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집 기둥서방이 되었다-81화 (81/346)

81.

“음하하하하!”

“그래. 그래 축하한다.”

나는 얼굴을 바짝 들이대는 표세종을 슬쩍 밀었다.

“음하하하하!”

“축하한다니까. 이런 날 맞으면 덜 아프냐?”

“음하하하하!”

하지만 이미 텐션이 대기권을 돌파해버린 동생놈을 말로 진정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보아라, 이 몸은 시작부터 대기업이다!”

“그래. 장하다.”

칭찬할 일은 칭찬해줘야지. 나는 진심으로 축하하며 세종이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냐? 혹시 급도 안되는 녀석을 뽑아준 것은······.”

아버지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연아는 환하게 웃었다.

“아니에요. 도련님의 실력이에요.”

“이상한데, 저놈에게 그런 실력이 있을 리가······.”

“아버지. 겸손도 과하면 결례라고 했습니다. 원래 첫째는 테스트 배드이고, 둘째가 마스터 피스인 법 아니겠습니까?”

“그래? 원래 실험작은 잘 만들고 두 번째부터는 양산형으로 단가 낮추지 않나?”

아버지의 농담에 평소라면 버럭 했을 세종이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그야말로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겠지.

“아무튼, 고생했고, 입사해서도 잘해라.”

“훗, 나 이미 복사기 사용법부터 수리방법까지 완벽하게 숙지했거든?”

“뭐?”

“드라마 보면 맨날 복사기 문제로 헤매잖아. 그럴 때 딱, 센스 있게!”

“사업부면 모를까, 우리는 복사기 쓸 일도 거의 없는데?”

“없어?”

“인트라넷에 공유된 문서 인쇄 버튼만 누르면 출력되는데, 누가 복사를 하냐. 그리고 요즘은 다 타블렛으로······.”

“그, 그렇지만······. 수, 수리도 할 수 있다니까?”

“설비 문제 있으면 설비팀에 연락해야지. 왜 함부로 손대냐? 부르면 재깍 와서 고쳐주는데.”

“······.”

“비, 비서실은 가끔 복사기 사용해요.”

보다 못한 연아가 끼어들었다. 하지만 이놈 포지션은 개발팀 아닌가.

“그래도 열정은 있어 보여서 나쁘지 않네. 신입사원 연수 가서 많이 배워.”

“응! 진짜 기대된다.”

기껏 공부한 복사기 관련 지식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깨닫고 잠시 침울했지만, 금방 회복한다.

“그런데 마지막 질문은 정말 웃기더라.”

“뭐가?”

“나보고 형만큼 축구하냐고 하더라고.”

“어? 너 개발이잖아.”

“장난하심? 유도부 특급 방어선을 뭘로 보고!”

“설마 허풍떨었냐?”

“허풍 안 떨었어! 그리고 형이 뭘 알아? 고등학교 이후로 우리 축구 해본 적 없잖아.”

“그래서 좀 나아졌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리 유도부가 대학 체육대회 3연패 했거든?”

“그거야, 나 없을 때 이야기고.”

“진심, 체육대회 시작되면 조심해라. 틀딱이라고 안 봐준다.”

세종이는 기세등등하게 설쳤다. 하지만 딱히 걱정되지는 않는다. 이제 와 딱히 축구에 욕심도 없고, 지난번에도 그저 회장님의 퀘스트였기에 열을 올린 것뿐이다.

이제 팀장인데, 나도 슬슬 몸 사려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나 다음 체육대회에서 뛸 수는 있나?’

듣기로는 지난번 체육대회 이후, 축구를 금지하든가, 나를 제외하든가 둘 중에 뭔가 하나는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던데.

“그보다 이번에는 연아 네가 해외 출장을 갈 것 같다고?”

“네. 여러모로 조금 바빠질 것 같아요. 그래서 한동안 찾아뵙지 못할 것 같아요.”

“일이 우선이지. 별걸 다 신경 쓴다. 몸조심하고.”

“네.”

연아는 깨비몬 사업부의 일로 해외 출장이 잡혀있다. 일본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동안 바쁜 나날을 보낼 것 같다.

“형수님. 잘 다녀오십시오. 회사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도련님.”

“아직 입사도 안 한 녀석이, 넌 적응이나 잘해라.”

“어허! 이 불타는 애사심을 몰라보다니, 안목이 형편 없군! 그래서 어디 팀장 노릇 하겠어?”

