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모처럼 만의 한가로운 주말이다.
오래간만에 죽자고 달린 탓에 피로가 쌓였다. 이런 날은 집에서 느긋하게······.
-우웅.
때마침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장남아.
“네. 아버지.”
-너 지금 여기로 좀 와야겠다.
“무슨 일 있으세요?”
-일단 빨리 좀 와라.
무슨 일이지? 평소답지 않게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IMF를 맞아 집안이 휘청이던 시절에도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던 아버지가 아니던가?
나는 급히 옷을 챙겨 입고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아버지.”
“어, 세인아.”
“형! 대박 사건!”
아버지와 세종이는 집 밖에 나와 있었다. 설마 나를 마중 나온 것도 아닐 테고······.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 가운데, 마침 아버지와 세종이가 낯선 자동차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남의 차를 기웃거려요?”
“이거 우리 차다.”
“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이제 겨우 은행 빚 청산한 우리 집에 무슨 돈이 있다고 이런 고급 세단을 산단 말인가?
“네 장인이 보내주셨어.”
“네?”
“상견례 때 드린 선물 보답이라고 하시더라.”
“네?!”
고작 나뭇조각을 깎아 만든 주사위에 대한 보답으로 벤츠 S클래스를 보냈다고?
“이거 좀 어떻게 해봐라.”
“뭘 어떻게 해요.”
“그럼, 이런 물건을 함부로 받아?”
네츄럴 본 소시민인 우리 아버지는 간담이 서늘하다는 듯이 턱밑을 쓸었다.
“······아버지가 정 그러시다면, 제가 시승식을! 꽥!”
나는 대뜸 차 문을 열려고 하는 철없는 동생놈에게 로우킥을 날렸다.
“정신 사나운데, 가만히 좀 있어라.”
“제, 젠장······. 황희와 이이만 아니었어도······. 운 좋은 줄 알아라. 아, 오늘도 유교의 가르침이 사람 하나 살리는구나.”
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동생 놈을 무시했다.
“마침 잘됐네요. 아버지 차도 낡았는데 이참에······.”
“그럼 우리 집 차는 내가 타도 되겠네?”
팔아버리려고 했는데······. 세종이가 눈을 반짝인다.
잠시 생각해보니, 중고차 시장에 내놔봐야 썩 좋은 가격을 받기도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너 얌전히 타고 다녀야 한다.”
“내 운전 실력 모름?”
“하긴 네가 소심하긴 하지.”
세종이는 덩치에 안 맞게 운전대만 잡으면 작아진다.
규정 속도에 딱 맞춰 달리는 타입이라 큰 사고 낼 타입이 아니긴 하다.
“야, 그런데 이런 차는 보험료도 비싸지 않냐?”
“그건 제가 부담할게요.”
“뭐?”
“뭘 그렇게 놀라세요.”
“너 요즘 돈 많냐?”
“이 정도 부담할 정도는 됩니다.”
좀비로얄 사외임원으로 등재된 덕분에 요즘 통장에 찍히는 액수가 엄청나다.
게다가 대부분 큰 건은 회장님이 주신 카드로 해결하다 보니 돈이 남아돌기 시작한다.
결혼 전부터 재벌집 사위라는 타이틀을 톡톡히 누리고 있는 셈.
‘그렇다고 무슨 드라마 같은 수준은 아니지만.’
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아버지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선물을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 그런데 이거 겁나서 타겠나.”
“아, 아버지 그럼 저에게 기회를······.”
“세종아, 너는 낄끼빠빠라는 말도 못 들어봤냐?”
“그런 거 따지면 막내 생활 못 합니다.”
“누가 들으면 형제 너덧 명 되는 줄 알겠네.”
“아무튼 키 좀.”
“그래. 자.”
“어?”
“왜 놀래?”
“진짜 줘요?”
“달라매?”
“오케이!”
-삐삑.
세종이는 신이 나서 차문의 락을 풀었다.
“그런데 이 차는 수리비도 장난 아니지?”
“헤드램프 하나만 나가도 2, 300백 할걸요?”
