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일단 첫걸음은 성공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요?”
김비서의 말에 조연아는 미튜브 조회수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겸양 따위는 필요 없다. 그저 산정했던 수치와 비교할 뿐.
성과는 기대 이상이었으니, 충분히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수한 디자인업체를 다그쳐 재빠르게 케릭터 시안을 뽑아냈고, 국내 최고의 음반제작사에 의뢰하여 다각도로 검토를 마친 챈트를 편곡했다.
“트로트 느낌이 의외로 반응이 좋았네요.”
현재 많은 가구들의 아이들이 조부모의 손에 양육되고 있다. 조손이 함께 따라부를 만한 노래라는 것도 현재 깨비송의 선풍적 인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던 것.
“뭐 요즘 트롯 열풍 덕에 아이들도 많이 접하고 있으니까요.”
김비서는 어깨를 으쓱했다. 회의 당시 김비서가 트로트를 언급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조연아는 그 부분에 다소 미심쩍었다.
하지만 어차피 음악은 자신의 전공이 아니고, 정작 제작자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기에 그렇게 해보자고 결정했었더랬다.
“벌써 천만. 그간 우리 게임 광고 영상들의 조회수를 생각해 보면, 그동안 뭐했던 건가 싶네요.”
“그동안은 우리가 맡지 않았었잖아요?”
김비서의 말에 조연아는 실풋 웃었다. 이 자신감.
반쯤 농담인 것은 알지만, 반쯤은 진심인 것. 김비서의 이러한 자신감은 조연아에게는 큰 힘이 된다.
“캐릭터별 후크송 제작도 협의가 끝났으니, 당분간 이쪽은 문제없겠네요.”
“실장님이 내신 아이디어도 좋았잖아요. 이번 후킹 포인트는 야구응원가 스타일로 접근해 달라는 것이 좋았죠. 제작자들이 눈을 반짝이던 것이 기억나네요.”
트로트 다음은 응원가 스타일.
K-컨텐츠가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가운데, 조연아는 그 점을 철저히 공략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뭐든 팔리는 시대다. 그렇다면 그것을 더욱더 파고든다.
“무엇보다 율동까지 함께 들어갈 예정이니, 이 부분은 분명히 반응이 좋을 거예요.”
응원가만큼 율동과 잘 어우러지는 리듬이 또 어디 있겠는가?
벌써부터 김비서의 눈에는 자신들의 노래에 맞춰 앙증맞게 팔다리를 흔들,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훤했다.
“영상 제작사와의 미팅은 언제죠?”
후크송 개발이 궤도에 올랐으니, 다음은 영상물을 제작할 차례다.
“잠시만요.”
“?”
“실장님 너무 달리시는 것 아니에요?”
김비서의 말에 조연아는 잠시 눈을 위로 들어 상황을 되짚었다.
너무 달리고 있다? 서두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있는 범위이며, 이미 계획도 탄탄하다.
문제는 없다.
“문제 없습니다. 저는 괜찮아요.”
“아니, 제가 안 괜찮아요.”
“왜요? 힘들어요?”
고된 비서실 생활도 버텨낸 김비서가 아닌가? 설마 벌써 지쳤을 리는 없다.
“몸은 괜찮죠! 마음이 안 괜찮아요.”
“마음?”
“나 지난번에 진짜 멋지게 표세인 팀장에게 회식하자고 했는데, 지금 이게 뭔가요? 해외 출장이다 뭐다, 우리 지금 너무 바쁘게 뛰고 있지 않나요?”
“그건 우리가 게임보다 먼저 캐릭터 산업에서 기틀을 닦기로······.”
“아니, 일 이야기가 아니고요. 사람이 좀 쉬어가면서 일해야지. 우리가 기계에요?”
김비서의 말에 조연아는 손가락으로 데스크 위에 빙글빙글 원을 그렸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그런데 싫다.
지금 막 바람을 탄 것 같은 상황이다. 하루도, 한시도 지체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그런 조연아를 지켜보던 김비서 역시 의중을 파악하고 피식 웃었다.
“진짜 일 좋아한다. 아니, 금수저답게 조금 방탕해도 되는 것 아니에요?”
“저 태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까지 부자 아니었어요.”
“태어났을 때는 금수저가 아니었다? 그 직후 떼부자가 된 거지만?”
“음······.”
여기서 더 말해봐야 자신의 입장만 난처해진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조연아였기에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말해봐요. 왜 이렇게 서둘러요?”
“···지기 싫어서?”
“네? 지기 싫어? 누구에게?”
김비서는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질문을 쏟아냈다.
“표세인 팀장이요.”
