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회사는 전쟁터다. 먼저 쏘지 않으면 내가 당한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지내다가, 눈먼 총알에 맞아 피를 흘리는 경우가 종종있다.
문제는 이 전장에서 같은 편이라는 것이 때때로 애매하다는 거다.
특히 컨셉 단계에서 기획은 파트별로 각자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물러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시나리오상으로 가장 필요한 부분이 시스템이나 컨텐츠 디자인에 따라서 수정되거나, 그 반대의 경우가 있을 수가 있다.
따라서 기획팀이 하나의 팀으로 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확실한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팀장님. 저희 잠시 회의 좀 다녀오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권태인은 자신의 파트원들과 함께 자리를 비웠다.
나는 시나리오 파트가 자리를 비우기를 기다렸다가, 남은 인원들을 불렀다.
“우리도 회의 좀 하자.”
“네.”
우리는 회의실이 아닌 사내 카페로 이동했다.
“설마 권차장 기죽일 작전이라도 구상 중이신가요?”
남궁원이 흥미롭다는 듯이 주먹을 풀었다.
“무슨 소리냐, 그리고 그런걸 너희랑 왜 논의하냐.”
“그런가요? 살짝 기대했는데.”
“기대?”
“맨날 그런 재미있는 일은 기도만 데리고 하시잖아요.”
“맞아요.”
함송희까지 나서서 남궁원의 편을 들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자신들만 따돌려지는 느낌이라서 조금 서운했던 모양이다.
“특히 지난번에 둘이 싸우는 척했을 때도, 저희는 정말로 무슨 일 난 줄 알고 긴장했었잖아요.”
“그건, 미안.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라. 뭐 그런 말도 있잖아?”
“팀장님은 기획팀을 상대로 작전은 안 짜.”
홍기도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작전까지는 좀 과하고, 그냥 덫이나 하나 쳐보려고.”
“덫?”
“그게 작전 아니야?”
“약간 다르지. 작전은 직접 공략하는 거고, 덫은 사냥 느낌이랄까? 사실 상대 쪽이 별것 하지 않으면 문제없는데, 뭔가를 꾸미면 제 발에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거지.”
홍기도가 나 대신 설명해 주었다.
“와, 미쳤다. 팀장님은 항상 그런 생각만 하시는 거예요?”
만이라니! 만이라고 하면 내가 무슨 이상한 사람 같잖아.
“나도 예전에는 너처럼 순수했다. 그냥 열심히 기획서만 쳐내면 그만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과장 달고부터 송부장 같은 사람이 위에서 쪼아대니까, 뭐라도 해야 하겠더라고, 그러다 보니, 이렇게 돼버렸네.”
“보통 사람들이 그러나?”
“왜? TV 보면 정치인들이 항상 음모 꾸미고 뒤통수 때리고 난리도 아니잖아? 게다가 드라마는 또 어때?”
“그건 TV 속 이야기 아니에요?”
“드라마는 방송 심의 때문에 적당히 희석하는 거지. 나는 현실이 더한 법이라고 생각해.”
내 말에 남궁원과 함송희는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함께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내 색에 덜 물들었다는 거겠지.
물론 처음부터 이상한 색에 물들어 있던 홍켓몬은 특이 케이스고.
“그래서 이번에는 뭘 어쩌시려고요?”
“일단 새를 사냥하려면 날개부터 좀 쳐내야겠지?”
“날개?”
“공대리와 민대리를 권차장에게서 떼어내시려고요?”
“그래.”
순간 남궁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홍기도를 바라보았다.
“너는 어떻게 이런 걸 바로 알아들어?”
“그런 내가 팀장님과 주파수가 같은 타입이라서 그렇지.”
“주파수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냥 함께 오래 구르다 보면 너희도 적응하게 될 거야.”
“지금 나 쳐내시는 것임? 날개 없이 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닭 날개 같은 놈이······.”
나는 피식 웃었다. 이런 대화도 오랜만이다. 한동안 이상한 버프에 걸려 있던 탓에 홍켓몬과 이런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눈 지도 제법 되었다.
“일단 개요는 말해줄게. 지금 상황에서 권차장도 골치깨나 썩고 있을 거야. 잘하고 있던 팀에서 갑자기 이쪽으로 발령 난 상황이잖아?”
“그렇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좌천이죠.”
