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과장 진급이요?”
“예.”
“물론 가능하십니다.”
양실장은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거 일이 공교롭게 되었군요.”
“무슨 말씀이시죠?”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양실장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다른 대리급에게도 기회를 주실 생각입니까?”
“물론입니다. 공정하게 해줘야······.”
“?”
“상대를 굴복시킬 수 있겠죠?”
내 말에 양실장은 잠시 고민한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공대리와 민대리도 이력은 나쁘지 않더군요. 권차장 말대로 연차도 비슷하고.”
“하지만 홍대리와 남궁대리의 승리를 확신하고 계신 거군요.”
“물론이죠.”
“그 믿음의 근거는?”
이번에는 내가 양실장의 말에 살짝 웃음이 났다.
믿음의 근거?
그동안 내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에 하나는 홍대리와 남궁대리가 내 뒤를 든든하게 받쳐줬기 때문이다.
내가 이들을 믿지 못한다면 누굴 믿을 수 있을까?
“일단 알겠습니다. 인사과 측에 전달해서 TO를 배정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심사는 누구에게 맡기실 생각이시죠?”
“마침 우리 쪽에 공정의 대명사가 있지 않습니까?”
“공정의 대명사?”
-똑똑.
때마침 공정의 대명사가 도착한 모양.
“부르셨습니까?”
“오셨군요.”
오늘도 3+ 빙결검의 위력을 유감없이 선보이는 서늘한 표정으로 무장한 제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확실히······. 공정하겠군요. 너무 공정할까 봐, 두려울 정도네요.”
제임스를 본 양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스는 오늘부터 저희 스튜디오의 PM직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가타부타 질문 따위는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제임스.
공정의 화신이 있다면 바로 이 사람이 아닐까 싶다.
“제임스. 저희 팀에 속한 대리급 4명에 대한 인사기록을 검토하고, 한동안 그들을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과장 진급에 어울리는 인재를 선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죠.”
“공정하게 부탁드립니다. 물론 그렇게 하시겠지만요.”
“물론입니다.”
제임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권차장이 가엽게 느껴지는군요. 지금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고 함전무 진영에서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겠지요.”
“함전무님은 미국지사에 출장을 나가셨다죠? 그렇다면 권차장이 손을 빌릴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마 개발1실의 천이사님일 겁니다.”
개발1실의 천이사라, 잘은 모르는 이름이다.
하지만······.
“제임스.”
“네.”
“이사급 인사의 압박이 들어올지도 모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
제임스는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한 표정. 이것은 자신의 역할을 이해 못 하는 것이 아니다.
이사가 아니라, 함전무가 직접 압박에 들어와도 똑같은 표정일 것이다.
왕자로 태어난 이만이 가질 수 있는 순도 100%의 오만함.
“그렇네요. 제가 시작부터 너무 강한 패를 꺼내 든 것이 아닐까, 싶긴 하네요.”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는데, 본사에 한해서, 그리고 덫으로 이용할 때.
제임스는 +3이 아니라, +5급 강화 버프가 더해진다.
그는 연아와 달리, 조회장의 아들이라는 것은 숨긴 것이 아니라, 그냥 필요가 없어서 언급하지 않은 것뿐이니까.
“덫을 너무 센 걸 놓았나?”
“덫이라······. 그렇군요. 적절한 비유입니다. 부디 권차장이 너무 큰 사고를 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
나와 양실장의 말에 제임스는 여전히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용건은 그것이 전부입니까?”
“네.”
“자리를 옮길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럼.”
제임스는 제 용건이 끝났다고 생각하자마자, 즉각 자리를 떠났다.
실장실 문이 닫히는데, 서늘한 한기가 밀려드는 것 같다.
“정말 한결같은 사람입니다.”
“네. 솔직히 같은 편이라서 다행입니다. 저 얼굴이 제 반대편에 있었다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네요.”
미안해요. 권태인 차장. +5 빙결 덫은 아플 거야.
그런데 지금 내 여자친구의 사표가 걸린 프로젝트라서 시답잖은 기 싸움 같은 것에 시간 낭비할 생각이 없거든.
