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69화 (69/346)

69.

“나오셨습니까?”

회장님과의 대화를 마치고 나오자, 제임스가 나를 반겼다.

‘연아는 없네?’

연아는 보이지 않았다.

“전화를 받고 어딘가 가더군요.”

“그렇습니까? 그럼 가시죠. 우선 양실장님부터 만나고 싶다고 하셨죠?”

“예.”

나는 제임스와 함께 양실장에게로 향했다.

“실장님 지금 안 계십니다.”

이름 모르는 비서실 직원의 말에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일단 저희 팀원분들 먼저 뵙기로 하죠.”

“그래야겠군요.”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그때였다.

“혹시 표팀장님?”

“누구시죠?”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개발1실 기획팀 팀장인 마일환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표세인입니다.”

당당한 체격에 각진 얼굴, 거기에 각진 안경까지 쓰고 있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다.

뭔가 일 잘할 것 같은 회사원을 그려놓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근래, 표팀장님 이야기로 본사가 시끌시끌하더군요. 체육대회 때, 활약이 대단하셨다죠?”

“아닙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모두의 부동산도 그렇고, 좀비로얄도 그렇고 손대신 것마다 대단한 성과를 내셨다지요.”

뭐랄까, 말은 칭찬 같은데······. 느낌이 좀 쎄하다.

이렇게 돌려 말하는 사람은 귀찮은데,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치고 들어오면 안 되나?

“전무님도 눈여겨보시는 것 같더군요.”

그렇구나. 함전무님의 사람이구나.

맥베스의 최대 인재풀을 자랑하는 전무군단의 일원다운 당당함이랄까? 물론 조금 과해서 오만해 보이기는 하는데, 뭐 나랑은 관계없는 이야기지.

“아닙니다. 그냥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럼 저는 일이 있어서······.”

“그렇죠. 운이죠.”

뭐야, 이건? 빙빙 돌리더니, 인제 와서 액셀 밟는다고?

“본인이 처음부터 기획하고 만들어 낸 것은 하나도 없고, 그저 다 된 밥에 수저 얹는 것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비릿한 미소를 흘리는 마팀장은 정말로 비호감상 그 자체였다.

하지만 어딜 가나 이런 인간들은 끊임없이 나타나기 마련.

일일이 심력 낭비할 필요는 없다. 더욱이 지금 내 곁에는 제임스까지 함께 있지 않나. 본사의 안 좋은 모습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

내가 적당히 맞장구쳐주고 자리를 피하려는 찰나,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지금 몇 시입니까?”

“뭐요?”

제임스의 뜬금없는 질문에 마팀장이 조금 당황했다.

“아, 이분이 지금 막 미국에서 오신 탓에 시차 적응이 필요하신 모양입니다. 지금 3시입니다.”

나는 마팀장을 대신해 제임스에게 말했다.

“업무시간이군요.”

“그렇죠.”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갑자기 시간을 물어보는 거람? 마팀장 같은 사람과는 되도록 오래 함께 있지 않은 것이 좋은데······.

“업무 시간 중에는 업무를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 길 가던 사람 붙잡고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겁니까?”

제임스의 일갈에 마팀장은 잠시 넋을 잃었다. 그리고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지금 팀장끼리 대화하는 것 안 보이나? 미국지사 출신이더라도, 본사에 왔으면, 본사 규정에 맞게 행동해야지.”

마팀장은 팀장의 권위까지 내세우며 제임스를 압박했다. 하지만······.

제임스가 누구던가?

회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숨기고서도 문이사 앞에서도 할 말 다 하는 노빠꾸의 대명사다.

더군다나, 직급으로도······.

나는 속으로 마팀장의 명복을 빌었다.

“규정?”

“그래. 장급 대화에 하급자가 함부로 끼어드는 것이 무례한 행동이라는 것도 모르나? 회사원이라면 직급에 맞게 행동해야 하는 것 아닌가?”

마팀장의 말에 제임스는 피식 웃었다.

“웃어?”

마팀장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하지만 제임스는 그깟 것 따위는 단숨에 얼려버릴 살벌한 냉기를 풀풀 날리고 있었다.

“마팀장.”

“!”

제임스가 님자를 빼고 자신을 호명하자, 마팀장의 가느다란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본사에서는 팀장이, 부장에게 회사 생활을 훈수 두나?”

“부, 부장?”

“파벌놀이는 업무 시간 끝나고 해. 내 말 알아들었나?”

절대 0도에 수렴하는 살벌한 냉기! 이것이 +3 빙결검의 위력인가?

마팀장은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서 얼음처럼 꽁꽁 얼어버렸다.

“그만 돌아가서 업무나 신경 쓰지?”