나와 아버지의 말에 세종이는 다시 락을 잠그고 키를 넘겼다.
“키는 잘 되네요.”
“안 몰아봐?”
“애차가 생겼는데, 그 녀석 말고 다른 차에 눈을 돌리면 안 되죠. 저는 지조 있는 남자입니다.”
그러면서 쪼르르 아버지의 낡은 차를 향해 달려갔다.
“나 세차하고 올게!”
“아니, 세차보다 정비부터 한 번 받아라. 지난번에 소리가 안 좋더라.”
“저 차가 소리가 좋은 적이 있어요?”
“가끔 달라져. 이씨네, 정비소 알지?”
“네.”
세종이는 그대로 차를 몰고 사라졌다.
“그나저나, 역시 선물이 좀 과하다는 느낌인데.”
“솔직히 그렇네요.”
순간 지난번 함전무가 주사위 가격으로 배를 지불하겠다던 것이 생각났다.
‘벤츠S 클래스 2대. 가능하시겠습니까?’
함전무의 벙찐 표정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너 오늘 할 일 없지?”
“네.”
“가서 인사라도 드려라.”
회장님댁을 방문한다? 안 그래도 한 번쯤 찾아가 뵈려고 했는데, 마침 좋은 핑계가 생겼다.
“그러는 것이 좋겠네요.”
“그래. 그래라. 가서, 너무 감사하다는 말도 전하고.”
“네. 그리고 아버지도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 편히 타세요. 부귀영화는 몰라도 저도 이제 이 정도는 감당 가능합니다.”
“그러냐?”
“네. 진짜로요.”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어째, 예전에 금메달 따오겠다고 태릉 갈 때랑 똑같은 표정인데?”
왜 부모님들은 항상 옛날이야기를 꺼내서 자식들을 무안 주는 걸까?
“너 지금 연아 아버님 만나러 간다고?”
엄마가 등장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이거랑, 이거, 이것도 가져가.”
분홍색 보자기에 둘러싸인 플라스틱 용기를 보며 살짝 한숨이 나왔다.
“아니, 이 많은 것을 다 어떻게 들고 가.”
“평생 운동시켜놨더니, 이것도 못들어?”
“운동하면 팔이 3개로 늘어나기라도 합니까?”
“이 차 몰고 가라. 트렁크에 싣자.”
“어? 새 차에 냄새 배기면 어쩌려고.”
“그럼 차를 무슨 신줏단지 모시듯이 모시랴? 마음 편히 타라며?”
그 마음이 그런 마음이 아니지······. 아니, 뭐 쩔쩔매며 동상처럼 세워두는 것보다는 낫겠지.
*
*
*
“다시 오니 감회가 새롭네.”
연아 없이 혼자, 회장님댁을 방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더 빨리 찾아뵙고 싶었지만, 여기서 회장님을 처음 뵌 이후로 이래저래, 정신없이 바빴다.
하지만 이렇게 오늘 다시금 이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네가 웬일이냐?”
조회장은 정말로 놀랐다는 표정이었다.
“아버지께서 선물 감사하다고 인사드리라고 하셔서요.”
“에잉, 그까짓게 뭐라고, 나야말로 사돈께 감사하다고 전해. 지난번에 자랑 좀 톡톡히 했다. 함전무 그 친구가 어찌나 입맛을 다시던지. 클클.”
네. 알고 있습니다.
“연아는 나갔습니까?”
“출근했다.”
“주말에요?”
“뭘 놀라? 너도 주말 출근 많이 해봤잖냐.”
“그건 그렇죠.”
“그런데, 그건 다 뭐냐?”
내가 바리바리 싸온 물건들을 보며 조회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머니가 이것저것 보내셨습니다. 하나가 동치미라는 것은 알겠는데, 나머지는 잘 모르겠네요.”
“어이고, 이 귀한 것들을 감사히 먹겠다고 전해라.”
“네. 이거 어디에 둘까요?”
“부엌으로 가자. 하나는 나 주고.”
“괜찮으시겠어요?”
“아직 지팡이 필요한 나이 아니다.”
