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조연아 : 오늘 뭐 해?
표세인 : 여자친구랑 데이트할 거야.
조연아 : 여자친구 시간 된대?
표세인 : 워낙 잘나가는 분이시라, 좀 바쁜데 아마 오늘은 되지 않을까 싶네.
조연아 : 요즘 바빠서 미안해.
표세인 : 괜찮아. 나 오늘 데이트할 거라니까?
조연아 : 알겠어. 회사 끝나고 봐.
연아의 메시지에 나는 절로 웃음이 났다.
자, 드디어 내 여자친구님께서 뭔가 준비가 끝나신 모양이다.
한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지 못했다.
‘과연 뭘 준비했을까?’
연애에 있어서 기대감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업무적으로나마 기대감이 생기는 이벤트가 추가될 수 있다는 것은 어떨까?
나나 연아나, 솔직히 다소 워커홀릭 기질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처음으로 서로 간의 업무가 겹치고 상대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
‘문제는 이건 내가 무조건 이기는 싸움이라는 거지.’
연아는 자신이 회장님의 딸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실장을 달아버렸다.
지금 이 시점이 연아에게는 무척 중요하다.
그렇기에 연아는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는 연아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나?
지분? 그따위 것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지갑이 얇던 시절은 지났고, 소시민 기준에 지금처럼 풍족했던 적이 없다.
나는 아주 느긋하게 나를 향한 여자친구의 애타는 눈빛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왜 그렇게 쪼개세요?”
아차, 지금 회의 중이었지. 홍켓몬의 말에 정신을 차리자, 모두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 계속하자.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잠깐.”
“?”
“뭘 그냥 넘어가려고 하십니까? 회의 중에 딴 데 정신 팔렸으면, 해명하셔야지요.”
홍켓몬이 건수 하나 잡았다는 듯이 물고 늘어졌다.
“흠흠, 오늘 퇴근하고 여자친구랑 데이트하기로 했어. 그래서 웃은 것뿐이야.”
“팀장님도 연애 제법 오래되셨죠?”
함송희가 물었다.
“뭐 그렇지?”
“그런데 아직도 여자친구분과 데이트한다는 생각에 설레고 그러세요?”
“그럼. 당연한 거 아니야?”
“당연하지 않죠.”
“솔직히 100일 지나면 그냥 무덤덤해지지 않나?”
함송희에 말에 남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100일 만에 무덤덤해지는 것은 네가 너무 빠른 것 같은데?
“수상해!”
“수상하네요.”
“수상하지.”
홍기도, 함송희, 남궁원이 입을 모아 말했다.
뭐지? 이 전에 없던 하모니는?
“여자친구와 데이트 확실해요? 다른 거 아니에요?”
홍켓몬은 오랜만에 건진 건수를 순순히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놈 생각이야 뻔하다. 그냥 심심하니까, 시간이나 때우고 싶은 거겠지.
하지만, 나는 오늘 칼퇴를 사수해야 하므로 이런 장단에 어울려줄 틈은 없다.
“쓸데없는 잡담은 이쯤하고 다시 집중하자. 아무튼, 이번 주 내로 인수인계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내 질문에 홍기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애초에 저희가 크게 뭘 한 것도 없잖아요. 게다가 복귀 인력들은 애초에 모두의 부동산 개발자들이었고요.”
우리가 신규팀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다른 곳으로 흘러갔던 모두의 부동산 기존 멤버들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신규 프로젝트들이 연거푸 사내 허들을 넘지 못했기에 벌어진 대참사.
아마도 되돌아온 인원들의 사기는 높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도 신경 써줘야지. 그리고 너 지난번에 성과장이랑 차대리 커피 사다 줬냐?”
“옙!”
“장난 안 치고 제대로 한 거지?”
“저 인남캐와 장난 같은 것 안칩니다.”
대사는 이상한데, 믿음은 간다. 그래, 너는 그런 부분에서는 믿을 수 있지.
까칠한 차대리 성격에 분명 홍기도를 툭툭 건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홍기도는 남자를 상대로 욱할 정도의 관심조차 없는 놈이다.
길 가다가 바람 분다고 바람과 싸우는 사람은 없다. 홍기도에게 차대리의 가치란 그 정도일 테지.
“좀비로얄 쪽은?”
“이미 파이널 빌드 작업 들어갔어요. 곧 정식출시할 거니까, 저희 쪽 서포트도 딱히 필요는 없죠.”