“적당히 까불고 이거나 먹어라.”

나는 세종이 접시에 반찬을 덜어주었다.

“그런데 형.”

“응?”

“나 어디 배속돼?”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팀장인데 그것도 모름?”

“나도 굴러들어온 돌 입장이다. 뭐 알겠냐.”

“모두의 부동산 같은 캐쥬얼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어쭈? 어디에 던져주든 죽을 각오로 해야지,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아버지의 핀잔에 세종이는 입맛을 다셨다.

“형네 팀이었으면 좋겠다.”

“왜?”

“지난번에 만난 홍대리님도 사람 좋아 보였고.”

순간 홍켓몬에 이어 동생몬까지 내 밑에서 설치는 그림이 그려졌다.

갑자기 전에 없던 위산 역류가 시작되는 기분이다.

아니지, 그나마 이놈은 기획이 아니니까, 한팀장님이 잘 커버해 주시겠지.

“너 연아랑 내 일 비밀이다. 입 잘못 놀리면 입사고 뭐고 그냥 아웃이야.”

“걱정마. 사나이 표세종. 누르기와 입만큼은 누구보다도 무거운 사나이!”

그래. 제발 부탁 좀 하자.

*

*

*

“좋은 아침입니다.”

“네. 좋은 아침입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네. 차대리도 좋은 아침입니다.”

차대리는 아직 나를 상대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이래서 사람이 함부로 각을 세우면 안 되는 법이다.

하지만 딱히 악감정 따위는 없다. 이미 지난 일이고, 직급 차이도 있는데 일일이 유감스러운 감정을 남겨둘 필요는 없다.

“오셨어요.”

“응. 오늘도 일찍 출근했네.”

역시나 남궁원이 오늘도 1착이다. 그리고 내 뒤를 이어 함송희와 홍기도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왔어?”

“안녕하세요.”

모두가 사무실에 도착한 것을 확인하고 나는 회의실을 예약했다.

팀빌딩은 아직이지만, 손 놓고 있을 여유는 없다. 하루빨리 컨셉 기획을 끝내고 새로 들어오는 인력들에게 곧장 업무를 하달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

사내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한 다음 우리는 회의실로 이동했다.

“먼저 누구부터 시작하면 될까?”

“저부터 할게요.”

역시 남궁······이 아니라 홍켓몬? 네가 갑자기 왜?

“또 회식 어쩌고 하려는 거면······.”

“아닙니다.”

나를 포함해, 남궁원과 함송희까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홍기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홍기도는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미리 준비해온 PPT를 출력했다.

“P, PPT까지 준비했다고?”

나는 순간 꿈인지 생신지 구분이 되질 않아서 허벅지를 살짝 꼬집었다.

그리고 그것은 남궁원과 함송희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집중해주시기 바랍니다.”

“네, 네. 죄송합니다. 진행하시죠.”

뭐에 홀린 기분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돌렸다.

“우선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 재미요소 중의 하나인 크래프팅 시스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홍기도는 화면을 넘겼다.

“기본은 블록크레프트 이후 양산되는 블록 크래프팅이 될 겁니다. 블록을 부수면 인벤토리로 들어가고 그것을 꺼내서 벽을 쌓는다. 이 단순한 구조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네고 완구에서부터 비롯된 검증된 시스템이니, 이 부분은 크게 변화를 가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 그렇지.”

뭘까, 빨려든다. 딱히 대단한 소리를 한 것도 아닌데, 진행자가 홍기도라는 사실만으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남궁원과 함송희도 마찬가지인지, 그저 멍한 얼굴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결국 차별점은 우리 게임의 특성인 깨비몬의 육성입니다. 첫 주안점은 스마트폰으로 시작했지만, 게임의 특성을 고려할 때, 망치와 도끼 같은 채집 도구 역시 깨비몬으로 전환하여, 도구를 성장시켜 차츰 채집 레벨을 상승시키는 겁니다. 흙에서 돌벽, 철벽, 뭐 이런 식으로 깨비몬 도구를 업그레이드하는 것을 결합해, 내적 몰입도의 향상을 도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단순한 도구가 아닌 그 자체를 육성해야 한다는 개념. 깨비몬의 아이덴티티가 적절하게 적용된 좋은 아이디어다.