“아, 예, 예! 실례했습니다.”

마팀장은 헐레벌떡 달아났다.

“가시죠.”

“······.”

“표팀장님?”

“······머, 멋져.”

“?”

엄마가 크고 튼튼하게 낳아주시고, 장남인 덕분에 살면서 누군가에게 보호 받은 적이 없었는데, 가족이 실드 쳐주는 것이 이런 느낌이구나.

“그런데, 아까 직급보다 직책이 중요하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

가끔 얼굴 색은 그대로인데, 귀만 빨개지는 사람이 있다.

연아가 그런 타입이고, 제임스도 마찬가지.

우리 형님 귀엽네.

“이번 일은 없던 것으로 해주시죠.”

왜요? 왜 없던 일로 해야 하는데요?

“특히 아버지······ 아니, 회장님께는 비밀로 부탁드립니다.”

이거, 의외로 놀려 먹기 좋은 타입?

*

*

*

“표팀장님!”

나를 발견한 팀원들이 큰 소리로 나를 반겨주었다.

그리 오래 떨어져 있던 것도 아닌데, 무척 반갑다.

“다들 별일 없었지?”

“네! 별일 없죠.”

“자, 이건 너희들 선물.”

나는 미국에서 구입한 선물들을 남궁원과 함송희에게 나눠주었다.

“그런데 기도는 어디 갔어?”

“흐흐흐.”

“아, 깜짝이야. 너 뒤에서 튀어나오는 버릇 안 고치면 진짜 언제 한번 죽는다니까?”

“보통은 한 대 맞는 다, 아닙니까?”

그게 그 뜻 아니야? 내가 놀라서 힘 조절 못 하면 넌 죽어.

“그런데 이분은 누구세요?”

남궁원이 제임스를 가리켰다.

“제임스입니다. 미국지사 소속인 탓에, 직급이 애매하니, 그냥 제임스라고 편하게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소개하기도 전에 제임스가 날름 소개를 끝마쳐버렸다.

“제임스는 당분간 우리 프로젝트를 도와주기 위해 특별히 와주셨어. 그러니 실례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써줘.”

아니, 해주세요. 우리 회사 생활 아직 창창하잖아?

“그런데 우리 프로젝트 정해졌어요?”

“지난번에 부탁한 것 있지? 그게 첫 프로젝트가 될 것 같아.”

“헉! 그거 진짜 하는 거였어요?”

“뭘 놀라? 니가 디자인 컨셉까지 만들었잖아.”

“그냥 클라이언트 홀리려고 사기 치는 건 줄 알았죠. 전 회사에서 저랑 팀장님이랑 외주 작업 전에 항상······. 읍! 읍! 으으음······.”

홍켓몬은 숙면에 빠졌다. 제, 제임스는 못 들었겠지?

내 실수다. 처음부터 홍켓몬은 재우고 인사를 시켰어야 했는데······.

“표팀장님?”

“양실장님!”

드디어 기다리던 인물이 등장했다.

“미국은 어떠셨습니까? 별일 없으셨습니까?”

“네. 별일 없었습니다.”

“다행이군요. 센터장이 다음 주에 코 수술을 한다고 해서, 걱정이었는데.”

아, 알고 계셨군요. 양실장님도 참, 사람 무안하게······.

“실수였습니다.”

“문이사님 말씀은 다르던데요.”

둘이 언제부터 연락까지 주고 받는 사이가 된거야?

일단, 사람들의 관심을 가지기 전에 화제를 돌리자!

“이건 선물입니다.”

“선물까지······. 감사합니다.”

“문이사님이 특별히 추천해주신, 시즈닝입니다. 한국에서는 구하기 어렵다고 하신 물건입니다.”

솔직히 나도 먹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른다.

“문이사님 추천이라면 믿을 만하겠지요. 집사람이 좋아하겠네요.”

양실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니, 나도 마음이 훈훈해진다.

그런데 뭔가, 등 뒤가 서늘하다?

“제임스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양성태입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양실장님 파벌에 가담할 생각 따위는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표팀장의 테스트를 거친 이후에 제 거처를 결정할 테니, 딱히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군요.”

“그거면 됩니다.”

역시 양실장은 그릇이 넓다. 한팀장도 그렇고, 다들 기꺼이 양실장을 따르겠다고 하지 않는데도 싫은 기색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 갑자기 파벌놀이 같은 것을 시작하셨습니까? 미스터··· 아니, 문이사에게 들었을 때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는 타입이라고 생각했었는데요.”

“제임스라고 부르면 될까요?”

“예.”

“제임스도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양실장이 자세히 말해주지 않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걸까? 제임스는 그저 묵묵히 양실장의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표팀장!”

