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제가 알아서 하라고요?”
예상치 못한 지시에 한명수는 눈을 껌뻑였다.
“그래. 함전무님은 뭔 바람이 불었는지, 사람이 넋이 나가 있더라고. 나보고 알아서 하라는데, 함전무님이 발 뺀 상황에서 내가 설치는 것도 웃기지 않나?”
이걸영은 귀를 후비며 대꾸했다.
애초에 조연아에게 받은 지시는 표세종이 함전무 밑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신입사원 배정 건을 두고 함전무를 찾았는데, 함전무는 어딘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알아서 하라며,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더랬다.
따라서 키는 한명수의 손에 쥐어졌다.
“그럼 각 팀장 의견 수렴해서 결정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알아서 잘하라고.”
영문은 모르겠지만, 어찌 됐건 좋은 일이다. 애초에 이사급들이 신입사원에게 신경을 쓰던 상황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지 않나?
“알겠습니다.”
한명수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표팀장 동생이라······.”
업무에 사적인 감정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면접 때 보았던 패기 넘치는 모습을 떠올리니, 역시 곁에 두고 키워보고 싶었다.
어떤 언어를 얼마나 다루던, 결국 현장에서 구르다 보면 코딩 실력은 갖춰지기 마련.
어차피 프로그래밍도 품앗이나 마찬가지다. 함께 만들고 함께 완성해 나가는 것. 이것을 위해서는 사회성이 좋아야 한다.
그리고 표세종은 확실히 그 부분에서 자신의 장점을 잘 어필했다.
“확실히 키우는 보람은 있을 것······. 아, 아니지. 내가 무슨 생각 하냐. 팀장들 모아서 공평하게. 공평하게 가자.”
한명수는 곧장 각 개발실 프로그램팀 팀장들을 모아두고 회의에 들어갔다.
하지만.
한명수의 예상과는 다르게 팀장 중에 누구도 표세종을 원하지 않았다.
“다들 정말 괜찮아? 이 친구 괜찮은데?”
“한팀장님.”
“왜?”
“솔직히, 전무님과 상무님이 신경 쓰시는 데다가 표팀장 동생 아닙니까.”
“그게 왜?”
“부담스러워서 어디 함께 일하겠습니까? 자고 일어나면 제 머리 위로 고공낙하 시전 할 것 같은데요?”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솔직히 이런 부분을 아예 신경 안 쓰시는 것은 한팀장님 정도죠.”
“지금 나 비꼬냐?”
팀장급 중에서는 최고참인 한명수가 눈을 부라리자, 팀장들은 일제히 손을 휘저었다.
“아니죠. 배포, 담력. 뭐 이런 거 아니겠습니까?”
“저는 담이 작아서 이런 친구는 피곤합니다. 솔직히 이팀장님처럼 김차장 같은 친구······.”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이팀장은 피식 웃었다.
“그렇지. 장난 아니지. 진짜 위가 녹아요, 녹아.”
“그래도 요즘 김차장 잠잠하던데요?”
“다 한팀장님 덕분이지. 존경합니다. 한팀장님.”
이팀장은 양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넙죽 고개를 숙였다.
“별소릴 다 하네, 아무튼 다들 이견 없는 거지?”
“없습니다.”
“오케이. 그럼 이렇게 결정하는 것으로 하지.”
팀장급들 사이에서 정신적 지주로 통하는 한명수의 진두지휘 아래 신입 배정 요청서는 금방 마무리되었다.
이걸 인사과에 보낸다고 100% 그대로 처리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
*
*
“팀장님 신입 배정 요청 들어왔습니다.”
“오오오! 드디어!”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이대로 해야지.”
“네?”
인사과에서 검토도 안 하고 그냥 패스한다고?
“지난번 전무님과 상무님까지 면접장에 들이닥치셨던 것 기억하지?”
“네.”
“그분들 심기 건드리고 싶어?”
“아!”
“이게 우리 면죄부야. 우린 조용히 묻어가자고.”
인사과는 침묵을 선택했다.
*
*
*
“안녕하십니까! 신입사원 표세종이라고 합니다!”
아이고, 귀 떨어지겠다.
세종이는 사무실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만한 요란스러운 목청을 앞세워 프로그램팀에 모습을 드러냈다.
“운동선수 출신 아니랄까 봐, 목청 한 번 좋네. 그런 파이팅 아주 마음에 들어.”
