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앗! 표상무님!”
“전무라고 임마.”
“아니지. 이사님?”
사장이 정신을 못 차리니 사원들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걸까?
오늘도 좀비로얄 직원들은 내 호칭을 두고 정신이 없다.
내 눈치까지 살피면서 이게 맞나? 하는 티를 내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인제 그만! 팀장으로 통일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힘찬데, 막상 다시 보면 또 혼란스러워서 할 것 같다는 느낌이다.
“아이고, 우리 상무님 오셨나?”
그래. 이 인간이 문제지.
“역시 상무······.”
아니라고!
“박대표님.”
“자, 안으로 들어와.”
쓸데없는 호칭 문제로 실랑이를 이어가느니, 차라리 빨리 용건이나 처리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오늘은 어디까지나 맥베스 팀장으로 온 겁니다.”
“그래?”
“외주 이야기 좀 해볼까 해서요.”
“외주?”
박대표가 뺨을 긁적였다.
“어차피 곧 개발인력 절반쯤은 여유가 생기지 않습니까? 혹시 곧바로 새로운 프로젝트 시작하실 겁니까?”
“우리가 그럴 여력은 없지.”
“그렇죠. 그리고 지금이 바로 신생 개발사가 머리 아픈 시점 아닙니까.”
아직 기반이 완전치 않은 신생 개발사의 경우, 런칭을 앞두고 개발인력을 엄청나게 뽑아놓은 다음, 런칭 이후 새로운 프로젝트로 빠른 전환을 하지 못한 탓에 대규모 정리해고를 감행하기도 한다.
물론 악독한 일부 대기업 역시 이것은 마찬가지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좀비로얄 역시 확실한 차기 프로젝트가 잡히지 않은 이상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이야기는 좋은데, 뭐 건수라도 있어?”
“일단 이것 한번 보시죠.”
나는 준비해온 깨비몬 컨셉 기획안을 건네주었다.
“소켓몬과 블록크레프트가 레퍼런스다. 잠깐, 벌써 디자인 회사까지 인수했어? 그리고 노래까지 제작했어?”
연아의 빠른 행보에 박대표까지 놀랄 정도. 내 여자친구지만 정말 감탄할 만한 속전속결이다.
“그럼 우리가 맡을 일은 시스템 파트인가? 맵이랑 크레프팅 설계 부분?”
역시 눈치가 빠르다. 어차피 디자인 파트는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니, 뻔하긴 하지만.
“네. 그렇습니다. 한 서른 명 정도 몇 개월간 지원해주시죠. 월급제하고도 조금 더 챙겨가실 수 있게 보수 책정해드리겠습니다.”
보통 외주 단가라는 것이 그리 높지 않다. 더욱이 부분 외주는 더더욱 그렇다.
“음, 나쁘지 않네.”
맞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그러니 가져왔지.
“그런데 맨입으로?”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박대표가 이상한 요구를 할 사람이 아니란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입에서 뜬금없이 맨입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다니?
“헤헤헤.”
“아, 이상한 거 하지 마세요.”
“으헤헤헤.”
“박대표님, 혹시 모르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저 태권도 상비군에, 특전사 출신입니다. 저 싸움 잘해요.”
영문모를 불안감에 평소에는 절대 입에 담지 않는 이력까지 줄줄 뱉어가며 실드를 펼쳤다.
상대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일 때는 일단 자르고 봐야 한다.
노노노. 아니요. 안돼요. 싫어요.
오케이 준비 완료.
“너 나랑 동업하자.”
“노노노. 아니요. 안돼요. 싫어요.”
“그, 그렇게 싫어?”
“어? 지금 뭐라고 하셨죠?”
순간 나와 박대표가 서로를 바라보며 눈을 껌뻑였다.
지금 이 사람 뭐라고 한 거야?
“동업?”
“그래. 동업.”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갑자기 동업? 제정신이세요?”
“하나 알려줄까?”
“뭘요?”
“갑자기 예상 못 한 돈방석에 앉으면 사람이 미쳐버리더라고. 도저히 제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어.”
이미 얼리억세스 단계에서 디젤 스토어 베스트셀러, 거기에 더해 올해 최고 기대작 중 하나로 평가를 받는 좀비로얄이다.
그리고 그 지분의 50%를 손에 쥐고 있는 남자가 바로 박영수 대표다.
“너도 알다시피, 나 바로 얼마 전까지 폐업 고민하고 있던 신세였잖냐.”