“정말 수고 많았다.”
“아니에요.”
서포트라고는 했지만, 듣기로 남궁원은 거의 총괄 PD 수준으로 그쪽을 지휘해냈다.
“대충 상황은 알겠고, 그러면 모두가 알다시피 이번 우리의 프로젝트는 ‘깨비몬’이다.”
“제목 정해진 건가요?”
“별로야?”
게임 제목이야 프로젝트 단계에서는 몇 번이고 갈아엎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별로라면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니요. 괜찮은 것 같아서요. 그냥 픽스된 것인지 궁금했어요.”
“다행이네. 하지만 나중에라도 더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사양 말고 말해줘.”
“네.”
“그래서 말인데, 이 게임은 블록크레프트류의 게임성에 소켓몬의 캐릭터성을 추가하는 것이 핵심이야. 나는 남궁대리가 시스템 파트, 홍대리가 캐릭터 파트를 맡아 줬으면 좋겠어.”
마침 두 사람의 특기 분야로 딱 나뉘는 게임 유형이기에 나는 어렵지 않게 둘의 포지션을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소켓몬······. 역시 캐릭터 파트가 이 게임의 핵심인데······.”
야심 넘치는 남궁대리 답게 가장 먹음직스러운 파트에 욕심을 보였다.
“소켓몬도 기본 150종 정도. 캐릭터 디자인, 모션 설계, 스킬 설계, 밸런스 작업······. 아, 이거 각이 안 나오는데. 어차피 시스템은 팀장님이 기본 설계 잡아주실 테고······.”
홍켓몬은 홍켓몬대로 캐릭터 파트의 과중한 업무 부담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둘 다 마음에 안 들어?”
“네.”
“별로에요.”
“그럼 어떻게 할래? 서로 바꿀래?”
남궁원과 홍기도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짧은 침묵.
그리고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누었다.
“딜!”
“콜!”
뭘 그렇게 비장하게······. 그래, 니들이 좋다면야.
단순히 특기 분야라고 생각해서 나누기는 했지만 언제나 의욕이 스킬을 성장시키는 법이다.
억지로 하기 싫은 역할을 떠넘기는 것보다야. 한번 원하는 대로 맡겨줘도 나쁠 것은 없겠지.
“그럼 저는요?”
함송희가 손을 들었다.
“어, 너는 내 서포트 좀 해줘야겠어. 남궁대리와 갈라놔서 미안하기는 한데, 이 사업은 내가 기획서 붙들고 있기보다는 아웃소싱 관련 미팅도 많아질 것 같아서 말이지.”
소켓몬의 개발사 역시 게임 관련 인력은 얼마 되지 않는다.
세계적인 명성과 인지도를 고려하자면 다소 의아할 정도의 적은 인원.
덕분에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하는 게임 그래픽 트랜드는 무시하고 다소 구시대적인 스펙의 게임만 개발하고 있다.
물론 이 점은 우리에게 나쁘지 않다. 난공불락까지는 아닌 셈이니까.
적어도 우리가 공략할 기회는 있는 셈.
“팀장님의 서포트······.”
“마음에 안 들어?”
“아니요! 좋아요!”
“그, 그래. 다행이네.”
평소답지 않게 힘찬 대답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홍대리와 함께 크레프팅 시스템 쪽에 신경을 써줘. 블록크레프트를 레퍼런스로 정했으니까, 당연히 그쪽이 생명이거든.”
샌드박스 장르라고 한다면, 블록 완구처럼 아이들이 중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의외로 성인 팬덤도 무시할 수 없다.
더군다나 블록크레프트가 출시 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그때 게임을 접했던 아이들은 이제 어른이 된 것이다.
따라서 아이와 성인 유저 모두를 만족하게 할 수 있는 내실 있는 크레프팅 시스템의 완성은 더없이 중요한 요소다.
“좋아. 그럼 회의는 여기까지 하고 당장은 인수인계에 신경을 써줘.”
“네!”
“알겠습니다.”
좋아. 이거면 회의도 정리됐지? 바로 돌아가서 컨셉 기획을 마무리······.
“설마 이대로 끝인가요?”
“응? 왜? 뭐가 더 남았어?”
다름 아닌 남궁원의 질문이라서 나는 조금 당황했다.
내가 뭘 빼먹었나?
