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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77화 (77/346)

77.

“반갑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문서는 이미 받았습니다만?”

“문서상에는 디테일한 부분들은 빠져 있으니까요. 인사도 드릴 겸, 그 부분에 논의를 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보다 제임스라고 부르면 될까요?”

“예.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직급에 연연하는 문화를 질색하는 제임스 답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제임스, 그리고 표세인 팀장님.”

우리는 잠시 김인숙 팀장의 말을 기다렸다. 과연 연아가 비서실에서 끌고 나온 인재가 우리를 찾아온 목적은 무엇일까?

“회식은 언제가 좋으시겠습니까?”

회, 회식?

“일을 시작하기 전에 얼굴도 익힐 겸, 예열 들어가야죠. 자고로 일 시작 전에는 기름 넣고 가는 법이죠.”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임스는 탐탁지 않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김인숙 팀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설마 사업 파트너의 제안을 거절하시려고요? 원래는 그쪽에서 먼저 제안하셨어야 하는 일 아닌가요?”

“우리가 제안을 해야 한다고요?”

“그렇잖아요. 언제나 프로젝트는 개발 쪽이 주도하고 사업부는 서포팅 포지션이죠. 아, 업무 프로세스 단계부터 이해시키려면 피곤한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술자리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납득이······.”

“쉿, 아직 한국 시스템에 적응을 못 하신 것 같으니, 넘어가 드립니다. 지금 갑과 을을 오해하신 것 같네요.”

“?”

“제가 보내드린 문서 확인하셨죠? 어떻던가요?”

“나쁘지 않은 사업계획안입니다.”

제임스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제임스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탁월하다는 평이 나올만한 수준이겠지.

“그거 접어요?”

“네?”

“그냥 접을까요?”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제임스의 눈초리가 점차 날카로워지는 와중에도 김인숙은 여유만만한 모습이었다.

“지난번에도 조실장님이 먼저 방문하셨었다죠?”

“네.”

“이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를 내고 진행하는 것은 그쪽인데, 왜 우리가 안달해야 하죠? 그쪽이 더 열성적으로 우리를 찾아와야 했던 것 아닌가요?”

딴은 그렇긴 한데.

애초에 연아의 방문 목적은 그런 느낌이 아니었지 않나?

“한잔해요. 한동안 손발 맞춰야 하는 사이인데, 서로 파악은 해야지. 표세인 팀장님은 제 말 이해하시죠?”

한국인들의 머릿속에는 좋은 게 좋은 거다. 라는 말이 있다.

김인숙 팀장의 말대로 함께 일해야 할 상대가 먼저 손을 내밀었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지.

그리고 단순히 예의 문제만이 아니다.

나도 상대측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이해했습니다.”

“그럼 날짜 정해서 알려주세요. 아참, 기획팀 인원들도 꼭 참석시켜주세요.”

“기획팀이요?”

나와 양실장, 그리고 제임스 정도만 참석하는 자리가 아니었나?

“팀장님 애인 있으시죠?”

“네.”

“임자 있는 남자들만 가득한 자리에서 제가 무슨 재미를 보나요? 아무튼 그럼 그렇게 알고 갈게요.”

김인숙 팀장은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떠났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는데,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은 알겠군요.”

“예. 긴장 좀 해야겠네요.”

연아를 상대로 갑의 위치를 점했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캐릭터가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오늘 데이트 재미있겠네.’

연아와의 만남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

*

*

호텔 라운지에 들어서자, 곧바로 연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북에 완전히 몰입해 있는 모습이었다.

“많이 바쁜가 보네.”

나는 건너편에 앉았다.

“어, 왔어?”

“하던 일 계속해. 신경 쓰지마.”

내 말에 연아는 곧장 고개를 파묻었다.

“조금만 기다려줘. 이것만 보내면 끝이거든.”

이런 상황은 전에도 몇 번 경험한 적이 있는 일이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회사 밖에서는 문서 작업이 잘 안되는 타입이다.

반면 연아는 장소 따위는 관계없는 타입.

“에스프레소 부탁드립니다.”

나는 대충 간단한 커피를 주문하고 연아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후우. 끝났네. 미안.”

“신경 쓸 것 없다니까?”

나는 싱긋 웃었다.

“일은 잘 되어가고 있어?”

일반적으로 사업부의 일은 주로 매출 현황 분석을 통한 마케팅 전략 수립과 각종 외부 런칭 관련된 업무다.

따라서 개발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기까지 사업부가 먼저 바쁜 일은 별로 없다.

하지만 게임 자체보다도 캐릭터 사업이 덩치가 더 큰 프로젝트인 탓에 나보다도 연아가 더 바쁜 상황.