나와 조회장은 어머니가 보낸 물건을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한 후에 거실로 돌아왔다.
“일단 앉아라.”
“예.”
나는 조회장의 말대로 커다란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회장님.”
“말해라.”
“정말로 이번 프로젝트 성패에 따라서 연아에게 사표 받으실 생각이십니까?”
사실은 이게 가장 궁금했다. 설마 친딸에게 사표를 받으실까?
“그래. 네입장에서는 그게 제일 궁금하겠지.”
조회장은 재미있다는 듯이 킬킬 웃었다.
“받을 거다. 아니, 내가 안 받아도 연아 스스로 회사를 뛰쳐나가겠지. 너는 모르냐? 그 녀석이 알게 모르게, 승부욕이 엄청나.”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의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고요.”
내 말에 조회장은 다리를 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너도 나중에 위치가 더 높아지면 알게 될 거다. 높은 자리에 앉을수록 핑곗거리가 적어지는 법이다. 더군다나 그 녀석은 자그마치 회장 자리를 노리고 있어. 제 손에 몇 명의 밥줄이 달려있는지를 깨달아야지.”
무게감 있는 조언이었다.
“그건 그렇고, 지금 연아 걱정할 때가 아닐텐데? 사내벤처는 잘 꾸려갈 수 있겠냐?”
“네. 양실장과 제임스가 도와주는 덕분에 저는 딱히 할 일도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너도 참 남다른 재주가 있다. 하나 같이, 제 위에 사람 안 두는 녀석들을 잘도 구워삶았어.”
“위라니요, 제가 가장 아래인 걸요.”
“그래. 뭐,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말이야 바른 말이지, 양실장도 제임스도 모두 직급이 나보다 높지 않은가?
“양실장은 그렇다치고, 제임스 그놈은······. 내 자식이지만 어쩌면 그리 외탁했는지.”
“아, 외탁입니까?”
“그래. 너는 어떠냐?”
“저는 좀 반반씩 닮았는데, 동생이 어머니 쪽을 많이 닮았죠. 살 빼면 보입니다.”
“지난번에 보니, 너희 집은 화목해 보여서 보기 좋더구나.”
“아닙니다. 싸울 때는 엄청 싸워요.”
TV 프로그램 결정권 같은 사소한 일로도 얼마나 다투는지 모른다.
“그게 사람 냄새라는 거지. 다 내 잘못이지. 일에만 미쳐 살아서는······. 어쨌든 연아 시집 분위기가 밝아서 내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음······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해?”
“이런 타이밍에 걸맞는 대사가 안떠오르네요.”
“기획자 실격이구만.”
“제가 시나리오 파트는 아니라서요. 흐흐.”
시나리오는 기획 파트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파트다.
이것만큼은 배운다고 감당할 수 있는 종류의 업무가 아니기에, 나도 도리가 없다.
나는 일부러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보다 이번 것도 퀘스트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 맞습니까?”
“왜 아니겠냐. 이번 일도 잘 해주기 바란다.”
“신규팀이 사내벤처로 뒤바뀐 것은 미국 출장의 보상이고요.”
“그래. 안 그래도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양실장이 먼저 나서더구나. 듣고 보니, 잘됐다 싶더군.”
“그런데 결국 사내벤처로 이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되면 회사가 가져갈 이익이 줄어드는 것 아닙니까?”
일반적인 사원이라면 이런 생각 따위는 하지 않겠지만, 나는 일반 사원이 아니지 않나?
“클클클, 다 계산이 있으니, 너는 네 할 일이나 잘해라.”
“이게 퀘스트인 이상, 저도 양보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미 연아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참이다. 그리고 정말로 순순히 합의해줄 생각도 없다.
“경쟁, 성과, 보상. 내가 처음 게임을 만들 때부터 지금까지 지켜온 신념이다. 게임이론이라는 단어를 들어봤나?”
“단어만 얼핏 들어본 수준입니다.”
“뭐, 나도 경제학자가 아니라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 너에게는 솔직히 말해줘도 괜찮겠지.”
솔직히?