“이번에 만들어질 신규팀. 독립 스튜디오잖아요?”
“그렇지.”
“스튜디오 이름 안정해요?”
“아!”
완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도 잊고 있었네. 그런데 이 부분은 나도 양실장님과 상의를 좀 해봐야 할 것 같네. 혹시 아이디어들 있어?”
“사실은 팀장님이 그냥 이거다! 하고 말씀해주실 줄 알았어요.”
남궁원도 별 아이디어는 없는 모양.
“생각해 놓은 것 없으세요?”
“없지는 않은데······. 역시 이건 양실장님과 논의를 해봐야겠네. 결정되면 바로 알려줄게.”
“네.”
회의는 그것으로 정리되었다.
*
*
*
“안 그래도 그 부분을 논의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렇군요. 혹시 생각해두신 이름이라도?”
내 질문에 양실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표세인 팀장님의 스튜디오지 않습니까. 본인이 정하셔야죠.”
마치 떠넘길 게 따로 있지, 라는 표정. 제임스도 동의한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솔직히 이름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해외 유수의 스튜디오 중에는 그냥 건물이 있는 지역명을 그대로 이용하는 경우도 많지 않습니까?”
제임스의 말 대로, 오픈월드 게임의 명가로 손꼽히는 베데스다 게임 스튜디오 역시, 설립 당시 메릴랜드주 베데스다에서 창립했다는 이유로, 지역명을 그대로 사용한 케이스.
“생각해두신 것이 없습니까?”
“사실은 있습니다.”
“그럼 다행이군요. 뭡니까?”
연아에게서 처음으로 조회장이 언급되었던 그 날.
내 가슴속에 자리 잡은 한가지 단어.
그때 처음, 집안에서 기둥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그저 무위도식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필라(Pillar:기둥)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필라 소프트? 필라 엔터테인먼트? 뒤에 붙는 것은 아무것이나 좋지만요.”
막상 입 밖으로 내서 말하자니 부끄럽다. 혹시 이유를 물으면 뭐라고 대답한다지?
“좋은 이름이네요.”
“뭐든 간결해야 좋은 법이지요.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의외로 양실장과 제임스는 군말 없이 동의했다.
“괜찮습니까?”
“네. 뭔가 걸리는 점이라도?”
걸리는 점은······. 저의 새카만 속내가 문제지요.
“그러면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회장님께는 제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양실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회장 앞에서 내 입으로 기둥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양실장이 알아서 전달하는 편이 낫다.
양실장이라면 알아서 잘 포장해서 전달해주겠지!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양실장이 떠나자, 나와 제임스만 남았다. 애초에 이곳은 제임스의 방이었다.
양실장을 찾으니, 그가 이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오게 된 것.
“본사 근무는 적응이 좀 되셨습니까?”
내 질문에 제임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요.”
역시 제임스 답다는 대답이었다.
“가족분들은 언제 한국에 오시나요?”
“조만간 옵니다. 아, 그것에 대해 말인데.”
“네?”
“괜찮으시다면, 제 가족들이 한국에 오면 함께 식사라도 하시지요.”
오오! 제임스가 먼저 이런 말을 꺼내다니! 나야 당연히 환영이다.
“물론이죠.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조실장이 보낸 문서를 제가 먼저 확인했습니다.”
나와 단둘이 있을 때도, 동생을 조실장이라고 부른다.
확실히 조씨집안 특유의 엄격함은 우리 집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어떻던가요?”
“준비를 잘 했더군요. 저는 불만 없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제자리로 돌아가서 보겠습니다. 인트라넷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제임스가 납득할 정도라면 연아도 준비를 단단히 했다는 뜻이다.
밀당도 재미있었는데, 역시 연아 스타일에 소꿉장난을 오래 할 생각은 없던 모양.
-똑똑.
“들어가도 될까요?”
낯선 목소리였다.
“그러시죠.”
제임스의 말에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인숙입니다. 마침 표팀장님도 계셨군요.”
“안녕하십니까.”
“전 비서실 내근팀 팀장, 김인숙입니다.”
“전?”
“예. 정식발령은 아직이지만, 곧 사업부 소속으로 편입될 예정입니다.”
사업부. 이 시점에 사업부라고 한다면 떠오르는 것은 하나뿐.
“조실장님 밑에 계신 분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 타이밍에 연아의 오른팔이 등장한다고?
< 아, 이거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