“글쎄, 이건 준비단계에 불과하니까. 조만간 일본과 동남아를 순회하며 캐릭터 디자인 회사들과 미팅이 시작될 거야. 그때부터가 본 게임이지.”

“캐릭터 디자인회사라······.”

“일단 처음에는 이모티콘 제작 경험이 있는 회사들을 우선 접촉할 거야. 그다음이 캐릭터 디자인을 이용한 제품 제작 노하우가 있는 회사를 물색해야지.”

“조금 이르지 않나? 아직 메인 케릭터 디자인도 나오지 않았는데?”

“어차피 컨셉아트는 나왔잖아. 복셀아트라는 느낌만 유지하면 되지 않아?”

“그것도 그렇네.”

여기서 복셀 아트의 장점이 또 한 번 두드러진다. 워낙 단순한 디자인인 덕분에 컨셉만 유지되면 바리에이션 작업이 어렵지 않다.

“아직 프로토 타입도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너무 서두르는 것은 아닐까?”

약간 걱정이 된다. 게임이란 것이 결과물이 나오기 전까지는 알 수 없지 않나.

계획 단계에서야 아무리 그럴 듯하더라도,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전혀 딴판인 물건이 튀어나올 수도 있는 법.

“사공이 많으면 그렇게 되겠지. 그걸 위해서 사내벤처라는 강수까지 동원한 거잖아. 나도 아빠도 오빠를 믿어.”

“그건 고마운 일이네.”

부담감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두근거림이 크다.

나 역시도 처음으로 내 이름을 걸고 개발하는 게임인 셈.

어중간한 결과에 만족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나 개인적으로는 게임 판매량에 캐릭터 사업이 기대어 가는 구조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아.”

“그럼, 반대로?”

“응. 캐릭터 사업이 게임을 이끌어가게 만들 거야.”

연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멋진 포부다. 그리고 든든하다.

“든든하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라도 양보할 생각 없어.”

“이 커피 다 마시기 전까지는 이야기 들어 줄게.”

나는 살짝 에스프레소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려고 에스프레소 주문한 거지? 평소에는 그냥 아메리카노 마시면서.”

들켰네.

“시간제한이 빠듯해야, 긴장감이 더 살지 않아?”

“그런 건 아빠하고나 해. 나는 그런 거 별로야.”

예. 알겠습니다. 까부는 것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그보다 아까 김팀장님을 만났는데.”

“들었어. 어땠어? 호감가는 타입이지? 나랑 친한 언니야. 내 사수였기도 하고.”

“대뜸 경고 날리고 회식 언급하고, 종잡기 어려운 타입이더라. 제임스도 당황하던데.”

“흥, 제임스는 무슨!”

조회장도 그렇지만 연아도 제임스에 딱히 호감은 없는 모양이다.

아마도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더 있는 모양.

“일단 일하기 전에 사람부터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타입이야.”

“그렇지? 회식부터 언급하는 것은 네 스타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어차피 국내 사업은 나 보다는 그 언니가 주도할 테니까. 가급적 보조를 맞춰줘.”

“회식이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 하지만 보조를 맞추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지?”

“오늘따라 얄밉네.”

“공과 사 구분이 조씨 집안 특성 아닙니까? 나도 곧 있으면 절반은 그쪽인데.”

내 말에 연아는 피식 웃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지난번 제안은 그저 선 긋기였어. 일단 우리 사이를 덮으려고 한 것도 있고.”

“알아. 하지만 일부는 진심이지?”

“맞아. 이번 프로젝트는 내게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욕심 숨길 생각 없어.”

“오케이. 딜을 시작해 보시죠.”

나는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오빠의 스튜디오 지분은 7:3 비율로 맞춰줄게. 당연히 오빠가 7이지.”

오, 시작부터 쎈데? 하지만 언제나 첫 번째 보다는 두 번째 안건이 진짜인 법.

“대신 그것은 게임에 한해서야. 캐릭터 사업과 마케팅 쪽은 반대로 우리가 7을 가져야겠어.”

“지적재산권을 가지시겠다.”

“맞아. 하지만 우리라고 하는 것은 본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야. 별도의 컨트롤 기업을 만들 거야.”

“편의상 깨비몬 주식회사라고 할 게, 깨비몬 주식회사는 본사가 29%, 오빠가 20%. 그리고 남은 51%는 내가 가질 예정이야.”

“너?”

“응. 내 명의로 되어있는 신탁이나 기타 예금 모두 여기에 쏟아부을 예정이거든.”

“확신해?”

내 말에 연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확신보다는 결의에 가깝지. 이런 프로젝트 하나 성공적으로 이끌지 못할 거라면 회장 자리 같은 것은 엄두도 내지 말아야지. 그리고 성공할 거라면 좋은 투자 아니겠어?”