“그렇죠.”
“얼마 전까지 프로토타입 하나 들고 투자처 찾아다닐 때는 진짜 이대로 끝인가 싶었다. 들고 있는 돈에, 은행 빚에 이것저것 다 날릴 판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지 않았냐.”
신생 스타트업이 다 그렇지 않나? 잘되면 대박, 안되면 쪽박.
하루하루 피 말리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왜 모르겠나?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어 준거다.”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포로토타입이 좋았잖아요. 트랜드에 맞고 나름의 독창성도 있고.”
“그것만 있으면 성공하냐?”
“음······.”
좋은 물건이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시장 상황과 주변 환경 같은 여러 요인이 어우러지지 않으면 그 어떤 아이디어라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까놓고 말해서, 나 벌 만큼 벌었다.”
“에이, 아직 한참 더 버셔야죠. 좀비로얄 정식출시도 안 했는데.”
“이제 우리 애들도 벌어야지.”
“그건 무슨 말씀이죠?”
“예전에 스톡옵션 이야기는 회사 상황이 위태로워서 다들 농담으로 받아들인 덕분에 전부 돈으로 해결했지. 다들 억 소리 나게 챙기긴 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하지.”
박대표는 입이 타는지, 커피로 목을 축이고는 말을 이었다.
“우리 회사 다음 프로젝트. 그 방향키를 네가 잡아줬으면 좋겠다.”
“······.”
나는 일단 대답하지 않았다. 이건 함부로 대답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좀비로얄은 네가 없었다면 지금의 반의반도 성공하지 못했을 거다. 그러니 때문에 지금 상황에서 너 없이 다음 프로젝트를 생각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지.”
“진정하세요.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지만, 여기도 반쯤은 맥베스의 계열사 같은 포지션이지 않습니까? 저는 앞으로도······.”
“일이란 것이 말이야.”
“?”
박대표는 내 말을 끊고 자신의 말을 이었다.
“결국 자기 돈이 걸려있어야, 진짜 죽을 각오로 일하는 거거든?”
“네, 뭐 그렇겠죠.”
괜히 회사들이 스톡옵션 같은 거대한 보상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돈 만큼이나 강력한 스톡옵션이 어디 있겠나?
“내 지분 절반 줄게.”
“네?”
이 미친!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술 드셨습니까? 오늘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는 것이 좋겠네요. 나중에 평온을 찾으신 다음······.”
“나 충분히 제정신이다. 아까 말했듯이 내 수익이 절반으로 줄지만, 네가 열배, 백배로 벌어다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외주 하나 맡기러 왔을 뿐인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맥베스가 네 회사도 아니잖냐. 그리고 너 정도면 이제 자기 회사 차릴 때도 되지 않았어?”
맥베스가 내 회사는 아닌데, 제 여자친구가 물려받을 회사라는 것이 문제죠.
아, 이걸 말할 수도 없고 답답하네.
“그리고 이사급은 원래 한 곳에만 묶여 있을 필요도 없지. 네 사정은 최대한 이해해줄 테니까, 내 제안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주기 바란다. 그리고 솔직히 내 제안이 나쁜 것도 아니잖아?”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것이다.
만약 연아와의 인연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하지만 지금 내 상황이 너무 복잡한 탓에 머리가 복잡하다.
더군다나, 나는 이미 내 회사를 가지고 있다. 아직 정식으로 인가가 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미 필라 소프트의 대표 직함까지 들고 있지 않나?
“그리고 네 이번 프로젝트에 회장 따님이 손을 뻗었다면서?”
“어?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나 남궁대리와 친구야. 가끔 톡한다.”
아, 그러시구나 하고 넘기기에는 뭔가 촉이 온다. 이거 그거지?
“네에~ 가끔 톡을 하시는 군요?”
“뭐, 뭐냐 그 눈빛은?”
“돈도 벌었겠다. 40년 홀아비 생활 청산하실 때도 됐죠.”
“아, 아직 그런 거 아니다. 그냥 순수한 친구야. 아직은······.”
“아직은?”
“내, 내가 나이가 있잖냐. 거의 띠동갑인데, 언감생심.”
“남궁대리라면 그런 건 신경 안 쓸 것 같은데요? 그보다는······. 형님 얼굴이······.”
“야, 나도 옛날에는 어디 가서 못생겼다는 소리 안 들었거든?”
