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한편, 표세인이 함전무에게 끌려간 사이 조연아는 홀로 방에 틀어박혀 무수한 서류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밥 안 먹냐?”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자, 조양길이 직접 조연아의 방을 찾았다.
“생각 없어요.”
“갑자기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졌냐?”
아버지지만 정말로 밉상맞은 캐릭터다. 조연아는 고개를 홱 돌려 조양길을 바라보았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갑자기 사업부로 가라고 하고, 깨비몬 같은 거대한 사업을 컨트롤하라고 하니까 이런 것 아니에요!”
“하여튼 성질머리 하고는······. 그리고 나라고 이렇게 될 줄 알았냐? 니 남자친구가 이 사달을 일으킨 주범이잖냐. 번지수가 틀려도, 한참 틀렸지.”
조양길이라고 이런 상황을 어찌 예상했겠나? 미국 구경 좀 하고 오라고 보낸 출장이었는데, 대뜸 깨비몬이라는 폭탄을 터트리지 않았나?
덕분에 조연아를 데뷔시키겠다는 파격적인 결정까지 내렸다.
어차피 처음으로 도전하는 생소한 프로젝트다. 망하건 성공하건,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
어차피 후계자를 자처하려거든 이 정도 전공은 세워야 하지 않겠나?
“아무리 그래도!”
“그래서 하기 싫어? 지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랴?”
“누가 싫대요!”
조연아가 버럭 소리치자, 조양길은 찔끔하며 문을 닫았다.
“하여튼 저 성질머리를, 누가 데려가······. 아, 데려갈 놈 있군.”
조양길은 홀로 털래털래 식당으로 내려왔다.
“연아, 밥 안 먹는 데요?”
“그렇답니다. 지금 일에 정신팔려서 밥도 안 넘어가겠지.”
“옛날에 수능 볼 때도 저랬었죠.”
“진짜 일 잘하는 사람은 저러지 않는 법인데, 하여튼 누굴 닮아서······.”
“지난번 회장님도 TRPG 마스터링 준비하신다고 식사를······.”
“흠, 흠. 배가 고프군.”
“네. 다 차려놨으니, 어서 드세요.”
조양길은 머쓱하게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
*
*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함전무 일행이 2차로 자리를 이동하려는 차에 나는 기회를 포착했다.
‘연아도 못 보고 우울한데, 귀국하자마자 2차는 끔찍하지.’
함전무도 내가 오늘 막 귀국했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 않나?
“그래, 아쉽구만. 이제부터가 본 게임인데.”
“나중에 기회가 또 있지 않겠습니까?”
“흐흐, 기회가 있으려나 모르겠군.”
그래도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불같이 노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그랬다면 피로감이 어마어마했으리라.
“그런데 자네 골프는 좀 치나?”
“아니요. 딱딱한 공놀이는 경험이 없습니다.”
당구, 볼링, 야구, 골프. 단단한 공으로 하는 스포츠와는 영 인연이 없이 자랐다.
“그렇군. 너무 늦기 전에 배워두라고.”
“예. 알겠습니다.”
“그럼, 가봐. 오늘 즐거웠네.”
“잘 먹었습니다.”
나는 황급히 등을 돌렸다. 하지만 그때!
“아! 양실장에게 전해주게.”
“네?”
“지난번 이상무를 찾아가서 선전포고했었다지?”
역시 알고 있구나. 세상에 비밀이란 것은 없다더니.
“어떤 말을 전하면 되겠습니까?”
“내가 기다리고 있겠다고 전해주게.”
기다린다? 설마 선전포고를 기다리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일전의 기싸움이야, 양실장과 문이사의 개인적인 다툼에 가까웠다.
이상무도 엄두가 안 나는데, 어찌 함전무에게 선전포고를 할까?
하지만 이미 도발까지 날린 상태가 아닌가?
“알겠습니다.”
“긴장도 안 하네?”
“예. 안 합니다.”
“용감한 거야? 아니면 무모한 거야?”
