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안녕하십니까.”
“네.”
한 직원의 정중한 인사에 조연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풍경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살짝 까딱임에 불과하던 고갯짓이 세찬 바람에 맞은 갈대처럼 급격하게 휘어진다.
지나는 걸음마다 이어지는 정중한 인사의 세례식.
이미 예상하던 일이지만 실제로 겪게 되니, 익숙해지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재벌집 딸이라고 이런 풍경에 익숙하겠나? 더군다나, 조연아가 태어나던 시점까지 조양길의 회사는 지금 같은 대기업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당당하고 오만한 이미지를 갑옷처럼 두른다.
‘일이 많아도, 오빠랑 데이트 한번 안 한 것은 좀 그런가?’
예전과 달리 같은 회사에 근무한다는 이유 때문일까?
전보다는 조금 여유가 생겼다는 느낌.
‘이해해줄 거야.’
표세인이라면 이해해 줄 것이다. 이미 지난번 자신의 장단에도 곧장 맞장구를 쳐주던 표세인이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까.’
물론 모든 부분에서 눈치가 빠른 것은 아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굉장한 허당이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언제나 기분 좋은 만족감을 선물해 준다.
기본적으로 어르고 달래는 일에 능숙한 사람. 어쩌면 주변을 아우르며 이끌어가야 하는 기획자라는 포지션이 표세인을 그렇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오셨네요.”
“네. 주말 잘 보냈어요?”
“우리 거의 새벽까지 화상통화 켜고 일하지 않았나요?”
김비서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알다시피.”
“별로 미안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말씀하실 것 없습니다. 다 기브앤테이크 아니겠어요?”
김비서는 조연아의 사수였다. 이후에는 동료가 되고, 이제는 아랫사람이 되었다.
조연아에게는 회사에서 처음 만난 동경할 수 있는 인물이자, 친근한 언니라는 느낌이었다.
일 잘하고, 가끔은 짓궂은 농담도 던지고, 그러면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다.
아직 비서용 가면에 익숙하지 않던 조연아가 내심 멘토로 삼고 답습했던 사람.
“마흔 살에 실장. 그것만 지켜주시면 됩니다.”
샐쭉 웃으며 농담을 던진다. 물론 농담 반 진담 반이겠지만.
“알잖아요. 저 사람 없어요.”
“그럴 때는 김비서라면 충분히 자격이 있다. 뭐 이런 말을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제 노처녀 티켓까지 끊어주시고선.”
“소개팅해드려요?”
“저 아직 클럽 입장 가능하거든요?”
“이제 클럽 지겹다고······.”
“대한민국 3대 거짓말 몰라요?”
“?”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말, 노인이 죽고 싶다는 말, 미혼이 클럽 지겹다는 말.”
“알겠습니다.”
“알아?”
“네?”
“소개팅이라는 단어를 꺼냈으면 책임을 져야지!”
“······알겠습니다.”
그래. 아마도 내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리라, 표정 연기가 너무 진지한 것이 신경 쓰이지만······.
“양실장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이미 반쯤은 예상하고 계셨는지, 그동안 비서과에서 수고했다며 선물까지 주시던걸요?”
김비서는 연아의 실장 취임에 발맞춰 비서실에서 사업부로 보직을 이동했다. 그리고 그것을 미리 예상했던 양실장은 사전에 선물을 준비해 놓았던 것.
“선물?”
“고급 리조트 이용권을 받았어요.”
“잘됐네요.”
“잘되긴! 양실장님이 함께 가자고 해야 잘된 거지!”
“양실장님 결혼하셨······.”
“아, 진짜 양실장님 볼 때마다 사람들이 왜 불륜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니까.”
“연하 취향이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상상력이 빈곤하시네요. 예를 들어볼까요? 명품백을 선물 받았다고 생각해보세요.”
“네.”
딱히 명품을 선물 받은 적은 없었지만, 연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디자인이 좀 내 취향이 아니야. 하지만 일단 가격표가 블링블링하잖아? 이게 어떻게 안 예뻐?”
“음······. 그래도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면 들고 다니기가······.”
“아, 금수저였지. 내가 누구랑 무슨 말을 하니.”
“음······.”
금수저라는 화제가 나오면 할 말이 없어진다. 금수저라서 모른다, 금수저라서 못 느낀다. 이런 류의 인식 덕분에 때로는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질 지경.
더 슬픈 것은 진짜로 공감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는 것.
“결론은 가격 앞에 취향 없다. 이상.”
“그렇군요.”
“정말 하나도 공감 안 된다는 표정이시네요.”
“전 명품 아니라도 디자인이 예쁜 것이 좋아서.”
“······가끔 참, 사람이 미워. 알죠?”