“신입사원으로 마땅히 익혀야 할 복사기 컨트롤과 수리! 거기에 더해 커피 브랜딩에 대한 노하우도 철저히 익혔습니다!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요즘 여긴 복사기 안 쓴다니까······. 그리고 여기 탕비실은 캡슐커피고 보통은 복지카드로 사내 카페 이용합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한팀장님은 동생놈의 바보짓 조차 관대하게 받아주신다.
“그래! 신입은 이런 패기가 있어야지!”
삽질에 패기가 필요하군요. 요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감사합니다! 이 사무실의 등대가······.”
“워워! 등대 금지!”
“큰일 날 소리 하고 있네!”
“?”
세종이는 게임 업계에서 등대가 금지어 중의 금지어라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다.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다.
“하지만 한 가지만 기억해줘.”
“네!”
“표팀장 동생이라고 특별대우 같은 것은 없을 거야.”
나이스! 바로 그겁니다. 저 철없는 녀석에게는 당근보다 채찍이 필요합니다!
“흐흐흐.”
“?”
뭐지 저 불길한 웃음소리는? 아, 안된다. 세종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네 머릿속에 있는 것은 다 틀렸어! 뱉지 마! 그냥 삼켜!
“저는 프로그래머입니다. 그리고 기획은 우리의 적!”
“적?”
“이미 이곳에 발을 들인 이상, 표세인 팀장은 제 형이 아닌, 그냥 던전(기획팀)의 타겟몹일 뿐입니다. 만약 알량한 힘을 믿고 들이댄다면, 제가 이 한 몸 바쳐, 막아내겠습니다!”
“오오오!”
갑자기 프로그램팀 팀원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든든하다!”
“안 그래도 표팀장님 맨날 우리 사정 봐준다는 핑계로 미친듯한 일감만 던져주잖아!”
“요즘은 남궁원 대리까지 합세해서 교대로 우리 두들겨 대잖아!”
그간 쌓여 있던 프로그램팀의 원성이 폭발했다.
“그래. 그래. 기획팀 말이라고 안되는 것 무조건 고개만 끄덕여서도 안 되지.”
한명수는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팀장님도 한패잖아요!”
“배신자!”
“표세인 깐부!”
“엇!”
한팀장님도 요즘 내 편의를 많이 봐주시다가 인망을 상당히 잃으신 모양이다. 곧 내 스튜디오로 이동하실 거기도 하고.
이것이 퇴임 전 레임덕인가?
그렇게 모두가 소란스러울 때였다. 커피 심부름을 나갔던 함송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무실 구조상 함송희는 프로그램팀 지나쳐 우리 쪽으로 향했다.
“헛!”
“죄송합니다?”
딱히 부딪친 것도 아닌데, 세종이가 화들짝 놀라자, 함송희가 얼떨결에 사과했다.
“미, 미녀?”
“?”
함송희가 당황한 사이, 이런 분위기 따위 1도 신경 쓰지 않는 우리팀의 파이터 남궁원은 기획서를 들고 한팀장에게 다가갔다.
“팀장님 이거······.”
“헛! 미녀가 둘?”
“?”
어째서 부끄러움은 항상 나의 몫인가?
*
*
*
“이건 대체 무슨 의도지?”
양성태는 인사과를 통해 입수한 문서를 보며 고민에 잠겼다.
그를 고민하게 만드는 문제는 다름 아닌, 표세인의 신규팀에 편입될 인력들에 대한 사항이었다.
최종 인사권은 표세인에게 있지만, 그것도 만능열쇠는 아니다.
고작 팀장이 각팀의 사정을 무시하고 인력을 빼 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상대방이 제시한 카드 중에서 그나마 쓸만한 인력을 추스르는 것이 고작.
당연히 다른 개발실에서 좋은 인력을 추려줄 리가 없으니, 신입도 뽑고 이런저런 공작도 펼쳐야 하지 않을까 했었다.
그런데,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상무님은 평범한데······. 함전무님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건 각 팀의 에이스들이지 않나?”
양성태를 고민에 빠트린 것은 다름 아닌, 함전무가 쥐고 있는 개발1실의 리스트였다.
한 명, 한 명이 주목받는 에이스들이었다. 갑자기 표세인이라는 괴물의 등장으로 주목도가 떨어졌지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진 이후에는 각 파트의 핵심인력이자, 차세대 회사의 기둥으로 성장할 인재들.
함전무는 자신의 파벌 구성에 탐욕을 감추지 않는 성격이다.