“저야, 지금은 양실장 손에 쥐어진 칼에 불과하니까요.”
“좋아. 조만간 날이 얼마나 섰는지, 한번 보자고.”
“전무님 방어력이면 끄떡없으시겠지만, 그래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아쉽네.”
“네?”
“내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드디어 처음으로 진짜 칭찬을 받았다는 기분이 든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회사에서 보자고.”
나는 그렇게 함전무에게서 벗어나 집으로 향했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거울 앞에 섰다.
‘실비오는 미국 최고의 테일러야! 내가 장담하지! 절대 후회할 일 없을 거야.’
문이사는 그렇게 호언장담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허풍이 아니었다.
정말로 실비오가 미국 최고의 재단사인지는 모르지만, 슈트를 걸치고 거울 앞에선 내 모습은 내가 봐도 그럴듯했다.
게다가 이런 옷을 입다 보니, 나도 모르게 헤어스타일링까지 평소보다 더 힘을 주고 말았다.
‘연아가 마음에 들어 하려나?’
새로운 옷, 새로운 팀. 거기에 새로운 프로젝트까지.
뭔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무대가 펼쳐질 거라는 기대감이 든다.
“가자.”
나는 집을 나섰다.
‘오늘부터 정신없겠네.’
당장 새로운 팀을 꾸리는 일부터 착수해야겠지. 양실장이 어느 정도 밑그림은 그려두었겠지만, 일이란 것이 다 그렇지 않나?
막상 붙잡으면 신경 써야 할 일들이 태산인 법!
‘역시 맨파워를 보충해야해.’
남궁원은 좀비로얄에 꼼짝없이 묶여 있어야 할 것이고, 함송희도 그 보조를 담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결국 남은 것은 나와 홍기도 뿐. 문제는 내 포지션상 단순히 사무실에만 계속 묶여 있을 수는 없을 것라는 것.
‘홍켓몬에게 아무리 사료(한우)를 투입해도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일이지.’
새로운 인재가 필요하다. 아마도 그것이 급선무다.
나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사무실에 도착했다.
“어?”
그런데 뭔가 사무실이 시끌벅적하다.
“무슨 일 있어?”
“오셨어요?”
언제나 우리팀의 1등은 남궁원, 2등은 함송희 그리고 3등이 나다. 뭐, 가끔 홍기도가 나보다 일찍 출근할 때도 있지만, 그건 정말로 예정 외의 상황이지.
“오늘 좀······. 많이 다르시네요?”
“멋있어요. 팀장님.”
남궁원과 함송희의 칭찬에 나도 모르게 좀 머쓱해 진다.
“하하. 여자친구가 좀 신경을 쓰라고 해서. 좀 어색하지?”
“아니에요! 완전 멋있어요!”
함송희는 두 손을 맞잡고 눈을 빛냈다. 그리고 남궁원까지 엄지를 착하고 치켜세웠다.
그래. 고맙다. 솔직히 나도 내심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 생각했었다.
그런데······.
“소, 송희야?”
“네?”
“좀 너무 가까운데?”
“아! 죄송합니다!”
함송희는 후다닥 물러났다.
“좋은 아침입니다.”
“출근하셨군요.”
마침 제임스가 등장했다. 그런데, 그 옆에 홍기도도 함께였다.
뭔가 굉장히 안 어울리는 조합이다.
“너 왜 제임스와 함께 오냐?”
“제가 어제 제임스네 집에서 잤거든요.”
내가 미국에서 뭘 잘 못 먹었나?
“미안한데, 내가 지금 잘 못 들은거지?”
나는 남궁원과 함송희를 향해 질문했다. 하지만 그들도 황당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할 뿐.
“그게 어떻게 된거냐······. 꿱!”
나는 홍켓몬 머리에 꿀밤을 날리고 냉금 내 뒤로 숨겼다.
“제임스. 죄송합니다. 이놈이 무슨 짓을 저질렀든 악의는 없었을 겁니다. 부디 용서를······.”