“표세인 팀장?”
“우리 회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계속 눈에 띄는 성과를 내고 있잖아요?”
“그런 그렇죠.”
맥베스 직원치고 이 부분에서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본인은 회장 딸씩이나 되는데, 일반 직원에게 질 수 없다?”
“아버지와는 관계없이 저 자신의 기분 문제죠.”
김비서는 알지 못한다.
조연아가 표세인에게 느끼는 경쟁심은 단순한 업무 비교뿐만이 아니다.
애인으로서 동등한 위치에 서고 싶다. 그렇기에 그의 활약에 기뻐하면서도 때로는 나는 그동안 무엇을 한 걸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포지션의 차이라는 것도 있지만, 어쨌든 지금 자신은 더 이상 비서가 아니다.
그렇기에 스스로 채찍질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재벌가의 일원이라는 타이틀이 누군가에게는 훈장처럼 여겨지지만, 누군가에게는 무거운 멍에처럼 여기기도 한다.
조연아는 명백한 후자였다.
조회장의 성격도 집안의 분위기도 그렇다. 아버지의 공로와 자신은 관계없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유업을 잇기로 한 이상 그 이상의 성과를 거두어야 했다.
“사람이 참······. 호감이야.”
“네?”
“할 수 없네요. 나도 피치를 좀 더 올려야겠네.”
“아니, 딱히 김비서님께 부담을 드릴 생각은 없어요.”
“나 김인숙에요.”
“네? 네. 그렇죠.”
순간 문이사가 떠올랐지만,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내가 모시는 사람이 일 좀 하겠다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해봐요.”
“뭘요?”
“표세인 부숴버리자고!”
“?!”
그, 그러시면 안 돼요.
연아는 그 말도 그냥 삼키기로 했다.
*
*
*
새로운 보금자리.
나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필라 스튜디오를 위해 개발3실의 위치 전체가 뒤바뀌었다.
주말사이, 총무팀과 용역업체의 활약으로 파티션이 새로 정리되고 우리는 구석이나마, 우리만의 보금자리를 꾸렸다.
“이제야 뭔가 정돈이 된 느낌이네.”
한팀장은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한동안 부산스러웠는데.”
사실 이게 처음도 아니다. 맥베스로 옮겨온 이래, 조직개편이다, 뭐다.
항상 시끄러웠더랬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일 없이 새롭게 꾸려진 팀으로 이동했다. 앞으로 별일이 없는 한, 부서 이동도 없을 테니, 일에만 집중하면 될 뿐.
“그보다 오늘부터 새로운 팀원들이 오는 거지?”
“예. 몇몇은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네요.”
내 말에 한팀장은 머리를 긁적였다.
“괜찮겠어? 솔직히 좀 탐탁지 않은 인물들도 끼어 있던데?”
“문제없습니다. 일할 때, 사적인 감정이 어디 있습니까?”
“표팀장이야 그렇다지만, 그쪽은 아닐 수도 있잖아?”
한팀장은 역시나 내가 걱정된다는 투였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제가 팀장이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냥 팀장도 아니지 않나? 신규스튜디오는 엄연히 별도의 사업체고, 나는 그곳의 대표다.
아직 1원도 벌지 못한 사업체이지만, 어쨌든 무려 지분의 70%가 내 손에 있다. 조금 과하게 말하자면 이 스튜디오 내부의 일이라면 나는 조회장님의 명령도 꺾을 수 있다.
“그래. 처음부터 틈을 주지 말고 단단히 못 박으라고 여기서는 표팀장이 대장이니까. 설령 나라고 해도 말이야. 알겠지?”
이런말을 진심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 한팀장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이런 사람은 정말로 편하다.
겉과 속이 한결같은데, 업무에 대한 열정도 살아 있다.
“한팀장님도 제가 틀렸다 싶으면 주저하지 않고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크~ 역시 표팀장은 다르단 말이지. 좋아! 그렇게 할게.”
한팀장은 진심으로 기뻐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마침 새로 이쪽으로 발령받은 팀원들이 도착했다.
“윤현창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한팀장님 밑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윤과장은 한팀장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는 힐끔 내 눈치를 살핀다.
‘그래, 지난번에 날 배신하고 문이사에게 붙은 것 때문에 찜찜하지?’
나는 피식 웃었다. 사실 나야말로 윤과장에게 미안한 감이 없지 않다.
애초에 당시에는 내가 문이사 진영에 와드 하나 심겠다고 술수를 부린 것이지 않나?
“그래도 아는 얼굴이 와서 반갑네.”
“하하, 친구야. 잘 부탁한다.”