“한팀장님!”

나는 한팀장에게도 선물을 나눠주고 부장님과 오팀장을 비롯, 사람들에게 차례로 선물을 나눠주었다.

살짝 지나친 환대 속에 복귀 신고를 마친 나는 퇴근 시간에 맞춰 칼 같이 빠져나왔다.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 같은 날까지, 회사에 발이 묶여 있을 수는 없지 않나?

나는 곧장 연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디야?

-미안, 나 오늘은 일이 좀 많아서 못 볼 것 같아. 그리고 부모님 댁에 먼저 가는 게 좋지 않아?

-주말에 갈 거야. 알겠어. 나중에 봐.

-응. 미안해.

-미안하긴.

아쉽게도 오늘 연아와 만나는 것은 불발되었다.

“이참에 들어가서 쉴까?”

어차피 캐리어도 번거롭던 참이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뜻하지 않는 사람과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정작 정점인 조회장 보다도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다니는 남자.

함전무였다.

“표세인 차장? 아니, 팀장이었던가?”

“예. 그렇습니다.”

나이는 조회장 보다, 나이가 적다고 들었는데, 하얗게 센 머리칼 덕분인지 오히려 더 연배가 있어 보이는 모습.

“퇴근하나?”

“예.”

“그럼 저녁 식사는 아직이겠군.”

“네?”

뭐랄까, 방심하던 중에 덫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은 느낌이랄까?

“나도 마침 저녁 식사를 하러 가던 길이었네. 함께 가지.”

라면서 내 대답은 듣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는 인물의 오만함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하는 수 없이, 함전무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뭐 좋아하나? 아직 젊으니 고기가 좋은가?”

고기 좋지. 언제나 좋지. 하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다.

“고기 말고 생선으로 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생선?”

“예. 저 고깃집 아들입니다.”

“하하하! 이 친구 재미있네?”

함전무의 말에 주변 사람들 모두가 환하게 웃었다.

미소가 무슨 하회탈 같다.

게임 회사에서 이 정도로 파벌이 구축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내에서 함전무의 파워가 그만큼 막강하다는 증거겠지.

“좋아. 횟집으로 가지.”

“예약하겠습니다.”

함전무의 말에 누군가가 급히 스마트폰을 꺼내 예약을 시작했다.

“체육대회에서 봤을 때는 운동 실력에 감탄했는데, 나중에 보니 일도 잘하는 친구더군.”

“과찬이십니다.”

별것 아닌 말을 툭툭 던지는 것뿐인데도 묘한 압박감이 밀려온다.

나를 향한 주변의 시선도 한몫하겠지.

조회장에게 퀘스를 받고 양실장과 함께 이래저래 눈에 띄다 보니, 언젠가 함전무와 대면할 일도 있겠다 싶긴 했는데, 이렇게 덜컥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제임스와 함께 귀국했다지? 그 친구 분명 문이사의 오른팔이라고 들었는데.”

“예. 함께 귀국했습니다.”

감출 수 없는 것은 드러내며 짧게, 짧게 최대한 단답식으로 대답하자.

상대는 노회한 구렁이가 아닌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만 덫을 피해갈 수 있다.

이미 양실장과 함께 출사표를 던지고, 이상무 진영에는 선전포고와 함께 일전까지 불사했다.

더는 일개 기획자 포지션을 유지해서는 안 된다.

상대의 의중을 탐색하면서 양실장의 의중과 엇나가지 않도록 세심하게 상황을 읽어내야 한다.

“안 그래도 자네와 한번 만나고 싶었더랬지.”

왜? 무슨 일로?

이유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대처 방식이 달라진다.

눈에 띄는 기획자라서?

양실장 파벌의 일원이라서?

혹시나 문이사와의 승부 때문에?

“지난번 회장님과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네만.”

조회장의 이름까지 등판했다. 이건 큰 건이다.

큰 게 온다.

나는 직감적으로 위기를 감지했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좁은 엘리베이터 공간에서 거대한 해일이 밀려오는 기분이 든다.

침착하자, 상대의 노림수를 오판하면 끝장이다!

“그······ 벽조목으로 만든 물건 말인데.”

“네······. 예?”

벽조목? 이게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지?

“회장님께 들으니, 자네 지인이 선물해준 물건이라고······.”

아, 아버지니까 지인은 지인이지. 그런데 갑자기 그게 왜?

“그 주사위······. 혹시 한 벌 더 구할 수 있나?”

“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냐? 이것이 정상급 임원의 술수인가?

“가격이 얼마든 내가 배로 쳐주지!”

가, 가격······. 그런 거 모르는 데요?

< 요즘 군대 너무 짧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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