맞는 말이다. 제대로 갖춰진 팀에서 규모 있는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던 자신이 갑자기 미래가 불투명한 신생팀에, 그것도 굴러들어온 돌의 밑으로 배정받았으니, 눈앞이 캄캄한 상황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가시를 바짝 세우고, 나름 자신의 라인이라 할 수 있는 공주혁과 민슬해를 꽉 잡고 나와 기 싸움을 벌이려 할 것이다.
“그래서 덫이라면?”
“어차피 팀장, 차장 밑으로는 죄다 대리뿐이잖아? 함송희는 좀 다른 케이스라 치고.”
“어? 저 진급시켜주시려고요?”
“왜! 네가 진급하냐?”
홍기도의 말에 남궁원이 발끈했다.
“둘 다 김칫국 마시지 말고. 하지만 말은 바른 말이지. 적어도 하나는 진급해야지.”
“하나?”
“한 명만?”
순간 남궁원과 홍기도 사이에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숨기지 않고 말할게, 둘 다 진급시킬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장담 못 하겠고, 교통정리라는 느낌으로 위에 올리면 한 명 정도는 과장 진급 가능할 거야.”
확신은 못 하지만 아마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원래 독립 스튜디오는 진짜로 대표가 갑이다.
게다가 만약 차후에 이들의 소속이 본사에서 새 스튜디오로 옮겨지면 최대 부사장까지 내 마음대로 앉힐 수 있는 것 아니겠나?
뭐, 말은 그래도 본사 직급과 족보가 꼬이지 않게 최대한 맞출 생각이지만.
어쨌든 지금은 본사에서 완전히 분리가 된 것이 아니라서, 두 명 모두 진급은 장담하기어렵다.
“두 사람 모두 진급할만한 충분한 성과도 하고 요즘 업무 쳐내는 속도도 아주 훌륭해. 솔직히 나로서는 누가 되든 상관없을 정도야.”
자리는 하나. 경쟁자는 두 사람.
결국, 누군가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밀려난 쪽은 이 일로 상당한 데미지를 입을 수도 있다.
이런 일에는 형평성이 가장 중요하다. 누군가 자신이 소외당한다고 느끼지 않도록.
“심사는 외부에 맡기는 편이 좋겠지?”
“외부요?”
“내가 선택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소외당한다고 느낄 수 있잖아?”
“흥, 어차피 팀장님은 기도만 예뻐하시잖아요.”
남궁원의 볼멘소리에 피식 웃음이 났다.
“기도랑 내가 긴 시간 같이 일한 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너도 지난번 좀비로얄을 컨트롤하면서 노력 많이 한 것 알아. 그러니 공평하게 하자는 거야.”
솔직히 남궁원은 우리 팀에 합류하자마자, 좀비로얄건으로 외근을 밥 먹듯이 나간 탓에 많이 신경 써주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하다.
홍켓몬처럼 차라리 고기! 고기! 하고 원하는 것을 말해주면 보답이라도 해주겠는데······.
“그런데 우리 진급이 어떻게 덫이 되죠?”
함송희의 질문에 모두가 나를 바라보았다.
“지켜보면 알아. 너희는 그저 하던 일만 열심히 해.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어차피 이번이 아니더라도 정규 진급 심사도 머지않으니까, 다른 한 명도 금방 진급하게 될 거야.”
최대한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나는 마지막 말에 힘을 주었다.
“크큭. 중급 닌자 시험이라 이건가······.”
아니, 얘한테는 좀 부담을 줘야 했나?
*
*
*
사무실로 돌아가자, 마침 시나리오 파트도 돌아와 있었다.
“권차장님.”
“네.”
“잠시 커피 한잔하시죠.”
“네. 안 그래도 드릴 말씀도 있었는데, 잘됐네요.”
나는 권태인과 함께 다시 사내 카페로 이동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팀장들은 항상 이렇게 사내 카페에서 시간을 축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도 신입사원 시절에는 팀장들이 일은 안 하고 놀러 다닌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금방 그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결국 팀장이란 팀을 이끄는 일이고 팀이란 사람을 말한다.
눈앞에 있는 문서 쪼가리 하나 보다, 팀원들의 맨파워를 관리하고 다른 팀과 일정을 조율하다 보면, 사람만 만나다 하루가 훌쩍 지나는 법이다.
“일단 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역시 공격적이다.