아아, 어째서 사죄는 나의 몫이란 말인가. 이것도 트레이너의 업보일 터.
“아닙니다. 즐거웠습니다.”
“네?”
“애초에 홍대리에게 술을 먹자고 제안한 것은 저였습니다.”
“아니, 어쩌다가······.”
애초에 제임스가 스스로 술을 먹자고 청하기도 하는 타입이었구나.
“양실장님에게 들었습니다. 이곳에서 본사 사정을 꿰뚫고 있으며, 표팀장님과 가장 각별한 사이라고 하더군요.”
각별은 좀 그렇고, 그냥 독특한 관계라고 하면 어울리려나?
“이런······.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아직도 자기 머리통을 부여잡고 있는 홍켓몬을 다시 꺼냈다.
“미안하다. 너에 대한 나의 신념이 너무 확고한 나머지······.”
“거기서는 보통 믿음이라고 하지 않아요?”
“아니, 나는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네 잘못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지.”
내 말에 남궁원과 함송희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건 어제는 즐거웠습니다. 사실 정보 조사차 제안한 자리였는데, 홍대리는 매우 유쾌한 사람이더군요.”
“어라? 그런데 어떻게 이놈과 술을 드실 수 있으셨습니까?”
애초에 이놈은 남캐로는 공략 불가 판정일 텐데?
“한우를 좋아한다더군요. 마침 저도 오랜만에 귀국이라 한우가 당기던 참이었습니다.”
“제임스가 의외로 맛잘알임.”
“그, 그래?”
“먹는 일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편입니다.”
제임스는 별일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그래서 이 혹 어떻게 할겁니꽈! 제임스에게 잘해주라면서요! 나는 시킨대로 했는데!”
순간 기세등등해진 홍켓몬이 빼액 소리쳤다.
제, 제길······. 이건 나도 방법이 없는데. 이미 한우로 배를 채운 홍켓몬을 어떻게 달래지?
“미, 미안하다. 아까도 말했듯이 내 신념이 너무나 확고한 탓에······. 솔직히 지금도 믿어지지 않고.”
“마침 오늘 금요일이네요.”
“그렇지?”
“어제 못한 환영식 오늘 하시죠. 콜?”
어라?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거래다? 어차피 출장도 끝났겠다,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에 팀원들과 한잔하려던 참이었다.
“그래. 그러자.”
“오호!”
홍켓몬은 경쾌하게 손가락을 튕기고는 어디론가 후다닥 사라졌다.
어, 업무 시간인 건 알고 있지? 그런 거지?
-우웅.
때마침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양실장 : 곧 회장님이 주관하시는 회의가 있을 것 같습니다. 표팀장님도 참석하셔야겠습니다.
회장님이 주관하시는 회의?
“그렇군요. 오늘 바로 시작할 모양이군요.”
“시작한다고요? 뭐를?”
“후계자의 데뷔 무대랄까요.”
연아가 뭘 해?
“일단 가시죠. 직접 보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나는 제임스와 함께 회의실로 이동했다.
“오셨습니까.”
“예.”
“이쪽으로 앉으시죠.”
“그런데 제가 참석해도 되는 것 맞습니까? 부장급 이하는 안 보이는데요?”
주위를 둘러보니, 팀장급은 오직 나뿐이었다.
“회장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아마도 오늘 새 프로젝트에 대해 언급하실 계획이시겠지요.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겠지만요.”
“본 안건은?”
“아마도······.”
양실장이 대답하기 전에 회의실 정문이 열리며 조회장과 연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회의실의 모두가 기립했다.
‘어? 오늘은 뭔가 좀 다르네?’
연아는 항상 입고 있던 검은 색 오피스 슈트가 아니었다.
화사한 색채의 정장 바지와 블라우스를 걸친 연아는 전혀 딴사람 같았다.
“다들 앉지.”
조회장의 말에 모두가 일제히 착석.
