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많이 놀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양실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내가 놀란 것은 연아의 정체 때문이 아니라, 이번 프로젝트 성패에 연아가 사직서까지 언급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단순히 프로젝트의 규모가 크거나 작다는 문제가 아니다.
진짜 내 인생까지 여기에 달려있게 된 셈.
“단순히 저희 입장만 놓고 보면, 조연아 실장이 사직서까지 거론할 정도로 이번 프로젝트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점입니다.”
“만약 실패한다면 회장님께서 정말로 조연아 실장의 사직서를 수리할 까요?”
내 질문에 양실장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는 인물에게 후계자 자격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래도 고작 이 한 건에······.”
“저는 오랫동안 조연아 실장을 곁에서 지켜봤습니다. 이번 건에 한해 회장님의 뜻도 있겠지만, 조실장 본인의 의중도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목적을 위해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성향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확실히 연아는 그런 면이 있다. 후계자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맡게 되는 첫 프로젝트.
만약 실패한다면, 아마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연아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얼마 전에야 그녀의 목표가 조회장의 뒤를 이어, 가업을 계승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거 사실상, 내 미래가 걸린 일 아닌가?’
이따금 농담처럼 떠올린 셔터맨의 미래 같은 것이 아니다.
나는 연아의 꿈을 지원하고 싶다.
‘하긴 생각해보면, 나도 예전에는 저랬었지.’
때로는 한 번의 실패가 인생 전체를 좌우한다. 운동하면서 그와 같은 절망에 허우적대는 모습들을 얼마나 많이 지켜봐 왔던가.
한 번쯤 실패해도 괜찮다? 그것은 단 한 번의 실패가 인생이 송두리째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속 편한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때로는 단 한 번의 승부에 인생 전체의 무게가 실리는 순간이 있는 법이다.
연아는 승부수를 띄웠다. 그것도 내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에 후계자로서의 미래를 걸었다.
“양실장님.”
“네.”
“뭐부터 해야 하는 겁니까?”
게임 개발이라면 양실장 보다는 내가 낫다. 하지만 그 밖의 모든 부분에서는 양실장이 한참 낫다.
전에 없던 새로운 프로젝트와 새로운 팀을 구성하는 일이 아닌가?
나에게는 조언이 필요하다.
“일단 제임스와 살짝 논의를 해보았습니다.”
양실장은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직접 설명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본 업무는 당신이 하셔야 할 테니까요.”
양실장의 포지션인 비서실의 실장. 지금 한배를 탄 입장이라고는 하나, 이 사업에 전력투구할 수는 없는 상황.
제임스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우선 우리가 신경 써야 할 일은 협상입니다.”
“협상?”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린가? 누구와 무슨 협상을 한다는 거지?
“듣기로 표팀장님이 담당할 새로운 개발팀은 사내벤처 방식으로 출발한다고 들었습니다.”
“사내벤처?”
“그 개념에 대해 모르십니까?”
“알기야 알지요.”
국내 IT업계의 선두주자라고 할 수 있는 레이버 역시 사내벤처로 출범했다는 것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다.
“그런데 왜 갑자기 사내벤처 이야기가 나온 겁니까?”
“표팀장님이 미국에 계시는 동안 제가 회장님을 설득했습니다. 본사의 시스템에 제약을 받기보다, 제대로 된 날개를 붙여주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거라고 말씀드렸죠.”
“그걸 회장님이 허락하셨습니까?”
“예. 아시다시피 국내 게임업계 사정은 좋지 않습니다.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주가가 내려가는 모양새가 어디 정상이겠습니까? 이럴 때일수록 파격적인 행보가 중요하다. 그렇게 말씀드렸고, 수긍하셨습니다.”
내가 미국에 있는 동안, 마법사가 또 한 번 마법을 부린 모양.
사내벤처.
제아무리 독립 스튜디오라고는 해도 결국 본사 입김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하지만 벤처라면 어떨까?
진정으로 자유로운 개발 방향을 설계해 나갈 수 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내게는 눈부시게 빛나는 기회다.