“죄송합니다.”
연아는 미안하다는 느낌이 전혀 없는 새침한 얼굴로 대답했고, 김비서는 피식 웃었다.
“명품보다 디자인이라······. 남자 고를 때도 그래요? 대체 부잣집 집 딸은 어떤 남자를 만나나?”
회사에서는 가장 친한 사이라지만, 조연아는 자신의 사생활을 털어놓는 타입이 아니었다.
“키 커요?”
“네. 커요.”
“몸 좋아요?”
“······네. 운동하던 사람이에요.”
“머리 좋아요?”
“네.”
“말 잘해요?”
“말재주는 확실히 있는 편이죠.”
“잘생겼어?”
“······네.”
“한 대 맞을래요?”
“?”
“다 가졌잖아! 뭐가 명품보다 디자인이야!”
“부, 부자는 아니에요.”
“니가 돈이 많잖아!”
“제가 아니라 아버지가 돈이 많죠. 김비서님이 저보다 연봉 높으시잖아요.”
“아빠가 부자지, 나는 아니다?”
“네.”
“이건 신종 괴롭힘인가? 나 왜 벌써부터 피곤하지?”
“······.”
“에잇, 이럴 때는 일이지! 스트레스는 일로 푸는 거야!”
그러면서 김비서는 테블릿을 꺼내 들었다.
“이제 도장 깨기 시작해야죠. 시작은 역시 재무팀?”
“순서상 그렇죠. 하지만 도장 깨기보다는 일단 간 보기라는 느낌이겠죠?”
“회장 딸이 간을 왜 봐요?”
“가끔은 회장도 눈치 봐야 하는 곳이 재무팀이잖아요.”
재무팀이 갖는 위상은 남다른 면이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자금의 흐름을 관리하는 부서가 갖는 특별함.
“고부장님······. 만만치 않은 분이시죠.”
“그렇죠. 함전무님 파벌의 핵심이면서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실 정도로 자신의 포지션을 철저히 지키시는 분이죠. 일부러 사내에 친한 사람을 안 만든다고 하신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지난번 거기 있는 제 동기에게 들은 말인데 고부장님이 특별히 아끼는 사람이 하나 있는 모양이에요.”
“아끼는 사람?”
“이 기획안 만든 사람이요. 표세인 팀장? 그분은 또 끔찍이 아끼신다고 하더라고요.”
순간 연아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그리고 김비서는 그것을 포착했다.
“뭐야? 이거 뭐야? 그 미소 뭐야?”
“네?”
“표세인 팀장 이름 듣고서 왜 표정이 밝아지지? 평소에는 얼음나라 공주님 포스 뿜뿜하는 사람이?”
“마, 말씀드렸잖아요. 실장 달았으니, 전과는 다르게 행동할 거라고요.”
“아니,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돼. 반칠십살 여자 촉이 말하고 있어.”
“촉이 뭐라는 데요?”
“조실장님과 표세인팀장.”
순간 연아의 가슴이 철렁했다. 지금까지 무사히 숨겨왔는데, 실장을 달자마자 들통난다고? 아무리 새로운 가면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지만······.
“그렇네. 운동하는 남자가 취향이구나? 그러고 보니, 표세인 팀장도 운동하던 사람이랬지?”
“에?”
“그래. 지난번에 체육대회 때, 허벅지 봤는데. 어머머······. 나 다리 풀릴 뻔했잖아. 이인삼각 때, 여직원 옆구리에 끼고 내달리던 것 기억나죠?”
“네······.”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다.
“역시 남자는 얼굴보다 피지컬이지!”
“음, 전 사실 그냥 일 잘하는 남자가 좋아요.”
차마 다른 여자의 입에서 남자친구 몸에 대한 품평이 계속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던 연아가 주제를 바꾸었다.
“남자친구 일 잘해요?”
“네. 무척 잘해요.”
“부자 아니라며?”
“네?”
“아! 그렇구나. 기준이 본인이구나! 하긴 조실장님 입장에서야, 99%는 흙수저지.”
연아는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런데 표세인 팀장도 그렇고 홍기도 대리도 그렇고. 거기는 무슨 팀원을 얼굴로 뽑나 봐. 다들 너무 반반하잖아요?”
“그런가요?”
“나는 홍기도 대리가 좋더라. 애가 발랄하고 상큼하잖아.”
“네. 그렇더라고요. 저보다 연상인데도, 동생 같았어요.”
“내가 남동생이 없어서 그런지, 나는 귀염이가 누나라고 부르면 좋아.”
“저도 남동생 없는 데, 저는 연하는 별로······.”
-우웅.
그때였다. 김비서의 스마트폰 알람이 울렸다.
