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가족사진입니까?”
내 질문에 제임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 아내와 딸입니다.”
보통은 한번 보라고 들이밀법도 한데, 제임스는 슬쩍 스마트폰을 감추었다.
“결혼을 일찍 하셨나봅니다?”
“네. 그런 편입니다. 표팀장님은 언제쯤?”
“얼마 전 상견례는 치렀습니다. 하지만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러시군요.”
“네.”
대화를 이어나가기가 참 어렵다. 입국 수속을 마친 우리는 곧바로 공항을 빠져나왔다. 짐은 이미 택배로 보내놓은 상태였기에 나와 제임스는 캐리어 하나가 고작이었다.
“머물 곳은 정하셨습니까?”
조회장의 지시로 꼬드기기는 했지만, 워낙 갑작스럽게 결정된 본사행 아닌가?
문득 제임스의 처지가 걱정되었다.
가족도 있는 사람을 이렇게 함부로 이동시켜도 되나?
“한국에 집이 있습니다. 가족들도 다음 주쯤 이곳으로 올 겁니다.”
“아! 그러셨군요.”
“그보다 팀장님은 오늘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저야 회사에 좀 들를 생각입니다.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아서요.”
안 그래도 어제 홍켓몬에게서 연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었는데, 내가 출장 간 사이에 회장의 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다니.
일단 연아를 먼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았다.
“마침, 저도 먼저 본사를 방문하고 싶었습니다.”
“잘됐네요. 함께 가시죠. 부장님.”
“······팀장님.”
“네?”
“굳이 호칭이 어려우시면 그냥 제임스라고 부르거나, 매니저라고 불러주십시오. 부장이라는 직함은 여러모로 득보다 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게 편하시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본인이 싫다는 데야, 어쩌겠나? 그보다 부장이라니······.
우리는 곧장 택시를 잡고 회사로 향했다.
‘연아 일도 그렇고, 신규 팀도 그렇고, 홍켓몬도 그렇고. 신경 쓰이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네.’
괜스레 조급해진다.
*
*
*
본사 앞.
“우선 저희 팀부터 들러도 괜찮을까요?”
“아니요.”
“?”
“회장님부터 뵙는 것이 순서겠지요.”
“회장님이요? 하지만 따로 연락도 못 드려서······.”
사전에 연락도 없이 회장실부터 방문하는 것은 어느 나라 방식이야? 미국은 그런가?
“연락 같은 것은 필요 없을 겁니다. 이미 알고 계시니까요.”
“아, 하긴.”
애초에 조회장의 지시로 제임스를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 아니었나?
아마도 사전에 연락이 되어있는 모양이다.
‘어차피 연아 얼굴도 볼 겸 나쁘진 않지.’
나는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회장실로 향했다.
‘연아다.’
아직 사업부로 옮기지는 않은 모양. 나는 연아를 향해 눈 웃음을 보냈다.
그런데, 연아의 표정이 이상하다.
“······여기는 왜?”
연아의 시선이 내가 아닌 제임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한 눈에도 당황했다는 것이 역력히 드러나는 모습.
‘뭐지?’
나는 고개를 돌려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제임스 역시 연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당황한 기색은 없었다.
그저 평소와 같은 서늘한 눈빛.
“오랜만이다.”
“······.”
“들어간다.”
“······.”
제임스는 허락도 없이 회장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무슨 일이야? 괜찮아?”
“응. 괜찮아. 생각 못 한 사람을 만나서 당황했어.”
“제임스와 아는 사이야?”
“제임스? 아아, 저 사람 이름이 제임스야?”
“어.”
연아는 살짝 서글픈 미소를 흘리며 시선을 내리 깔았다.
“일단 들어가.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셔.”
“알겠어. 나중에 이야기해 줄 거지?”
“응. 이따 퇴근 후에.”
“오케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회장실 안에 들어가면 사정을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가벼운 노크와 함께 회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와, 이 공기 뭐냐?’
조회장의 얼굴에는 평소와 같은 미소는 없었다. 살짝 좁아진 미간과 가늘게 뜬 눈으로 제임스를 바라보고 있었고, 제임스 역시 평소보다 1도쯤 내려간 것 같은 서늘한 눈빛으로 조회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예.”
“10년 만에 만나서, 할 말이 고작 그거냐?”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 여기는 회사 아닙니까. 설마 이곳에서 아버지라고 불러드리길 바라십니까?”