“상황은 이해했습니다. 계속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내벤처라고 해봤자, 별것 없습니다. 어차피 독립 스튜디오도 따지고 보면 스타트업과 별반 다르지 않지요. 결국 포인트는 지분 문제입니다.”
“지분?”
“사내벤처든 스핀오프(분사)든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모회사의 지분비율입니다.”
“향후 투자에 관한 문제군요.”
“그렇습니다.”
스타트업에 외부 투자는 생존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 하지만 의외로 많이들 실수하는 부분이 바로 지분 문제였다.
최악은 공동창업자로서 50 대 50의 지분비로 나누는 경우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의결권을 행사할 대표의 지분이 51%에 미치지 않는다면, 투자 의향 자체를 내비치지 않는 경우가 태반.
작은 규모의 회사일수록 대표의 역량이 빛을 발하는 법이 아니겠나?
아이템의 시장성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대표의 자질인바, 그렇기에 올바른 지분 구조는 투자 유치의 가장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다.
“잠깐 사내벤처라면 대표는 누구죠?”
내 말에 양실장과 제임스가 동시에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표팀장님의 팀이니, 당연히 표팀장님이 대표로 이름을 올리셔야지요.”
“네?”
내, 내가 대표라고?
“이것은 회장님의 뜻입니다.”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연아에게는 사직서, 나에게는 대표라는 족쇄가 채워진 셈이다.
대표라고 한다면 언뜻 듣기에는 좋지만, 결국에는 책임자라는 말이다.
‘실패한다면······. 나도 무사하지 못하겠네.’
최악의 경우에는 본사에서 분리된 팀과 함께 가라앉게 된다는 거다.
“역시 회장님 답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계속하시죠.”
내 말에 제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윗선에서 생각하는 것이 사내벤처냐, 스핀오프냐는 것입니다. 국내에서는 용어를 혼재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접근 방식에 따라서 협상의 포인트가 크게 달라지겠지요.”
스핀오프(분사)는 시스템만 놓고 보면 사내벤처와 다를 것이 하나 없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모회사의 지분구조와 영향력.
모회사의 영향력이 강할수록 벤처라는 이름이 무색한 일반적인 자회사에 가까워지기 마련.
당연히 본사 입장에서는 제 돈 들여 키운 벤처를 순순히 독립하게 두고 싶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우리 역시 당장 본사의 그늘 밖에서는 자생이 불가능하다는 것.
“말씀의 요지는 우리는 보다 벤처 스타일의 지분확보가 급선무라고 하시는 거군요. 상대는 반대겠고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상대라고 해봤자······.”
설마 이걸 조회장과 협상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겠지?
회장과 일개 사원이 협상테이블에 앉는 것이 말이 되나?
-똑똑.
“실례하겠습니다.”
간결한 노크 소리와 함께 회의실 안으로 모습을 드러낸 여성.
오늘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나의 여자친구.
연아였다.
“조실장님?”
“논의 중에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쪽도 시급하거든요.”
이쪽도 시급하다? 그러고 보니 이번 프로젝트의 사업부 담당자가 연아라고 했었지?
“이렇게 바로 치고 들어오다니······.”
제임스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짧게 혀를 찼다.
“어머? 미국에서 오신 분치고는 사고방식이 무르시네요. 상대가 준비를 갖추기 전에 공략하는 것은 기본적인 전략이지 않나요?”
연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달라졌다. 비서로 있을 때의 연아는 저런 작은 표정 변화조차도 극도로 조심하지 않았었나?
사실 부잣집 딸이라는 분위기를 최대한 숨기려고는 하고 있지만, 연아도 가만 보면 상당히 오만하고, 공격적인 성향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3대 7. 물론 본사가 7입니다. 이렇게 합의하죠. 본사 차원에서 최대한의 지원을 약속드리겠습니다.”
“!”
최저한의 마지노선인 51%의 비율조차 가차 없이 짓밟아 버리는 과격한 횡포!
시작부터 이렇게 치고 들어 오다니!
“협상의 기본을 모르는군. 게다가 70%? 벤처라는 이름은 허울이고 그냥 스핀오프라고 생각하라 이건가?”
제임스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연아는 조금도 흔들림 없는 자신만만한 미소로 응수했다.