“그녀도 좋은 인재입니다.”
양실장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망가트릴 생각은 없어요.”
“제임스도 그럴 생각이기 바랍니다.”
“그건······. 장담 못 하겠네요.”
가끔 딜링 계산이 어렵게, 크리티컬 확률이 높은 무기가 있기 마련이지.
*
*
*
“과장 진급?”
“네. 표팀장이 그러더군요. 그 사람 그냥 양실장의 하수인이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권태인의 말에 천준호 이사는 슬며시 턱을 쓰다듬었다.
얼마 전 양성태가 난데없이 개발3실의 기획팀장직을 겸임하면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한 이름.
표세인.
아직 그에 대한 다른 부서 사람들의 인식은 양성태의 하수인 정도 위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표세인이 이룬 모든 업적은 양성태 밑에서 이룬 것들이고, 그 자신은 굴러들어온 돌에 지나지 않는다.
“마팀장, 내 방으로 오라고 해.”
-네.
천이사는 마팀장을 소환했다.
“지난번에 표팀장이라는 친구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지?”
“예.”
마팀장은 표세인이라는 이름에 입맛을 다셨다.
생각할수록 얄미운 녀석이다.
처음 우연히 만났을 때는, 제임스라는 부장급 인사 덕분에 망신살이 뻗치고, 그다음 회식 자리에서는······.
“그 친구 어떤 인물이지?”
“특전······사?”
“뭐?”
“아, 아니. 아닙니다.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함전무님은 좀 신경을 쓰시는 것 같습니다만······. 분명히 전무님 사람이 될 수는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그래? 그럼 양실장만 신경 쓰면 된다 이거지?”
천이사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어차피 당장은 비서실 소속이고, 양실장도 우리와 직접 힘겨루기할 생각은 없겠지.’
자신 역시 양성태와 직접 충돌할 생각은 없다. 한때, 양성태는 회장의 숨겨둔 아들이라는 소문까지 있던 남자다.
비서실에 들어가면서 안 그래도 회장의 전령 같던 위상이, 오른팔 정도로 격상된 상황.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들여보낸 권태인에게 힘을 실어 주는 정도도 못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넌지시 흘려보는 정도는 괜찮겠지.’
함전무가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에이스들까지 투입시킨 공작에 차질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표팀장 연결해.”
-네.
내선을 이용해 표세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표세인입니다.
“나 천준호야. 알고 있나?”
-천이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목소리에 딱히 경계심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으레 보이는 굽신굽신한 태도도 전해지지 않는다.
“점심 함께하지.”
-권태인 차장도 함께 입니까?
“아니, 아마 마팀장이 함께 할 것 같군.”
-혹시 과장 진급 관련이라면, 담당자도 함께 동석해도 괜찮겠습니까?
“담당자?”
-네. 공정을 기하기 위해, 미국지사에서 온 제임스에게 이번 심사를 부탁했습니다.
“제임스? 직급이 어떻게 되지?”
-본사 직급으로는 부장급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순간 천이사의 입가가 묘하게 늘어졌다. 그래, 부장급이라······.
제 딴에는 나름 손 뻗을 수 있는, 무게감 있는 직급을 기용했다는 느낌일 것이다.
대뜸 양성태 이름이라도 언급하지 않을까 했는데, 부장급 인사라······. 그것도 본사에서는 대우가 애매한 미국지사 소속.
‘차라리 잘 된 것인지도 모르겠군.’
표세인이야 양성태의 우산을 믿고 당당하게 나올지 모른다. 하지만 어쨌건 부장급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오히려 행동이 조심스러워지기 마련이다.
오히려 성향에 따라서는 대뜸 표세인을 등지고 자신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도 있다.
부장이란 임원직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하는 위치인 만큼 때로는 평사원들 보다도 더욱 임원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지 않겠나?
“좋아. 그렇게 하지.”
-알겠습니다. 시간에 맞춰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그래. 기다리지.”
천이사는 통화를 종료했다.
“직접 나셔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권태인은 송구하다는 얼굴로 천이사를 바라보았고.