예에~ 그러시군요. 박대표와 남궁원이라, 뭔가 그림이 안 나오기는 하는데, 남의 연애사에 왈가왈부하는 취미는 없으니, 일단 이건 약점 수첩에 적어 놓고 한동안 묻어두자.
“흠흠. 어쨌든 회장 따님이 갑작스럽게 실장 명함까지 달고 전면에 나섰으니, 이번 프로젝트 최대 공로자는 그 사람일 것 아니냐? 게다가 솔직히 네 역량 중에 절반은 마케팅과 사업인데, 한 손 묶인 셈이잖아.”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왜 웃어?”
“아니, 흠흠. 아닙니다.”
아무래도 박대표님은 연아를 조금 얕잡아 보고 있는 것 같다.
내 여자친구라서가 아니다. 연아는 사업부문에서는 나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의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전에 내가 먼저 노래부터 시작해 보라고 하기가 무섭게 출장을 다녀오더니, 단숨에 멋진 노래를 만들어 냈다.
“이거 좀 보세요.”
“이게 뭔데?”
나는 미튜브 영상 하나를 띄웠다.
“혹시 상어가족이라는 노래 들어보셨습니까?”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나?”
북미의 유명한 챈트인 Baby Shark를 편곡해서 제작한 상어가족은 미튜브에 업로드한 이래, 100억이 넘는 미친 조회수를 달성하며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단순한 동요 편곡임에도 빌보드차트 32위에 진입하는 등, 여러모로 세계적인 이슈 몰이의 주인공이다.
“이거 뭐 새로운 버전이야?”
“아니요. 전혀 다르지만, 그 뒤를 쫓아서 큰 이슈를 낳을 노래입니다.”
험프티 덤프티.
영국의 전래동요로 알려진 이 노래는 수수깨끼 같은 노래 가사가 특징인 유명한 동요다.
“깨비몬, 깨비몬, 담장에 앉아!”
“깨비몬, 깨비몬, 떨어졌네!”
초반부부터 신나는 음악 소리와 함께 팔다리가 달린 휴대폰과 가방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네, 어? 야, 가만 이거 설마?”
“예. 맞아요.”
노래가 차츰 진행되자, 한국인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느낌의 멜로디가 시작된다.
“트, 트로트 느낌?”
“예.”
이건 나도 예상치 못했다. 연아는 무슨 생각에선지 중후반부 후렴구를 트로트 느낌으로 꾸몄다. 덕분에 그 부분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듣는 사람 모두가 절로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게 된다.
“조회수가······. 벌써 700만?”
“설령 상어가족을 이기지는 못한다고 해도, 그 언저리까지는 충분히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그러더라고요. 트로트 한류는 이 동요로부터 시작될 거라고요.”
아니, 아마도 연아가 그렇게 만들겠지. 내가 가볍게 던진 아이디어를 이용해 단숨에 이만한 성과를 가져왔다.
더군다나 상어가족이 끝없는 표절 시비에 휩싸여 있지만, 이 노래는 무려 트로트 리듬이 가미되어 있는 완전히 새로운 편곡이다.
박대표는 틀렸다.
연아가 내 프로젝트에 수저를 얻은 것이 아니다. 나는 레시피만 던질 뿐, 연아가 차린 밥상의 상석에 앉을 거다.
이것이 내가 꿈꾸는 미래. 그리고 필라 소프트의 방향성 아니겠나?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시작에 불과해?”
“캐릭터가 뽑히는 데로 캐릭터송을 미친 듯이 쏟아부을 거거든요.”
“어?”
“우리가 상어가족 개발사보다 체격이 훨씬 크지 않습니까?”
아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지. 게다가, 이 프로젝트의 사업 진행자가 누구다?
“더욱이 이 프로젝트를 이끄는 사람이 누굽니까? 회장 따님이시죠. 쩨쩨하게 미끼 한두 개 던지는 것으로 끝낼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예 미끼통 자체를 부어버릴 것 같아요.”
저도 모르게 흥이 나는 노랫소리 덕분일까? 고개를 끄덕이는 박대표의 고갯짓에도 절로 리듬감이 실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까 하셨던 말 그대로 돌려드리지요. 조연아 실장이 최대 공로를 가져간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조실장이 이 프로젝트는 열배, 백배로 키워줄 겁니다. 거기에 올린 제 수저를 금수저로 바꿔주겠다는데, 뭐가 문제겠습니까?”
박대표는 내 말이 끝난 이후에도 미튜브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 빨리 결정해야 할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