아버지!?
내가 지금 뭘 잘 못 들었나? 하지만 제임스가 농담하는 캐릭터도 아니고, 조회장의 표정 역시 변화가 없다.
“쯧, 회장 아들이라고 소문이라도 내고 다닐 생각이냐?”
“그런 취미 없습니다. 그저 표팀장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알아야 한다고? 설마 나와 연아에 대해서도 알고 있나?
“연아의 상견례로 연락했던 것은 아버지 본인이시지 않습니까?”
“코빼기도 안 비춘 놈이 할 소리냐?”
“어머니는 참석하길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연락이 너무 늦었던 것이 문제지요.”
어, 어머니? 아직 살아계셨어?
연아는 언제나 가족에 대한 주제를 회피했더랬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연아의 표정이 극도로 어두워지기에, 나도 굳이 캐묻지 않았더랬다.
‘돌아가신 것이 아니었구나?’
아무래도 내가 알지 못하는 곡절이 있는 모양.
이거, 내가 계속 듣고 있어도 되는 이야기인가?
“혹시 두 분께서 대화가 끝나시면 다시······.”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예. 혀, 형님.”
“?”
제임스가 진심으로 놀랐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니, 그럼 뭐라고 부르나? 아직 식은 안 올렸지만, 상견례까지 끝내지 않았나.
“······그냥 제임스라고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니, 그래도 법도가······.”
“신경 쓰지 마. 저놈은 이제 한국 사람도 아니야.”
조회장은 혀를 차며 못마땅하다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저를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아직 미국지사는 마커스의 손에 있습니다만?”
“그만하면 됐다. 이 정도까지 판이 깔렸으면 문이사가 알아서 할 거다. 이제 네가 할 일은 끝났어.”
“다음 일은 표팀장을 도우라는 겁니까?”
제임스의 말에 조회장의 얼굴에 드디어 미소가 걸렸다.
“저놈 보니까, 어떻더냐?”
“뛰어납니다. 표팀장 정도의 인재라면, 미국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형님. 편하게 매부라고 불러주십시오.
사돈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제임스에 대한 애정이 무럭무럭 샘솟는다.
그보다, 지난번에 내가 실수 한 것은 없겠지?
지난번 테스트 운운했을 때,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닐까?
살짝 고까워서, 질렀는데······. 그 일로 마음이 언짢다거나 한 것은 아니겠지?
새삼 간담이 서늘하다.
“미국 공기 좀 마셔보라고, 장난삼아 보내 놨더니, 이런 사고를 치고 올 줄은 몰랐다.”
“저도 놀랐습니다.”
솔직히 지금 제가 놀란 것에 비하겠습니까?
“이거 제대로 해야 하는 건이다.”
조회장의 묵직한 한마디에 지금까지의 혼란스럽던 분위기는 일순 사라졌다.
“글로벌 마켓의 변화를 못 읽은 탓에 국내 게임업계는 갈라파고스화가 심각해졌지. 연일 주가가 하락하는 와중에 우리도 체질 개선을 시도해보려고 했지만, 죄다 그 나물에, 그 밥이 되어버린 시점이라, 변변한 기획을 가져오는 놈이 없더군.”
“국내 기획자들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든 것은 회장님 같은 임원급 인사들 잘못 아닙니까?”
제임스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러고 보니, 문이사가 나를 처음 소개했을 때도, 국내 기획자 운운했더랬지.
“그때는 시대가 지금과는 달랐어. 그리고 이 시점에 잘잘못 따져서 무슨 소용이냐. 앞으로가 중요하지.”
“맞습니다. K-컨텐츠의 영향력과 관심도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진 이 시점에 게임도 진입해야지요. 그런 의미에서 게임, 미디어, 캐릭터 산업까지 아우르는 표팀장의 아이디어는 확실히 투자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부자가 뜻이 맞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성격들이 이래서 그렇지, 의외로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닌지도?
“넌 당분간 표팀장 라인에 붙어.”
“그럴 생각입니다. 테스트를 먼저 거쳐야 할 테니까요.”
“테스트?”
“그런 게 있습니다.”
제임스가 일축하자, 조회장은 고깝다는 눈초리로 제임스를 쏘아보았다.
사이 나쁘지 않은 것 맞죠?
“표팀장.”
“예.”
“이놈이 보다시피 여간 깐깐한 녀석이 아니야.”