“그놈 간담이 서늘하겠군요. 천이사님이 직접 나서시다니.”
마팀장은 10년 묵은 체증이 사라졌다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잘 됐군.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참인데.”
양성태의 오른팔이라며 갑작스럽게 사내에서 이름이 언급되기 시작한 표세인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은 진작부터 갖고 있던 참이었다.
“재미있겠어.”
*
*
*
“재미없는 상황이군요.”
-네. 저도 동감입니다.
해외 출장 중인 조연아와 통화 중에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
상무 진급이래, 이만큼이나 스스로가 무력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함전무도 알고 있는 일입니까?”
-아마 모를 겁니다. 솔직히 저도 몰랐으니까요.
조연아 조차 몰랐다면야, 할 말이 없다.
“대체 회장님은 왜 그러신답니까?”
-저도 이런 부분에서는 아버지가 밉, 아니 회장님의 저의를 파악하기 어렵네요.
“그런데 정말 그걸로 끝입니까? 한명 더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요.”
-글쎄요. 솔직히 저도 모르겠습니다.
“답답한 노릇이군요.”
-하지만 어차피 업무와는 무관한 일이지 않습니까?
“정말 무관하다고 생각하셨다면, 실장님께서 제게 주의하라고 하시는 일은 없었겠지요.”
-······.
이걸영은 조연아를 뒷받침하기로 한 이후 자신의 스탠스를 바로 잡았다.
나이 차와 상무와 실장이라는 직급 차에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조연아를 자신의 윗선으로 모시기로 한 것.
처음에는 그저 어리게만 보였지만, 실장 취임 이후 거침없는 일 처리를 보며, 자신의 배팅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경어를 쓰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킹메이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바라마지 않는 최고의 역할이 아닌가?
회장이 공언한 후계자이며, 본인의 능력 역시 부족함이 없다.
당장은 아니겠으나, 언젠가 조연아는 반드시 회장 자리를 손에 넣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최후의 승리자는 나다.’
함전무와의 파벌 경쟁에서는 언제나 2인자를 면치 못했으나, 자신은 비교적 젊다.
조연아가 회장이 된 이후에는 자신의 자리가 없을 수 있지만, 최소한 그 순간까지는 그녀의 곁을 보필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최종 승자는 자신일 터.
‘문제는······.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제임스.’
문상훈에게는 그저 든든한 오른팔이라고 스치듯이 들었던 것이 전부.
하지만 조연아와 앞으로의 일정을 논의하던 중에 듣게 된 충격적인 이야기.
‘그리고 제임스란 인물을 상대할 때는 특별히 신경 쓰시기 바랍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그는······. 제 작은 오빠입니다.’
조연아의 등장도 충격적이었지만 제임스의 정체는 그 이상이었다.
비록 만난 적은 없어도 벌써 몇 년 동안이나 들어온 이름이지 않은가?
잠시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순간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혹시 큰 오빠도 우리 회사에 있습니까?”
-······아마 아닐 겁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요.
순간 콩가루 집안이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가까스로 내뱉지 않을 수 있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이걸영은 사내 명부 전체를 뒤져서라도 조씨 성을 지닌 이들을 모조리 기억해두겠다고 결심했다.
-네. 하지만 제임스는 기본적으로 건드리지 않으면 별일 없을 겁니다. 그의 스위치만 건드리지 않으면요.
“스위치? 그게 뭡니까?”
-권위와 파벌 다툼, 같은 것? 게다가 의외로 욱하는 성격이라서······. 어쨌든 그 부분만 건드리지 않으면 비교적 안전한 편입니다.
“비교적 안전하다라······.”
이걸영은 조연아의 말에서, 비교 대상이라는 존재가 그녀의 큰 오빠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굳이 정체 모를 인물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제임스는 지금 표팀장과 함께 있지 않습니까? 설마 양실장 파벌이 제임스의 편에 선 것 아닙니까?”
이걸영의 말에 조연아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크큭.
“?”
-양실장 파벌과 제임스의 관계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확실합니까?”
-네. 확실합니다.
조연아의 대답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 식사 맛있게 하게. >