“시간 됐네요. 가시죠.”
순식간에 업무모드로 돌입한 김비서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래야겠네요. 덕분에 긴장은 풀렸네요.”
“긴장하신 줄 몰랐네요.”
“알았으면서.”
일거수일투족. 사내의 모든 시선이 자신의 행보를 추적하고 있으리라······.
자신의 목표가 이 회사의 정점이자,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이기에 연아가 느끼는 부담감은 상당했다.
단순히 회장의 딸이라서 자리 물림 했다는 말은 용납할 수 없었다.
실제로 오빠들 역시 그런 이미지가 싫어서, 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고 회장의 딸이라는 이점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뭐든 이용해야지.’
한때, 표세인이 지나가듯이 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표세인은 이용할 수 있다면 뭐든 이용하는 남자였다.
그리고 연아도 그것을 지켜보며 많이 배웠다.
재무팀으로 향하며 연아는 살짝 부드러운 표정으로 재무장했다.
이제는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포지션이다. 단순히 딱딱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달라진 직위, 달라진 업무, 달라진 가면. 자신도, 그리고 주변도 하루빨리 이것에 적응해야 한다.
“고부장님. 잠시 시간 되십니까?”
“조······. 실장님?”
아직은 자신의 직급과 정체에 많은 사람이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조비서에서 조실장으로 인식의 전환 시키는 것.
그것이 방문의 큰 목적 중에 하나.
“이번 프로젝트에 대한 안건을 논의하러 왔습니다.”
부드럽지만 흔들림 없이. 상대는 이 회사의 핵심부서를 컨트롤 하는 만만치 않은 인물. 게다가 자신이 준비해온 것은 거대한 폭탄 그 자체.
“보내주신 기획안은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시작부터 인수를 계획하시다니, 배포가 남다르시군요.”
칭찬일까? 견제일까?
아직은 고부장에 대한 정보가 완벽하지 않다. 회장실에서 몰래 염탐하며 취합한 정보는 완벽하지 않다.
왜냐? 자신은 회장이 아니니까. 그 간극을 빨리 파악해야 한다.
“이번 프로젝트의 특성을 감안 할 때,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겠지만, 캐릭터 사업 비중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알고는 있습니다만, 아직 검토 중입니다.”
검토 중이라는 것은 이미 예상하던 바였다.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업안이니까. 더군다나 일반적인 사업계획도 아닌, 인수합병 계획이 아닌가?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저 인사차 들린 셈이니까요. 그리고 이번 인수는 그저 첫걸음에 불과합니다.”
“그렇겠지요.”
캐릭터 디자인 회사를 인수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 완성된 캐릭터들을 이용해 다양한 사업이 시작될 것이니까.
“앞으로도 재무팀에 상당한 부담을 끼쳐드릴 것으로 예상합니다. 어쩌면 서로 눈살을 찌푸리는 일도 있겠지요.”
“하하. 저야말로 너그러이 봐주시기 바랍니다. 이 프로젝트의 규모와 방향성이 이전과는 판이한 탓에 저희도 상당히 애를 먹고 있습니다.”
“예. 그렇지요.”
“하지만, 회사의 사활이 걸린 프로젝트라는 회장님의 말씀도 있으셨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회장의 이름이 거론된 뒤에 추가될 말이 더 있다는 말인가?
“표세인 팀장의 첫 프로젝트 아닙니까? 저도 보다 꼼꼼하게 검토하고 보완해서 조력하려고 합니다.”
남자친구의 이름이 또 등장했다. 대체 이 짧은 시간 안에 표세인이 회사에 남긴 족적은 얼마나 크단 말인가?
“그런데 부장님은 표세인 팀장과 어떤 관계이신가요?”
표세인의 입에서 고부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은 양실장과 함께 출사표를 던지던 때의 이야기가 전부.
그것도 그저 사람 좋아 보이고, 친근하다. 라는 말이 전부였다.
애초에 고부장의 사내 이미지를 고려할 때, 친근하다는 표현이 다소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친구가 하는 짓이 참 예쁩니다. 그냥 뭐라도 하나 더 주고 싶은 기분이 들게 한달까?”
고부장의 말에 연아는 자신의 가슴 어림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자신이 그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다는 자괴감은 용납할 수 없다.
‘나도 질 수 없지.’
연애는 연애고 일은 일이다.
표세인의 일을 방해할 생각 따위는 없다. 그가 인정받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니까.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자신도 그에 못지 않은 족적을 남겨야 한다.
조양길 회장과는 전혀 다른 타입으로 보이지만, 그 내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지고 싶지 않다.
연아는 조용히 승부욕을 불태웠다.
< 무슨 일로 오셨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