“······.”
네, 확실히 친해지기 쉬운 타입은 아니죠.
“하지만 잘 컨트롤하면 분명 쓸만할 거야. 네 밑에 붙여줄 테니, 잘 써먹어 봐.”
“하지만 직급상 제 밑이라고 하기에는······.”
“직급? 직급이 뭐가 중요해. 너 직급에 불만이라도 있냐?”
“없습니다. 그따위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급여지요.”
급여? 회장님 아들이 급여 운운하니까, 조금 우습다는 느낌이다.
“어차피 억 소리나는 연봉 챙겨주고 있어. 신경 쓰지마. 그리고 팀장이잖나. 직급보다 직책이 우선인 법이야.”
“선심 쓰듯이 말씀하시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스탠퍼드 출신이면 다들 그 정도는 받습니다.”
“봤지? 이놈 건방진 거?”
조회장은 나에게 동의를 구하듯이 말했고.
“······.”
제임스는 너도 참 딱하다, 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상견례에 조회장과 연아 둘뿐이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는 느낌이다.
“다들 명심해. 회사에 사적인 관계 끌어들일 생각마.”
“당연한 말씀을 굳이 강조하실 필요 없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제임스와 나는 조금 다른 의미의 대답을 했다.
“그건 그렇고, 한나도 들어오는 거냐?”
한나?
“예. 다음 주 쯤 레이첼과 함께 귀국할 예정입니다.”
아, 제임스의 딸 이름이 한나구나. 조한나. 이름 귀엽네.
“며느리, 직장은?”
“마침 올해 안식년을 신청할 수 있게 되어서, 한나와 함께 한국 여행이라도 한다는 심정으로 보낼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 잘됐군. 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해.”
“저 돈 있습니다.”
“너 말고, 며느리와 손녀에게 선물이라도 해주려고 그런다!”
“저 돈 있습니다.”
“······.”
이건 사이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인간적으로 핀트가 어긋난다는 느낌이랄까?
장난기가 다분한 조회장과 쌀쌀맞아 보일 정도로 딱딱한 제임스는 부자 관계를 떠나, 인간적으로 잘 맞지 않는 타입이다.
“너도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둥글둥글해질 법도 하지 않냐?”
“회사에서 사담은 이쯤하는 편이 좋겠군요. 저는 양실장을 좀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제임스는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대 놓고 시간이 아깝다고 시위하는 꼴이 아닌가?
부자지간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진짜 이 사람 캐릭터 너무 센 거 아닌가?
조회장과 연아가 유별나서 자신들의 관계를 숨긴 것이 아니라, 다른 가족들도 이런 느낌이구나.
잘사는 집은 원래 이런가?
“네놈이 그렇게 사람 냄새가 없으니까, 이 회사를 너희에게 못 물려주겠다는 거다.”
“물려달라고 한 적 없습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 외에는 관심 없습니다.”
가족이란 것을 처음 소개받자마자, 유산상속에 관한 내용까지 들어가는 것은 너무 빠르지 않습니까?
사위 될 사람 심장도 좀 걱정해 주시죠.
“아무튼 잘 해야 한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그리고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이 프로젝트는 충분히 비전이 넘치는 물건입니다.”
“그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야.”
“?”
“표팀장, 잘 보필해. 그리고 보고 배워.”
아니, 그런 말씀은 부디 저 없는 자리에서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민망한데 이거······.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봐.”
“예.”
“표팀장은 잠깐 남고.”
“네?”
제임스는 그 길로 가타부타 말없이 회장실 밖으로 사라졌다.
“내가 직원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못 볼 꼴을 보여줘서 면목이 없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눈치 없이 부자지간의 대화에 끼어버렸습니다.”
“아니야. 저놈 말대로 너도 알아야지.”
이제는 사위와 장인의 대화 시간인가?
“저놈 보니 어떻던가?”
“일 처리 깔끔하고, 공사 구분 확실한 타입이죠. 함께 일해서 손해 볼 게 없다는 느낌입니다. 오히려 제가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래도 저놈은 큰 놈에 비하면 낫지.”
크, 큰 형님은 더하다고요? 대체 나는 무슨 집안과 사돈을 맺게 되는 거지?
순간, 새로운 팀에 대한 걱정보다 앞으로 닥쳐올 결혼생활에 대한 걱정이 물 밀 듯이 밀려왔다.
< 머, 멋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