없겠지?”
“미디어 플랫폼 산업과 완구산업까지······. 아웃소싱 컨트롤이 생명이겠네요.”
“쯧, 보이는 것이 고작 그거냐? 이 게임이 출시되었을 때, 유저들의 반응을 먼저 떠올려야 하는 것 아니냐?”
“특기가 아닌 부분에 신경 쓸 생각은 없어요.”
연아는 자신의 장단점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해했으면 시간 낭비 말고 양실장에게 가라. 가서 그쪽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하고,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들려줘. 제 놈들도 상황 파악은 해야지.”
그들이 아직 모르는 정보를 들고 방문하는 것. 이것의 이점을 연아는 바로 간파했다.
“이거 엎어지면 안 되는 일이다. 할 수 있겠지?”
결국, 딸에 대한 걱정을 슬며시 드러난다.
“캐릭터 산업이 쟁점이지, 일단 이 부분은 내부보다 외부에서 물색하는 편이······.”
연아는 대답도 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회장실을 빠져나갔다.
*
*
*
“저도 함께해도 괜찮을까요?”
그렇게 조비서가 아닌, 조연아의 첫 데뷔 무대가 시작되었다.
< 이번에는 빙결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