내가 미소를 띄우자, 윤과장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하지만 그와 반비례로 한팀장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친구?”
“네?”
“회사에 친구가 어디 있어?”
“아, 아니 그게······. 제가 이 친구와 입사 동기라서······.”
“동기면 상사에게 말 놔도 돼? 그리고 표팀장은 나랑 같은 팀장인데, 둘이 있는 자리라면 모를까, 내 앞에서 뭐하자는 거지?”
한팀장의 서슬에 윤과장은 찔끔하며 곧바로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표팀장님.”
음, 좀 안쓰럽기는 한데, 재미있으니까 그냥 놔두자. 어차피 얼마 후에는 기가 살아서 날뛸 녀석이니까.
“안녕하십니까.”
윤과장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김차장이었다.
지난번 문이사의 샤우팅 이후에 사람이 바뀌었다 싶을 정도로 핼쑥해졌다.
“이번에 새로 발령받았습니다. 한팀장님, 표팀장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침부터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아직도 지난번 일로 의기소침해 있는 거야? 넌 진짜 왜 그 모양이냐?”
이번에는 질책이라기보다는 격려였다. 한팀장이라고 김차장과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건 동문이라는 걸까?
눈빛에서 염려가······.
아, 단순히 염려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한팀장은 내 부탁을 받고서 익숙지 않은 뒷공작까지 펼쳤지 않나?
그 타겟이었던 김차장이 그 후로 의기소침해졌으니, 마음이 쓰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자리는 이쪽이지, 차장, 과장 순으로 앉으라고.”
“예!”
“······알겠습니다.”
한팀장의 지시에 따라서 김차장과 윤과장이 차례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드디어 뉴페이스들이 등장했다.
“새로 발령받은 공주혁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새로 발령받은 민슬해입니다.”
양실장을 통해 전해 듣기로는 함전무가 아끼는 맥베스 최고의 인재들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아니 이들을 이끌고 왔다고 해야 할까?
작지만 다부진 눈매가 인상적인 여성.
“권태인 차장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입사하기 전까지는 차세대 최고 인재 중에 하나라고 평가받았다는 권태인 차장.
물론 지금도 그 평가는 유효할 것이다.
특히 타고난 글솜씨를 지닌 기획자라는 것은 무척 귀한 존재다.
물론 한국 유저들 80% 이상은 대사보다 스킵 버튼을 먼저 찾지만······.
더욱이 개발 사정을 이해하고 거기에 맞는 유연성을 가진 시나리오 집필 능력은 그야말로 완성된 다이아몬드라고 할 수 있겠다.
솔직히 외국계 기업이라면, 그녀의 몸값은 나 같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될 것이다.
“저희는 파트가 겹치는 만큼 자리가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권태인 차장은 상큼한 미소로 말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닌데······.’
자기 의견을 명확히 표명하는 당당함이 묘하게 걸린다.
실상 저들은 시나리오와 퀘스트, 레벨디자인 등을 다뤄왔다고 했었으니, 업무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처음부터 선입견을 품는 것은 안 되는 일이지만, 권태인 차장의 지나친 자신감은 아무래도 나를 조금 경계하게 한다.
“여기 저희가 써도 될까요? 마침 좋네요.”
마침 3명 자리만 따로 있는 바깥 자리를 가리키는 권태인 차장.
“그럼 허락하신······.”
오케이.
“잠깐만요.”
“네?”
“아직 업무 배정도 안 끝났으니, 일단 새로 오신 세분은 제 앞에 있는 자리로 오시면 좋겠네요. 나중에 파트 배정이 끝나면 다시 자리를 조정해봐도 좋고요.”
“하지만 업무 효율성을 위해서라도······.”
“말씀하신 대로 업무 효율성을 위해서라도 당분간은 저와 긴밀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저희 파트는······.”
“말씀드렸다시피, 아직 파트 정리는 안 끝났으니까요.”
내 말에 권태인 차장은 조금 당황한 듯 주춤했다.
“이건 뭐죠? 기 싸움인가요?”
기 싸움인가요? 자기가 시작하고도 뭔지를 모르나?
불만 가득한 눈초리. 이거, 아무래도 한동안은 순탄치 않은 상황이 이어질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이런 작은 일로 실랑이를 벌일 생각은 없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저 기 싸움 같은 것 관심 없습니다. 그러니까, 날 세우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내 장비가 아니면 부숴버릴 거니까.
내 장비가 될지, 폐기될지, 빨리 결정해야 할거야.
기회를 여러번 줄 생각은 없으니까.
< 나는 가능한데, 너는 못 하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