“갑자기 소집해서 미안하군. 하지만 워낙 사안이 시급한 일이다 보니, 이렇게 됐네. 다들 바쁠 테니, 서두르도록 하지.”
조회장은 그 말을 끝으로 가벼운 손짓을 보냈고, 비서실 직원이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그간 문이사와 미국지사가 심혈을 기울여온 협상이 마무리되었어. 베타코인과 파트너쉽 계약에 도장 쾅! 찍었지.”
“오오!”
잠시 동안 탄성과 박수가 이어졌다. 어찌 되었건 나 역시 그 부분에 일조한 몫이 있기에 절로 뿌듯해졌다.
“이걸로 끝이 아니야.”
“?”
“우리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프로젝트도 함께 딸려왔다. 조실장.”
조실장?
“네.”
조회장의 부름에 연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번에 미국에서 건너온 깨비몬,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프로젝트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이번에 새로 사업부 실장으로 부임한 조실장이 담당한다.”
“조연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조연아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모두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조비서가 실장?’
‘잠깐 이거 설마?’
지금까지 어떠한 낌새도 없었기에 성씨가 같은 것은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모두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순간.
“다들 생각하는 그대로다.”
“그 말씀은?”
“그래. 조실장은 내 딸이다.”
“!”
예상치 못한 거대한 폭탄 투하에 모두의 넋이 나가버렸다.
그리고 연아가 입을 열었다.
“다들 많이 놀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새 프로젝트의 성공입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캐릭터 산업과 미디어 산업을 아우르는 거대한 규모이며, 전에 없이 사업부의 역량이 중요합니다.”
모두가 연아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는 아직 사업부의 일에 경험이 없습니다.”
“!”
뜻밖의 멘트에 분위기가 모두가 당황했다. 경험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런 약점을 이렇게 당당하게 말한다?
‘멋지다. 역시 우리 연아답네.’
자고로 목마를 때, 내준 물이 가장 기억에 남는 법.
경험이 없다는 연아의 말에 모두가 저마다의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아는 당근만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경험이 없고, 여유도 없습니다. 그런 만큼 이 시점부터 제게 NO라고 말씀하실 때는 제가 누구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
단꿈을 꾸던 이들의 머리 위로 찬물을 쏟아부은 느낌이랄까?
‘그렇지! 그래야지.’
어차피 회장 딸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공개된 이상, 소꿉놀이할 필요가 어디에 있나? 집행검도 휘둘러야 집행검인 법!
자고로 아이템은 아끼는 게 아니라고 했다.
“내 딸이라는 점을 신경 쓰지 말라는 유치하는 소리는 안 하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지. 이번 프로젝트 성공 못 하면, 내 딸이라도 용서 없어. 그렇지?”
“예. 그때는 책임지고 사표 쓰겠습니다.”
“그래. 낙하산이면 그 정도 결의는 보여야지. 다들 들었겠지? 앞으로 긴장 바짝 해야 할 거야.”
조회장은 흡족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잠깐 지금 뭐라고? 사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옆집 불구경하던 기분이던 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조회장은 한 말은 지킨다. 그리고 연아 역시 뱉은 말을 주워담는 성격이 아니다.
연아는 정말로 사표를 제출할 것이고, 조회장은 수리할 것이다.
오싹한 기분과 함께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표팀장님. 이건 우리와는 관계없는 회장님과 조실장 부녀간의 문제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
내 당황한 얼굴에 양실장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게 지금 될 소리인가?
“양실장님.”
“네?”
“목숨 걸어야겠습니다.”
“네?”
“이거 반드시 성공시켜야 합니다.”
자고로 마왕이란 언제나 공주를 빌미로 용사를 위기에 빠트리는 법이라 했던가?
‘할 수 있겠지?’
순간 조회장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이것이 새로운 퀘스트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번 퀘스트는 지금까지와는 레벨이 다르다!
띠링!
[위기에 처한 공주(연아)를 구하시오!]
내 미래가 위험하다!
< 연애는 밀당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