싹수가 보인다 싶으면 신입사원에게라도 즉각 손을 뻗기를 꺼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게 긁어모은 인재들을 대거 이쪽으로 투입하는 저의가 무언가?
“이건 대체 무슨 수지?”
아무리 양성태라고 한들 언제나 남의 속을 훤히 읽어낼 수는 없는 일.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무척 난감한 기분이었다.
“대체 노림수가 뭘까?”
회장님이 지시를 해도 이렇게까지 간이고 쓸개고 모두 빼주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히 노리는 수가 있으니, 이렇게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노림수를 짐작할 수가 없다.
“함전무님을 만나 뵈어야 할까?”
아니다.
이 시점에 자신이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했음을 먼저 알려줄 필요가 없다.
게다가······.
“만약 이 인재풀을 표세인 팀장이 흡수한다면······.”
양성태는 문상훈과는 다르다. 그는 성급하지 않고 신중하다.
더군다나 표세인은 이제 겨우 서른 중반을 갓 넘긴 시점이다.
사내 정치라는 큰 판의 기준에서는 창창하다 못해, 햇병아리라고 해도 좋을 수준이 아닌가?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다. 그리고 시간만 주어진다면 표세인은 기적 같은 일을 이루어내는 남자가 아닌가?
“이건 내가 판단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
양성태는 한 번 더 표세인의 기적에 걸어보기로 했다.
그러니 마음이 편해진다.
든든한 뒷배를 지녔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어쩌면 얼마 후에는 함전무님을 안쓰럽게 여겨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르지.”
양성태는 고민을 멈추고 느긋하게 서류를 옆으로 치웠다.
모든 것을 꼼꼼히 살피고 하나부터 열까지 계획을 세워야 직성이 풀리던 양성태였다.
하지만 표세인을 만난 이후에는 마음이 편안하다.
분명 이번에도 무언가 보여줄 것이다. 양성태는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며 미소를 흘렸다.
*
*
*
소란스러운 동생 놈의 신고식이 끝나고 사무실은 본연의 업무 모드에 돌입했다.
요즘 개발쪽은 팀원들이 너무도 잘해주고 있었으므로, 나는 신규 팀 구성 부분에도 신경을 할애할 여유가 생겼다.
“이건 차라리 외주가 낫겠는데?”
소켓몬의 개발사도 총원이 백오십명 정도이며 그중에서 개발자를 추려내면 정말로 얼마 되지 않는 작은 개발사다.
물론 소켓몬은 턴제이고 우리는 방향성이 다르기는 하지만, 반대로 우리 쪽은 기반 시스템이 완성되면 오히려 개발속도가 더욱 빨라질 수도 있다.
따라서 무턱대고 덩치를 불리는 것보다는 몇 가지 파트를 외주로 처리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찔러나 볼까?”
나는 좀비로얄의 박대표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박대표님.”
“아이고, 우리 이사님. 아니, 이제는 표대표라고 불러야 하나? 아, 표대표. 진짜 느낌 안 산다. 거꾸로 해도······.”
“누누히 말씀드리지만, 그냥 팀장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우리 상무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래야지.”
그래. 이 인간은 원래부터 남의 말 안들어먹는 타입이었지.
“그래서 웬일이야?”
“곧 좀비로얄 정식출시이지 않습니까?”
“역시, 우리 신경 써주는 사람은 표전무 밖에 없네. 기억하고 있었구나?”
“어떻게 잊겠습니까. 그보다 그 건으로 논의 좀 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 오늘 시간 되십니까?”
“한잔하자고?”
“곧 출시인데 벌써 술잔 오가면 안 되죠. 나중에 제가 한잔 거하게 사겠습니다.”
“그러면 쓰나, 나 요즘 돈 쓸데없어. 내가 형이잖아, 임마. 술은 형이 사는 거지.”
“전무 어쩌고보다 임마가 낫네요. 흐흐.”
“그래. 예전에는 돈 없어서 너 고꾸라트리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각오해. 돈 많은 형이 술 어떻게 사주는지, 보여줄게.”
“알겠습니다. 아무튼 오늘 시간 되신다는 거죠?”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내고 나는 대충 하던 일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외근 좀 다녀올게.”
“어디 가세요?”
“박대표님 좀 만나고 오려고.”
“이제 곧 출시인데, 이 시점에 우리가 할 일이 더 있나요?”
남궁원의 말대로 이 시점에 우리가 할 일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금광 좀 캐고 올게.”
“네?”
고급 인력들 놀게 하면 쓰나.
< 노노노.아니요. 안돼요. 싫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