“그럼 외부로 나가서 투자라도 받으시려고요? 해당 프로젝트에 소유권은 본사가 쥐고 있습니다만?”
꼬우면 어쩔거냐? 라는 엄포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다.
깨비몬이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직원으로서 회사를 위해 고안한 아이템인 것은 사실이니까.
“굳이 회장님이 사내벤처라는 거창한 이름을 들먹인 이유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본사가 지닌 낡은 시스템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빠른 행보를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그럴 거면 뭐하러 신규팀을 구성하지? 그냥 기존팀에 맡기면 될 일 아닌가?”
“어차피 전부 말장난에 불과하지요. 이번 프로젝트는 본사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프로젝트입니다. 이런 중대한 프로젝트를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도록 독립성을 부여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주시기 바랍니다.”
제임스와 연아. 두 남매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기 싸움을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지켜보며 잠시 고민에 잠겼다.
연아가 7대3이라는 과격한 딜을 시전하는 이유.
갑작스러운 데뷔와 거대한 프로젝트. 그녀는 현재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일까?
‘선 긋기인가?’
‘화난 거 아니지?’
‘재미있네. 어울려 줄게. 넌 진검 승부 좋아하잖아.’
‘아니야. 나는 이기는 것을 좋아해.’
그거야 누구나 그렇지? 하지만 역시나 그전에 봐주는 것을 더 싫어하잖아?
이따금 나와 연아는 데이트 중에 에어하키나 배드민턴 같은 놀이를 즐긴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언제나 나에게 소리쳤다.
‘봐주지 말고 제대로 해.’
그래! 그리고 나는 단 한 번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그게 우리가 지금까지 사귀어온 방식이 아니었나?
‘그럼 나도 시작해 볼까?’
나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들겼다. 작은 소리였지만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은 충분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럼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아니요. 반대로 제안하지요. 9 대 1 물론 저희가 9라는 것은 말씀드리지 않아도 괜찮겠죠?”
“뭐라고요? 지금 농담하시는 겁니까?”
연아의 고운 눈썹이 살짝 휘어졌다. 토라진 모습도 이렇게 예쁘면 반칙이다.
자꾸 장난치고 싶어지잖아.
“말씀드렸다시피, 깨비몬은 본사가 쥐고 있습니다만?”
“그럼 알아서 만드시면 되겠네요. 어차피 제가 만들 생각도 없던 아이템입니다. 전 다른 것을 만들겠습니다.”
“뭐, 뭐라고요?”
“제 원래 계획은 깨비몬 못지않은 아이템입니다. 그러니 잘됐네요. 서로 열심히 해보죠. 파이팅.”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과한 도발은 좋지 않습니다. 상대는 어쨌든 회장님의······. 아니, 그보다 원래 다른 계획이 있으셨습니까?”
양실장이 나에게 우려 섞인 눈빛을 보냈다.
“계획? 물론 있지요.”
뻥카가 내 계획이다. 애초에 팀장 달기 무섭게 미국으로 등 떠밀리지 않았나? 뭔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히 해둬야 할 것이 있다.
나는 게임에는 언제나 진심이다.
상대가 회장님이든, 내 여자친구든 그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판세가 불리해? 그럼 뒤집어 버리면 그만이지.
“그리고 전 도발한 것이 아닙니다.”
“도발이 아니었습니까?”
“그럼요. 어필한 겁니다.”
“어필?”
“상대가 가장 매력적인 순간은 튕길 때가 아니겠습니까? 제가 콧대를 세웠으니, 곧 꽃다발 들고 달려오겠죠.”
다들 착각하는데, 나 돈에 별로 관심 없다. 지분 51%? 우습지도 않은 소리.
연아의 가장 큰 착각은 나라는 사람을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이다. 맥베스가 100%를 다 가져가도 내가 손해날 것이 뭔가?
어차피 미래 장인어른의 회사가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연아의 가장 큰 실수는 나를 설레게 했다는 거다.
내 여자친구는 과연 나를 어떻게 유혹하려고 할까?
이거 너무 기대되잖아!
쉽게 넘어가지 말아야지. 연애의 백미는 밀당 아니겠나? 크크크.
< 맨 정신에 술 주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