“멋있네.”

“고마워. 그래서 이 조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연아가 살짝 눈을 올려 뜨며 내 표정을 살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킬킬 웃어버렸다.

“내 여자친구가 고심해서 만든 계획인데 어떻게 만족스럽지 않겠어.”

밀당하며 장난 좀 치려고 했는데, 못하겠다. 이런 귀여운 표정은 반칙이잖아.

“장난하지 말고.”

“장난하는 것 아니야. 어차피 투자를 받기 위해서는 지분 쪼개다 보면 한 줌도 안 남기 마련인데, 벤처는 70%에 지적재산권은 20% 남겨 준다며? 솔직히 엄청나지. 그냥 다 내놓으라고 해도 내놓아야 할 판인데.”

어쩌면 연아도 진짜 직장인의 삶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애초에 회사 업무 중에 떠올린 아이디어를 이렇게까지 보장해주는 회사가 어디에 있나?

90% 짬되고, 아니면 윗선에서 채가고, 그도 아니면 회사 차원에서 금일봉 정도나 내려주면 감지덕지한 것 아니겠나?

과거 천지인 자판을 개발했던 개발자는 회사로부터 ‘직무발명’이라는 명목으로 21만원의 금일봉을 받았더랬다.

미국과는 달리 개인의 역량과 성과에 극도로 인색한 국내 사정을 감안하면, 사실 나로서는 절을 올려도 부족할 판이다.

그런데도 정작 연아는 내 눈치를 살피며 미안해한다.

아마도 이것이 서민과 재벌 자제의 인식차가 아닐까?

“정말 욕심이 없어?”

연아는 확신할 수 없는 모양. 여전히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내 속내를 감안하려고 하는 것 같다.

“나 네 남자친구야.”

“알아.”

“그리고 우리 상견례까지 치른 사이지.”

“그래.”

“네가 기쁘면 나는 그걸로 충분해. 그리고 솔직히.”

“?”

“깨비몬이 내 취향 게임은 아니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연아도 아직 멀었다. 개발자의 마음을 모른다.

일이니까 당연히 최선을 다하겠지만, 좋아하는 게임의 장르는 천차만별이다.

물론 대부분이 커리어 내내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게임을 개발하지 못한다.

특히 패키지 게임을 좋아하는 개발자라면 더더욱 그렇다.

“나는 AAA급 오픈월드 게임을 만들고 싶어. 내 개인적인 목표는 이거야. 지분? 그 딴거 아무려면 어때? 나 지금도 돈 많아.”

돈 많다는 말에 연아는 눈을 껌뻑인다. 그래, 네 기준에서야 무슨 말인가 싶겠지.

“깨비몬은 나에게 커리어를 채워줄 도구에 지나지 않아. 애정이 없다는 말이 아니야. 하지만 최종 목표도 아니지.”

“솔직히 잘 이해는 안 가. 프로젝트 규모가 최우선 아닌가?”

역시 이런 주제는 조회장이나 한팀장 정도가 아니라면 공감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양실장과 제임스도 아마 연아와 같은 반응일 것 같다.

“눈부신 그래픽과 뇌리에 박히는 감정적인 시나리오. 그리고 가슴이 뻥 뚫리는 자유도! 나는 그런 오픈월드를 만들고 싶어. 물론 아직 먼 미래의 일이지만.”

“그게 모바일 게임보다 시장성이 좋아?”

연아의 말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 어쩌면 훗날 연아가 회장 자리에 오르면, 우리는 이 문제로 상당한 갈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연아가 틀린 것은 아니다. 경영자에게는 경영자의 마인드가 필요하고, 개발자는 개발자의 마인드가 필요한 법.

“네가 최고 경영자를 꿈꾸듯이 나는 최고 개발자를 꿈꾸는 것뿐이야.”

오픈월드만이 아니다.

시뮬레이션도, 액션 게임도 좋다.

유저가 시간을 잊고 미친 듯이 홀려서 플레이하고 이후에 커다란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게임.

나는 그런 게임을 만들고 싶다.

나는 그거면 된다.

“역시 남자는 일을 할 때가 멋있는 것 같아.”

“그래? 좀 철없어 보이지 않아? 돈 되는 게임 보다 만들고 싶은 게임 운운하는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걱정되는데.”

아무래도 연아는 회사를 장래에 경영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으니까, 나도 거기에 맞춰서 최대한 연아를 도울 수 있도록, 그렇게 코드를 맞춰야 하지 않을까?

그때, 연아가 테이블에 올려진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오빠는 계속 바라는 대로 해. 내가 오빠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도와줄게.”

아, 이거 왔다.

가슴이 찡하고 울린다.

< 큰 게 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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