“너희의 경쟁을 통해서 나는 너희의 수를 읽고 더 나은 전략 방안을 수립할 수 있게 된다. 결국은 모두 회장인 나를 위한 것. 더 나아가 회사를 위한 것이다.”
“그렇습니까.”
“뭐, 이것은 그냥 내 개인적인 경영철학에 불과하니, 그냥 그렇구나 하고 알아만 둬라. 너도 나중에는 네 방식이 생길 거다.”
나만의 경영방식.
불현듯 언젠가 나도 조회장처럼 나만의 확고한 경영철학을 수립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그보다 용건은 그게 끝이냐?”
“아닙니다.”
“뭐가 더 있어?”
“오늘 하루는 회장과 직원이라는 직급을 떼고 함께 시간을 보냈으면 합니다.”
“예비 장인과 사위로 친목 도모라도 하자는 거냐?”
“제 입장에서는 득점 기회랄까요?”
“득점?”
“아시다시피, 연아는 우리 부모님을 상대로 막대한 득점을 기록했는데, 저는 회장님께 변변히 점수를 딴 것이 없지 않습니까.”
“아니, 너도 잘하고 있는데?”
“업무 말고요.”
“음······. 나 간지러운 것 안 좋아한다.”
“저도 그런 쪽은 아닙니다. TRPG 말고 다른 취미는 없으십니까?”
“흐음······.”
내 밀문에 조회장은 고민에 잠겼다.
“낚시 좋아하나?”
“어릴 적에는 아버지 따라서 몇 번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골프는 좋아하나?”
“골프는 경험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함전무도 골프를 배우라는 조언을 했었지.
대체 어른들은 왜 골프를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걸까?
“좋아. 그러면 오늘은 낚시와 골프를 해보기로 할까?”
“두 가지 전부요?”
“뭐가 취향에 맞을지 모르잖나.”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시죠.”
“나가?”
“낚시와 골프를 하자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안 나가요?”
“왜 나가?”
“?”
내가 잠시 얼빠진 얼굴로 조회장을 바라보는 와중에 조회장은 어디선가 낚싯대와 골프채 모형의 게임패드를 들고 왔다.
“접대게임의 왕은 낚시와 골프지!”
“자, 시작하지.”
이, 이 사람······. 진짜 게임을 좋아하는구나.
“이게 이래 봬도 내가 따로 주문 제작한 거다. 손맛이 아주 기가 막히지!”
조회장은 자신의 낚싯대를 들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취미에 진심인 사람은 이래서 편하다. 그걸 칭찬해주기만 하면 한결 가까워지니까.
게다가 나 역시 남 못지않게 게임을 좋아하지 않나?
“그립감이 좋네요. 특히 이 고무질감이 남다르네요. 게다가 묵직하고.”
“그래, 나름대로 낚싯대 무게만큼 나오지. 모터도 따로 달았으니, 진동이 약하다 싶으면 이 버튼을 눌러라. 그럼 손맛 끝내준다.”
“그럼 점심 내기로 할까요? 짜장면?”
“짜장면? 나는 짜장면 안 먹는다.”
아, 역시 재벌에게 짜장면 내기는 좀 어이 없는 제안이었나?
“나는 짬뽕 파야. 그리고 요즘 배달시키려면 탕수육 빼면 말이 안 되지. 세트로 가자.”
“콜!”
“밸런스 조절 필요하나?”
“훗, 회장님. 벌써부터 핑계 준비하십니까?”
“······이 동네 짜장면값 만만치 않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공짜 밥일 텐데요.”
내가 히죽 웃으며 말하자, 조회장은 옷소매를 걷어 올렸다.
“3판 2선승이다.”
“알겠습니다.”
“지난번 하드소울 보고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나 낚시랑 골프게임은 잘해.”
“기대하겠습니다.”
설마 젊은 내가 노인에게 게임에서 밀리겠나?
*
*
*
“잘 먹으마. 클클클.”
“······ 맛있게 드십시오.”
그날 나는 짜장면 가격에도 프리미엄이 붙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게임은 역시 센스 보다는 경험이라는 것도······.
< 뭐야, 그 미소 뭐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