“질문이 있습니다. 보통 크레프팅 게임에는 채집 도구에, 내규도 시스템을 적용하는 것으로 자원의 리사이클링 기능이 첨부되기 마련인데, 그 부분에서는 어떻게 해결하실 예정입니까?”

남궁원의 질문에 홍기도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화면을 전환했다.

“아시다시피 깨비몬은 도구이자, 생물입니다. 생물에게는 양식이 필요하지요. 공복 게이지로 내구도를 대신할 계획입니다. 그에 따른 밸런싱은 이쪽 표를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오오!”

밸런스 테이블이라는 것이 대충 훑어본다고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홍켓몬이 이 정도 준비를 해왔다는 사실에 나는 그저 감동할 뿐이었다.

대체 뭐냐? 무슨 일인 거냐!

대체 주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우리 홍켓몬이 달라졌어요! 가 방영 중인 거냐!

홍켓몬 트레이너로서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다.

“또한, 절대적 자유만을 선물하는 블록크레프트와는 달리, 깨비몬은 스토리 모드와 샌드박스 모드 두 가지를 기본적으로 제공할 예정입니다. 이 부분은 어차피 애니메이션화가 계획된 이상, 당연한 수순이겠지요. 관건은 기본적인 채집, 제작시스템의 이해를 돕는 것과 깨비몬 육성에 관한 부분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 흐르듯이 막힘 없이 이어지는 홍켓몬의 발표가 끝날 때까지 나는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깨비몬은 팀장님께서 기본 컨셉을 잡아 주신대로, 스마트폰이나 모자 같은 작은 액세서리부터 손에 쥐고 사용하는 도구와 함께 이동하는 펫형태, 그리고 탑승이 가능한 마운트 형태, 마지막으로 거대한 자이언트까지 기본적인 4가지 타입을 중점으로 기획하고 있습니다.”

홍기도가 다음 장으로 넘기자, 4가지 형태의 깨비몬의 단면도가 나타났다.

“포켓몬 형태에 따라서 벌어질 수 있는 전투양상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기에, 해당 전투 밸런스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시스템의 베이스를 구체화하면서 조심스럽게 가다듬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전투의 심화요소이며 강력한 개성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레퍼런스인 소켓몬이 정적인 턴제베이스인 반면, 우리 깨비몬은 보다 엑티브한 전투를 지향한다.

하지만 복셀아트의 특성상 너무 복잡한 시스템은 불가하다. 하지만 탑승 시스템 하나만으로도 훌륭한 패턴 전환을 기대할 수 있으니, 그 부분은 충분히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다.

심플하면서도 여러 가지 패턴을 노릴 수 있는 시스템. 다행스럽게도 홍기도는 내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일단은 컨셉 기획은 이상입니다.”

-짝짝짝.

우리는 동시에 박수 쳤다. 너무나도 감동스러운 순간.

첫 만남 때부터 그냥 죽일까? 싶던 것을 감내하며 어르고 달래서 육성한 보람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묻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홍대리. 주말 동안 무슨 일 있었어?”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냐?

“······.”

*

*

*

지난주 금요일 밤.

회사 근처 술집에서 양성태와 제임스, 그리고 홍기도라는 이색조합이 뭉쳤다.

“이해하셨습니까?”

“······.”

한참 동안 이어진 양성태와 제임스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홍기도는 그저 침묵을 고수했다.

평소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남자뿐인 술자리는 싫다며 투정을 부리거나, 술자리에서 일 이야기는 싫다는 투의 반응도 없었다.

엄격, 근엄. 진지.

그야말로 세상에서 홍기도에게 있어 가장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럼 동의하신 것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대답하지 않는 홍기도를 조금 불안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양성태는 대답을 채근했다.

“정말로 이게 표세인 팀장님을 위한 길이라는 거죠?”

“물론입니다. 표세인 팀장님께서 홍기도 대리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양성태의 말에 제임스까지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다시피, 개발 파트에서 저희는 별다른 도움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 부분은 홍기도 대리 외에는 없습니다.”

“······.”

이제 할 수 있는 말은 다 했다. 남은 것은 대답을 기다리는 것뿐.

양성태와 제임스는 글래스를 만지작거리며 홍기도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홍기도가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가 뭘 하면 되는지, 알려 주십시오.”

홍기도의 말에 양성태는 안심했다는 듯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일단 과장 승진부터 시작해볼까요?”

마법사의 마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그 놈, 그런 놈 아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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