남궁원처럼 순수 파이터 타입으로는 보이지 않는데도, 이런 느낌.
아마도 자신의 상황에 대한 부담감이랄까?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 때문에 빈틈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오히려 상대를 밀어붙이고 있다는 느낌.
“말씀하시죠.”
“현재 계획 중인 프로세스에서 몇 가지 방향성을 선회했으면 좋겠습니다. 전연령가라는 딱지는 시나리오를 구성하는데, 제약이 너무 많습니다. 게다가 시나리오 컨펌을 영상제작을 위해 사업부와 협의해야 하는 부분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구상안에 그쪽이 쫓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생각이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좀 핀트가 어긋난다.
이것을 잘 조율해야 앞으로 원활한 업무가 가능하겠지.
‘문제는 지금 내가 뭐라고 하던 진심으로 수긍하지는 않겠지.’
사람은 감정적인 동물이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행동하려고 해도, 미운 놈은 미운 놈인 법.
지금 권태인의 눈에 비친 나는 굴러들어온 돌인 주제에 줄 하나 잘 잡아서 승승장구한 낙하산이나 다름없는 녀석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지난번 함전무 진영의 마팀장도 그랬듯이, 애초에 현시점에 나를 곱게 보고 있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 것이다.
“권차장님.”
“네.”
“솔직히 지금 좀 답답하시죠?”
“무슨 말씀이신지?”
다시 한번 권태인이 가시를 바짝 세우는 것이 느껴진다.
“제가 좀 편하게 해드릴까요?”
“지금 협박하시는 건가요?”
“협박이라뇨.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그럼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주시죠.”
“시나리오 파트는 솔직히 어느 정도 독자성이 부여되어야 제힘을 발휘할 수 있는 파트죠.”
“네. 그렇죠.”
독자성이라는 말에 권태인이 반응했다. 그래 당신이 바라는 것이 뭔지는 너무 뻔하지.
내 밑이 아니라,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자신만의 파트를 이끌고 싶겠지.
팀장이라는 절대군주 밑에서 신하로 일하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영지를 가진 중세의 영주가 되고 싶겠지.
그래서 더더욱 시나리오 파트 인원들에 대한 영향력 유지를 위해서라도 나와 계속 각을 세우려 할 테고······.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그런 타입이 아니다.
운동부 출신에 부사관.
나는 상명하복의 시스템 유용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물론 부작용도 있다.
너무 짓누르면 아랫사람들의 살아 있는 목소리를 차단할 우려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감당해야 할 영역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내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순순히 지켜볼 생각은 없다.
고삐를 느슨히 쥘 수는 있어도, 고삐에서 손을 뗄 수는 없는 법.
“당분간 권차장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일을 진행해 주세요.”
“그 말씀은?”
“솔직히 당장 시나리오 파트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습니다.”
내 말에 권태인은 살짝 고민에 빠진 것 같다. 이것은 독인지, 약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현재 우리 팀에 대리급이 너무 많죠.”
“!”
“하나는 과장으로 올려서 교통정리 좀 해야겠어요. 저는 당분간 그 문제로 바쁠 것 같네요.”
“과장진급······. 잠시만요. 혹시 대상이 남궁대리와 홍대리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왜요?”
“제 쪽에 공대리와 민대리도 연차가 비슷할 텐데요?”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덫을 펼친 보람이 있지. 미끼를 던지자마자, 덥석 무는 모양새에 조금 김이 빠질 정도지만, 그래도 막상 입질이오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나?
게다가 제 쪽? 아직 그녀의 머릿속에는 나와 자신의 파벌이 명확하게 갈라져 있는 상황.
기본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우리 쪽에 과장급 타이틀이 추가된다는 것이 달갑지는 않겠지.
“제가 아직 그 친구들에 대한 파악이 끝나지 않아서요.”
“잠깐만요.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진급을?”
고작 팀장 따위가 어떻게 팀원 진급을 시킬 수 있냐고?
그래, 아직 대부분 사람은 아직도 내가 일개 팀장에 불과하고, 신규 스튜디오 역시 그저 이름뿐인 바지사장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이 작은 오해가, 권태인은 결코 넘을 수 없는 성벽이 되어 나를 감싸고 있는 거다.
“저는 가능합니다.”
나는 가능한데, 너는 못 하겠지?
< 빙결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